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나중에 보여준 전문성은 상상을 초월했다.그러나 연경훈은 여전히 성연의 의술을 의심하고 있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이어지는 성연의 동작들을 바라보았다.“이렇게 하면 정말 좋아지실 수 있다고요?”현재의 의료기술이 그렇게 발달하고, 병원에는 수많은 전문의들이 있었고 또 최고 품질의 약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안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는 믿지 않았다. 성연의 말 대로 해서 할아버지가 좋아질 수 있다는 걸.어차피 한의학이란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듯해서 그는 한의학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특히 성연의 의술이 그렇게 좋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다.연경훈의 생각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성연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다.“가능하냐 아니냐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 수 있다. 만약 단 하룻밤이라면 당연히 안된다.”성연은 이곳에 올 때, 이미 마음속으로 준비를 했었다.이런 의술을 접한 적이 없으면 당연히 믿지 못할 터. 아마도 연경훈의 눈에는 정밀한 의료기구도 없이 그저 눈으로 병세를 진단하는 그녀가 신뢰성이 없어 보일 터다.하지만 연경훈은 모른다. 한의학에 이런 ‘환자의 병세를 눈으로 보고, 듣고, 묻고, 손으로 짚는’ 네 가지 진찰 방식이 있다는 걸.한의학의 세계는 지극히 넓고 심오하여 단시간에 설명해 줄 수 없었다.결국 효과를 보아야만 자연히 그 속의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던 연경훈은 성연의 믿음직하지 못한 부분을 다시 찾아내려 애썼다.그러다 예기치 못하게 또 다시 어머니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너는 도대체 네 할아버지가 회복되기를 바라기는 한 거야? 제발 입 좀 다물어라.”연씨 집안 며느리는 성연의 신분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분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은 부탁할 수도 없는 이였다.그때 가서 아들의 말 실수로 난처해지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게다가 손님으로 찾아와서 호의로 치료해 주고 있는데, 이 아들놈의 행동은 도무지 존중과는 담을 쌓은 것이었다.하지
침을 모두 뽑은 성연은 소파에 앉아 쉬었다.연씨 집안 며느리가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고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성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뇨.”수업이 끝나자마자 와서 시간에 쫓기듯 시술했지만 너무 늦게 끝나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음식을 먹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성연의 대답을 들은 며느리가 자책했다. 어째서 일찍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고.성연이 손님으로서 찾아와 도와주었는데, 그 정도도 제대로 못 챙겨 주다니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긴 시간 바쁘게 치료했는데, 정말 안될 말이었다.마음속으로 자책하던 그녀는 좀 더 겸손한 태도로 열심히 설득했다.“고 선생님을 제대로 못 챙겼군요. 정말 섭섭하게 해 드렸어요. 꼭 남아서 식사하고 가셔야 해요.”“이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에요. 집에 돌아가서 먹으면 됩니다. 귀찮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성연이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연씨 집안에 처음 온 터라 아직 많이 낯설고 어색했다.익숙하지 않아 불편하기도 했다.게다가 강무진이 아직 여기에 있으니 더더욱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거절하는 것을 본 며느리가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선생님, 이렇게 번거롭게 당신을 오게 했는데, 식사마저 하지 않고 그냥 간다면 결국 내가 대접을 소홀히 한 게 아니겠어요? 아버님 뵙기도 민망하네요.”“고 선생님, 그냥 평소의 식사이니 남아서 드시고 가세요.” 아들도 옆에서 자꾸 권했다.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성연 또한 체면을 봐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면 정말 인정머리 없어 보일 터.결국 성연은 저들의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남아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무진도 식탁에 함께 앉았다.성연은 식사하는 내내 그와는 어떤 말도 섞지 않고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지금 고 선생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강무진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성연은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은 일부러 피하고 잘 먹지 않던 것만 집어 조금씩 먹었다.