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사가 나왔다. 초조한 얼굴로 성연을 보던 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작은 사모님, 오늘 어디 가셨습니까? 운전기사가 사모님을 못 만나 난리였습니다. 하마타면 불안해 죽을 뻔했습니다.”성연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운전기사에게 소식을 보냈는데요.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라고. 혼자 오면 되니까 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그렇습니까?” 집사는 운전기사만 돌아오는 것을 보고 성연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성연이 이제 성인이니 무슨 일이 생기겠나,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진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집에서 기다렸던 것이다.“네, 내 기억으로는 그렇게 말했는데.” 성연이 휴대폰을 꺼냈다.그런데 그녀의 휴대폰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여태 몰랐다. 수업을 마치며 운전기사에게 보낸 메시지에 빨간 느낌표가 떠 있었다.그때 성연은 연씨 집안에 황급히 가면서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건 정말 자신의 잘못이다. 성연은 머리를 통통, 두드리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집사님. 걱정하게 했어요. 다음에는 일이 있으면 꼭 미리 전화해서 알려줄 게요.”성연의 휴대폰 메시지를 집사도 보았다.그는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단지 걱정이 된 것뿐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요.”“무슨 일 있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다른 사람이 어디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느낌도 그런대로 괜찮았다.“참, 사모님, 식사하셨어요? 도련님도 오늘 일이 있어서 늦게 온다고 하셨는데.” 집사는 나중에 잠시 그런 생각도 했었다. 젊은 두 부부가 데이트하러 가서 안 돌아온다고 말이다.그러나 강무진의 성격으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이제 성연 혼자 돌아왔으니 집사의 마음속 추리도 사라졌다.성연은 고개를 숙이고 책가방을 정리한 후에야 말했다.“이미 친구들
다음 이틀 동안, 성연은 기본적으로 매일 밤 늦게 돌아왔다. 매일 연씨 집안으로 어르신을 치료하러 갔던 때문이다.무진에게는 동아리 모임이라고 말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의 매번 치료를 마치고 나오려면 다들 지극정성으로 권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하고 저녁을 먹게 되었다.연씨 어르신은 사부님의 친구이다 보니,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성연은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못이기는 척하며 타협한 결과였다.성연을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은 이것 만이 아니었다.강무진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거의 매일 밤마다 연씨 저택으로 찾아왔다.그리고 성연과 침을 놓는 방법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 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아니, 성연이 밥을 다 먹자마자 강무진이 또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음이 좀 초조했지만 지금 지금의 신분으로 강무진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또 곤란했다.그래서 성연은 참을성 있게 강무진에게 설명하였다.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답하자마자 강무진은 또 다른 문제를 물었다.성연은 주먹을 쥐고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대표님, 침구라는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은 실천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인데, 나는 단지 입만 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침구를 배우고 싶다면, 차라리 선생님을 청해서 당신을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말을 듣던 강무진의 반응도 매우 침착했다. 그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고 선생님을 보니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것 같군요. 나도 이 방면에 관한 책을 좀 보았다. 고 선생님 정도의 나이에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고 선생님의 경험을 묻어 보고 싶군요. 고 선생님, 괜찮으시죠?”“대표님은 배우고 싶은 게 아니시군요. 침술을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요?” 팔짱을 두른 성연의 눈빛이 좀 차가웠다.“배움의 세계는 끝이 없죠. 침구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가 생기는군요.”
