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떠난 후 근처에 있던 정우석의 친구들이 소란을 피우며 놀려 댔다.“에이, 정우석, 너 설마 반한 건 아니지?”평소 정우석의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려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다.북성제일고에서도 정우석을 추종하는 아이들이 많았다.그러나 정우석은 누구에게도 송성연을 대하듯이 하지는 않았다.정우석 또한 부인하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뭐 안될 거 있어? 송성연은 대단한 아이야.”겉만 번지르르해서는 정우석을 매혹시키지 못할 터였다.정우석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그 자신과 비슷한 실력이었다. 아니 송성연이 그 자신보다 더 뛰어났다.이런 사람을 보며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이들이 놀려댔다.“그럼 우리 북성제일고의 퀸이 정말 슬퍼하겠네.”북성제일고의 퀸은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정우석을 좋아하고 있었다.매번 정우석과 좀 더 가까워지려 애를 썼다.무슨 수이든 가리지 않고 썼다.그러나 정우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물론 성연의 생김새는 북성제일고의 퀸보다 못하지 않았다.또 정우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지 않나.정우석이 좋아하는 것도 사실 이해가 될 정도였다.모두들 친구들이어서 정우석의 취향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그러나 친구들의 말에 정우석은 동의하지 않았다.‘퀸은 무슨 퀸, 내 보기에 소위 퀸이란 아이는 성연의 반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데.’성연은 정우석과 친구들이 자신을 화제로 삼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기다리던 차에 오른 성연은 차 안에 무진이 타고 있음을 발견했다.성연은 순간 속으로 놀랐다. 일찍도 아니고 늦지도 않았건만 꼭 이때를 골라서?‘너무 공교로운데?’성연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무진 씨는 왜 또 왔어요?”‘자신도 참 지지리 재수가 없지. 말 몇 마디 할 때마다 무진에게 걸리고 마니.’‘자신 같이 재수 없는 운은 어디도 없을 걸?’강무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너를 데리러 왔지. 그런데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됐군.”성연의 주변에 얼쩡거리는 것들이 정말 너무
서한기가 이런 자신을 보면 뭐라고 투덜거릴지 모르겠다.‘우리 보스 자존심도 없어? 왜 이렇게 나약해?’라고 하지 않을까?예전에 성연은 무슨 일이든 늘 과감하게 처리했다.이처럼 우유부단하게 군 적이 없었다.집에 돌아오니 이미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얼른 밥을 먹은 성연은 바로 게임을 하며 놀았다.너무 문제만 풀다 보면 책벌레가 될까 더 이상 문제집을 보지 않았다.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무척 즐겁긴 하지만 학습과 휴식의 균형도 신경 써야 하지 않겠나.무진은 성연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처리해야 할 서류들 때문에 성연과 함께 게임을 어울릴 수가 없었다.바로 옆에서 서류를 넘기며 때때로 성연이 내는 음성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게 여겨졌다.한창 놀다가 고개를 돌린 성연이 무진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줄곧 성연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무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내가 본업인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연이 무진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네가 즐거운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이 질문을 나에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무진이 성연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성연이 헤 하는 웃음소리로 무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음을 표현했다.늦은 시각, 성연이 목욕하러 가며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무진은 아직도 소파에 앉아서 남은 서류들을 처리하는 중이다.그때 갑작스레 핸드폰 벨 음이 들렸다.‘이 벨 소리는 성연의 것인데?’흘깃 한 번 쳐다본 무진은 받지 않았다. 성연이 나오면 전화 왔었다고 알려줄 생각이었다.핸드폰은 상당히 사적인 물건이다.무진이 성연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않는 까닭은 성연을 존중해 주기 위해서이다.그러나 어쩌다 발신 번호를 흘깃 보았을 뿐이지만 번호가 상당히 낯익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번호가 분명했다.무진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앞뒤로 넘기며 연락처를 뒤적였다.무진의 개인 핸드폰에는 연락처가 많지 않았다.가까운 사람들만 무진의 개인 번호를 가질 수 있었으니