‘이러면 자신이라는 생각을 강무진이 할 수 없겠지?’성연은 평소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어본 것 같아.식사하는 내내 성연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가슴이 조마조마하다.마음이 잔뜩 긴장되어 무진이 자신을 알아보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그러나 오늘 자신은 중무장을 하고 또 특제 인피도 썼다. ‘강무진이 그저 떠 본 것일 뿐이야. 날 알아보지도 못했잖아?’성연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어서 빨리 식사를 마친 후 이 숨 막히는 곳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끝내 운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 와서 병을 치료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강무진을 만났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었다.성연은 태어난 이래 가장 불편한 식사를 했다.식사 후에 성연이 약을 남기고 며느리에게 복용법을 알려주었다.“앞으로 매일 와서 어르신께 침을 놓을 겁니다. 어르신이 제때에 약을 복용하게 하세요.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성연이 다소 엄한 표정으로 당부했다.자신의 말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랬다.연씨 어르신의 병세는 약물과 침구 치료를 함께 병해해야만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며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고 선생님.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연씨 일가 모두 어르신의 병세를 최우선으로 중시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처럼 힘들게 의사들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어르신이 젊었을 때는 모든 연씨 집안을 안전하게 지켰다.집안의 아이들은 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모든 가족들이 어르신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효성을 보였다. 한 점 모호함 없이 말이다.약을 받은 후, 연씨 집안 며느리가 고개를 돌려 연경훈에게 말했다.“경훈아, 고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가는 건 위험해요.”눈을 크게 뜬 연경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가리켰다.잘못된 들은 게 아닐까? 자신 더러 성연을 집에 데려다 주라니 말이다. 자신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잘 아시는 분이.‘어머니가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돌아가는 도중에 무진은 성연의 주소를 물었다.“고 선생님, 댁이 어디십니까?”입가를 삐죽거리던 성연은 자신이 어디에 산다고 말을 했는지 생각이 안 났다. ‘아, 정말 난리 났네?’속으로 조용히 눈을 한 번 뒤집었다. 주소 문제는 해결하기 좀 어려웠다. 성연은 결국 서한기의 주소를 말했다.고개를 끄덕인 무진은 운전기사에게 그리로 가자고 지시한 후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성연은 아직도 의심스러웠다. 강무진이 적어도 자신에게 이것저것 막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그런데 그렇지 않았다.차가 빠르게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성연은 좀 어색했다.그러나 강무진이 말을 하지 않으니 좋았다. 또 핑계거리를 찾아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서한기의 거처 앞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린 성연이 무진에게 인사를 했다.“오늘 강 대표님께 정말 폐를 끼쳤습니다.”성연을 힐끗 쳐다본 무진이 손을 들어 기사에게 운전하라고 지시했다.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연은 서한기의 주택단지 뒤쪽으로 미친듯이 달려갔다. 서한기는 차를 거기에 세워 두었다.서한기는 성연과 몇 마디 하고 싶었지만, 급하게 달려오는 성연을 보았다.누가 성연의 뒤에서 쫓아오는 줄 알고 그녀의 뒤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그럼 우리 보스는 도대체 왜 달려오는 거야? 서한기는 이해가 안되었다.차문을 연 성연이 다시 ‘탕’하고 차문을 닫았다.계속 달려와서 차에 올라탄 성연은 아직 약간 숨을 헐떡였다.가까스로 숨을 돌린 성연이 말했다.“빨리, 가장 빠른 속도로 엠파이어 하우스로 돌아가, 최대한 빨리.”말하는 동시에 성연은 칸막이를 내려 서한기의 시선을 차단했다.그리고 가면을 찢어버리고 옷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서한기는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장 빠른 속도로 운전했다. 서한기의 차는 속도가 아주 뛰어났다. 운전한 지 10여분이 지난 후, 서한기는 성연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보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그렇게 조급
