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있던 사내들 모두 그 분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만약 실토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더 끔찍할 것이다.‘이런 채찍쯤은 모두 겨우 견딜 수 있어.’이를 악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앞에는 결국 어린 계집애일 뿐이다.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저들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 듯, 성연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손의 동작에 힘을 좀 더 주자 채찍이 사내들의 몸 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그리고 성연이 큰 소리로 위협했다.“너희들 잘 생각해. 만약 입을 안 열고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성연의 채찍에 맞으면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뒤로 가자 진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나왔다.바로 입을 열었다.“말, 말할 게요.”사내들 사이에서 하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성연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좋아, 말해.”그녀의 채찍 아래에서 꽤나 오래 버틴 셈이다.이 놈들의 지구력이 그런 대로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때 누군가 저지하려 소리쳤다.“너 미쳤어? 말하지 마.”그 분의 성격으로 봐서는 입을 여는 순간 돈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뼈도 못 추릴 터였다.“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요.”호소하는 사내의 음성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이런 아픔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못난 놈.”말리던 사내가 퉤, 하고 사납게 침을 뱉었다.성연이 냉소를 지으며 저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너희들 말하려면 빨리 말해. 너희들과 같이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하, 저렇게 졸렬한 연기라니.’성연이 말을 하는 동시에 저들의 몸에 채찍을 휘두르는 걸 잊지 않았다.의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부위가 가장 아플지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성연이었다.‘저 사람들 곧 참을 수 없을 걸.’저들이 즉시 일어나며 말했다.“아가씨, 이야기 좀 해요. 제발 그만 휘둘러요.”성연이 턱을 치켜든 채 동작을 멈추었다.“좋아, 말해봐.”“네, 강상규 사장님이 당신을 납치하라고 우리를 고용했습니다.”사내가 바로
회사에 남아 있는 무진은 좌불안석이었다.시간이 늦어져 성연의 상황이 더 위험해질까 걱정스러웠다.다행히 진우현 쪽에서 소식이 왔다.각 구간을 모니터링해서 성연이 있는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했다.그 차량은 교외로 사라졌다.진우현이 자신의 추론을 무진에게 들려주었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는 않았다.누가 생각했겠는가. 꽃을 피울 줄 모르던 천년 고목 같던 자신의 친구가 드디어 한 여자아이에게 넘어가다니.평소라면 좀 놀려볼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친구가 가장 큰 조력자가 될 수밖에.무진이 알았다는 것을 표시한 뒤, 진우현에게 감사인사를 했다.조급한 무진의 마음을 이해한 우현이 농담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돌아오면 전화해서 안부를 전해달라는 우현의 말에 무진이 그러마, 하고 약속했다.무진이 곧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우현이 다시 갑자기 입을 열었다.“무진, 너 답지 않아. 무슨 일을 하든 이성을 잃지 마. 네 위치에서 절대 가져서는 안되는 게 약점이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다른 사람이 너를 위협하는 꼬투리가 될 거야.”오래동안 웅크린 채 기다렸던 무진이었기에 이 이치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우현은 생각했다.하지만 오늘 무진의 전화를 받고 그의 초조한 음성을 들었을 때, 우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됐어, 진짜 감정이란 놈은 사람 혼을 빼놓는 군.’“난 그녀를 보호할 능력이 있었어.” 이를 악 다물고 있던 무진이 결국 한 마디를 뱉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지 못했다는 걸.이 일은 냉정해야 했다.“하아.” 우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됐고, 그럼 너도 조심해. 네까지 거기에 끼워 넣지 말고.”“음.”무진이 담담히 대답했다.무진은 직접 교외 부근으로 나갔다.그곳에 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주차된 차가 보였다.잠시도 기다리지 못했던 무진이 바로 사람을 데리고 뛰어들려고 했다.성연의 일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이제까지의 냉정함은 사라지고 없었다.조마조마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성연의 눈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성연은 저들의 지원군이라고 생각했다.정탐을 위해 보낸 한 명이 몰래 살피고 돌아왔다.성연에게 낮은 음성으로 ‘강’이라는 한 마디만 전했다.성연은 잠시 멍했다. 강씨 집안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무진뿐이다.하긴 한참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응답도 없었으니, 운전기사가 이미 무진에게 보고했을 터였다.무진이 얼마나 걱정했을 지 알 수 없었다.생각을 하던 성연이 바로 결단을 내렸다. 남자들을 하나하나 쳐서 기절을 시켰다. 두 경호원도 따라서 거들었다.이 남자들이 깨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도록.“물러가.” 성연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경호원 두 명이 황급히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무진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런 기척이 없자 수하들을 데리고 바로 돌진했다.격전이 있을 줄 알았다.아니면 납치범들이 성연을 인질로 해서 자신에게 조건을 말하든가.무진은 속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오직 성연이만 괜찮다면 뭐든 승낙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상상한 것과 좀 달랐다.바닥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누워 있었다. 겹겹이 쌓여 누운 모양새가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유독 바닥에 앉은 성연의 두 눈이 좀 멍해 보였다.