성연이 샤워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니 무진이 보이지 않았다.의아한 마음에 비서 손건호에게 물었다.“무진 씨는요?”손건호가 대답했다.“보스는 사모님이 욕실로 가셨을 때 전화를 받으러 서재로 가셨습니다.”대답하던 손건호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알려줬다.“사모님, 조금 전에 전화가 오는 것 같았습니다.” 성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뜻을 나타냈다.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발신자를 확인한 성연이 내심 놀랐다.연씨 집안에서 온 전화였다.최근 연수호 어르신의 병세가 많이 호전됨에 따라 자연 연씨 집안에 가는 일도 줄었다.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될 정도로.그런데 연경훈이 자신에게 전화를 해 온 것이다.성연은 다행히도 무진이 서재로 올라가 연경훈에게 전화가 온 건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성연의 휴대폰에 미 착신 상태로 표시되어 있으니 분명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뜻.연씨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걱정스러웠다.그래서 문 밖으로 나가 조용한 곳을 찾아 연경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경훈은 마치 핸드폰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받았다. 하지만 다소 원망이 담긴 음성이었다.“고 선생님, 조금 전에 뭐 하느라 그렇게 오래도록 전화를 안 받았어요?”“씻으러 가면서 핸드폰을 두고 갔어요. 무슨 일이에요? 왜 내가 당신에게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는데요?” 성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전화를 받자마자 연경훈이 한 첫 마디가 이런 말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한 성연이다.“아니, 아니, 당신한테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해서 걱정했어요.” 여자들과 많이 어울렸던 연경훈은 입을 다물지 않고 재빨리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연경훈의 번지르르한 말은 무시한 채 성연이 바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연경훈의 말투도 좀 진지해졌다.“할아버지께서 약을 다 드셨는데 괜찮을까요?”연 어르신의 병세는 모두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이제까지 복용한 약들은 모두 성연이 직접 조제한 것들이었다.약이 떨어지자 연씨 일가족은 당황스
성연은 연경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물 한잔을 따라서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바로 이때 무진이 나오더니 손건호를 슬쩍 쳐다보았다.손건호는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저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방으로 돌아온 무진은 전화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다.이튿날, 성연은 학교에 휴가 신청원을 내고 연씨 저택을 찾았다.연경훈이 거실에서 이미 성연을 기다리고 있었다.성연은 올 때 당연히 그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지 않았다.그러나 성연이 오늘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집에서 계속 기다렸던 것이다.성연을 본 연경훈이 곧바로 소파에서 일어났다.아주 친절한 태도로 성연을 맞이했다. “고 선생님, 왔어요?”변장을 한 성연의 얼굴은 결코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상대적으로 좀 평범하다고 할까.적어도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봤던 연경훈이라면 눈에 차지 않을 터였다.하지만 연경훈은 절대 일시적인 흥미로 성연에게 구애하는 것이 아니었다.성연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게 하고 또 알고 싶게 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성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주 진지했다.처음엔 업신여겼으나 할아버지 연수호를 세심하게 돌보는 성연의 정성과 능력을 직접 보면서 조금씩 빠져든 게 분명했다.별 다른 표정이 없는 성연의 얼굴은 무척 담담해 보였다.“저 왔어요.”“아, 뭐 좀 먹었어요? 주방에 먹을 것 좀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 손바닥을 치며 말하는 연경훈은 성연 앞에서 표현을 많이 하려 애썼다.성연에게 자신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이미 먹었어요. 귀찮게 그럴 필요 없어요. 어르신께서 계신 곳으로 안내해 줘요.”연경훈이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친절에 성연은 좀 불편함을 느꼈다.그 자리에서 계속 연경훈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느낌이 좀 이상했다.“알았어요. 바로 할아버지께 안내할 게요.” 거리를 두려는 듯한 성연의 태도에 실망한 연경훈.