성연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사가 나왔다. 초조한 얼굴로 성연을 보던 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작은 사모님, 오늘 어디 가셨습니까? 운전기사가 사모님을 못 만나 난리였습니다. 하마타면 불안해 죽을 뻔했습니다.”성연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운전기사에게 소식을 보냈는데요.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라고. 혼자 오면 되니까 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그렇습니까?” 집사는 운전기사만 돌아오는 것을 보고 성연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성연이 이제 성인이니 무슨 일이 생기겠나,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진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집에서 기다렸던 것이다.“네, 내 기억으로는 그렇게 말했는데.” 성연이 휴대폰을 꺼냈다.그런데 그녀의 휴대폰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여태 몰랐다. 수업을 마치며 운전기사에게 보낸 메시지에 빨간 느낌표가 떠 있었다.그때 성연은 연씨 집안에 황급히 가면서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건 정말 자신의 잘못이다. 성연은 머리를 통통, 두드리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집사님. 걱정하게 했어요. 다음에는 일이 있으면 꼭 미리 전화해서 알려줄 게요.”성연의 휴대폰 메시지를 집사도 보았다.그는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단지 걱정이 된 것뿐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요.”“무슨 일 있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다른 사람이 어디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느낌도 그런대로 괜찮았다.“참, 사모님, 식사하셨어요? 도련님도 오늘 일이 있어서 늦게 온다고 하셨는데.” 집사는 나중에 잠시 그런 생각도 했었다. 젊은 두 부부가 데이트하러 가서 안 돌아온다고 말이다.그러나 강무진의 성격으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이제 성연 혼자 돌아왔으니 집사의 마음속 추리도 사라졌다.성연은 고개를 숙이고 책가방을 정리한 후에야 말했다.“이미 친구들
다음 이틀 동안, 성연은 기본적으로 매일 밤 늦게 돌아왔다. 매일 연씨 집안으로 어르신을 치료하러 갔던 때문이다.무진에게는 동아리 모임이라고 말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의 매번 치료를 마치고 나오려면 다들 지극정성으로 권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하고 저녁을 먹게 되었다.연씨 어르신은 사부님의 친구이다 보니,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성연은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못이기는 척하며 타협한 결과였다.성연을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은 이것 만이 아니었다.강무진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거의 매일 밤마다 연씨 저택으로 찾아왔다.그리고 성연과 침을 놓는 방법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 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아니, 성연이 밥을 다 먹자마자 강무진이 또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음이 좀 초조했지만 지금 지금의 신분으로 강무진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또 곤란했다.그래서 성연은 참을성 있게 강무진에게 설명하였다.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답하자마자 강무진은 또 다른 문제를 물었다.성연은 주먹을 쥐고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대표님, 침구라는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은 실천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인데, 나는 단지 입만 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침구를 배우고 싶다면, 차라리 선생님을 청해서 당신을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말을 듣던 강무진의 반응도 매우 침착했다. 그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고 선생님을 보니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것 같군요. 나도 이 방면에 관한 책을 좀 보았다. 고 선생님 정도의 나이에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고 선생님의 경험을 묻어 보고 싶군요. 고 선생님, 괜찮으시죠?”“대표님은 배우고 싶은 게 아니시군요. 침술을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요?” 팔짱을 두른 성연의 눈빛이 좀 차가웠다.“배움의 세계는 끝이 없죠. 침구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가 생기는군요.”
