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아저씨, 전 정말 몰라요. 이것들이 어떻게 내 서랍에 있는지요.”아연이 목이 메이는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물이 두 뺨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또 가련한 모습으로 동정심을 유발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수작이다.연약하면서 청순한 분위기의 송아연이 흘리는 눈물방울은 사람들의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과연 곧 바로 아연을 편드는 소리가 들렸다.입을 여는 아이들은 모두 평소 아연을 쫓아다니던 남학생들이었다.[아연이가 얼마나 착한데, 이런 일을 어떻게 한 단 말이에요?][맞아, 지난번에 보니까 달팽이 한 마리도 못 밟고 지나가더라. 게다가 다른 사람이 밟을까 딴 곳에 옮겨 주기도 하고 말이야.][아연이가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 아마 바보가 하는 짓이 눈에 거슬린 누군가 대신 응징하려 한 게 아닐까?]남학생들의 말을 듣고 있던 여학생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평소 보여주기 위해 연출한 송아연의 모습을 남자 아이들은 진짜로 믿었다.가증스러울 정도로 꾸며낸 청순 가련한 얼굴이 좀 예쁘게 생긴 것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도 없는데 말이다.분위기에 편승한 송아연의 또 다른 추종자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아연을 보았다. 모두가 송아연을 나쁘게만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하지만 송아연은 분명 착하고, 실력도 뛰어난 여자아이야.’즉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너희들 쓸데없는 소리 마. 아연이 어제 그 바보에게 음료수를 주는 걸 봤어. 얼마나 친절하게 대했는데.”그러자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의 안색이 확 변했다.보건교사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제 기억이 맞다면, 지금도 병상에 누워 있을 임정용 학생은 병원의 검사 결과, 약을 탄 주스를 마셨다고 하던데. 정말 너였나 보구나.”아연은 속으로 대충 넘어가길 바랬다. 그런데 저 덜 떨어진 녀석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짜증이 치밀어 사납게 치 떤 눈으로 망할 녀석을 노려보았다.입 방정을 떤 녀석 역시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곧 아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
경찰에서 나온 사람들이 돌아간 후, 학교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요 며칠 학교에서 발생한 골치 아픈 일들로 머리가 다 하얗게 셀 정도로 걱정인 교장이 손을 휘이 내저으며 당부했다.“학습 진도에 차질 없도록 수업 계속 진행하세요. 경찰이 공정하게 잘 처리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바로 앞에 서 있는 이윤하를 성연이 쓰윽, 흘겨보며 말했다.“이윤하 선생님, 아직 저에게 사과 안 하신 게 하나 있지 않나요?”이윤하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성연이 이 일을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다.아무 말 않고 서 있는 이윤하를 보며 성연이 가차없이 다그쳤다.“선생님, 조금 전에 많은 학우들 앞에서 나에게 약속하셨잖아요. 설마 본인이 한 말도 책임 안 지시는 건 아니지요?”사실 조금 전, 이윤하가 그처럼 지나치게만 안 했어도, 성연은 그녀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얼굴이 새파래진 교장이 이윤하를 노려보며 질책했다.“이 선생은 어째서 늘 송성연 학우와 문제를 일으킵니까?”‘며칠 전에 사무실에서 한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단 말이야?’죽는 한이 있어도 이윤하가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별일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성연의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이윤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성연을 더 원망할 뿐이다.성연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반응했다.“별일 없다구요? 반에 그렇게 많은 학우들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어째서 저만 지목하셨어요? 딱 잘라서 제가 한 것이라고 단정하셨잖아요?”눈에 굴욕감과 불쾌감이 떠오른 이윤하가 손가락을 꽉 그러모아 쥐었다.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송성연에게 사과하라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진배없었다.‘진짜 사과를 한다면 앞으로 누가 내 말을 듣겠어?’성연은 이윤하의 생각을 간파했다.‘여태 뭐 하다 이제서야 체면에 신경 쓰고 그래?’