주치의가 바로 왔다. 무진의 상황이 좀 심각했다.즉시 무진의 체온을 낮추랴 체내에서 날뛰는 통증을 억제하랴 정신이 없었다.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니 이미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그러나 성연은 무진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그 시각, 무진의 상태를 연락 받은 손건호가 즉시 엠파이어 하우스로 달려왔다.성연이 일어나서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진 씨 괜찮던 몸이 왜 이렇게 힘들게 된 거예요?”손건호는 자신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한 뒤, 손건호가 푹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사모님께 죄송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스가 깨어나시면 제 스스로 징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성연은 손을 내저었.“이건 손 비서님 탓이 아니에요.”그녀와 의사, 두 사람 모두 무진의 증세가 추위로 인한 일련의 합병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러나 회사에서나 차 안에서나 충분히 난방이 공급되고 있었다.‘어떻게 한기가 들 수 있지?’무진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다. 또 항상 자신의 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그렇다고 무진이 자기 몸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도 아닌데.생각에 잠겼던 성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뭔가 의심스러운 느낌.어떤 사람은 무진의 몸이 추위를 못 이기는 점을 이용해서 고의로 이런 소동을 일으켰다면?성연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손 비서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누가 그랬는지 반드시 알아내세요.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돼요.”성연은 자기 쪽 사람을 시키기가 불편했다.결국 시킬 사람이 손건호 밖에 없었다.무진의 일에 대해서라면 손건호는 당연히 도의상으로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그리고 원래 자신의 일이기도 했다.손건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사모님. 이 일은 제가 반드시 잘 처리하겠습니다.”“그럼 손 비서님께 맡길게요.” 성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간신히 무진 씨 몸을 정상 가까이 돌려놨었는데.’다시 원
그리고 다음 날도 무진은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다행히 성연의 보살핌으로 무진의 열은 내려간 상태였다.하지만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데다 링거의 수액은 그저 수면 작용만 있을 뿐.그래서 무진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무진 상태로서는 잠을 자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수면 상태에서 신체 회복이 더 빠를 수 있으니 말이다.무진은 그동안 너무 쉬지 않았다.성연은 거의 잠시도 무진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했다.직접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매 시간대마다 무진의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이상 증세가 없다는 걸 확인해야 하니까.하지만 무진이 자리를 비우자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무진이 없는 동안 회사 업무는 모두 할머니 안금여가 무진을 대신해 처리했다.임원진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중에 강상철이 회의 석상에 나타났다.상식적으로 봤을 때, 강상철의 상처는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을 터였다.그런데 하필 무진이 자리를 비운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강상철의 움직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강상철을 바라보는 안금여와 강운경의 얼굴에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두 사람 모두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상철을 바라보았다.강상철이 나타나면 항상 좋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적개심이 뼛속에 새겨져 있을 정도였다.그러나 다시 침착함을 되찾은 안금여는 평소처럼 안건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한 후, 각 부서의 실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회의에 참석해서 난리를 칠 줄 알았던 강상철이 의외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보아하니 의견을 제시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강운경과 안금여는 서로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설마 강상철이 양심껏 아무 말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고?’안금여의 말이 끝나가는 데도 강상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드디어 회의 진행을 마친 안금여가 테이블 위 서류들을 정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자리에서 일어
