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그제서야 무진이 일부러 자신의 애를 태우려 했음을 눈치챘다.갑자기 어이가 없어진 성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이 사람 진짜 손해라고는 조금도 안 볼 사람이네.’“문제없어요. 돈만 주신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죠.” 성연이 마지못한 듯 승낙했다.‘신분만 드러내지 않으면 돼.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거야.’성연이 집사를 찾았다.“집사 아저씨, 오늘 아침에 나가면서 사와야 할 약재 목록을 드렸는데, 모두 사셨어요?”“네. 작은 사모님.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가 즉시 창고로 가서 약재를 꺼내 왔다.주로 강무진의 약욕에 사용될 이 약재들은 성연이 직접 그 분량과 배합을 조절해야 했다.약마다 그 효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성연이 고개를 숙인 채 약재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최상품의 약재들은 가격도 엄청나게 비싼 만큼 그 사용 효과 또한 분명해서, 들인 노력의 배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었다.성연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좋아요.” 상자 안의 약재를 받아 든 성연이 필요한 분량을 손으로 가늠해서 덜어내고, 곧바로 약을 배합해냈다.그리고 약재들마다 얼마만큼의 중량이 필요한지 일일이 집사에게 말했다.절반쯤 말하다 집사가 다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 성연이 아예 약재의 중량을 펜으로 써내려 갔다.다 쓴 후, 쪽지를 집사에게 건네며 당부했다.“집사 아저씨, 나중에 꺼내기 편하도록 약재들을 잘 분류해서 보관하라고 이르세요. 그리고 정확한 중량을 꼭 기억하세요. 절대 틀리면 안돼요. 안 그러면 오히려 아주 심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요.”성연의 의술은 아주 뛰어났다. 그만큼 약효도 빠르다.하지만 성연의 약제법은 꽤 과감한 편이라서, 자신이 직접 처방할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지, 다른 사람에게 처방전을 함부로 줄 수는 없었다.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아주 컸다.“네, 작은 사모님.”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는 도련님의 병세를 위해 열심인 성연을 보며
멍하니 쳐다보던 성연은 금세 알아차렸다.그날 강씨 집안의 모임에서 드러난 모습이 다가 아닌 것이다. 겉으로야 겨우 입으로만 찧고 빻을 뿐이지만, 등뒤에서는 어떤 떳떳치 못한 일들을 할지 알 수 없는 터.이 대단한 가족들의 내부 암투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강씨 집안은 사람을 유혹하는 커다란 케이크 같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 더 큰 케익을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가운데, 무진이 지난 번처럼 다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성연은 분별 있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자, 옷 벗어요.”그녀가 돌연 말을 던졌다.서로 눈을 마주친 집사와 손건호는 상대방의 눈에서 똑같은 놀라움을 보았다.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얼른 방에서 물러나왔다.무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거의 도망가는 듯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성연이 움찔했다.성연의 볼 양쪽에 불시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홍조는 곧 볼에서 눈가의 미간으로 번져갔다.성연이 다소 어색한 듯이 바닥만 노려보았다.수줍어하는 성연을 무진이 시종 여유로운 모습으로 관찰했다.하얀 성연의 피부는 수줍은 빛을 띄자 온통 연분홍 가루를 덮어쓴 듯했다. 손톱마저 연분홍 빛을 띈 모습이 말도 안되게 귀여웠다.작열하듯 뜨거운 시선에 정신을 차린 성연이 강무진을 보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침을 놓으려면 옷을 벗어야 해요. 안 그러면 침을 놓기 힘들어요.”무의식 중에 말하고 나서야 성연은 깨달았다.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말이다.성연의 의중을 파악한 무진이 곧 하얀 실크 셔츠의 단추를 손으로 하나하나 풀어 내리며, 탄탄한 상체를 드러내었다.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도 무진의 몸은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탄탄한 몸의 근육들은 보기만 해도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였다.조명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광택은 손을 내밀어 만져보고 싶게 했다.물론 이런 생각은 그저 성연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무진을 환