“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잖아요, 제가 강요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되시면서 ‘약속 지키는 법’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두 눈이 허옇게 뒤집어질 정도로 화가 난 임수정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송종철의 안색은 더 엉망으로 구겨졌다. 아연이 다른 사람을 건드린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임씨 집안을 건드리다니.임씨 집안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대였다.송종철은 곧바로 아연을 만나 어떤 상황인지 물어볼 수 있도록 경찰에게 요구했다.현재 유치장 구류 중인 아연은 면회가 허용되는 상태였기에, 경찰에서는 그들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해줬다.헝클어진 머리에 울어서 빨갛게 부어 오른 눈,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아연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세심하게 단장했던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다른 사람에게는 인색하고 이기적인 임수정이지만 자신의 딸 송아연만큼은 누구보다 아꼈다.어려서부터 손에 올려 놓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딸이건만, 어떻게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지?임수정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아연아, 아이고, 불쌍한 내 딸.”송아연도 울었다.“아빠, 엄마, 살려주세요. 도와줘요. 나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유치장은 두 모녀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임씨 집안과의 문제로 마음이 복잡하던 송종철은 두 모녀의 울음소리에 더욱 골치가 아팠다.성난 목소리로 다그쳤다.“울면, 지금 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은 문제를 해결해야 해. 아연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을 해 봐!”그의 처 임수정과 딸 아연은 그저 모든 걸 누리기만 하고 살아왔다.그에 반해 송종철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큰일이 터졌을 때. 역시 집에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두 모녀는 즉시 울음을 멈추었다. 임수정이 아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아연아, 걱정 말고 찬찬히 말해 봐. 아빠, 엄마가 죽을 힘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송성연 때문이에요. 걔가 고의로 약을 내 서랍에 집어넣었어요. 당시 송성연만 교실에 남아 있었단 말이에요. 성연이가 임정용에게 준 약이 틀림없어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송성연 걔
송종철이 얼마나 크게 소리질렀는지, ‘짐승’이라는 단어가 거실 전체에 크게 울리며 강무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성연이 이런 소리로 불린다는 게 무척이나 맘에 안 드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성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이미 습관이 되고 마비되어서 그런 지도.게다가, 소위 여동생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있었는 지도 기억에 없다.성연이 차가운 음성으로 받았다.“짐승이 송아연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짐승 맞네요.”화가 난 송종철의 가슴이 오르내렸고,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송성연, 나와 입씨름할 생각 마라. 아연일 모함해서 잡혀가게 해 놓고는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송아연이 또 경찰서에서 앞뒤 바꿔서 말했을 것이 뻔했다.그러나 성연 자신은 아무나 마음대로 뭉갠다고 뭉개지는 그런 홍시 같은 존재가 아니다.“제가 무슨 낯짝이 없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송아연이에요. 걔가 저지른 비양심적인 일은 전교생이 다 알아요. 잘 모르시면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싹 다 설명해 드릴 수도 있고요!”“아연이 약을 탄 음료수를 임정용에게 줬어요. 그래서 임정용이 교실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벌였고요. 약은 모두 경찰이 직접 아연이 가방에서 찾아낸 거예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요. 왜 또 나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던가요?”성연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에 이어서 말했다.“송아연이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다고 해도 그건 모두 자신이 자초한 거라고요!”아연이 경찰서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아연인 어릴 때부터 말 잘 듣는 그들의 자랑거리였다.임수정은 당연히 자신의 딸을 더 믿었다. 아연이 결코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줄곧 송종철 옆에서 성연의 말을 듣고 있던 임수정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고서는 욕설을 퍼부었다.“거짓말 마! 아연이 어떤 아이인지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알아. 너, 나이도 어린 게 어쩜 이렇게 못돼 쳐먹