연경훈은 계속 성연의 옆을 지키며 칭찬했다. 듣기 좋은 말들만 연이어 늘어놓았다.“고 선생님, 당신 의술이 정말 대단하네요. 할아버지가 회복이 아주 빠르세요. 지금은 혼자서 화원 산책도 하실 수 있을 정도세요.”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연의 의술만큼은 절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이전에 많은 의사들이 와서 할아버지의 다리를 진찰했었다.대부분은 고개를 흔들며 탄식만 했다.할아버지 스스로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단념했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성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 걷게 된 것이다.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사부님이 자신에게 맡긴 일이었다. 만약 이조차 제대로 못한다면 사부님의 제자로 부끄럽지 않겠나.어쨌든 사부님을 가리키는 ‘신의’라는 칭호는 그냥 얻은 것이 아니었다.조심스럽게 성연을 쳐다보던 연경훈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고 선생님, 점심 먹고 가시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한동안 고 선생님을 보지 못해서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냥 보내면 어머니가 무척 섭섭해할 겁니다.”성연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연경훈이 계속 말했다.“밥을 먹은 후에 내가 집 근처 구경하러 데리고 갈게요. 부근의 풍경이 아주 좋거든요. 고 선생님은 평소 많이 바쁘죠? 오늘 시간을 내서 몸도 마음도 좀 가볍게 풀어주세요. 사람은요, 자신을 역시 너무 팽팽하게 조여도 안돼요.”성연은 연경훈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이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연경훈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걸 알면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괜히 희망을 주어 그가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도록.성연이 완곡하게 거절했다.“오후에 일이 있어서 같이 나갈 수 없겠네요. 호의에 감사합니다.”연경훈의 얼굴이 바로 축 늘어졌다.매번 거절당할 때마다 점점 면역이 되어가는 자신을 느꼈다.억지로 미소를 지은 연경훈이 대답했다.“괜찮아요. 고 선생님처럼 의술이 뛰어난 분은 바빠서 한가로이 돌아다닐 시간도 없을 텐데. 내 생각이 짧았어요.”성연이 한숨을 쉬며
순간 성연의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무진의 말속에 뼈가 들어 있는 듯했다.하지만 연씨 집안에서는 어떤 내색도 보일 수 없었다.슬쩍 손을 꽉 맞잡은 채 억지로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신가요?”무진이 직접 찾아온 뜻을 밝혔다.“그동안 제 할머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잘 회복되고 있는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의술이 뛰어난 고 선생님이 할머님을 봐 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무의식적으로 성연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왔다.“요즘 좀 바쁩니다. 일이 많아서 아마 몸을 빼기 힘들 것 같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강 대표님.”어쨌든 무진은 오랜 시간 자신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며 지낸 사람이 아닌가.자신의 생활 습관과 행동들에 익숙할 게 분명했다.더군다나 안금여라면 더 잘 알 것이다.또 할머니 앞에서 언제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까.강씨 집안은 갈 수가 없었다.그리고 안금여의 건강은 자신이 늘 살피고 있었다.문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고 선생님, 할머님은 제 소중한 가족입니다. 나는 할머님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할머님을 봐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무진이 재차 설득했다.눈썹을 찌푸린 성연이 또 다시 완곡하게 거절했다.“할머님의 신체는, 어떤 의료기기든 사용해서 검사해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가서 본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가 볼 수 있는 건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 시간을 내기 어려워요.”강씨 집안에 갔다가 온전히 빠져나올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평소의 자신을 잘 알고 그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자신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고 선생님, 당신이 연수호 어르신을 치료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의술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꼭 고 선생이 가서 도와주길 부탁합니다.” 무진이 진짜 자신에게 부탁하러 온 것 같지 않은가.성연이 연거푸 거절의 말을 내놓자 무
성연은 무진을 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돌아가는 길에 무진이 말했다.“정말 고 선생님께 큰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무진을 말을 듣던 성연이 저도 모르게 입가를 오므렸다.“천만에요, 당연한 거죠, 뭐.”강무진에게 승낙한 게 정말 후회되는 그녀다.하지만 승낙하지 않으면 분명 무진이 의심할 터.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무진이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아주 절도가 있어 보이는 동작이 그가 하니 좀 더 귀티가 났다.무진이 입을 열었다.“고 선생은 평소 직업이 의사입니까?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데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었겠군요?”‘평소 말도 별로 없는 강무진이 오늘따라 왜 이리 쓸데없는 말들을 하는 거지?’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지 않는 강무진이다.‘설마 안금여를 진찰하게 하기 위해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일까?’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었다.성연은 속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무진이 어떤 점을 간파했는지 알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성연은 참을성 있게 대답해 주었다.“네, 얼마 전에 졸업했어요. 자그마한 진료소를 가지고 있는데 평소 환자가 많아서 꽤 바쁜 편입니다.”그녀의 말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뜻.‘똑똑한 강무진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당연히 무진은 아주 잘 알아들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없이 바로 한 마디만 했다.“조금만 더 있으면 도착합니다.”성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에 기대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분명히 같은 곳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성연의 심경은 이전과 달랐다.그녀는 지금 무진과는 잘 모르는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전날에도 이 차에 앉아 무진에게 애교를 떤 자신이건만.이건 정말 쇼킹한 반전이 아닌가.앞에서 운전 중이던 손건호는 성연이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차를 몰았다.본시 짧지 않던 여정이 더 길어졌다.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성연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무진은 눈을 감은 채 옆에서