성연은 너무도 피곤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이처럼 무리한 적은 없었다.몸을 쭉 늘어뜨렸다 카펫을 짚고 일어난 성연이 한쪽편에 놓인 쿠션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약효가 다 되어서인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무진이 번쩍 눈을 떴다.엎드려 있는 그의 등에는 온통 은침이 꽂혀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에 기대어 잠든 성연을 쳐다보았다.눈을 감았을 때 오히려 더 깜찍해 보였다. 조명이 날렵한 콧등 위로 부서지며 도자기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볼을 뒤덮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교하게 빚은 예쁜 인형 같기도 하고.单纯,无害,让人心生宁静的美好和向往。단순하고 무해하며,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이다.눈을 떴을 때, 뼛속 깊은 곳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이 절로 튀어나왔다.무진이 성연을 뚫어져라 본 지 한참이 지났다.오래전부터 훈련을 통해 시선에 대해 예민한 성연이다.무진이 그녀를 주시했을 때, 이미 그의 시선을 알아챘었다.하지만 워낙 피곤한지라, 생각을 비웠다.‘볼 테면 봐라.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닌데, 뭐.’성연의 체력이 거진 회복되었는데도 무진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참지 못한 성연이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가운 시선으로 무진의 몸을 한 번 훑었다.“얼마나 더 볼 거예요?”눈을 뜬 그녀는 곧바로 깊은 동굴과도 같은 무진의 눈과 마주했다.삽시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무진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언제까지 잠든 척하는지 보려고.”성연이 웃는 듯 마는 듯 쳐다보며 대꾸했다.“이 침, 안 뽑아도 되겠네!”“나를 실험실의 쥐처럼 다루고 싶은 건 아니고?” 무진이 일부러 성연을 자극했다.그에 성연이 아예 아랑곳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맞아요. 독살을 당한다 해도, 난 몰라요.”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말장난을 이어갔다. 마치 즐기고 있는 듯하다.우습게도 정작 자신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결국 성연이 말장난을 끝냈다.손을 들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성연이 침대로 다
은색 잠옷을 입은 무진이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그의 컨디션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상태였다.의자에 앉아 게임을 하던 성연이 곁눈질하듯이 슬쩍 한 번 쳐다보았다.약을 사용한 후,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만약 조금이라도 능력이 되지 않았다면, 성연이 하겠다고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기본이다.휴대폰을 내려놓은 성연이 고개를 치켜들어 무진을 바라보았다.“내일 저녁엔 다리에 집중해서 침을 놓을 거예요. 약욕의 재료도 다를 거고요.”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 상태가 잘 느껴졌다. 성연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평소에 주의해야 할 건?”무진이 물었다.미간을 살짝 문지르며 대답하는 성연의 안색은 피로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틈날 때마다 많이 걷는 게 좋아요. 위축된 근육을 단련시키려면,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는 건 안 좋아요.”하품을 한 성연이 침대에 올라가 머리를 대더니 곧바로 잠이 들었다.무진도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온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작고 연약한 동물 같았다.무진이 픽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애는 도무지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듯 아무 생각없이 군다.‘하, 아니 나도 남자인데, 이렇게 마음을 놓아도 되는 거야?’천천히 성연의 옆에 누운 무진은 은은하고 맑은 약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잠들었다.이튿날, 깨어난 무진은 활기가 넘쳤다. 안색 또한 평소의 창백한 빛이 아니라, 건강한 붉은 빛이 더해졌다.이렇듯 눈에 띌 정도로 변화를 보이자, 집사와 손건호는 놀랍도록 반가웠다.‘어린 사모님이 정말 대단하셔. 허풍이 아니었어.’‘몇 십년의 경험을 자랑하는 나이 많은 명의들보다도 의술이 더 뛰어난 것 같아.’진우현이 또 방문했다. 진료하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의약품 상자도 챙겨 가지고 왔다.하지만 사실, 의약품 상자 안은 비어 있는 채였다.무진의 멘탈 부분을 좀 살펴볼 생각에 방문한 터였다.며칠 오지 않았다 보니
온몸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된 진우현이 창백한 안색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성연이 없는 틈을 타서 우연이 무진에게 참소했다.“네 아내도 너무 몰인정하지 않냐? 정말 너무하잖아. 이건 그냥 둘 수 없어, 절대!”손건호가 아예 대놓고 웃었다.“저희 작은 사모님은 절대 원한을 잊으시는 법이 없죠. 그러게 왜 사모님을 의심해서는. 보기 좋습니다!”성연에게 미움 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작은 사모님에게 줄곧 공손한 태도를 유지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낭패를 당한 사람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손건호의 말에 무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비분강개한 우현의 어조에는 말로 드러내지 못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너 정말 변했어. 나한테 의지하던 이전의 너가 더 맘에 든다고!”