무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연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그는 성연을 바라보았다.“고 선생님, 나는 단지 어르신을 방문하러 온 것입니다. 아마도 고 선생님이 오해하시는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손건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차를 도랑으로 몰고 갈 뻔했다.강무진은 지금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 말이다. 설령 없다고 해도 저 여자는 자기 얼굴도 안 보나 보다. 어떻게 감히 저런 경천동지할 말을 할 수 있는지, 손건호는 정말 신세계를 마주한 느낌이었다.손건호는 몰래 뒷좌석을 한 번 보았다.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도무지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상황?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서 손건호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은 채 안전 운전만 할 뿐이었다.“그건 아닌데요.” 성연은 강무진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무진이 뭘 알아낸 건 아닌지 머리가 아팠다.원래 대로라면 강무진은 회사를 경영하느라 엄청 바쁜 사람이었다.어떻게 무료하다는 듯이 매일 여기 와서 자기만 주시하고 있을 수 있냐 말이다.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좀 불가능한 것 같다.그러나 강무진은 또 단순히 어르신을 보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이 점이 도저히 좀 납득이 되지 않았다.“만약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고 선생님을 오해하게 했다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나는 이미 약혼녀가 있습니다. 고 선생님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무진이 이 말을 할 때, 눈을 성연에게 맞추어 예의 주시하며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았다.성연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주먹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강무진이 해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탐색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성연은 얼떨결에 대답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정말 대표님을 오해했었네요. 대표님이 이렇게 매번 바래다주시면 약혼녀가
더 이상 강무진이 말로 허점을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연은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연씨 집안의 어르신, 연수호 장군에게 침을 놓기로 했다.일부러 무진과 부딪히지 않을 시간을 정해서 마침내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다.덕분에 며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그러나 연경훈과 이야기하는 건 괜찮았다.처음 봤을 때처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호전됨에 따라 성연에 대한 인상도 달라졌기 때문이다.지금은 집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성연을 돕고 있었다.점심 때 마침 연경훈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왔다.부친 연강휼과 모친 하지연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성연이 보이지 않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코트를 벗어 한쪽편에 툭 던진 연경훈이 넥타이 매듭을 풀며 모친에게 물었다.“고 선생은 오늘 안 오나요?”그런 그의 모습을 본 연경훈의 모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집에 오자마자 고 선생은 왜 찾아?”“편하게 묻지도 못해요?” 시큰둥하게 대꾸한 연경훈이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방에 있는 성연을 보고는 왠지 모를 안도감마저 들었다.올라온 김에 내처 방 안으로 들어간 연경훈이 물었다.“내가 도울 일이 필요해요?”연경훈의 음성을 들은 성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지시했다.“마침 잘 왔어요.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 수건을 적셔 줘요.”“알았어요.”연경훈이 두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욕실로 들어갔다.곧이어 수건과 뜨거운 물을 받아서 돌아왔다.수건을 건네받은 성연이 온도를 확인한 후 어르신에게 찜질을 했다.어르신의 몸에 침이 가득 꽂히고 나서야 성연은 옆에 앉아 잠시 쉬었다.매번 시침이 끝날 때면 언제나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연경훈이 성연에게 물잔과 휴지 한 장을 건넸다.휴지를 받아 땀을 닦은 성연이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옆에다 잔을 내려 놓았다.“많이 힘들어요?” 연경훈이 친절하게 물었다.“견딜만해요.” 성연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대충 대답했다.