성연이 바로 무진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무진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이 능숙한 동작과 무의식적인 말투는 모두 누군가를 꼭 닮아 있었다.그러나 그의 손은 계속 가슴을 움켜쥔 채로 있었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배어 몹시 아파 보였다.성연은 마음이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즉시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무진의 입에 물렸다.약을 먹이자 무진의 통증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무진이 몸을 받치고 일어나 앉았다.“고 선생은 역시 명의의 제자로 손색이 없군요. 약만으로도 병이 사라지다니.”차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란 손건호가 급히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보스, 괜찮으십니까?”무진이 손을 휘이 저으며 말했다.“괜찮으니 계속 운전해.”손건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성연은 조금 전 무진의 상황에 깜짝 놀랐다.예전 무진의 곁에 있을 때 무진에게 가슴 통증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었다.돌발적인 상황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성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렸다.그러나 그녀는 애써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현재 자신의 신분은 송성연이 아니라 고 선생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기억하기에.성연이 물었다.“강 대표님은 건강해 보이는데 어째서 갑자기 그러신 건가요? 지병이 있으신가요?”무진이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예, 예전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신체 바탕이 나쁘다 보니 가끔 이런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성연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그전에 맥만 짚고도 무진의 몸이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성연은 몰래 속으로 궁리했다. 시간이 있으면 방법을 찾아서 강무진을 검사해 보아야겠다고.‘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안 돼.’오래된 상처가 한데 엉켜 있는데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더욱 심각해질 뿐이다.무진의 지금 상태는 밖에서 보기에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그 안은 꼭 솜 한 덩어리로 채워 넣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손민철의 안배로 조수경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 많은 사장들을 꼬셔냈다.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지난 번의 거의 두 배에 가깝게.이런 놀라운 업무 실적 상승에 사람들은 조수경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이전에 조수경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이번 성과를 본 후에는 완전히 승복했다.사람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조수경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했다.앞으로 조수경은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옆에서 조수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대표실 안.비서 손건호가 서류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조수경의 업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파일이다.“보스, 좀 보시죠.”두텁게 쌓인 서류는 상당히 무게가 있어 보인다.무진이 눈을 들어 손건호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숙여 눈앞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동안 집중해서 문서를 모두 살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무진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보고서를 다 확인한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렇게 많지?”손건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조수경 쪽을 직접 주시하지 않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했었다.그러나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조수경의 이 업무 실적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손건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지금 조수경 씨의 이 업무 실적이라면 이론상 팀장의 위치까지 승진해야 합니다.”무진은 어렴풋이 조수경이 이렇게 하는 목적을 알아챘다.지금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조수경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방법을 썼을 테고...“묵살해!”손건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담당 부서의 책임자가 제출한 겁니다. 묵살할 방법이 없습니다.”만약 묵살해 버린다면, 회사 내의 많은 직원들이 실망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어쨌든 조수경의 업무 실적이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이상, 누구
