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뒤에서 강제로 차에 실린 성연의 입과 코를 막았다.코를 찌르는 냄새가 확 풍겼다.성연은 속으로 이 사람들 꽤나 신중하다는 생각을 했다.여고생 한 명을 상대하는 데도 이렇게 무지막지한 수단을 쓰다니.수건의 냄새에서 미약 성분이 맡아졌다.하지만 체질적인데다 사부님의 훈련 덕에 어떤 약물도 성연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성연은 경거망동하지 않은 채 미약에 취한 척했다. 이 남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지 볼 생각에.그 시각, 학교 앞 골목에서는 운전기사가 성연을 기다리고 있었다.하교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무런 연락 없이 성연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사리가 분명한 성연은 평소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미리 전화를 걸어 알려주며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어쩌면 무슨 사정이 생겨 좀 지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기사는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렸다.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결국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운전기사는 먼저 학교 경비실로 달려갔다.학교에 방과 후 행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경비원이 말했다.“요즘 무슨 행사가 있어요? 학생들도 벌써 다 돌아갔는데. 무슨 일입니까?”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운전기사가 성연의 이름을 말하며 경비원에게 보았는지 물었다.말을 듣고 있던 경비원이 누군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상 많이 받은 그 여학생 말하는 겁니까?”지금 성연은 북성남고의 유명인사였다.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당직 경비원조차도 다 아는 것을.지금도 학교 입구의 벽에는 성연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다.경비원도 당연히 성연에 대한 인상이 깊었다.지금 운전기사는 성연을 기다리느라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이다.여기서 경비원과 친한 척 말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하지만 경비원의 말을 들으니 성연에 대해 꽤 잘 아는 듯해 보였다.경비원에게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희망을 가지며 운전기사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네, 우리 아가씨가 맞습니다. 보셨습니까?”골똘히 기억을 더듬던 경비원이 말
이 일로 운전기사를 탓할 수는 없었다.무진은 사람들에게 좀 더 물어볼 것을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전화를 끊은 무진의 얼굴은 얼음으로 뒤덮인 듯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손건호는 무진에게서 이처럼 차가운 표정을 보기는 처음이었다.조심스럽게 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보스, 무슨 일이십니까?”“성연이 사라졌어. 학교 근처의 CCTV를 찾아서 누구 짓인지 알아봐. 간도 크게 감히 내 사람을 데려가?”무진의 어조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드러내고 화를 내지 않는 편인 무진이지만 그의 이 표정은 보기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였다.손건호가 몸을 떨며 대답했다.“네.”무진은 내심 성연이 절대 이유없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성연은 틀림없이 미리 전화를 걸어 알렸을 것이다.‘절대 말 한 마디 없이 떠났을 리가 없어.’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해석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인데.무진이 계속해서 성연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결같이 ‘잠시 통화를 할 수 없다’는 안내 멘트만 들릴 뿐이다.꽉 움켜쥔 그의 손에 마치 핸드폰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성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마치 보이지 않는 큰 손이 무진의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했다.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아파왔다.아직 떠나지 않았던 손건호가 무진진의 표정을 보고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건넸다.“작은 사모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지 잘 아시잖습니까? 별일 없으실 겁니다.”눈을 들어 손건호를 쳐다보는 무진의 표정이 좀 힘들어 보였다. 무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빨리 가봐.”“네.”손건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즉시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그 결과 성연이 납치된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번호판을 가린 검은색 승용차였다. 납치범들이 똑똑하게도 아주 일반적인 차를 골랐다.대도시 북성에서 이런 차들은 비일비재했다. 군중 속에 묻히면 흔적도 찾기 힘든 그런 차종.그러나 그 승용차의 창문에 구멍이 난 듯 보였다.