캐서린 쪽에서도 연락을 받았다.그리고 두 조직이 자신들의 위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캐서린은 그렇게 오랫동안 성연을 관찰했기에 성연의 신분도 잘 알고 있었다.감히 성연을 잡아온 이상 양대 조직과 대항하는 것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이제 캐서린에게는 성연이 감추고 있는 정보가 중요했다.캐서린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누구든 가장 빠르게 우리를 찾을 수는 없어.’소식을 들은 캐서린이 천천히 성연의 앞으로 걸어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수없이 맞아서 숨이 간들간들한 상태였다.캐서린이 오는 것을 보고 또 새로 고문을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다.성연은 차갑게 웃으며 캐서린을 바라보았다.“헛수고하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설사 안다 해도 캐서린한테는 말할 수 없어.’“내가 지금 말하려는 건 그 일이 아니야. 너하고의 연락이 끊어지자, 강무진이 즉시 A국에서 유럽으로 달려왔다는 거 알아?” 캐서린은 말하면서 혀를 내둘렀다.“네 약혼자가 너한테 정말 잘해 주네. 그러나 지금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네 약혼자는 너를 찾는 도중에 죽게 될 거야. 내가 이미 사람을 배치해 뒀거든.”캐서린의 말투에는 강력한 위협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무진이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걸 알게 된 성연은 마음이 훈훈해졌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걱정도 되었다.‘캐서린이 나를 미끼로 무진 씨를 유혹한다면, 무진 씨는 망설이지 않고 달려올 거야.’‘실혼전의 인간들은 모두 미친놈들이야.’‘만약 무진 씨가 위험에 부닥치게 된다면 정말 골치 아프게 돼.’성연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다.성연에게 중요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무진은 성연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무진 씨에게 사고가 나게 할 수는 없어.’“어쩌면 내 사형한테 물어보면 알 지도 몰라.” 성연은 캐서린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했다.‘이것도 자구책의 하나야.’‘캐서린의 정보만 전해지면, 현수 선배와 무진 씨가 틀림없이 방법을 강구할 거야.’그 말을 듣자 캐서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캐서린이
‘성연이 영문도 모르게 실종될 리가 없어. 게다가 그렇게 총명한 성격인데 뜻밖에도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어.’‘성연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말해주는 거야.’무진은 곧바로 성연을 찾기 위해서 양대 조직의 사람들을 소집했다.성연과 무진의 결혼식에 두 조직에서도 참석했다.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성연은 이터너티의 사람들을 무조건 도와주라고 아수라문의 부하들에게 일찌감치 말했었다.이번에 성연이 위험에 처했으니 모두들 도의상으로도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파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를 파견했다.샤넬 가문의 사람들도 함께 수색하러 갔다.그러나 성연의 행방은 끝내 찾지 못했다.매번 성과가 없다는 소식에 상심만 더해갔다.무진은 절망으로 가득 차서 의자에 주저앉아 있었다.손에 낀 반지를 어루만지면서 마음도 멍한 상태였다.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성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성연아,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제발 널 찾게 해줘.’한쪽 구석에 서 있던 손건호는 모든 기대가 무너진 듯한 무진의 표정을 보았다.손건호도 가슴이 아팠다.“보스, 사모님이 그렇게 좋은 분이시니 틀림없이 무사하실 겁니다.”“그러길 바랄 뿐이야.” 무진도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성연에게 사고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아직 찾지 못한 거야? 너희들 도대체 진지하게 다시 찾아본 거야?” 무진도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손건호가 옆에서 위로했다.“보스, 모두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만 유럽은 정말 넓습니다. 만약 마음먹고 사모님을 숨긴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말했다.무진도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말했다.“미안해.”“괜찮습니다.” 손건호는 고개를 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보스에게 사모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잘 알고 있어.’‘게다가 두 분은 아직 신혼인데, 사모님이 이렇게 보스의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어떻게
성연은 무진에게 졸업식이 끝나면 바로 귀국할 거라고 말했다.하지만, 물건을 정리해야 해서 내일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무진은 성연의 졸업식이 어땠는지 전화해 보고 싶었다.‘성연이 약속한 사진도 보내지 않았어.’무진이 줄곧 성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무진은 상황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성연이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여전히 학교에 있었어. 3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는 어디에도 갈수 없어.’무진은 성연을 걱정하느라 애가 탔다.망설이지 않고 바로 샤넬 가문에 전화를 걸어서, 성연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좀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그리고 무진도 즉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다.