통화를 끝낸 성연은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송종철과 임수정이 미친 개처럼 짖어대는 말에 또다시 상처받지 않게.컵을 테이블 위에 놓은 성연이 소파에 웅크린 채 넋을 빼고 있었다.성연을 조사 했었던 무진은 각자 재혼을 한 그녀 부모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정도까지 최악일 줄은 몰랐다.“너네 가족들, 설마 계속 이런 식으로 너와 대화한 거야?”무진이 성연에게 물었다.성연이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집안의 추태는 밖으로 드러내는 법이 아니다. 이처럼 창피한 일을 그녀 역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강무진이 다 들어 버렸다. 아마 앞으로 이런 장면을 볼 기회는 더 많을 것이다. 머리 속에서 계산이 끝난 성연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뇨. 저들은 아예 나와는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아요.”먼 곳을 바라보던 동공에 점차 초점이 사라지며, 성연은 오래전의 추억에 빠졌다.“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유일하게 나에게 관심 가져 주신 분이었어요. 제 부모라는 사람들은 그저 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생각 했지만요…….”송종철이 자신을 시골에서 데려온 목적을 생각하자 참지 못한 성연이 물었다.“송종철이 나를 강씨 집안에 보낼 때, 엄청 많은 예물을 요구했겠죠?”강무진을 강씨 집안의 미치광이로 알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다.워낙 명성이 자자한 강무진이었기에 이런 방법을 쓴 것이고.하지만 성연이 볼 때, 강무진은 아주 정상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두 사람은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고.강씨 집안의 입장에서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아니, 꽤 좋았다.무진이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음, 확실히.”그까짓 돈, 강씨 집안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아직 안 줬죠?” 성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은.”그녀가 묻는 질문마다 무진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반색을 한 성연이 흥분해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기왕 이렇게 된 거, 그 돈 나한테 줘요. 송종철의 행위는 딸을 판 거
성연이 그제서야 무진이 일부러 자신의 애를 태우려 했음을 눈치챘다.갑자기 어이가 없어진 성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이 사람 진짜 손해라고는 조금도 안 볼 사람이네.’“문제없어요. 돈만 주신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죠.” 성연이 마지못한 듯 승낙했다.‘신분만 드러내지 않으면 돼.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거야.’성연이 집사를 찾았다.“집사 아저씨, 오늘 아침에 나가면서 사와야 할 약재 목록을 드렸는데, 모두 사셨어요?”“네. 작은 사모님.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가 즉시 창고로 가서 약재를 꺼내 왔다.주로 강무진의 약욕에 사용될 이 약재들은 성연이 직접 그 분량과 배합을 조절해야 했다.약마다 그 효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성연이 고개를 숙인 채 약재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최상품의 약재들은 가격도 엄청나게 비싼 만큼 그 사용 효과 또한 분명해서, 들인 노력의 배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었다.성연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좋아요.” 상자 안의 약재를 받아 든 성연이 필요한 분량을 손으로 가늠해서 덜어내고, 곧바로 약을 배합해냈다.그리고 약재들마다 얼마만큼의 중량이 필요한지 일일이 집사에게 말했다.절반쯤 말하다 집사가 다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 성연이 아예 약재의 중량을 펜으로 써내려 갔다.다 쓴 후, 쪽지를 집사에게 건네며 당부했다.“집사 아저씨, 나중에 꺼내기 편하도록 약재들을 잘 분류해서 보관하라고 이르세요. 그리고 정확한 중량을 꼭 기억하세요. 절대 틀리면 안돼요. 안 그러면 오히려 아주 심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요.”성연의 의술은 아주 뛰어났다. 그만큼 약효도 빠르다.하지만 성연의 약제법은 꽤 과감한 편이라서, 자신이 직접 처방할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지, 다른 사람에게 처방전을 함부로 줄 수는 없었다.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아주 컸다.“네, 작은 사모님.”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는 도련님의 병세를 위해 열심인 성연을 보며
