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서 나온 사람들이 돌아간 후, 학교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요 며칠 학교에서 발생한 골치 아픈 일들로 머리가 다 하얗게 셀 정도로 걱정인 교장이 손을 휘이 내저으며 당부했다.“학습 진도에 차질 없도록 수업 계속 진행하세요. 경찰이 공정하게 잘 처리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바로 앞에 서 있는 이윤하를 성연이 쓰윽, 흘겨보며 말했다.“이윤하 선생님, 아직 저에게 사과 안 하신 게 하나 있지 않나요?”이윤하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성연이 이 일을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다.아무 말 않고 서 있는 이윤하를 보며 성연이 가차없이 다그쳤다.“선생님, 조금 전에 많은 학우들 앞에서 나에게 약속하셨잖아요. 설마 본인이 한 말도 책임 안 지시는 건 아니지요?”사실 조금 전, 이윤하가 그처럼 지나치게만 안 했어도, 성연은 그녀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얼굴이 새파래진 교장이 이윤하를 노려보며 질책했다.“이 선생은 어째서 늘 송성연 학우와 문제를 일으킵니까?”‘며칠 전에 사무실에서 한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단 말이야?’죽는 한이 있어도 이윤하가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별일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성연의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이윤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성연을 더 원망할 뿐이다.성연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반응했다.“별일 없다구요? 반에 그렇게 많은 학우들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어째서 저만 지목하셨어요? 딱 잘라서 제가 한 것이라고 단정하셨잖아요?”눈에 굴욕감과 불쾌감이 떠오른 이윤하가 손가락을 꽉 그러모아 쥐었다.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송성연에게 사과하라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진배없었다.‘진짜 사과를 한다면 앞으로 누가 내 말을 듣겠어?’성연은 이윤하의 생각을 간파했다.‘여태 뭐 하다 이제서야 체면에 신경 쓰고 그래?’“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잖아요, 제가 강요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되시면서 ‘약속 지키는 법’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두 눈이 허옇게 뒤집어질 정도로 화가 난 임수정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송종철의 안색은 더 엉망으로 구겨졌다. 아연이 다른 사람을 건드린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임씨 집안을 건드리다니.임씨 집안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대였다.송종철은 곧바로 아연을 만나 어떤 상황인지 물어볼 수 있도록 경찰에게 요구했다.현재 유치장 구류 중인 아연은 면회가 허용되는 상태였기에, 경찰에서는 그들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해줬다.헝클어진 머리에 울어서 빨갛게 부어 오른 눈,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아연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세심하게 단장했던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다른 사람에게는 인색하고 이기적인 임수정이지만 자신의 딸 송아연만큼은 누구보다 아꼈다.어려서부터 손에 올려 놓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딸이건만, 어떻게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지?임수정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아연아, 아이고, 불쌍한 내 딸.”송아연도 울었다.“아빠, 엄마, 살려주세요. 도와줘요. 나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유치장은 두 모녀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임씨 집안과의 문제로 마음이 복잡하던 송종철은 두 모녀의 울음소리에 더욱 골치가 아팠다.성난 목소리로 다그쳤다.“울면, 지금 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은 문제를 해결해야 해. 아연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을 해 봐!”그의 처 임수정과 딸 아연은 그저 모든 걸 누리기만 하고 살아왔다.그에 반해 송종철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큰일이 터졌을 때. 역시 집에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두 모녀는 즉시 울음을 멈추었다. 임수정이 아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아연아, 걱정 말고 찬찬히 말해 봐. 아빠, 엄마가 죽을 힘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송성연 때문이에요. 걔가 고의로 약을 내 서랍에 집어넣었어요. 당시 송성연만 교실에 남아 있었단 말이에요. 성연이가 임정용에게 준 약이 틀림없어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송성연 걔