무진이 느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넌, 너 자만하는 경향이 있어. 어린 여자아이가 너보다 훨씬 유능해.”“너, 너, 마누라한테 빠져서 친구를 내팽기치다니.” 우현이 손을 떨며 과장된 동작으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이 세상에 진짜 사랑은 없어.’웃음을 참는 손건호의 입이 연신 실룩거렸다. 무진의 눈썹 끝이 쓰윽 올라가며, 침착한 모습으로 우현이 펼지는 연기를 지켜보았다.학교에서 성연을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송아연도 해치운 마당에 누가 또 그녀를 건드릴까?반 학우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송아연의 선동에 따랐을 뿐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성연의 학교 생활이 그처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뭐, 지금도 괜찮은 것 같군. 그 아인 아예 친구가 없어도 돼.’‘혼자 고고하고 자유롭게, 얼마나 좋아.’하루를 조용히 보내며 평상시 대로 수업을 한 성연은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사람들을 피해 보건실에 가서 잠을 잤다.출입이 편하도록 서한기가 뒷문을 열어주었고, 또 따로 열쇠까지 맞춰 줬다. 바로…… 잘 수 있도록.성연이 올 때마다 매번 서한기는 세심하게 깨끗한 이불로 갈아준다.보건실로 말하자면 원래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인
성을 붙여 이름을 부르니, 성연이 못 들은 척할 수도 없었다.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이에요?”“송성연, 우리가 왜 왔는지 몰라? 무슨 모르는 척을 해?” 임수정은 성연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자신의 딸 아연이는 유치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송성연은 무슨 자격으로 안락한 교실에서 수업을 한단 말인가?“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성연이 차가운 표정으로 임수정 앞에 섰다.“이 사갈 같은 게, 우리 딸 아연이 너 때문에 어떤 꼴인데? 그 연약하고 겁 많은 것이 며칠 동안이나 경찰서에 있으면서 바짝 말라가고 있는데, 넌? 이 죄값 모두 네가 받아야지!”분노를 참지 못해 성연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임수정의 눈동자는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성연을 잘게 썰어낼 것만 같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성연이 눈썹 끝을 세웠다.‘연약하고 겁이 많다고? 하, 약을 탈 땐 전혀 약하지 않던 송아연이?’“바로 너 때문이야. 우리 아연이는 늘 사리가 분명한 아이였어. 도대체 우리 아연이한테 무슨 철천지원수가 졌다고 걔를 그 지경으로 모함해?”울고 있을 아연의 모습을 떠올리자 임수정의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말아요.” 성연의 표정은 차분했다.임수정이 냉소를 지었다.“너 즉시 경찰서에 가서 네 죄를 인정해. 이 일은 절대 아연이 잘못이 아니야. 아연인 곧 피아노 콘테스트에 참가해야 해. 만약 이 일로 오점이 생긴다면 대회 참가 자격이 박탈당할 거란 말이야!”임수정의 사나운 어조로 봐서는 성연이 갈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기세다.송종철도 옆에서 거들었다.“내가 이 일을 알아봤다. 네가 여동생을 모함한 것이더구나. 지금 즉시 경찰서에 가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해라.”송종철과 임수정에게는 누가 옳고 그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성연은 이미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있어 여태 아낌없이 지원해 온 송아연만이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줄 존재이기에, 송아연은 절대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저 멀리서 송종철이 분노에 차서 내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조롱의 기운이 담긴 냉소를 지으며 몸을 돌린 성연이 강씨 집안의 차가 세워진 골목으로 들어갔다.엠파이어 하우스.무진은 학교에서의 소동에 대해 전해 들었지만, 집에 돌아온 성연에게 먼저 꺼내지 않았다.성연이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릴 셈이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소소한 일 정도는 성연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무진이 나설 필요도 없이.뭐든 자신이 직접 하는 걸 좋아하지, 남에게 의지하는 걸 싫어하는 성연이다.창백한 얼굴의 진우현이 성연이 수업 마칠 때를 맞춰 찾아왔다. 죽상을 하고서 성연에게 약을 부탁했다.“아가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설사 약을 좀 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처음 설사를 할 시작했을 때에는 참을 수 있는 듯했으나 점점 뒤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약국에서 처방을 받은 여러 약들을 먹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설사 증세가 심해질까 봐 다른 것들은 아예 먹지도 못했다.성연이 자신에게 준 게 어떤 건지 누가 알겠는가?성연이 눈을 깜빡깜빡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어, 배탈이 난 거 아니에요? 위장이 안 좋은가 봐요. 관상을 보니 신장이 좀 약한 것 같은데, 평소에 밤샘도 많이 하지요? 생활을 균형 있게 잘 하셔야겠어요.”화가 나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우현이 한쪽에 서 있었다.성연이 약을 주기만 한다면 몇 마디 더 듣는 것쯤 참을 수 있었다.“집사 아저씨, 이 처방대로 약재를 꺼내어 진 선생님께 약을 달여드리세요.”말하는 사이, 성연은 이미 약방문을 써서 집사에게 건넸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저녁 식사 후, 다 달여진 약을 집사가 받쳐 들고 왔다.시커먼 약은 보기만 해도 무진장 쓸 것 같았다.설사로 인한 공포가 더 컸던 우현은 마지못해 눈 딱 감고 약을 마셨다.쓰고 떫은 맛이 혀를 자극하자 우현의 얼굴이 말도 아니게 찡그려졌다. 여러 잔을 물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겨우 입안의 쓴 맛을 가