무진의 마음은 성연에 대한 미안함으로 몹시 혼란스러웠다.성연이 북성을 떠나 유럽으로 갔을 때 무진은 줄곧 불안했다.혹시나 성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그런데 지금 가장 걱정하던 일이 결국 발생했어.’‘성연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무진이 샤넬의 오빠와 통화할 때 샤넬과 목현수가 바로 옆에 있었다.오빠가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것을 본 샤넬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오빠,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미세스 송이 없어졌다는 거야.”샤넬의 오빠가 조용히 말했다.“어, 어떤 미세스 송인데요?” 샤넬은 한동안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목현수는 미세스 송이 바로 성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그는 의자에서 재빨리 일어섰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은 샤넬도 오빠에게 물어보았다.“성연이에요?”샤넬의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미세스 송이 갑자기 강 대표와 연락이 끊겼다고 해. 아무리 해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거야. 게다가 미세스 송이 예약한 항공편도 없어. 강 대표가 걱정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 쪽에 조사를 도와달라고 했어. 지금 강 대표는 이미 A국에서 유럽으로 오고 있어.”“그럼 빨리 움직여야지요. 위험해지면 안 되잖아요.” 샤넬은 바로 오빠에게 조사를 재
성연이 좀 피로해졌을 때 캐서린이 밖에서 들어왔다.손에는 긴 채찍을 들고 있었다.채찍에는 미늘들이 박혀 있었다.캐서린은 두말없이 바로 성연의 몸에 채찍질을 했다.“말 안 할 거야?”채찍에 박힌 미늘들이 성연의 몸에 바로 핏자국을 남겼다.하얀 티셔츠가 피로 물들었다.고통에 신음 소리를 낸 성연이 캐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몰라.”“아직도 주둥이만 살아가지고.”캐서린이 말하면서 또 성연의 몸에 채찍질을 했다.성연의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면서 아파서, 이미 어디가 더 아픈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고통을 꾹 참는 성연의 모습을 보고 캐서린이 웃었다.손에 든 채찍을 가늠하는 한편 웃으면서 말했다.“당당한 아수라문의 보스가 이제는 내 포로가 되었네?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캐서린이 성연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자, 성연은 고개를 쳐들고 캐서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그 순간, 캐서린은 뜻밖에도 성연의 눈빛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그러나 성연의 앞에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어쨌든 성연의 머리카락은 놓아주었다.힘없이 고개를 숙인 성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절대 캐서린을 가만히 두지 않겠어.’“네 충성스러운 개들이 모두 우리 손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말해봐. 만약 네 부하들이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리석게도 희생을 겁내지 않고 널 구하러 올까?”캐서린은 느물거리면서 말했다.“그러면 안 돼!” 성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내 부하들은 내가 잘 알아.’‘내가 캐서린에게 납치된 걸 알게 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하러 올 거야.’성연은 몇 년 전의 참극을 또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실혼전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야.’‘차라리 내가 희생되더라도 나를 믿는 사람들을 공연히 죽게 만들 수는 없어.’캐서린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부하들을 신경 쓰는 모양인데, 걱정하지 마. 지금 아수라문에서는 너 혼자만 내게 쓸모가 있어. 다른 자들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원래 송성연을 몰래 여기다 잡아
성연의 흥분한 기색을 본 캐서린이 웃었다.“미스 송, 넌 지금 나한테 잡혔어. 그렇게 사납게 굴지 마.”캐서린을 노려보는 성연의 눈빛은 짙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당연히 네가 쓸모가 있으니까 널 데려왔지. 아니면 내가 너를 왜 데리고 왔겠어?”캐서린은 우리에 갇힌 맹수 같은 성연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이제 송성연은 내 손에 떨어졌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어.’“그냥 바로 말해, 구태여 빙빙 돌릴 필요가 있어?” 성연은 캐서린의 손에 떨어졌어도 여전히 굴복하지 않았다.“좋아, 좋아. 나는 이런 네 모습을 감상하려는 거야.” 박수를 치면서 다가간 캐서린이 성연의 턱을 누르면서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고학중은 도대체 어디에 있어? 그때 청혈진주는 도대체 어디에 숨겼지?”성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네가 찾아와서 나한테 스승님의 행방을 알려주겠다고 했잖아? 이제는 나한테 반문하는 거야?”캐서린이 질문에 대해서 성연은 알지 못했다.심지어 청혈진주가 뭔지도 잘 몰랐다.성연은 스승님과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스승님의 행방은 더욱 몰랐다.