비록 연로했지만 안금여의 위엄은 여전했다.무진이 자리에 있을 때처럼 질서정연한 모습은 아니었으나.자리를 지키고 있은 그녀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주치의가 매일 방문해서 무진의 건강을 체크했다.그리고 성연이 사람들 모르게 무진을 치료하는 중이다.창고에 있는 인삼을 모두 꺼내 무진의 보신용으로 사용했다.인삼탕을 달여 매일 조금씩 무진에게 먹였다. 물론 성연이 직접 끓인 인삼탕이다.성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무진을 간병했다.무진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은 채 돌보는 중이다.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않고 있지만 무진의 몸이 아주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예전 같은 허약 상태는 벗어났다.매일 방문해서 무진의 몸을 체크할 때마다 주치의는 신기하게 생각했다.물론 가장 좋은 약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 만으로 이런 효과를 내기는 힘들었다.아무래도 무진의 자가 치유 능력이 뛰어난 듯하다.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성연이 인삼탕을 들고 침실로 들어왔을 때도 주치의는 아직 가지 않고 있었다.성연이 능숙한 자세로 무진의 몸을 받쳐 안은 채 무한한 인내심으로 한 입 한 입 무진에게 탕을 떠먹였다.입으로 들어가던 탕이 도로 흘러나오자 성연이 휴지로 깨끗이 닦았다.그 모습에 주치의는 성연을 다시 보게 되었다.저 어린 나이에 이처럼 세심하게 간병하다니.그래서 농담으로 한 마디 했다.“대표님의 몸이 이렇게 빨리 회복될 수 있는 데에는 사모님의 세심한 간병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주치의 말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성연이 난감해하자 오히려 옆에 서 있던 집사가 대신 입을 열었다.“그럼요. 사모님이 어찌나 세심하게 도련님을 돌보시는 지. 잠도 줄여 가며 매일 직접 간병하십니다.”집사까지 추켜세우는 말을 하자 더 쑥스러워진 성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모두 과찬이세요. 일반적인 간병 수준일 뿐이에요.”자신은 단지 무진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그리고 또 달리 말하자면 무진 역시
성연은 며칠 동안 잠을 설쳐가며 쉬지 않고 무진을 간병했다.인삼탕 역시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그리고 드디어 무진의 의식이 돌아왔다.무진이 눈을 뜨는 순간, 성연은 하마터면 기뻐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정신이 들어요? 몸은 좀 어때요?” 기쁜 나머지 목소리가 얼마나 들떠 있는지 성연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다.눈을 뜨는 순간 가장 보고 싶었던 얼굴이 보이자 무진이 미소를 지었다.“괜찮아.”“깨어났으니 됐어요.” 성연이 한숨을 돌렸다.자신의 노력이 그래도 효과가 있었다.적어도 무진이 깨어났으니까.침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가 의식을 차린 무진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도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대표님 모르시죠? 작은 사모님이 요 며칠 거의 눈도 붙이지 못한 채로 대표님을 간병하셨습니다.”“고생했어.” 무진이 손을 들어 올려 성연의 머리카락을 쓸었다.그러나 이제 막 깨어난 상태라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어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힘들지 않아요. 무진 씨, 자기 몸에 좀 더 신경 쓰면 안 돼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하느님, 부처님이라도 당신 못 구했어요.” 성연이 원망이 섞인 말투로 타박했다.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무진에게 화가 난 듯했다.“그런데 내가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거지?” 무진은 집에 도착한 그 순간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났다.회사에서부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움을 느껴서 감기에 걸린 줄 알았다. 그러나 작은 감기로 이리 오래 누워있을 리는 없지 않나?“한기가 들면서 고열이 난 게 병을 촉발시킨 주요 원인이에요. 하지만 누가 수작을 부린 건 아닌지 조사하고 있어요.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예요.”이 일을 생각하던 성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그녀의 미간도 같이 무심결에 찌푸려졌다.무진이 손을 들어 성연의 미간을 살며시 쓸었다. 미간의 주름을 펴고 싶다는 듯이.“나는 괜찮아. 넌 이제 이런 것들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처리할 게.”어떤 일이든 성연이 눈살을 찌푸릴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무진
무진의 건강 회복은 강상철과 강상규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강상철이 지금 큰 집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다친 몸으로 회의에 참석했건만, 그런 자신 앞에서 위세를 부리던 안금여라니.어찌나 인정 사정없이 구는지.강상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기는 요즘 하루도 좋은 날이 없긴 했다.강상철의 표정을 본 집안의 고용인들이 모두 알아서 그 앞을 피해 다녔다. 감히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모두 몸을 사렸다.사실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겁내는 것이다.차를 마시던 강상철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질 뻔했다.강무진 그 놈은 도대체 왜 그렇게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무슨 목숨이 그렇게나 질긴지, 나 원.’……그 시각.안금여의 지시를 받고 사고 경위를 조사하던 이에게서 회신이 왔다.무진이 앓아 눕게 된 원인이 당시 회사 내부 온도가 지나치게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했다.마침 엠파이어 하우스에서 무진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 보고를 들은 안금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전화를 끊고서도 안금여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니 화가 많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옆에 있던 모두가 안금여의 말을 아주 똑똑히 들었다.말할 것도 없이 냉방 담당자가 누군가에게 매수된 게 틀림없는 상황.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안금여가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배후에 누가 있는지 반드시 찾아내세요.”이번 일로 무진이 죽다 살아났다.‘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단 말인가?’양심이라고는 없는 그 사람들이 미워 죽을 지경이다.‘이리 악랄한 짓을 하다니, 천벌을 받을 놈들.’“할머니, 진정하세요.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누군지 반드시 알아낼 거예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할머니 건강을 해쳐서는 안돼요.” 성연이 안금여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위로했다.그 놈들은 당연히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할머니의 건강을 해롭게 할 가치는 전혀 없었다.“엄마, 성연이 말이 맞아요. 이제 원인을 알아냈으니 진짜 주모자를 찾는 것도 멀지 않았어