집사의 말에 안금여는 상당히 놀랐다. 곁에 있던 강운경 역시 무척 의아했다.무진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실은 두 모녀의 오랜 근심이었다.할 수 있는 건 해볼만큼 다 해보았다. 가끔은 좀 나은 듯도 했지만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했다.해외의 저명한 최면 전문가를 모셔도 봤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조카 무진의 수면장애는 최고의 정신과 의사도 치료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좋아질 수 있단 말인가?무엇이 원인이었든, 무진을 잘 자게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단하지 않은가.그들 심중의 제일 큰 걱정이 해결된 것이다.안금여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이 아이,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본인도 역술가를 그다지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만일 진짜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어차피 강씨 집안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어린 여자애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과연 무진의 ‘평강공주’였다.강운경 역시 무척 기뻐하며 감탄했다. “큰오빠와 올케가 떠난 후, 무진이 하루도 안식을 취하지 못 했는데, 성연이가 무진이를 평온하게 해주면 좋겠어요.”모든 게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앞으로 무진이 점점 더 좋아지리라는 믿음이 생겼다.안금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보게, 돌아가거든, 우리 무진이와 새아기를 잘 돌봐 주게. 특히 새아기가 요구하는 게 있으면, 나쁜 것만 아니면 뭐든 다 들어주고. 새아기를 진짜 주인으로 잘 모셔야 하네. 만약 제대로 모시지 않는 고용인이 있다면 단단히 교육을 시키게.” 지난 십여 년간 강씨 집안을 관리해온 집사는 매우 신임을 받는 사람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안금여가 무진의 곁에 두지 않았을 터.다만 집안 규율을 잘 모르는 일부 새로 온 고용인들을 집사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까 걱정되었을 뿐이다.안금여의 지시를 받고 허리를 굽혀 인사한 집사가 물러났다.저녁을 먹은 성연은 오늘도 소파에서 게임 중이었다.도대체 어디에서 수입
공항 입국 게이트.암담한 눈빛의 성연은 걸음도 부자연스러워서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이 상황을 본 예민주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인 모양이네.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겠어.’이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은침으로 성연의 허리에 있는 혈을 찔렀다.순간 아픈 표정을 드러냈지만, 곧 눈빛이 되살아난 성연이 고개를 돌려 예민주를 바라보았다.“막내 사매? 여기가 어디야?”성연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자 예민주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보아하니, 내가 연구해서 만든 독이 그래도 썩 효과가 좋은 것 같네.’사람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 뒤 인식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이 독은, 여민주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그 실험 대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F국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언니, 이제 귀국했으니까 곧 무진 오빠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무진 오빠가 보고싶죠?” 예민주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약은 성연이 무진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민주의 계획은 전혀 시행할 수가 없다.‘그래, 한 걸음씩 차근차근 해야 해.’ 예민주의 인내심은 대단했다.“응, 무진 씨가 내 남편이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어. 무진씨가 잘해 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운성시에서 살면 돼.” “더 이상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스승님이 너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하셨어!”지금 성연은 더 이상 예전의 성연이 아니라 이미 완전히 변했다. 성연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기억들과 지시가 박혀 있었다.그래서 예민주에 대한 말투는 더없이 온화했다.“응, 언니가 정말 잘해 주시는 걸요! 언니가 외국에 와서 나를 찾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거기에 갇혀 있었을 거예요. 언니가 제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예요!”예민주는 마음속으로는 그야말로 통쾌하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주 선량한 척 가장하면서 묵묵히 성연의 기억을 강화하고 있었다.예민주가 설계한 기억 속에서 성연은 어제 오후 3시에