조수경의 표정이 좀 어정쩡했다.사실 마음속은 성연에 대한 원망으로 꽉 차 있었다.고택에 찾아갔더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강무진도 자신에게 어찌나 냉담한지.조수경은 성연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생각했다.물론 강씨 집안에서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 주었겠지만, 외부인이 송성연에게 이런 명품들을 선물한 적은 없을 것이다.송성연 쪽에서부터 손을 쓰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은 자신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든 강골이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수경의 얼굴에는 거꾸로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성연 씨,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앞으로 꼭 무진 오빠와 거리를 둘 게요. 다만...”조수경은 성연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나는 할머님과 고모님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고모님과 할머님은 지금 나를 전혀 만나시려고 하질 않으세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어 성연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성연 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두 분도 나를 다시 만나 주실 거라고 믿어요.”조수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찾아왔는가 싶었더니, 알고 보니 조수경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택에 찾아가면, 무슨 일을 하든 훨씬 편리할 테니까.“할머니랑 고모가 어떻다고요? 그 분들 뜻이에요.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나도 두 분 어른의 뜻은 못 꺽어요. 나를 핑계로 해서 그 분들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에요.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성연이 딱 잘라 말했다.자신의 마음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본 조수경은 얼굴의 미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어요. 송성연 씨, 정말 미안해요. 나는 정말 일이 이렇게 되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조수경 씨가 무진 씨와 거리를 두기만 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생길 리가 없겠죠.”성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낸 후 성연의 시간은 다시 한가해졌다.지금 성연은 정원에서 꽃나무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꽃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다소 귀한 약재들이다.엠파이어 하우스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거의 비료를 준 적이 없는 셈인데도 토양이 아주 비옥했다.성연이 몇 그루를 심어 보았는데 모두 살아남았다.손을 씻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성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구지, 이 사람은?’‘기억에 없는 번호인 것 같은데?’원래 받기 싫은 마음에 잠시 망설이던 성연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네.”“송성연 양, 저 조수경이에요.”휴대폰 건너편에서 조수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성연의 두 눈썹 앞머리가 올라갔다.“조수경 씨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조수경이 자신 때문에 고택에서 쫓겨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성연은 조수경을 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그런데 내 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조수경은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송성연 씨, 얘기 좀 하고 싶어요.”성연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수경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고.조수경을 본다면 그날 밤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그런데 왜 조수경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 하는 거지?’“죄송합니다만, 요즘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 성연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성이 오르내림이 전혀 없이.오늘 반드시 성연을 만날 결심을 한 조수경이 애원을 하듯이 사정했다.“송성연 씨, 제발, 한 번만 저를 만나 주세요. 요 며칠 저는 무척 괴로웠어요.”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수경이 더 간절히 매달리며 이어 말했다.“그냥 송성연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성연 씨, 제발 부탁해요.”성연이 조수경을 겁내서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사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대체 조수경이 자신에게 무슨 이
5일의 일정 동안 세 사람은 북성의 명소 네다섯 곳을 돌아다녔다.원래 좀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샤넬 가문에 뭔가 일이 생겼는지 곧 돌아가야 했다.성연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재미난 곳도 많은데.풀이 죽어 있는 성연의 모습에 미스 샤넬이 웃으며 성연의 뺨을 꼬집었다.“그러지 마. 나중에 우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야.”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은 매일 같이 업무로 바쁜 무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떠나는 미스 샤넬과 목현수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점 한 곳을 예약했다.성연이 이번에 예약한 곳은 평이 좋은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었다.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목현수가 이런 정통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한 성연이 특별히 그에게 맛 보여 주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테이블에 오른 음식들은 소담하면서도 먹음직스러웠다. 미스 샤넬은 눈앞의 음식들을 보며 폰을 들어 한참 촬영을 한 후에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정말 맛있어. 와, 매번 색다른 맛을 경험하게 해 주네요.” 이곳의 음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 샤넬이 연신 감탄했다.입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맞아요. 우리 북성에는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성연이 미스 샤넬씨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맞아요. 이곳은 산수가 수려해서 경치도 너무 아름다워요. 앞으로 현수 씨가 원한다면, 현수 씨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정착해도 좋겠어요.” 첫날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스 샤넬은 무척 즐겁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 그러면 그 때 우리 적당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나랑 무진 씨도 두 사람과 같은 곳에 살고.” 그 생각을 하던 성연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것도 좋죠.” 샤넬 양이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샤넬 가문은 유럽에서 세력이 무척 큰 가문 중의 하나.지금 연세가 많은 미스 샤넬의 아버지는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