엠파이어 하우스를 나온 안금여는 즉시 회사로 갔다.당직을 섰던 보안요원을 사무실로 불러 하나하나 캐물었다.그날 밤 당직자는 단 두 명.캐묻는 건 간단했다.“그날 밤, 두 사람 중 누가 냉난방기의 조절 리모컨을 작동시켰어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안금여의 전신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그러자 보안 요원 두 명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회장님이 물으시는데 빨리 대답하세요.”옆에 서 있던 안금여의 비서가 혐오감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덜덜 떨고 있는 보안 요원을 바라보았다.보안 요원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그날 저녁에 온도조절기는 저희 두 사람이 교대로 관리했습니다. 제가 볼 때만 해도 계속 상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입만 살아 있는 듯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안금여가 냉소를 지었다.“상온, 상온이라.”곧이어 그녀가 손을 내밀자 비서가 즉시 서류 한 장을 건넸다.“대표실 입구의 온도계 기록입니다. 방금 상온이라고 했나요? 그런데 왜, 이 지점에서 실내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거죠?” 안금여가 서류로 책상에 내려쳤다.저들 스스로는 아주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안금여 쪽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었다.안금여 쪽에서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 밝혀냈다.보안 요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그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반박했다.“회장님,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아마도 온도조절기가 고장이 난 것 같습니다.”이 일을 저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강상규가 돈으로 저 두 사람을 매수했고, 강상규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 냉방장치에 장난을 친 것이다.물론 저 두 사람이 그 사람을 들여보낸 것이고. 저들은 그냥 모른 척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물론 냉방장치는 저들과 확실히 무관했다.그러니 저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일 터.“아직도 궤변을 늘어 놓는 겁니까?” 안금여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았다.조금 전 두 사람의 소소한 동작을 안금여의 눈에도 들어왔다.저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
이 일은 회사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WS그룹 직원 사이에서 의론이 분분했다.어쨌든 전체 보안실에 근무하는 직원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일시에 그처럼 많은 사람을 해고한 것을 보아 안금여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 지 있었다.그동안 회사 내 모든 직원들은 자신이 해고될까 봐 극히 조심했다.사람들은 보안 요원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고되었는지도 잘 몰랐다.그저 강무진 대표의 병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 소식은 강상철, 강상규의 귀에도 전해졌다.배후의 주모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본보기로 삼은 안금여의 의도를 강상규는 바로 알아차렸다.몇 차례 충격을 받았던 강상철은 부상까지 겹쳐 건강도 좋지 않았다.집에서 휴양 중이던 강상철을 강상규가 집으로 찾아와 이 일을 의논했다.강상규가 속으로 욕을 하며 강상철에게 말했다.“형님, 큰 형수가 회사에서 사람들을 해고할 때 얼마나 가차없었는지 아세요? 주주들도 정말이지, 말 한 마디 못하고, 정말 쓸모없는 놈들이에요.”‘예전에 자신들에게 부화뇌동해서 강무진을 짓밟을 때는 얼마나 신나게 밟아 댔는지 그새 잊었단 말이야?’지금은 찍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지금 강무진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크게 주니, 자연히 아무 말도 못하는 게지. 우리가 강무진만큼 저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까 봐 말이야.”두 늙은 여우도 저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이게 바로 현실이었다.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편에 붙을 이들이다.지금 회사 내의 저울은 점점 강무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이대로 가다가는 회사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판이다.“무진이 놈 목숨이 어찌 그리 질긴지. 그렇게 오랫동안 끙끙거리면서도 아직 죽지 않다니.” 강상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덫에 걸릴 때마다 어찌 그리 매번 위기를 빠져나가는 지.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넌 무진이 신변에 유능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유능한 수하도 없이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겠어?” 강상철은 가볍게