멍하니 쳐다보던 성연은 금세 알아차렸다.그날 강씨 집안의 모임에서 드러난 모습이 다가 아닌 것이다. 겉으로야 겨우 입으로만 찧고 빻을 뿐이지만, 등뒤에서는 어떤 떳떳치 못한 일들을 할지 알 수 없는 터.이 대단한 가족들의 내부 암투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강씨 집안은 사람을 유혹하는 커다란 케이크 같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 더 큰 케익을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가운데, 무진이 지난 번처럼 다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성연은 분별 있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자, 옷 벗어요.”그녀가 돌연 말을 던졌다.서로 눈을 마주친 집사와 손건호는 상대방의 눈에서 똑같은 놀라움을 보았다.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얼른 방에서 물러나왔다.무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거의 도망가는 듯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성연이 움찔했다.성연의 볼 양쪽에 불시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홍조는 곧 볼에서 눈가의 미간으로 번져갔다.성연이 다소 어색한 듯이 바닥만 노려보았다.수줍어하는 성연을 무진이 시종 여유로운 모습으로 관찰했다.하얀 성연의 피부는 수줍은 빛을 띄자 온통 연분홍 가루를 덮어쓴 듯했다. 손톱마저 연분홍 빛을 띈 모습이 말도 안되게 귀여웠다.작열하듯 뜨거운 시선에 정신을 차린 성연이 강무진을 보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침을 놓으려면 옷을 벗어야 해요. 안 그러면 침을 놓기 힘들어요.”무의식 중에 말하고 나서야 성연은 깨달았다.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말이다.성연의 의중을 파악한 무진이 곧 하얀 실크 셔츠의 단추를 손으로 하나하나 풀어 내리며, 탄탄한 상체를 드러내었다.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도 무진의 몸은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탄탄한 몸의 근육들은 보기만 해도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였다.조명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광택은 손을 내밀어 만져보고 싶게 했다.물론 이런 생각은 그저 성연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무진을 환
성연은 너무도 피곤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이처럼 무리한 적은 없었다.몸을 쭉 늘어뜨렸다 카펫을 짚고 일어난 성연이 한쪽편에 놓인 쿠션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약효가 다 되어서인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무진이 번쩍 눈을 떴다.엎드려 있는 그의 등에는 온통 은침이 꽂혀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에 기대어 잠든 성연을 쳐다보았다.눈을 감았을 때 오히려 더 깜찍해 보였다. 조명이 날렵한 콧등 위로 부서지며 도자기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볼을 뒤덮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교하게 빚은 예쁜 인형 같기도 하고.单纯,无害,让人心生宁静的美好和向往。단순하고 무해하며,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이다.눈을 떴을 때, 뼛속 깊은 곳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이 절로 튀어나왔다.무진이 성연을 뚫어져라 본 지 한참이 지났다.오래전부터 훈련을 통해 시선에 대해 예민한 성연이다.무진이 그녀를 주시했을 때, 이미 그의 시선을 알아챘었다.하지만 워낙 피곤한지라, 생각을 비웠다.‘볼 테면 봐라.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닌데, 뭐.’성연의 체력이 거진 회복되었는데도 무진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참지 못한 성연이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가운 시선으로 무진의 몸을 한 번 훑었다.“얼마나 더 볼 거예요?”눈을 뜬 그녀는 곧바로 깊은 동굴과도 같은 무진의 눈과 마주했다.삽시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무진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언제까지 잠든 척하는지 보려고.”성연이 웃는 듯 마는 듯 쳐다보며 대꾸했다.“이 침, 안 뽑아도 되겠네!”“나를 실험실의 쥐처럼 다루고 싶은 건 아니고?” 무진이 일부러 성연을 자극했다.그에 성연이 아예 아랑곳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맞아요. 독살을 당한다 해도, 난 몰라요.”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말장난을 이어갔다. 마치 즐기고 있는 듯하다.우습게도 정작 자신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결국 성연이 말장난을 끝냈다.손을 들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성연이 침대로 다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