송종철이 얼마나 크게 소리질렀는지, ‘짐승’이라는 단어가 거실 전체에 크게 울리며 강무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성연이 이런 소리로 불린다는 게 무척이나 맘에 안 드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성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이미 습관이 되고 마비되어서 그런 지도.게다가, 소위 여동생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있었는 지도 기억에 없다.성연이 차가운 음성으로 받았다.“짐승이 송아연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짐승 맞네요.”화가 난 송종철의 가슴이 오르내렸고,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송성연, 나와 입씨름할 생각 마라. 아연일 모함해서 잡혀가게 해 놓고는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송아연이 또 경찰서에서 앞뒤 바꿔서 말했을 것이 뻔했다.그러나 성연 자신은 아무나 마음대로 뭉갠다고 뭉개지는 그런 홍시 같은 존재가 아니다.“제가 무슨 낯짝이 없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송아연이에요. 걔가 저지른 비양심적인 일은 전교생이 다 알아요. 잘 모르시면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싹 다 설명해 드릴 수도 있고요!”“아연이 약을 탄 음료수를 임정용에게 줬어요. 그래서 임정용이 교실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벌였고요. 약은 모두 경찰이 직접 아연이 가방에서 찾아낸 거예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요. 왜 또 나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던가요?”성연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에 이어서 말했다.“송아연이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다고 해도 그건 모두 자신이 자초한 거라고요!”아연이 경찰서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아연인 어릴 때부터 말 잘 듣는 그들의 자랑거리였다.임수정은 당연히 자신의 딸을 더 믿었다. 아연이 결코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줄곧 송종철 옆에서 성연의 말을 듣고 있던 임수정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고서는 욕설을 퍼부었다.“거짓말 마! 아연이 어떤 아이인지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알아. 너, 나이도 어린 게 어쩜 이렇게 못돼 쳐먹
통화를 끝낸 성연은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송종철과 임수정이 미친 개처럼 짖어대는 말에 또다시 상처받지 않게.컵을 테이블 위에 놓은 성연이 소파에 웅크린 채 넋을 빼고 있었다.성연을 조사 했었던 무진은 각자 재혼을 한 그녀 부모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정도까지 최악일 줄은 몰랐다.“너네 가족들, 설마 계속 이런 식으로 너와 대화한 거야?”무진이 성연에게 물었다.성연이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집안의 추태는 밖으로 드러내는 법이 아니다. 이처럼 창피한 일을 그녀 역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미 강무진이 다 들어 버렸다. 아마 앞으로 이런 장면을 볼 기회는 더 많을 것이다. 머리 속에서 계산이 끝난 성연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뇨. 저들은 아예 나와는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아요.”먼 곳을 바라보던 동공에 점차 초점이 사라지며, 성연은 오래전의 추억에 빠졌다.“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유일하게 나에게 관심 가져 주신 분이었어요. 제 부모라는 사람들은 그저 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생각 했지만요…….”송종철이 자신을 시골에서 데려온 목적을 생각하자 참지 못한 성연이 물었다.“송종철이 나를 강씨 집안에 보낼 때, 엄청 많은 예물을 요구했겠죠?”강무진을 강씨 집안의 미치광이로 알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다.워낙 명성이 자자한 강무진이었기에 이런 방법을 쓴 것이고.하지만 성연이 볼 때, 강무진은 아주 정상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두 사람은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고.강씨 집안의 입장에서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아니, 꽤 좋았다.무진이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음, 확실히.”그까짓 돈, 강씨 집안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아직 안 줬죠?” 성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은.”그녀가 묻는 질문마다 무진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반색을 한 성연이 흥분해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기왕 이렇게 된 거, 그 돈 나한테 줘요. 송종철의 행위는 딸을 판 거
성연이 그제서야 무진이 일부러 자신의 애를 태우려 했음을 눈치챘다.갑자기 어이가 없어진 성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이 사람 진짜 손해라고는 조금도 안 볼 사람이네.’“문제없어요. 돈만 주신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죠.” 성연이 마지못한 듯 승낙했다.‘신분만 드러내지 않으면 돼.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거야.’성연이 집사를 찾았다.“집사 아저씨, 오늘 아침에 나가면서 사와야 할 약재 목록을 드렸는데, 모두 사셨어요?”“네. 작은 사모님.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가 즉시 창고로 가서 약재를 꺼내 왔다.주로 강무진의 약욕에 사용될 이 약재들은 성연이 직접 그 분량과 배합을 조절해야 했다.약마다 그 효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성연이 고개를 숙인 채 약재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최상품의 약재들은 가격도 엄청나게 비싼 만큼 그 사용 효과 또한 분명해서, 들인 노력의 배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었다.성연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좋아요.” 상자 안의 약재를 받아 든 성연이 필요한 분량을 손으로 가늠해서 덜어내고, 곧바로 약을 배합해냈다.그리고 약재들마다 얼마만큼의 중량이 필요한지 일일이 집사에게 말했다.절반쯤 말하다 집사가 다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 성연이 아예 약재의 중량을 펜으로 써내려 갔다.다 쓴 후, 쪽지를 집사에게 건네며 당부했다.“집사 아저씨, 나중에 꺼내기 편하도록 약재들을 잘 분류해서 보관하라고 이르세요. 그리고 정확한 중량을 꼭 기억하세요. 절대 틀리면 안돼요. 안 그러면 오히려 아주 심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요.”성연의 의술은 아주 뛰어났다. 그만큼 약효도 빠르다.하지만 성연의 약제법은 꽤 과감한 편이라서, 자신이 직접 처방할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지, 다른 사람에게 처방전을 함부로 줄 수는 없었다.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아주 컸다.“네, 작은 사모님.”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는 도련님의 병세를 위해 열심인 성연을 보며