무진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체력은 여전히 약한 상태였다.얼굴색도 아직 창백했다.성연은 이제 무진이 단 시간에 회복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무진이 목숨을 건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깨어난 후 며칠 쉬었더니 무진은 거의 회복되었다고 생각하고 회사에 나가려 했다.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은 뒤에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성연이 문을 막고 섰다.“어디 가시려고요?” 눈썹을 치켜세운 성연의 모습에서 은근한 분노가 느껴졌다.‘이 남자, 도대체 조금도 깨달은 게 없단 말이야?’‘자기 몸 상태에 대해 어쩜 이리도 생각이 없는 걸까?’“회사에 나가서 어떤지 좀 보고 싶어.” 성연의 마음을 살짝 구슬리려는 듯한 어조로 무진이 입을 열었다.성연의 마음이 약해지기를 바라며 이렇게 완곡하게 말을 했다.“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다는 거 몰라요?” 성연은 무진에게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무진 씨에게 회사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이야?’‘어찌 되었든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 아닌가.’“나도 알아. 할머니가 회사에 계시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둘째, 셋째 할아버지가 또 어떤 트집을 잡는 건 아닌지.”무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럼 무진 씨는요? 당신이 지금 회사에 가면 할머니를 가장 걱정시키게 되는 거라고요! 안돼요, 못 가요. 집에서 쉬어요.” 성연이 다다다 말을 쏟아 낸 후, 문 앞을 막고 서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다. 만약 무진이 오늘 진짜 회사에 간다면, 앞으로 다시는 무진을 간병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하면서.성연의 굳어진 안색을 보니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보였다.무진이 입술을 꽉 다문 채 그 자리에 섰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옆에서 지켜보는 집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난감했다.성연과 무진이 다투는 건 지금 처음 보았다.누구의 말을 거들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무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마치 바람이 불면 바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저 몸으로는 견디지 못 할 게 분명했다.집사도 무진이 회사
다음 학기 곧 다가온 성연은 요 며칠 정말 바빴다.하루 종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했다.또 국내에만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예를 들면 귀한 한약 약재들, 그리고 집 생각 나고 그리워지는 맛있는 음식들.이런 맛들은 가정에만 존재한다.성연이 외국에서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할 때면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그러므로 이번에 모두 준비해 가서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만나면 두 사람에게도 좀 나누어 줘야지. 그들도 일상의 맛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지난번에 미스 샤넬이 왔을 때, 중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성연은 똑 같이 좀 받기로 했다.때가 되면 짐을 부치는 곳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성연은 구시가지로 나갔다.북성이라는 곳에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가장 잘 갖추어 있다.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여기로 오면 된다.다른 곳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여기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물건을 파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성연도 이곳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이때 성연은 길 모퉁이로 나오자마자 마스크를 쓴 남자 하나가 한 여자 애의 가방을 낚아채며 빼앗는 것을 보았다.날치기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 지, 빼앗자마자 달아났다.성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백주 대낮에 감히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곧 정신을 차린 여자아이가 즉시 구조를 요청했다.“살려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제 가방 안에는 중요한 증명서가 많이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 돼요.”소리치는 여자아이의 음성에 울음이 미미하게 섞여 있었다.성연이 손에 든 물건을 놓고 앞으로 나가 도와주려던 순간.한 남자가 뛰어나가더니 곧이어 날치기를 잡아 땅바닥으로 밀었다.무척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날치기에게서 여자아이의 가방을 되찾았다.그 남자가 일어나 달아나려던 날치기범을 다시 붙잡으려던 중에 날치기범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는 모습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작은 칼의 날이 햇빛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게 섬뜩해 보였다.날치기범이 눈앞의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안금여와 강운경은 마음을 정리했다. 오후, 무진이 회사에 출근한 시간에 성연을 고택으로 불렀다.“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성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할머니가 일 없으면 부르면 안 돼? 네가 한 번 생각해 보렴. 오랜만에 귀국했는데, 이 할머니를 보러 몇 번 왔었니?” 안금여는 일부러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성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귀국하자마자 비교적 많은 일이 생겼다. 또 공교롭게도 미스 샤넬과 목현수가 와서 성연이 그들과 함께 지내며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었다.그러고 보니 진짜 안금여의 말 그대로였다.성연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안금여에게 사과했다.“할머니, 죄송해요. 요즘 좀 바빴어요.”“네가 돌아온 후에 일이 많았다는 걸 알고 이 할머니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다만, 사람이 늙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안금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안금여가 탄식하는 모습을 본 성연은 갑자기 마음이 언짢아졌다.