하룻밤 사이에 연운그룹은 완전히 무너졌다. 연계진 회장은 탈세 문제로 구속되었고, 많은 부문의 책임자들도 잇달아 사직했다. 인터넷의 여론이 폭발하면서, 주가는 이튿날에도 어김없이 또 다시 20%나 폭락하며 하한가를 기록했다.회장 대행인 조수경도 이미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도저히 국면을 만회할 수가 없었다. 진교철과도 연락을 시도했지만 결국 진교철은 여전히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대리인을 시켜서 연운그룹에 한 투자마저 철회했다.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조수경도 재빨리 연운그룹과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수경은 오후에 바로 회장 대행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그룹 전체가 이미 완전히 끝장이 났다. 게다가 여러 여직원들의 고소에 직면해 있어서, 탈세 문제뿐만 아니라 성범죄 문제와도 엮여 있었다.이 보도를 접하면 당연히 즐거운 마음이 들어야 했지만, 지금 무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커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그 7 명의 임원들 사건이 무진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그래함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이른 아침에 전화를 건 그래함은, 성연의 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줄곧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래서 무슨 사고가 생길까 봐, 어젯밤에 성연과 짜고 거짓말을 했다고 무진에게 빨리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무진은 비로소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성연의 핸드폰으로 연달아 전화를 걸었지만 줄곧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렸다.손건호와 서한기에게 반드시 단서를 찾으라고 지시한 뒤 지금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곧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손건호의 전화였다.얼른 전화를 받은 무진이 다급하게 물었다.“소식이 있어?”[보스, 사모님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어제 오후 3시 비행기로 F국 프로방스로 갔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추적하기 위해서 제가 이미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그래, 어서 가.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보고하고. 하지만 반드시 은밀히 해야 해. 실혼전에서 틀림없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무진은 당황
완전히 놀란성연은 멍한 상태가 되었다.실혼전의 캐서린을 마주해도 지금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너 정말 예중천 스승님의 딸이 맞아? 왜, 왜 이렇게 하려는 거야?” 질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예민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수잔이 주는 커피를 받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선배,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언니에게 그렇게 많이 가르쳐 줬어요. 언니도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 언니가 강무진 씨를 양보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은혜에 보답하는 게 되겠지요!”“웃기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돼!”이를 악문 성연의 눈빛에는 살기도 확고하게 배어 있었다.“언니는 안 죽어도 돼요! 그리고 언니가 죽는다면 소용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언니가 순순히 양보하는 거예요! 나하고 강무진 씨가 행복해야 지내는 모습을 봐야지요.” “그리고 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언니가 키우게 할 수도 있어요. 내가 갑자기 아이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내게 줘도 돼요.”예민주의 말투는 마치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연은 예민주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놀라서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수잔은 마치 로봇처럼 성연에게 홍차를 가져다주었다.“송성연 씨, 차 드세요!”“예민주, 네가 말한 계획들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그 7명의 임원들이 없어도 내 남편이 충분히 조정할 수 있어.” “그리고 강씨 가문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겠다는 그런 말을 하니 더 터무니가 없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 넌 스승님의 딸도 아니면서 왜 딸이라고 사칭한 거야?”성연의 거듭되는 질문에 갑자기 화가 난 예민주는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변했다.“나를 화나게 해서 더 많은 사실을 드러내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좋아요, 그럼 내가 아예 말해 줄게요.” “예전에 강무진 씨 부모님 죽음은 우리 예씨 가문과 관계가 있어요. 강씨 가문이 우리 예씨 가문에게 빚진 거지요! 알겠어요?”“내가 강씨 가문의 모든