조수경은 바로 손민철을 찾아갔다.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만났다.칸막이가 쳐진 룸에서 손민철은 조수경을 껴안고 뺨에 키스를 했다.“왜 그래, 우리 자기, 겨우 며칠 못 봤을 뿐인데 내가 보고 싶었어?”“나도 보고 싶었어요.” 조수경이 당당하게 대답했다.손민철의 표정이 일순 흐려졌다. 자신이 보고싶었다고 조수경이 자신의 입으로 처음 시인한 것이다.손민철이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말을 하면서 조수경에게 입을 맞추었다.조수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목을 껴안고 고개를 들어 키스를 받아들였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모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부족하다고 느낀 손민철은 다시 키스하고 싶었다.조수경이 손민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가로막았다.“민철 씨에게 할 말이 있어.”손민철은 키스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일인데?”“내가 더 큰 성과를 올리게 해 줘요. 지금으로서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해!”조수경의 눈에 모질고 포악한 기색이 번쩍였다.‘내가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무진 씨가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손민철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러지.”그러고는 조수경의 손을 더듬거리면서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 무조건 나와 같이 있어야 해!”농담하듯이 웃는 조수경의 표정에는 이전의 내키지 않아 하던 모습은 전혀 없었다.“그래.”“밤은 짧아. 지금 가자!” 손민철은 한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다급한 모습으로 조수경을 이끌고 호텔로 가서 방을 잡았다.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조수경을 벽에다 밀어붙인 채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조수경의 옷을 벗기려던 순간, 조수경이 손민철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오늘 밤은 충분히 기니까 천천히 즐겨요.”손민철은 애가 타면서도 속으로는 동시에 조수경이 자신에게 어떤 즐거움을 선사할지 기대감마저 가지고 있었다.천천히 객실 안으로 들어선 조수경이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베란다로 나가 앉은 조수경이 손민철에게 손을 흔들었
조수경은 두 사람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이를 갈았다.‘나는 지금 무진 씨를 만날 수도 없건만.’‘송성연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불러낼 수 있는 거지?’‘도대체 송성연의 어디가 좋다는 거야!’조수경은 이렇게 앉아서 무진의 처분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계속 이러면 무진 씨가 나를 거들떠보기나 하겠어?’저녁에 퇴근한 조수경은 또 다시 많은 선물과 건강기능식품을 사서 고택으로 찾아갔다.집사는 바로 안으로 들이는 대신 조수경의 방문을 먼저 안금여에게 보고했다.안금여와 강운경이 고개를 돌려 서로 쳐다보았다.그날 밤의 일에 대해 나중에야 알게 된 두 사람.정말이지 조수경이 무진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하마터면 무진과 성연 사이에 오해가 생길 뻔했던 것.조수경을 쉽게 믿었던 안금여는 마음속으로 성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수경에서 고택 외부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옛 친구의 체면을 고려해서 안금여는 그래도 조수경이 계속 회사에 남아있게 해서 체면을 세워주었다.조수경이 방문했다는 말에 안금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됐어, 가서 한번 만나 봐야겠어.”강운경이 안금여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회사에서부터 화를 참고 왔던 조수경은 자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자 더 화가 났다.‘이전에는 이 집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거절당하다니!’안금여와 강운경이 나타나자 조수경은 억지로 눈물 몇 방울을 쥐어짜내며 불쌍한 척 쇼를 하기 시작했다.“할머니, 고모,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 용서해 주세요. 두 분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드럽고 여리여리한 외모의 조수경의 두 눈은 촉촉하면서 약간 충혈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이 더 동정심을 갖게 했다.안금여는 조수경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래 여린 마음을 가진데다가 지금 조수경이 보이는 모습에 더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안금여는 강씨 가문의 입장 또한 잊지 않았다.안금여 또한 차마 조수경에게 심한 말