성연은 스승이 위험에 처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좋아하는 제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그러나 성연의 이런 행동을 본 캐서린은 성연이 꼴에 자존심만 세다고 생각했다.‘송성연은 고학중의 제자인데, 어떻게 스승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수 있어?’캐서린이 손끝으로 성연의 뺨을 가볍게 그었다.“미스 송, 나는 미녀를 아끼는 사람이야. 눈치껏 행동하라고 충고할게. 그렇지 않으면 이따가 고생할 거야.”마치 독사가 성연의 뺨을 핥는 듯한 캐서린의 행동에 성연은 정말 반감이 들었다.그러나 지금은 전혀 피할 수가 없었다.사람들이 하는 대로 당해야 하는 이런 기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하필 성연은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내가 예전에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나한테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너를
가는 도중에 성연은 침묵한 채 줄곧 말을 하지 않았다.여자를 따라서 한 장원에 도착했다.성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여자가 성연에게 뭔가 뿌리자 바로 온몸에 힘이 없어졌다.성연은 자신을 묶는 여자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당,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성연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서 아주 미약했다.여자가 자신에게 뿌린 약은 연골산과 비슷한 약이었다.성연은 발버둥치려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지금 이 순간, 성연은 비로소 속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대방의 목표는 아마도 성연 자신이었을 것이다.방금까지 위선적이었던 가면을 벗은 여자의 얼굴은 차갑고 표독스러웠다.“나를 잊었어? 미스 송은 정말 건망증이 심하네.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 캐서린은 손을 뻗어 성연의 턱을 누르면서 억지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성연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면서 웃는 캐서린의 눈가에 어두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반항할 힘이 전혀 없는 성연은 여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나를 잡았으니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성연이 물었다.캐서린이 냉소하며 말했다.“애초부터 너를 노렸지만 뜻밖에도 네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어. 이제야 겨우 내가 기회를 잡게 된 거야.”성연은 여자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이 여자는 정말 전혀 기억이 없어.’‘게다가 나는 아예 이 여자를 모르는데.’성연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자 캐서린은 더욱 화가 났다.‘내가 기억하는 걸 왜 송성연은 모두 잊어버린 거야?’캐서린의 마음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나는 캐서린이야! 아직 기억하고 있어?”캐서린은 성연을 사나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성연은 고개를 저었다.“기억이 나지 않아.”화가 난 캐서린은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좋아, 아주 좋아. 기억이 안 나도 괜찮아.” 캐서린은 성연을 억지로 장원의 지하실로 끌고 갔다.어두컴컴한 이곳은 주위에서 습하고 썩는 냄새가 났다.캐서린은 성연을 지하실의 유일한 의자에
졸업식이 끝난 후 성연의 유럽에서의 학업은 마침내 일단락되었다.귀국 준비를 하려고 기숙사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성연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아주 아름답고 젊은 서양 여자였다.“당신이 송성연 씨인가요?” 젊은 여자가 물었다.성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 있는 여자에 대해서는 어떤 기억도 없었다.어디서 봤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그러나 이 사람은 성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성연은 예의상 웃으며 말했다.“전데요, 무슨 일이신가요?”“중요한 일이 있어서 미스 송을 어디로 좀 초대해서 상의하고 싶은데요?” 여자가 성연을 초대했다.성연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았다.‘게다가 이 여자와는 처음 만났을 뿐이야.’‘어떻게 처음 본 사람과 함께 갈 수 있어?’‘이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일을 상의할 수 있단 말이야?’“아니요, 저는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해요.”성연의 말투가 싸늘해졌다.성연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여자는 입술을 가리면서 가볍게 웃었다.“송성연 씨, 미리부터 성급하게 저를 거절하지 마세요.”“당신의 이름부터 말해야 하지 않나요?” 성연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송성연 씨 당신이 줄곧 고학중 씨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의 스승님이지요? 내가 너에게 말한다면, 나와 함께 가겠다고 대답할 건가요?” 여자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성연에게 가장 중요한 걸 자신이 가지고 있기에, 성연이 거절할 거라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스승님의 이름을 듣자 성연은 순간 멍해졌다.흥분해서 여자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당신이 정말 제 스승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나요?”성연은 힘이 세서 여자가 좀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았다.그래도 여자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미스 송이 알고 싶다면 저와 함께 가야 합니다.”손을 놓은 성연은 반신반의하면서 여자