“도대체 날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거야? 조건이 있으면 그냥 말해.” 두려움을 떨치고 정신을 차린 성연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았다.분노한 성연이 소리치자 예민주가 냉소를 터뜨렸다.“마주 보고 있어야 얘기하기도 편해요. 앉아요!”예민주는 여전히 얼버무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모든 건 자신의 수중에 있다는 듯이.성연은 거실로 돌아와서 예민주의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잔이 성연에게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송성연 씨, 홍차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커피를 원하십니까?”성연은 정말 깜짝 놀랐다. 겉으로는 전혀 무해해 보이는 이 여자가, 불과 몇 초 전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기에!‘어떻게 감정을 이렇게 신기하게 바꿀 수 있지?’‘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아.’예민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성연 씨에게는 홍차를 한 잔 주세요. 임산부라서 커피를 마시는 건 적합하지 않아요!”‘헐!’성연은 정말 멍해졌다.“날 조사한 거야?”“언니가 내 선배인데 당연히 언니의 일에 더 신경을 써야지요.” 예민주의 눈빛은 정말 사람을 몹시 불편하게 했다.‘내가 임신한 사실은 지금까지 무진 씨하고 서한기만 알고 있어. 할머니와 고모에게도 아직까지 알리지 않았는데, 아득히 멀리 있는 예민주가 알고 있다니!’자신의 비밀을 예민주가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자, 성연은 완전히 충격에 휩싸였다.“됐어요! 언니 표정이 이렇게 다채로운 걸 보니 내 목적도 달성한 모양이군요. 이제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겠어요!”갑자기 미소를 거둔 예민주의 단호한 눈빛에는 냉혹함까지 엿보였다.“그래! 나도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불원천리 날 찾아왔는데, 나나 무진 씨를 내버려둘 리는 없겠지?”원래 막내 사매라는 호칭에 성연은 어느 정도 친근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방을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또는 적으로 생각해야 했다.“그 7 명의 임원을 무사
성연은 문득 예민주의 나이에 의문이 들었다.‘외모는 확실히 나보다 두세 살 어리게 보여. 갓 대학교에 입학한 청순한 아가씨처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모습이야.’그러나 겨우 10여 분 동안 접촉하면서 성연은 이따금씩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막내 사매는 앳된 외모 속에 무서운 영혼을 감추고 있어.’다시 자리에 앉아서 예민주를 쳐다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WS그룹의 미래 업무를 담당해야 할 7명의 고위 임원들이 예민주의 부하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것 만이 7명의 임원들이 예민주의 지시에 따라서 잇달아 여기 프로방스로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너무 놀랄 필요 없어요. 언니가 세상 일을 전부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먼저 아침부터 먹어요! 그리고 나서 언니한테 어떻게 해야 WS그룹을 구하고 남편을 도울 수 있는지 알려 줄게요!”수잔이 아침 식사를 하나씩 내왔다. 빵과 우유, 그리고 약간의 치즈로 아주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었다.그러나 지금 성연은 전혀 입맛도 없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요구를 빨리 말하는 것이 좋겠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그 7명의 임원들을 WS그룹으로 돌려보낼 거야?”예민주는 들은 체 만 체하며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이 X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거야?’성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이제 7 명의 임원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어. 그 사람들이 정말 예민주의 부하라면, 그럼 더 이상 WS그룹으로 돌아가게 할 필요도 없어.’‘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야.’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성연은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은침을 날려서 예민주를 제압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그러나 예민주가 나를 그렇게 쉽사리 풀어줄 리가 없지. 분명 다른 숨겨진 위험이 있을 거야.’잠시 생각하면서 성연은 사방을 쓸어보았다.