서로 한 차례 시선을 맞춘 무진과 손건호의 얼굴에 아연실색한 표정이 떠올랐다.‘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손건호는 더욱 의심스러웠다. ‘설마 송성연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쓰러트렸단 말이야?’‘그게 가능하다고?’마음속에 수많은 의혹이 들어찼다.그러나 무진에게는 성연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성연이만 괜찮으면 돼.’무진이 얼른 다가가 성연을 품에 안았다.“성연아? 어때?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다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성연이 무진의 눈에 가득 들어앉은 걱정의 빛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무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켰다.“너 때문에 하마터면 놀라 쓰러질 뻔했다.” 무진이 눈치채지 못
손건호는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두 사람이 포옹을 풀 때까지 기다렸다.만약 이럴 때에 방해헸다가 의심의 여지없이 자기 보스에게 찍힐까 겁내며.거진 시간이 되었다 싶을 때 손건호가 입을 열었다.“작은 사모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조금 전에 누군지 모르겠지만 솜씨가 대단한 두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구해주고 이 남자들을 기절시켰어요.”말하면서 성연이 몸을 돌려 무진을 바라보았다.“설마 무진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보내 성연을 뒤쫓게 했지만 그들은 진즉에 성연을 놓쳤었다. 하지만 무진은 이 일을 성연에게 말하지 않았다.자신이 성연을 믿지 않아서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사실 처음 시작한 취지는 확실히 그랬었다.그러나 후에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바로 성연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저들이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그러나 무진은 지금 성연과의 관계가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이런 일들을 말해서 그들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그래서 무진은 간단히 대답했다.“내가 보낸 사람들은 아니지만 네가 괜찮으니 됐어.”만약 성연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다면 무진은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손건호가 옆에서 중얼거렸다.“그런데 왜 사람들을 기절시켰지?”그 점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깨어 있는 게 이야기하기 더 좋지 않나?’지금 정신을 잃은 상태라 저들도 상황을 다 알지 못할 터.성연은 손건호가 이 문제를 물어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어찌나 예리한지 사건의 핵심을 단번에 짚었다.성연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아마 저들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 아닐까요?”성연의 해석에 동의한다는 듯이 손건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무진을 바라보던 성연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무진에게 말했다.“조금 전 그 두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이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했어요. 이들이 말하길 셋째 할아버지 강상규 사장이 자신들을 보냈다고 했어요.”무
줄곧 침묵하며 입을 열지 않던 무진이 한참 뒤에 손건호에게 지시했다.“너는 이 사람들을 끌고 가라.”감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납치하다니 반드시 응징해야 할 터.손건호는 보스의 뜻을 잘 이해했다.그 역시 절대 이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일을 모두 지시한 후, 무진이 성연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안금여와 강운경은 벌써부터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무진이 성연을 데리고 들어오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연을 본 두 사람의 관심은 끝이 없었다.안금여가 즉시 달려가 성연을 안았다.“성연아, 얘야 괜찮니? 아이고, 이 할머니 네 걱정으로 죽는 줄 알았다.”이미 무진을 안심시켰던 성연에게 또 다시 안심시켜야 할 두 사람이 더 남아 있었다.하지만 성연은 조금도 귀찮게 생각되지 않았다.이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끼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성연은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이며 안심시켰다.“할머니, 저 괜찮아요. 보세요, 저 여기 멀쩡히 서 있잖아요?”운경도 성연의 납치에 크게 놀랐다.운경이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도대체 누가 감히 우리 강씨 집안의 사람을 납치한 거야? 정말 우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군.” 성연의 신분을 발표한 이후로 신변에 그다지 불편한 일은 없었다.납치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러나 운경은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 설마 같은 강씨 집안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성연이 바로 셋째 할아버지라고 알려주었다.운경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저들, 저들이라고? 정말 어이없네.”성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안금여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무진아,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구나. 강상철, 강상규 저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노기등등하게 말을 끝낸 안금여가 성연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성연아, 네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이번에는 강씨 집안이 너에게 잘못했구나.”아마도 강상철과 강상규는 무진이 성연을 얼마나 좋아