성연은 버려진 폐공장으로 끌려갔다.곳곳에 보이는 폐자재와 먼지들을 보면 버려진 지 한참 된 것 같아 보인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성연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방금 들리는 소리로 봐서는 또 다른 차에 사람이 있는 듯했다. 분명 옆에 벽으로 구분된 다른 공간이 있을 것이다.인원이 꽤 많은 듯했다.하지만 그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성연이 그리 탄탄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연약해 보이는 여자애로 생각해서인지 말을 조심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귓가에 거친 음성들이 들려왔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 분을 건드려서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게 만든 거죠? 어린 계집애 하나 때문에 우리 애들 거의 다 풀면서까지 이럴 필요 있어요?”한 사내가 의문을 드러내었다.그러면서 또 성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말라비틀어진 듯한 모습을 보니 이렇게 많은 인원을 움직이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뭘 그리 많은 걸 신경 써? 돈 받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 다른 사내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높은 자리에 있는 양반들이야 언제나 손이 큰 것을.그 양반들의 한 번이면 자신들이 여러 번에 해당할 정도이니.기꺼이 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이유 같은 것 따지고 할 만큼 그는 심심하지 않았다.‘돈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걸 뭘 그렇게 많은 것을 따져?’“그나저나 그 분은 이 계집애를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고 여기에다 납치해 놓고는 끝이라고?’이때 다른 한 사내가 음험한 웃음을 지으며 성연을 쳐다보았다.“어떻게 해도 좋아. 목숨만 남겨 두면 돼.”그 사내는 아직도 망설였다.“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시킬 정도면 이 계집애 신분도 대단하다는 말 아닙니까? 만일 우리한테 불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라고요?”그들은 평소 닥치는 대로 먹을 뿐이다.진짜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찍혀서는 안되었다.다른 한 사내가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내가 말했지? 좀 발전성이 있어보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윗 대가리들 머리 위에
두 눈에 망연자실한 빛을 띈 성연은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 그대로였다.두 명의 남자를 보자마자 놀란 듯 성연이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뭐 하려는 거예요?”성연의 손에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한 두 사내는 성연의 몸짓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계속 다가가 성연에게 손을 대었다.두 눈에 가득 찬 탐욕과 욕망이 그대로 드러났다.계속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나는 성연은 겁에 질린 듯해 보였다.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당신들 도대체 누가 보낸 거예요?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당신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야.”두 사내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네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 말해 줄게.”말을 한 두 두 남자는 마치 성연의 무지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큭큭 웃었다.성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손을 쓰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쓰고 싶지 않았다.자신이 온 목적은 누가 그녀를 납치하라고 시켰는지 알고 싶어서이니까.아니면 이 잔챙이들 몇 명의 실력으로 그녀를 어찌할 수나 있었을까.성연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다시 한번 노력했다.어쩌면 이 두 사람이 말을 할지도 모르지.성연이 코를 훌쩍이며 무척 슬픈 척 연기했다.“난 여태까지 다른 사람에게 원한 산 적도 없어요. 말해 줘요. 누가 시켰는지. 상황은 바로 알고 죽을 수 있도록요.”성연이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눈물을 닦는 척했다.서로 눈을 마주친 두 사내는 성연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여자를 조심스럽게 대할 마음일랑 이들에게 전혀 없었다.어차피 지금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으니.자신들 마음대로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다.의외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성연에게 알려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거구의 사내가 누런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예쁜아, 이 오라버니가 말하지 않았니? 네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 가르쳐 준다고.”이마를 찡그린 성연의 눈에 혐오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성연이 계속 애원했다.“두 분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알아요. 말해 주세요. 속이나 시원하게요.”“아
성연의 경호원인 두 사람은 평소 밀착 상태로 늘 그녀와 함께 했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연을 보호하기 위한 사부님의 안배였다.사부님이 직접 훈련시킨 두 사람은 성연 턱밑까지 따라오는 실력을 가졌다.서한기의 실력보다 뛰어나지만 평상시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성연에게 위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그렇게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성연은 저들이 자신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저 둘의 사명이니까.두 경호원이 성연을 보고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성연도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세 사람이 모이자 더 이상 망설임 없이 바로 움직였다.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시정잡배 수준의 십여 명은 성연 같은 전문가 앞에서 정말 목불인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에게 제압당한 사내들이 모두 몇 명씩 한 꾸러미로 묶였다.경호원 중 하나가 어디선가 걸상 하나를 가져와 성연이 앉게 했다.성연도 사양하지 않고 걸상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눈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내들을 보면서 자백을 강요하기 시작했다.“말해봐, 나를 납치하라고 너희들을 사주한 사람.”자신의 납치를 사주할 만한 사람에 대해 성연은 정말 아무런 짐작도 되지 않았다.‘날 납치하게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라는 말이야?’단서가 없었다.고문을 해야겠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한 놈이 말했다. “그냥 네가 예쁘고 돈도 있어 보여서 너를 납치한 거다. 다른 사람의 사주는 없어.”저들이 한 이 말을 그녀가 믿을 리가.북성남고에는 예쁘고 돈 많은 학생들이 널렸다.죽기 살기로 자신을 노렸다는 게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그리고 학교 앞에서 자신을 납치할 때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건 저들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반증이다.분명히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저들이 지금 배후의 인물을 자백하지 않는다는 건 아마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 터.성연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은 많으니까.“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말 안 해? 너