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하인들과 수잔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경호원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계산하기 어렵겠죠. 어떻게 똑똑히 계산할 수 있겠어요.”예민주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닫았지만 성연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내친 김에 아예 예민주에게 반문했다.“그럼 사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세어 보기라도 했어?”예민주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시원스럽게 대답했다.“세어 봤지요.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동안 제가 배운 게 변변치 않아서 사실 환자를 도와준 적이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말을 마친 예민주의 얼굴에는 잠시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성연은 멍해진 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예민주가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떨어진다 해도 의술을 배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조금 전 손가락 사이에 은침을 끼우는 수법만 해도 정말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거야.’‘그래서 예민주의 말 뜻은 도대체 뭐야?’갑자기 성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자기도 모르게 방금 전에 수잔이 벌벌 떨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뼛속에서 발산되는 공포에 떨던 모습은 예민주가 수잔을 어느 정도로 참혹하게 다뤘는지 말해 주기에 충분했다.‘게다가 수잔은 예민주를 주인이라고 불렀어. 애완동물한테나 주인이 있는 거지.’‘그럼 예민주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건, 줄곧 다른 사람을 징벌하는데 의술을 사용했기 때문인 거야?’‘심지어, 사람들을 해치거나?’성연은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예민주를 보면서 마음속으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언니가 이제야 눈치채신 모양이네요? 호호,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배운 건 원래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의술이 아니었어요.” 예민주는 성연의 추측을 시원스럽게 확인해 주었다.게다가 더할 나위 없이 지극히 평범한 표정이었다.그 말을 들은 성연은 경악하면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스승님은 국내외에서 최고의 신의로 여겨지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어.’‘스승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고,
예민주가 차에서 내리자 성연은 바로 멍해졌다.예민주는 세련되고 예쁜 퍼프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오똑 솟은 코, 역동적인 두 눈은 서양 인형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선명한 붉은 입술에 일부러 양갈래로 땋아서 예쁜 느낌을 주는 머리카락.‘이런 모습은 흡사 동화 속의 공주와도 같은 모습이야.’‘나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지만 앳된 느낌은 없어. 옅은 파란색 눈동자는 오히려 차분한 느낌이 가득해.’성연은 깜짝 놀랐다. 여러 면에서 예민주가 스승의 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스승님과 닮은 부분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그 푸른 눈동자에 성연은 좀 놀랐다.‘예민주가 뜻밖에 혼혈이야?’“언니, 드디어 언니를 만났네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예민주는 곧장 성연의 앞으로 걸어갔다. ‘미소를 지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는 스승님과 정말 닮았어.’“이제 당신이 내 사매라는 걸 인정할 수 있겠네요. 사매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스승님의 딸이잖아요. 예민주 씨!”성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예의를 갖춰 화답했다.그리고 위아래로 예민주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그러자 마음속에 갑자기 뭔지 모를 느낌이 더 생겼다.이 막내 사매는 겉으로는 귀엽고 단순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연은 왠지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다.마치 더없이 존귀한 존재인 예민주가 구름 위에 서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래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결국 제게도 의술을 좀 물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언니의 막내 사매라고 할 수 있어요. 저도 이 호칭을 좋아하니까, 더 이상 저한테 말을 높이지 마시고 그냥 사매라고 저를 부르세요!”웃으면서 손을 뻗은 예민주가 성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그러나 순간 바로 뒤로 물러난 성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예민주를 주시하며 냉담하게 말했다.“뭘 하려는 거야?”“역시 선배답네요. 제 은침은 손가락 사이에 숨겨져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어요. 그래도 언니는