성연이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왜 갑자기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세요? 지금은 괜찮으시잖아요? 마음을 편안하게 드시고 집에서 요양을 잘 하시면 돼요. 남은 일은 무진 씨에게 맡기시고, 걱정하지 마세요.”“말이야 그렇다만,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걱정거리가 없을 수가 있겠니? 괜히 이 할머니 위로할 필요 없다.” 안금여가 가볍게 웃었다.성연은 효심이 깊은 아이다. 오랫동안 집을 나갔다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그들을 걱정시킨 적이 없다.“할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성연이 옆에서 위로했다.“하지만 할머니가 너를 부른 것은 진짜 중요한 일 때문이야.” 안금여가 성연을 바라보며 불현듯 진지하면서 다소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성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할머니, 무슨 일이신지 바로 말씀해 주세요.”“음, 그건 말이야, 이 할머니 생각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알겠니. 그러니 네와 무진이가 우선 결혼부터 해놓으면 이 할머니가 안심이 좀 될 것
안금여가 한숨을 내쉬었다.“너와 성연이 모두 착한 아이들이야. 만약 정말 무슨 부득이한 상황이 닥치면, 이 할머니는 너희들이 좋게 헤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러지 마, 무진아.”“할머니, 말씀하신 그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무진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안금여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강운경이 옆에서 말렸다.“엄마, 우리도 잘 알고 있잖아요. 엄마가 성연이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시는지요. 하지만 무진이와 성연이 서로 감정이 깊어요. 둘 다 사리가 분명한 애들이에요. 무진이 우리를 찾아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안금여의 말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 맞다. 불길한 말은 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잠시 멍하니 있던 안금여가 입을 열었다.“성연이에 대해서는 네 말이 맞다. 우리 집 무진이가 마침내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다니, 이 할머니가 당연히 기뻐해야지. 모두 이 할머니 잘못이다, 요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구.”무진이 얼른 말했다.“할머니, 할머니 탓하지 마세요. 모두 저와 성연일 위해서 하신 말씀이시잖아요?”“그렇네, 얼른 무진과 성연이 결혼식을 예약해야지. 성연이가 외국에서 나쁜 마음을 품은 놈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말이다!” 강운경은 성연의 성격을 안다.겉으로 보기에는 성격이 강하고 털털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조그만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간다면...‘정말 무진이 죽으려고 하겠네.’“그래, 근데 성연이 나이가 한참 어린데, 그렇게 하겠다고 해?” 강운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계획을 다 세웠다.그러나 성연이 그러겠다고 할지는 아직 미지수.“성연이는 분명히 그러겠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성연이 곧 개학할 텐데, 성연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그러면 성연이 공부하러 가는 것을 막는 양상이 된다.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실, 불안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연이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시 돌아왔다.무진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그러나 마음이 심란해지며 성연이 떠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그래서 무진은 성연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고택에 들렀다.무진이 고택으로 들어왔을 때, 안금여와 강운경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무진을 보던 안금여는 무진의 뒤를 쳐다보았다.“아니 왜 성연이는 너와 함께 오지 않았어?”무진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같이 안 왔어요.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두 분에게 드릴 말이 있어서예요.”무진의 태도가 너무 공적이고 진지한 터라, 안금여와 강운경도 덩달아 긴장하며 다급히 물었다.“무슨 일이냐?”두 사람은 무의식 중에 회사의 일을 떠올렸다.“성연이가 곧 학교로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 저는 성연이가 더 뛰어나게 성장하는 걸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연이 떠나면, 더 이상 제가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없습니다.”무진의 음성이 유난히 침중했다.성연은 아직 너무 젊었다. 외부에는 성연이를 끌어당기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무진이라 해도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무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조바심과 불안은 오직 눈앞의 가족 두 사람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었다.무진이 에둘러 말했지만, 안금여와 강운경은 바로 알아들었다.무진의 말을 듣던 안금여와 강운경이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무슨 큰 일인가 했더니, 그걸 걱정하고 있었어?” 안금여와 강운경이 박장대소를 했다.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무진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있다니.제 마음이 이리도 빨리 들통나 버리자 무진은 좀 민망함을 느꼈다.무진이 입술만 오물거리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강운경이 그런 무진을 놀렸다.“예전에 내가 무진이 너에게 괜찮은 아가씨들을 참 많이도 소개해 줬는데, 그때는 너 꿈쩍 하지도 않더니. 그때 나 정말 걱정했었어. 네가 고독한 모습으로 혼자 늙어가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