대표실에 앉아 업무를 하던 무진이 고개를 돌려 맞은편 빌딩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내내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데스크 위의 전화가 울리며 무진의 정신이 돌아왔다.[보스, 적호가 유럽에서 MS 가문 칠장로의 아들 오웬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유럽이 한바탕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적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신분을 숨겨서인지 아무도 그의 소행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약 무진이 사람을 보내서 계속 주시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이 적호의 소행임을 그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무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적호의 행동으로 해서 이 일 전체가 모호해졌어.’‘도대체 누가 적호에게 지시를 내린 거지?’‘설마 적호가 나를 노린 게 MS 가문과 상관이 없단 말인가?’‘그런데 MS가문에서 사주한 거라면 왜 도리어 MS가문의 사람을 죽인 거지?’‘아니면 저들 사이에 내분이라도 생긴 건가?’무진이 묵직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계속 주시하면서 무슨 소식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해. 만약 자신이 있다면 적호를 생포하고, 자신 없으면 그냥 없애 버려.”어쨌든 적호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안되었다.그가 살아 있는 한 무진과 성연의 안전은 늘 위협받게 될 테니까.[예.]수하에게 지시를 내린 무진이 전화를 끊었다.적호의 위협이 사라지자 무진의 마음이 다소 홀가분해졌다.적호가 북성을 떠났다는 사실은 성연의 외출 금지가 해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이제 성연은 언제 어디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불현듯 마음이 내킨 성연이 차를 몰고 무진의 회사로 찾아왔다.그룹 빌딩 일층에 차를 세운 성연이 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맞혀 봐요?”성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에서 음산한 기운을 모두 걷어낸 무진이 웃으며 말했다.“어디인데?”“맞혀보라니까요.” 성연이 애교를 부렸다.“모르겠는데? 그냥 얘기해 주면 안돼?” 무진의 입
일렬로 쭉 뻗은 건물이 구름 속으로 우뚝 솟아 있다.은백색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빌딩 내의 창문 앞에 서서 맞은편 빌딩을 바라보고 있다.‘저기가 바로 WS그룹의 본사.’안진검은 WS그룹 맞은편에 위치한 이 건물의 한 층을 임대해서 자신이 말했던 창업을 준비했다.물론 이는 모두 위장이다.그의 목표는 당연히 MS 가문에서 내린 지시, 즉 WS그룹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안진검은 창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빈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리자 안진검은 정신을 차렸다.힐끗 돌아본 핸드폰 화면에는 특수한 번호가 떠 있었다.적호가 건 전화였다.[오웬은 이미 죽었어!] 적호의 음산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말을 들은 안진검은 속으로 기뻐했다.‘며칠 동안 지지부진하더니 겨우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 있군.’“다른 사람한테 들키진 않았어? 미행은?” 안진검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MS 가문의 세력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그리고 오웬은 칠장로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 아닌가.오웬이 별안간 비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MS 가문에서 절대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미행하고 추격하는 놈들도 꽤 됐지만, 내가 다 따돌렸어. 가면을 써서 얼굴을 완전히 감춘 나를 그들은 전혀 못 알아봤어. 신분만 바꾸면 돼.]적호가 담담하게 설명했다.안진검은 속으로 흥분감을 느끼며 호쾌하게 말했다.“곧 백억을 쏴 줄 테니까, 잠시 유럽에서 휴식하며 재정비하도록 해. 내가 더 많은 리스트를 보내줄 테니.”적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안진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안진검이 막 전화를 끊는 순간에 곧장 또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안진검의 양부, 일장였다.그가 전화한 목적도 오웬의 일 때문이었다.[오웬이 죽었어. 네가 요 몇 년 동안 오웬으로부터 억압받았다는 것도 알아. 이번에야 말로 너에게 좋은 기회야. 네가 WS그룹을 전복시키기만 하면 가문에서는 틀림없이 너를 크게 들어 사용할 거야!]안진검은 마음속으로 역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