멍하니 쳐다보던 성연은 금세 알아차렸다.그날 강씨 집안의 모임에서 드러난 모습이 다가 아닌 것이다. 겉으로야 겨우 입으로만 찧고 빻을 뿐이지만, 등뒤에서는 어떤 떳떳치 못한 일들을 할지 알 수 없는 터.이 대단한 가족들의 내부 암투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강씨 집안은 사람을 유혹하는 커다란 케이크 같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 더 큰 케익을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가운데, 무진이 지난 번처럼 다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성연은 분별 있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자, 옷 벗어요.”그녀가 돌연 말을 던졌다.서로 눈을 마주친 집사와 손건호는 상대방의 눈에서 똑같은 놀라움을 보았다.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얼른 방에서 물러나왔다.무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거의 도망가는 듯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성연이 움찔했다.성연의 볼 양쪽에 불시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홍조는 곧 볼에서 눈가의 미간으로 번져갔다.성연이 다소 어색한 듯이 바닥만 노려보았다.수줍어하는 성연을 무진이 시종 여유로운 모습으로 관찰했다.하얀 성연의 피부는 수줍은 빛을 띄자 온통 연분홍 가루를 덮어쓴 듯했다. 손톱마저 연분홍 빛을 띈 모습이 말도 안되게 귀여웠다.작열하듯 뜨거운 시선에 정신을 차린 성연이 강무진을 보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침을 놓으려면 옷을 벗어야 해요. 안 그러면 침을 놓기 힘들어요.”무의식 중에 말하고 나서야 성연은 깨달았다.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말이다.성연의 의중을 파악한 무진이 곧 하얀 실크 셔츠의 단추를 손으로 하나하나 풀어 내리며, 탄탄한 상체를 드러내었다.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도 무진의 몸은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탄탄한 몸의 근육들은 보기만 해도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였다.조명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광택은 손을 내밀어 만져보고 싶게 했다.물론 이런 생각은 그저 성연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무진을 환
성연은 너무도 피곤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이처럼 무리한 적은 없었다.몸을 쭉 늘어뜨렸다 카펫을 짚고 일어난 성연이 한쪽편에 놓인 쿠션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약효가 다 되어서인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무진이 번쩍 눈을 떴다.엎드려 있는 그의 등에는 온통 은침이 꽂혀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에 기대어 잠든 성연을 쳐다보았다.눈을 감았을 때 오히려 더 깜찍해 보였다. 조명이 날렵한 콧등 위로 부서지며 도자기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볼을 뒤덮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교하게 빚은 예쁜 인형 같기도 하고.单纯,无害,让人心生宁静的美好和向往。단순하고 무해하며,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이다.눈을 떴을 때, 뼛속 깊은 곳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이 절로 튀어나왔다.무진이 성연을 뚫어져라 본 지 한참이 지났다.오래전부터 훈련을 통해 시선에 대해 예민한 성연이다.무진이 그녀를 주시했을 때, 이미 그의 시선을 알아챘었다.하지만 워낙 피곤한지라, 생각을 비웠다.‘볼 테면 봐라.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닌데, 뭐.’성연의 체력이 거진 회복되었는데도 무진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참지 못한 성연이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가운 시선으로 무진의 몸을 한 번 훑었다.“얼마나 더 볼 거예요?”눈을 뜬 그녀는 곧바로 깊은 동굴과도 같은 무진의 눈과 마주했다.삽시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무진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언제까지 잠든 척하는지 보려고.”성연이 웃는 듯 마는 듯 쳐다보며 대꾸했다.“이 침, 안 뽑아도 되겠네!”“나를 실험실의 쥐처럼 다루고 싶은 건 아니고?” 무진이 일부러 성연을 자극했다.그에 성연이 아예 아랑곳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맞아요. 독살을 당한다 해도, 난 몰라요.”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말장난을 이어갔다. 마치 즐기고 있는 듯하다.우습게도 정작 자신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결국 성연이 말장난을 끝냈다.손을 들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성연이 침대로 다