그 자리에 있던 사내들 모두 그 분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만약 실토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더 끔찍할 것이다.‘이런 채찍쯤은 모두 겨우 견딜 수 있어.’이를 악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앞에는 결국 어린 계집애일 뿐이다.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저들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 듯, 성연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손의 동작에 힘을 좀 더 주자 채찍이 사내들의 몸 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그리고 성연이 큰 소리로 위협했다.“너희들 잘 생각해. 만약 입을 안 열고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성연의 채찍에 맞으면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뒤로 가자 진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나왔다.바로 입을 열었다.“말, 말할 게요.”사내들 사이에서 하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성연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좋아, 말해.”그녀의 채찍 아래에서 꽤나 오래 버틴 셈이다.이 놈들의 지구력이 그런 대로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때 누군가 저지하려 소리쳤다.“너 미쳤어? 말하지 마.”그 분의 성격으로 봐서는 입을 여는 순간 돈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뼈도 못 추릴 터였다.“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요.”호소하는 사내의 음성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이런 아픔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못난 놈.”말리던 사내가 퉤, 하고 사납게 침을 뱉었다.성연이 냉소를 지으며 저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너희들 말하려면 빨리 말해. 너희들과 같이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하, 저렇게 졸렬한 연기라니.’성연이 말을 하는 동시에 저들의 몸에 채찍을 휘두르는 걸 잊지 않았다.의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부위가 가장 아플지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성연이었다.‘저 사람들 곧 참을 수 없을 걸.’저들이 즉시 일어나며 말했다.“아가씨, 이야기 좀 해요. 제발 그만 휘둘러요.”성연이 턱을 치켜든 채 동작을 멈추었다.“좋아, 말해봐.”“네, 강상규 사장님이 당신을 납치하라고 우리를 고용했습니다.”사내가 바로
회사에 남아 있는 무진은 좌불안석이었다.시간이 늦어져 성연의 상황이 더 위험해질까 걱정스러웠다.다행히 진우현 쪽에서 소식이 왔다.각 구간을 모니터링해서 성연이 있는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했다.그 차량은 교외로 사라졌다.진우현이 자신의 추론을 무진에게 들려주었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는 않았다.누가 생각했겠는가. 꽃을 피울 줄 모르던 천년 고목 같던 자신의 친구가 드디어 한 여자아이에게 넘어가다니.평소라면 좀 놀려볼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친구가 가장 큰 조력자가 될 수밖에.무진이 알았다는 것을 표시한 뒤, 진우현에게 감사인사를 했다.조급한 무진의 마음을 이해한 우현이 농담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돌아오면 전화해서 안부를 전해달라는 우현의 말에 무진이 그러마, 하고 약속했다.무진이 곧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우현이 다시 갑자기 입을 열었다.“무진, 너 답지 않아. 무슨 일을 하든 이성을 잃지 마. 네 위치에서 절대 가져서는 안되는 게 약점이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다른 사람이 너를 위협하는 꼬투리가 될 거야.”오래동안 웅크린 채 기다렸던 무진이었기에 이 이치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우현은 생각했다.하지만 오늘 무진의 전화를 받고 그의 초조한 음성을 들었을 때, 우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됐어, 진짜 감정이란 놈은 사람 혼을 빼놓는 군.’“난 그녀를 보호할 능력이 있었어.” 이를 악 다물고 있던 무진이 결국 한 마디를 뱉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지 못했다는 걸.이 일은 냉정해야 했다.“하아.” 우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됐고, 그럼 너도 조심해. 네까지 거기에 끼워 넣지 말고.”“음.”무진이 담담히 대답했다.무진은 직접 교외 부근으로 나갔다.그곳에 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주차된 차가 보였다.잠시도 기다리지 못했던 무진이 바로 사람을 데리고 뛰어들려고 했다.성연의 일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이제까지의 냉정함은 사라지고 없었다.조마조마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성연의 눈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성연은 저들의 지원군이라고 생각했다.정탐을 위해 보낸 한 명이 몰래 살피고 돌아왔다.성연에게 낮은 음성으로 ‘강’이라는 한 마디만 전했다.성연은 잠시 멍했다. 강씨 집안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무진뿐이다.하긴 한참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응답도 없었으니, 운전기사가 이미 무진에게 보고했을 터였다.무진이 얼마나 걱정했을 지 알 수 없었다.생각을 하던 성연이 바로 결단을 내렸다. 남자들을 하나하나 쳐서 기절을 시켰다. 두 경호원도 따라서 거들었다.이 남자들이 깨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도록.“물러가.” 성연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경호원 두 명이 황급히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무진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런 기척이 없자 수하들을 데리고 바로 돌진했다.격전이 있을 줄 알았다.아니면 납치범들이 성연을 인질로 해서 자신에게 조건을 말하든가.무진은 속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오직 성연이만 괜찮다면 뭐든 승낙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상상한 것과 좀 달랐다.바닥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누워 있었다. 겹겹이 쌓여 누운 모양새가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유독 바닥에 앉은 성연의 두 눈이 좀 멍해 보였다.서로 한 차례 시선을 맞춘 무진과 손건호의 얼굴에 아연실색한 표정이 떠올랐다.‘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손건호는 더욱 의심스러웠다. ‘설마 송성연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쓰러트렸단 말이야?’‘그게 가능하다고?’마음속에 수많은 의혹이 들어찼다.그러나 무진에게는 성연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성연이만 괜찮으면 돼.’무진이 얼른 다가가 성연을 품에 안았다.“성연아? 어때?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다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성연이 무진의 눈에 가득 들어앉은 걱정의 빛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무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켰다.“너 때문에 하마터면 놀라 쓰러질 뻔했다.” 무진이 눈치채지 못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