무진은 강상철, 강상규에 관한 자료들, 범죄의 증거들을 암암리에 수집했다.크고 작은 사건을 막론하고 어느 것도 그냥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이번에 강상규가 성연을 건드림으로써 강무진의 임계치를 건드린 것이라는 게 확실해졌다.무진은 강상철과 강상규를 일망타진할 생각이다.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씩 그들을 잠식해 들어가 반격할 힘이 하나 남아있지 않게 할 것이다.무진 앞에는 두꺼운 자료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모두 요 몇 년간 저들이 해 놓은 일들.어둡게 가라앉은 무진의 얼굴이 무척 냉랭했다.앞에 놓인 서류더미를 주시하는 모습이 마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흉악범죄를 앞에 둔 듯하다.실제로 서류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들어온 손건호는 서류를 쳐다보고 있는 무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모습에 오싹 소름이 돋은 손건호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소리를 낮추어 무진을 불렀다. “보스, 회의가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올 사람들은 다 왔어?” 무진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마치 방금 보았던 모습이 모두 착각이라는 듯.손건호가 대답했다.“네, 다 왔습니다.”그는 무진이 말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오늘 회의실에서 누군가는 아주 낭패를 당할 것이다.손건호의 말을 들은 무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다 왔으면 가지.”고개를 끄덕인 손건호가 무진의 뒤를 따랐다.넓은 회의실 앉아 있는 이들은 모두 WS그룹의 핵심 인물들이다.주주, 임원, 그리고 강상철과 강상규 라인의 사람들.오늘은 매달 열리는 정례회의로 프로젝트의 진척 사항과 실적을 보고해야 하므로 모두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무진은 평소대로 임원들의 업무 보고를 들었다.회의가 끝나갈 때쯤 자리에서 일어선 무진이 거침없이 강진성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강진성 지사장, 얼마 전에 맡았던 프로젝트의 손실이 매우 심각하군요. 원래 수익의 10%도 안 될 정
그러나 무진은 조금도 체면을 봐 주지 않았다. 또 마음이 약해지지도 않았다.무진이 이어 말했다.“뿐만 아니라 강 지사장은 회사에 배정된 승용차를 몰며 폭주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룹 차원에서 차량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이 차는 강진성이 강상규를 오랬동안 졸라서 겨우 얻어 낸 람보르기니 한정판이었다.당시 강상규가 신경을 많이 썼던 차량이었다.생각해 보면 당시 강진성이 막 지사장이 되었을 때였다.그래서 강상규는 손자에게 이 차를 배정하도록 회사에 압력을 넣었다.강진성의 출근 수단으로 삼고자.그는 이렇듯 편리하게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강진성에게 차를 건네주었다. 한 마디로 진짜 일거양득이었던 셈.그런데 강상규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 못했다.결국, 이 차가 쓴 것은 확실히 회사의 공금이었다.이제 그들은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강진성의 분노는 더 심했다.차가 회수되자 강진성의 심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강무진에 대한 마음속의 원한이 더 깊어졌다.‘강무진 저 놈은 회사를 관리만 할 뿐이면서 뭐가 그리 기세 등등해?’그러나 결국 자신의 잘못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진성은 간신히 자리만 지킨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강진성을 바라보는 주주들은 하나같이 비난의 표정이었다.강상철과 강상규의 손자들이 암암리에 노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하지만 당시에는 강무진처럼 비교될 만한 뛰어난 인재가 없었다.주주들이 볼 때 그들은 억지를 부렸었다.하지만 지금은 저 화면의 데이터와 같다.일단 비교해 보면 구름과 흙만큼이나 구분이 갈 정도다.어쩐지 매 업무마다 본가에서 그룹을 경영하더라니.본가의 유전자는 뛰어났다. 강무진은 난감한 스캔들 기사 하나 없었다.강진성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주주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같은 강씨 성인데 어찌 이리 차이가 큰지 하고 생각했다.하지만 어떤 주주도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아무리 싸워도 그것은 그들 강씨 집안의 일이지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었다.그들은 강씨 집안의 누구에게
회의가 끝난 후 강진성은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바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의자에 앉은 뒤, 책상 위의 서류를 모두 바닥으로 쓸어버렸다.“강무진, 병신 같은 놈 네가 감히, 어떻게 감히!”오늘 주주들 앞에서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이미지를 한순간에 망친 셈이다.강무진을 생각하며 강진성은 이를 악물었다.강무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이제 둘째 할아버지 강상철도 자신의 할아버지 강상규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신이 어떻게.지금 그룹 내 강무진의 지위는 이미 예전과 같지 않았다.화가 난 것은 맞지만, 모든 것을 분명하고 투명할 정도로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강무진은 분명 이 일을 들어 자신을 지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지사장이라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앞으로 일을 하는 데 훨씬 번거로웠을 터.가까스로 올라간 그가 당연히 이 자리와 기회를 쉽게 놓칠 리가 없었다.돈은 메꾸지 않을 수가 없다.강진성은 속으로 몹시 억울했다.만약 그에게 돈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바로 무진의 얼굴에 돈을 집어 던지며 난처하게 만들 텐데.하지만 그 돈은 적은 액수가 아니다.자신처럼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남자가 무슨 돈을 모은다는 말인가.그 돈은 지금 강진성에 있어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다.그는 할아버지 강상규를 찾아갈 수도 있을 터.그러나 이 일을 알고 난 뒤 할아버지는 벌써 화가 단단히 난 상태.만일 또 다시 찾아 간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테지.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실망할 게 분명했다.강진성은 딜레마에 빠졌다.결국 한참을 고민하며 저울질하던 강진성은 결국 할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어쨌든 친할아버지이니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거야.’출근하고 집에 돌아온 강진성은 서재로 할아버지를 찾았다.회사에서는 이목이 많은 가운데 또 그렇게 창피한 일을 당했으니, 회사에서 할아버지에게 돈을 부탁할 면목이 없었다.서재 문을 열고 강진성이 들어갔다.강상규가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