은색 잠옷을 입은 무진이 머리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그의 컨디션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상태였다.의자에 앉아 게임을 하던 성연이 곁눈질하듯이 슬쩍 한 번 쳐다보았다.약을 사용한 후,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만약 조금이라도 능력이 되지 않았다면, 성연이 하겠다고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기본이다.휴대폰을 내려놓은 성연이 고개를 치켜들어 무진을 바라보았다.“내일 저녁엔 다리에 집중해서 침을 놓을 거예요. 약욕의 재료도 다를 거고요.”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 상태가 잘 느껴졌다. 성연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평소에 주의해야 할 건?”무진이 물었다.미간을 살짝 문지르며 대답하는 성연의 안색은 피로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틈날 때마다 많이 걷는 게 좋아요. 위축된 근육을 단련시키려면,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는 건 안 좋아요.”하품을 한 성연이 침대에 올라가 머리를 대더니 곧바로 잠이 들었다.무진도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온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작고 연약한 동물 같았다.무진이 픽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애는 도무지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듯 아무 생각없이 군다.‘하, 아니 나도 남자인데, 이렇게 마음을 놓아도 되는 거야?’천천히 성연의 옆에 누운 무진은 은은하고 맑은 약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잠들었다.이튿날, 깨어난 무진은 활기가 넘쳤다. 안색 또한 평소의 창백한 빛이 아니라, 건강한 붉은 빛이 더해졌다.이렇듯 눈에 띌 정도로 변화를 보이자, 집사와 손건호는 놀랍도록 반가웠다.‘어린 사모님이 정말 대단하셔. 허풍이 아니었어.’‘몇 십년의 경험을 자랑하는 나이 많은 명의들보다도 의술이 더 뛰어난 것 같아.’진우현이 또 방문했다. 진료하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의약품 상자도 챙겨 가지고 왔다.하지만 사실, 의약품 상자 안은 비어 있는 채였다.무진의 멘탈 부분을 좀 살펴볼 생각에 방문한 터였다.며칠 오지 않았다 보니
예민주는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원래 길을 잃은 두 아이가 펑펑 울게 만든 다음에, 무진에게 아이들이 그다지 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예상 외로 아이들은 영리한 데다가 일찌감치 철도 들었다. 졸지도 떠들지도 않은 데다가 얌전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무진은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점심 휴식 시간이 제한적이었다.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여기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예민주도 아직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영리한 핑계를 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들 부자 세 사람만 지낼 기회를 절대 줄 수가 없었기에.결국 세 사람이 대표 집무실에 함께 있게 되었다.“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렇게 둘러댈 일이 아니야.”“너 계속 큰소리로 말하지 마!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몰라?”이제 세 사람은 이미 오후 내내 함께 있게 되었다. 특히 지금 무진은 회의를 하러 갔기에, 대표실에는 그들 세 사람밖에 없었다. 예민주는 이미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른한 자태로 소파에 기댄 예민주의 얼굴에는 온통 경멸하는 표정만 가득했다.집에서도 이렇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사진은 정말 억울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예민주에게 말려들곤 했다.사진이 낮은 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런데 아줌마, 우리는 그냥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예민주는 이제 숨기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바로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해! 아무도 너희들 응석을 받아주지 않아!”예민주의 말투는 아주 야박해서 두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역시나 예민주의 말이 막 떨어지자, 사진은 이미 엉엉 울기 시작했다.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초롱초롱한 사진의 두 눈은 지금 완전히 눈물에 젖은 가련한 모습이었다.사무는 평소 집에서는 여동생을 싫어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한 손으로 여동생을 가볍게 안고 달래면서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좀 있다가 아
“예민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성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예민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바탕 구역질이 났다.클래식한 파텍필립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서, 다음 순간 성연은 이미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해!” 문 앞에 도착한 성연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한기를 보면서 소리쳤다.10여 분 후, WS그룹 1층.두 손으로 운전대를 꼭 잡은 채, 성연은 아주 멋진 드리프트 솜씨로 차를 건물 입구에 세웠다.주차 도우미 직원과는 불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만 남았기에, 직원은 이미 쓰러질 지경이었다.“무즌 주차를 이렇게 해요?” 이렇게 거친 주차 방식을 보자, 직원은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무의식적으로 차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운전석의 차문이 열리고 성연이 차에서 내렸다.자신에게 다가온 직원의 눈길을 마주하고서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한바탕 퍼부으려던 직원은 성연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말문이 막혔다.“차는 주차장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에 그래도 놔 둬요!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차가 다른 곳에 있다면, 당신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겁니다!”“하지만 아가씨, 이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성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나를 믿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말이 끝나자, 성연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갔다. 