성연이 학교로 가는 날, 무진은 직접 성연을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두 사람은 이별을 아쉬워했다.그러나 성연은 결국 가야만 했다.한참동안 포옹을 하고 있다가 시간이 되자 성연은 비행기에 올랐다.유럽에 간 뒤 반년 동안 성연은 남은 과정을 이수했다.곧 졸업식이 다가왔다.저녁에 기숙사에서 무진과 통화했다.[느낌이 어때?]” 무진이 물었다.[내일이 졸업식인데 긴장돼?]“괜찮아요, 정상적으로 졸업하는 거라서 긴장되지는 않아요.” 성연은 어깨를 으쓱했다.[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무진의 눈빛에는 미안한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원래 성연의 졸업식에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기다렸다.성연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이다.그러나 급한 일이 생겨서 무진은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어쩔 수 없이 성연이를 서운하게 만들었어.’“괜찮아요. 무진 씨 일이 바쁜 거 알아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성연은 졸업식이 그저 사진만 찍는 것이지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무진이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방법이 없다면 성연도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졸업식 끝나면 사진 보내줘.] 무진도 성연이 졸업 가운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알았어요. 무진 씨 혼자 집에서 일하는데 건강에도 주의해야 해요.”성연은 무진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매번 어떤 일도 강요하지 않았다.성연도 그렇게 큰 회사를 관리해봤기 때문이다.무진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무진이 쉽지 않다는 걸 더욱 잘 알 수 있었다.[알았어, 잘 자.] 무진은 성연에게 뽀뽀를 날린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졸업식이 곧 다가왔다.일단 강의실에 있으면서 학생들은 졸업 소감을 공유했다.그들의 지도교수도 바뀌었는데 지금의 지도교수는 아주 부드러운 유럽 여성이었다.단상에서 축사를 하던 지도교수가 갑자기 성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송성연 학생이 이번에 학과에서 학점이 가장 높아요. 성연 양은 이에 대해서 미래의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선물을 산 무진과 성연은 안금여를 방문하러 본가로 갔다.두 사람이 선물을 들고 들어오는 걸 본 안금여가 탓하듯이 말했다.“나는 또 너희가 신혼여행에만 급급해서 이 할미는 잊어버린 줄 알았구나.”“할머니, 어떻게 할머니를 잊어버리겠어요.” 안금여의 비위를 맞추면서 다가간 성연은 안금여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안금여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지만, 아주 기분 좋게 성연의 안마를 받아들였다.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본 안금여는 바로 주방에서 성연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도록 했다.‘이제야말로 내 집에 돌아왔어. 온갖 음식들이 전부 나를 위한 거야.’밥을 먹을 때 안금여는 줄곧 성연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성연아, 많이 먹어야 해. 너는 너무 말랐어.”“할머니 감사합니다. 저는 그렇게 많이 못 먹어요.” 성연은 얼른 자신의 그릇을 감싸면서 말했다.안금여는 끊임없이 반찬을 집어주었고, 성연의 그릇에는 곧 한 무더기가 쌓이게 되었다.“괜찮아, 이렇게 말랐는데 많이 먹어야지.” 안금여는 그러고도 성연에게 반찬을 더 집어준 뒤에야 비로소 수저를 내려놓았다.성연은 이미 적잖은 간식을 먹고 온 터라, 지금은 정말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바로 무진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무진은 성연을 흘겨보더니 성연의 그릇에 쌓여 있는 반찬들을 자신에게 옮겼다.안금여의 눈앞에서 버젓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그러나 무진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안금여는 무진이 이렇게 당당하게 성연을 비호하는 걸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래 이래야 해. 성연이는 무진이 아내니까 무진이가 성연이를 감싸는 것도 당연해.’“성연아, 무진아. 결혼식도 끝났는데 너희들은 계획이 있니? 신혼여행을 갈 생각은 없어?” 연로한 안금여는 잘 모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방식이 유행한다고 했다.“할머니, 저희는 안 갈 거예요.” 무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성연이 가지 않겠다고 했다.무진은 성연에게 아무런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결혼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하지만 성연이 신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