그날 이후 예중천은 정식으로 성연을 제자로 받았다.정식으로 스승님을 모시는 예를 갖춰서 스승님에게 차를 대접하고 절을 했다. 예중천도 마찬가지로 성연에게 봉투를 하나 줬다.봉투 안에는 80만 원이나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성연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추가로 구입했고 자신의 옷과 신발도 샀다. 그리고 예중천에게 자주 고기를 대접하기도 했다.예중천은 성연의 집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연은 방에서 지내고 예중천은 물건이 쌓인 창고에서 아무렇게나 지냈다.수많은 시간 동안 성연은 모든 약초의 이름과 조제 배합 방법을 외우고, 약을 달이고 침을 놓는 방법을 끊임없이 학습했다.그 시간은 아주 단순한 즐거움이었다. 성연은 이런 걸 배워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몰랐지만, 스승은 줄곧 성연에게 이 기술들이 실전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일단 대수롭지 않은 병이 생기면 점점 성연에게 진료를 의뢰하기 시작했다. 계속 연습하면서 성연의 의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심지어 지방의 언론 매체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그때는 이른바 소녀 신의를 방문해서 취재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성연은 매일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결국 이장을 찾아간 성연은 앞으로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게 한다면, 마을 사람들의 병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마을 사람들도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이런 공짜 의사가 정말로 가 버리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외부인이 함부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그날이 될 때까지.스승님은 성연에게 이미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스승님 자신은 평생 절대 놓칠 수 없는 원수와 줄곧 맞서야 한다고!그때 성연은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다만 스승님이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 목이 쉬도록 울었다.사부님은 마지막으로 의학 서적들을 모두 성연에게 건네주면서 당부했다.“잘 배워두도록 해라. 이 책들은 네가 보관하거라. 앞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내게
밤새 성연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어릴 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예전에 성연이 스승을 만났던 그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억수처럼 퍼부어서 마을 사람들은 외출도 하지 못했다. 빗속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지팡이가 없었더라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어린 성연은 모습을 보고 나쁜 사람이 온 줄 알고는 깜짝 놀랐다.그러나 그 사람이 마침내 진창길에 쓰러지자, 용기를 낸 성연은 우비를 입고 뛰어갔다.처음에는 정말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스승님의 얼굴 반쪽에는 이미 진흙이 가득 묻은 채 진창 속에 잠겨 있었다. 얼굴은 온통 진흙투성이인 데다가 남루한 옷차림이어서 거지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몇 번이나 소리쳐 깨우면서 설마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하자 두려워진 성연은 재빨리 마을 이장님 댁으로 달려갔다.비록 아직 세상 물정은 몰랐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장님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성연은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결국 이장님을 불러낼 수 있었다.‘이장님은 아마도 스승의 생김새가 희고 멀끔해 보이자, 시골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있는 도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보수를 좀 챙기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이장님이 자기 친척을 불러서 결국 스승님을 구할 수 있었지.’‘뜨거운 죽 한 그릇과 작은 장작불이 결국 스승님을 다시 살려낸 거야.’얼굴의 진흙도 떼지 못한 스승은 성연과 눈빛이 부딪치자 미소를 지었다.“네가 날 구했지, 그렇지?” 예중천이 물었다.어색해진 성연은 이장만 보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장이 바로 사실을 얘기했다.“이 아이가 당신을 발견한 뒤에 나를 불렀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당신은 도시 사람 같은데 어떻게 이런 시골 마을까지 오게 된 겁니까?”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중천은 손을 뻗어 너덜너덜한 옷 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 낡아서 헤진 지폐 몇 장을 꺼냈다.만 원짜리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