마치 뒤에 천군만마가 있는 것처럼 당당하고 기세 등등한 걸음걸이였다.성연의 곁에는 아무도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1층의 안내 데스크.“대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데스크의 여직원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방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한눈에 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억누른 채 최선을 다해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성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가볍게 웃었다.“대표님은 어디 계세요?”“죄송합니다만, 대표
‘그 여자는 분명히 그 다른 쪽이라고 했어. 즉, 그 여자가 알려준 건 잘못된 방향이었어.’‘만약 그 여자가 방향을 몰랐다면, 위치를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자신있게 위치를 말했어.’‘그건 자신이 있다는 말이야!’이렇게 생각하자, 예민주에 대한 사무의 인상은 더욱 좋지 않았다.다음 순간, 턱을 살짝 든 사무가 두 여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제 여동생이 아직 저쪽에 있어요. 잠깐만요, 제가 가서 여동생을 데리고 올게요.”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자 좀 놀랐지만, 소년이 돌아서는 걸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대답했다.“아, 여동생! 그래, 그래.”화장실에 간 후, 사무와 사진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가 혹시 함정이라도 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있다는 걸 떠올리자,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첫 교훈도 얻게 되었다. 이 놀이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한편 다른 한쪽. 시재 백화점에 갔다가 별장으로 돌아온 성연은 양 손에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온갖 장난감이 가득했다.이것들은 모두 성연이 업무를 마친 뒤에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 고른 장난감이다. ‘요 며칠 동안 정말 너무 바빴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늦은 밤이거나, 좀 일찍 집에 돌아와도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성연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빚을 진 듯한 느낌이었다.집을 열자 거실은 조용했다. 위층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우리 사진이, 사무? 엄마가 돌아왔어!”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성연이 말했지만, 아이들의 열정적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사진아? 사무야? 너희들 집에 있니?”“사무야?”아래층에서 계속 몇 번이나 소리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큰 집에 성연 자신의 목소리만 울릴 뿐.“보스, 아이들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이때 서한기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집에 없다니?” 성연이 눈썹을 바짝 세웠다. 순간 마음속에
“그 여자는 이전에 엄마하고 알고 지냈던 것 같아. 다만 아직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그럼 이따가 우리 어떡하지?” 사진이 약간 지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오전 내내 이곳을 왔다갔다했으니 아이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그리고 방금 위층으로 올라갈 때, 아이들은 여전히 아주 자신있게 서한기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후회막심’이다.‘지금 아직 한기 아저씨가 있다면. 바로 집에 가서 편하게 누워서 쉴 텐데.’“일단은 우리 계획대로 그 여자한테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온 건 그 여자하고 상관이 없어.”원래 신중한 사무지만, 지금 사무의 말은 오빠라는 사무의 입장과 아주 딱 맞게 진지했다.두 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건 핑계였지만, 막상 바깥에 나오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한참을 가도 식당 창문이나 작은 방은 곳곳에 있는데, 예민주가 말한 화장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억울한 듯이 분홍색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사진은 움직이기도 귀찮았다.여동생의 이런 모습을 보자, 사무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반짝이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딴 데 가지 말고. 알았지?”말을 마친 사무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갔다.“오늘 가지는 좀 맛이 없어.”“그래도 괜찮은데. 먹기 싫으면 나한테 줘.”사무는 식사 중이던 두 아가씨의 앞으로 갔다.“누나, 실례합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 있어요?”목소리는 여리지만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밥을 먹고 있던 두 아가씨는 그 말을 듣자 먹던 동작을 멈췄다. 사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온 거야?’ ‘뚜렷한 이목구비에 심플한 검은색 스웨터만 입었는데도 잘 어울리는 걸.’‘얼굴의 통통한 젖살이 큐티 작살인데!’‘그야말로 너무나 귀여운 아이야!’사무는
두 아이를 보면서 예민주는 더욱 초조했다.마음속에 잘 기억해 놓은 뒤, 예민주의 노기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을 회복했다.“사진아, 너희들은 이전에 외국에서 잘 살았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마치 큰 언니가 아이들을 배려하는 듯 예민주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지금 두 아이는 이미 이 여자의 목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엄마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돌아왔어요.”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해맑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진의 대답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아까까지만 해도 술술 잘 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빈틈이 없어진 거야?’예민주는 기분이 좀 꿀꿀했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니? 너희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아빠를 찾는 것 같은데, 누가 너희들에게 뭔가 말한 거 아니야?”예민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무진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진에게 등을 진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진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예민주를 쳐다보았다.“아줌마, 우리하고 함께 여기서 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거만 물어봐요?”“맞다. 아줌마, 우리 엄마 알지요? 우리 엄마한테 지금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오늘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엄마가 꼭 혼내 주게요!”“맞아요, 맞아요! 누가 우리를 괴롭힌 걸 알면, 엄마가 반드시 호되게 혼을 내줄 거예요.”두 아이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호흡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예민주는 표정이 붉어졌다는 것도, 심지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이 두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송성연이 이 두 녀석을 아주 진지하게 단
예민주가 무진을 보러 매일 회사에 올 수는 없는 노릇.그러나 자신이 잘 쓰는 방법을 사용해서 WS그룹에 자기 부하를 하나 심었다.매일 무진의 스케줄을 예민주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오늘 아침 전화한 사람은 두 아이가 몰래 대표실에 들어갔는데, 줄곧 대표님을 아빠라고 불렀다고 말했다.평소 기발한 행동을 해서 명문가에 시집가려는 여자들도 적지 않다.운성 경제의 명맥을 쥐고 있는 무진과 누가 관계를 맺고 싶지 않겠는가!매일 프런트에서 자칭 ‘강무진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들을 몇 명이나 상대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거의 대부분은 프론트에서 차단되지.’‘그런데 오늘 대표 집무실로 직접 들어온 아이들이 있다니.’원래 예민주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머릿속에 문득 성연의 모습이 번뜩였다.‘결국 당황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급히 회사로 달려왔는데.’‘뜻밖에도 정말 송성연과 관계가 있었어!’예민주는 다시 눈앞의 이 두 아이에게 눈길을 돌렸다.예민주의 눈빛에 음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너희들은 평소에 엄마하고 같이 있지 않니?”사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요, 매일 엄마하고만 같이 있어요. 그래서 아빠가 보고싶어요.”아이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예민주는 내친 김에 계속 캐물었다.“너희들은 이전에 줄곧 외국에 있었는데, 아빠 가족들이 너희들을 찾지 않았어?”“아빠 가족들요?” 뭔가를 눈치챈 듯, 사진이 고개를 돌려서 옆에 있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교환한 두 아이는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작은 신호들을 사용했다.‘이 여자는 그냥 회사를 좀 구경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사무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작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아주머니, 이게 잘 안 들어가는데요? 좀 도와 주실래요?”갑자기 사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레고 블록을 든 채.예민주는 계속 묻고 싶었지만, 사무가 성깔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남자는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약간 쉰듯한 목소리에서는 차가운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예민주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이 두 아이 귀엽지 않아요? 오히려 오빠가 그렇게 쫓아냈는데, 만약 누군가 영상이라도 찍었다면, 회사의 명성에 영향을 주지 않겠어요?”“누가 감히 우리 WS그룹을 함부로 보도할 수 있겠어?”무진의 말에는 힘찬 기세가 담겨 있었다.무진이 결코 지나치게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강경할 수 있는 것이다.무진이 이렇게 말하자 예민주는 잠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잠시일 뿐!다시 무진에게 다가간 예민주가 작은 소리로 무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사실 쟤들은 이 참에 오빠하고 잠시 함께 있기 위한 핑계였어요.”예민주가 다가오자, 순간 그윽한 향기가 무진의 코에 스며들었다.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무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막 좁혀졌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다.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근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접근해서 기회를 틈타 상류층으로 오르려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심지어 한 번만 만나려고 머리를 쥐어짜내는 사람들도 있다.그런 사람들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매번 비서진이 쉽게 대처했지만,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은 예민주다.자신의 여자 친구인.무진의 이런 습관을 예민주도 사실 잘 알고 있다. 평소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예민주는 절대로 이렇게 짙은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그래야 무진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무진이 이렇게 배척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예민주는 이 ‘금기’를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방금 무진의 동작은 지금 예민주의 눈에는 적나라한 거부이자 분명한 소외감이었다.그러나 예민주는 감히 이 억눌린 마음을 마음속에 묻어두어야 했다.겉으로는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했다.입가에 줄곧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애들하고 얘기를 해 볼게요. 애들이 왜 대표실을
“감탄할 수밖에 없어! 저 아가씨가 사랑 앞에서 저렇게 자신을 낮출 수 있다니!”“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대표님 여자친구는 정말 총명하다는 거야!”“뭔데? 뭔데? 나만 모르는 거야?”“...”회사에서는 업무 시간에 뒷담화를 하지 못하도록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없을까?어떻게 다 금지할 수 있을까?지금 회사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여전히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오히려 당사자들은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아이들을 데리고 이미 회사 식당에 온 예민주는 룸에 도착했다.평소에 무진은 사실 사실 이쪽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손건호가 식사를 가지고 오면 늘 대표 집무실에서 식사를 했다.하지만 여전히 무진을 위한 개인 공간이 갖춰져 있었다.바깥의 인테리어도 좋지만, 내부 공간은 여전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바로 돈이 있어서 좋은 점!단지 식사를 하는 공간이지만, 룸 안에는 대형TV와 편안하고 넓은 가죽 소파가 갖춰져 있었다. 또 각종 커피 메이커, 정수기, 그리고 국외에서 수입한 첨단 설비들이 갖춰져 있어서 그야말로 작은 휴게실이나 다름없었다.“아줌마, 회사 구경을 시켜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에는 왜 왔어요?”사진은 자신의 작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무진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하지만 남자들이 이동하는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빠, 나 아빠 옆에 있고 싶어.”무진의 행동이 이렇게 소원하자, 사진은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으려고 했다.여동생을 힐끗 본 사무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나도 어쩔 수가 없어.”“엉엉. 사진이한테는 너무 어려워!”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슬피 우는 소녀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예민주는 들어오기 전에 미리 장난감과 먹을 걸 준비해 달라고 시켰다.지금 이미 예민주가 시킨 물건들을 보내왔다.이쪽을 보니 무진은 옆에 있는 아이의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얘들아, 너희들은 어느 집 아이들인데 지금 회사에 있는 거니?”온화한 모습으로 살짝 몸을 숙인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민주의 모습에는 어떤 허세도 보이지 않았다.두 아이는 이전에 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빠와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본 데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인 걸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우호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흥분한 표정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면서 사진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저희는 여기를 구경하고 싶어요.”사진은 여린 목소리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인 예민주는 고개를 돌려서 무진을 한 번 보았다. 무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그래, 그럼 아줌마가 너희들 회사 구경을 시켜줄까?”“이제 곧 점심 시간이야. 너희들도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 걸 사줄까?”예민주의 제안은 시원시원하고 아주 열정적이라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어느새 다가온 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민주야, 이 두 아이는 내력이 분명하지 않아. 그렇게 애들을 여기 남겨두고 놀게 하다가, 무슨 일에 엮일 지도 몰라.”“괜찮아요. 이 두 아이가 무슨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겠어요. 그저 단지 여기를 지나다가 궁금해서 좀 더 구경하고 싶을 뿐일 거예요.”예민주가 시간을 보니 마침 12시가 다 되었다.“같이 한 바퀴 돌아볼래요? 오빠도 한참동안 나하고 함께 있지 못했잖아요.”철이 든 모습의 예민주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결국 무진의 마음속 예민주에 대한 미안함이 이성에 승리를 거두었다.두 아이는 지금도 무진에 대해서 희망을 품고 있었다.‘사무실에 있을 때는 우리한테 냉담했지만, 결국 우리 친아빠야.’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잘못했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모두 처음 겪은 일이기에, 잠시 동안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던 아이들도 마음을 놓았다.‘어렵게 왔는데, 아빠하고 좀 더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