무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연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그는 성연을 바라보았다.“고 선생님, 나는 단지 어르신을 방문하러 온 것입니다. 아마도 고 선생님이 오해하시는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손건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차를 도랑으로 몰고 갈 뻔했다.강무진은 지금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 말이다. 설령 없다고 해도 저 여자는 자기 얼굴도 안 보나 보다. 어떻게 감히 저런 경천동지할 말을 할 수 있는지, 손건호는 정말 신세계를 마주한 느낌이었다.손건호는 몰래 뒷좌석을 한 번 보았다.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도무지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상황?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서 손건호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은 채 안전 운전만 할 뿐이었다.“그건 아닌데요.” 성연은 강무진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무진이 뭘 알아낸 건 아닌지 머리가 아팠다.원래 대로라면 강무진은 회사를 경영하느라 엄청 바쁜 사람이었다.어떻게 무료하다는 듯이 매일 여기 와서 자기만 주시하고 있을 수 있냐 말이다.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좀 불가능한 것 같다.그러나 강무진은 또 단순히 어르신을 보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이 점이 도저히 좀 납득이 되지 않았다.“만약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고 선생님을 오해하게 했다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나는 이미 약혼녀가 있습니다. 고 선생님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무진이 이 말을 할 때, 눈을 성연에게 맞추어 예의 주시하며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았다.성연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주먹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강무진이 해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탐색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성연은 얼떨결에 대답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정말 대표님을 오해했었네요. 대표님이 이렇게 매번 바래다주시면 약혼녀가
더 이상 강무진이 말로 허점을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연은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연씨 집안의 어르신, 연수호 장군에게 침을 놓기로 했다.일부러 무진과 부딪히지 않을 시간을 정해서 마침내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다.덕분에 며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그러나 연경훈과 이야기하는 건 괜찮았다.처음 봤을 때처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호전됨에 따라 성연에 대한 인상도 달라졌기 때문이다.지금은 집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성연을 돕고 있었다.점심 때 마침 연경훈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왔다.부친 연강휼과 모친 하지연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성연이 보이지 않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코트를 벗어 한쪽편에 툭 던진 연경훈이 넥타이 매듭을 풀며 모친에게 물었다.“고 선생은 오늘 안 오나요?”그런 그의 모습을 본 연경훈의 모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집에 오자마자 고 선생은 왜 찾아?”“편하게 묻지도 못해요?” 시큰둥하게 대꾸한 연경훈이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방에 있는 성연을 보고는 왠지 모를 안도감마저 들었다.올라온 김에 내처 방 안으로 들어간 연경훈이 물었다.“내가 도울 일이 필요해요?”연경훈의 음성을 들은 성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지시했다.“마침 잘 왔어요.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 수건을 적셔 줘요.”“알았어요.”연경훈이 두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욕실로 들어갔다.곧이어 수건과 뜨거운 물을 받아서 돌아왔다.수건을 건네받은 성연이 온도를 확인한 후 어르신에게 찜질을 했다.어르신의 몸에 침이 가득 꽂히고 나서야 성연은 옆에 앉아 잠시 쉬었다.매번 시침이 끝날 때면 언제나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연경훈이 성연에게 물잔과 휴지 한 장을 건넸다.휴지를 받아 땀을 닦은 성연이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옆에다 잔을 내려 놓았다.“많이 힘들어요?” 연경훈이 친절하게 물었다.“견딜만해요.” 성연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대충 대답했다.
“경훈이 어떻게 된 거지? 쟤가 저런 살뜰한 모습으로 누굴 대하는 것 본 적 있어요?” 경훈의 모친 하지연이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목소리를 낮춰 남편에게 말했다.“녀석, 얼굴에 다 드러내고 있는데 그걸 눈치 못 채겠소? 음, 분명 고 선생을 마음에 둔 것 같아.”남편 연강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그러나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하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 치료가 끝난 후, 성연은 오후 수업 시간에 맞추어 돌아가야 했다.경훈과 성연이 차례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연이 일어나며 말했다.“고 선생님, 벌써 돌아가게요? 좀 더 있다 가지 않고요?”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오후에 일이 있어서 돌아가야 해요.”일이 있다고 하니 하지연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식사 시간도 이미 지났고 말이다.그래서 성연에게 케익이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집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주방장의 솜씨가 괜찮아요. 가지고 가서 맛 한번 봐요.”예쁘게 포장된 상자에 담긴 케익은 흐트러지지 않게 단단히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끼 식사로 넘칠 정도의 양이었다.하지연은 매번 성연에게 먹을 것들을 포장해 주었는데, 마치 성연을 먹이지 못해 한이 맺힌 듯 보일 정도였다.성연이 상자를 드니 꽤 묵직한 것이 또 얼마나 담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케익이야 뭐 그리 비싸겠는가. 어찌 되었든 주는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다만, 성연은 이 사람들을 이처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케익 상자를 든 채 어쩔 수 없이 말했다.“사모님, 다음에는 이렇게 준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 케익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요.”여자아이들은 모두 달콤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하지연은 성연이 싫어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아, 안 좋아했구나. 다음에는 다른 것을 준비하도록 할게요.”자신의 말을 아예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하지연을 보니 성연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 다급해진 성연은 더는 말
오후에 성연이 떠난 후,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경훈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화가 나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그러거나 말거나 연강휼과 하지연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자신들의 아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알았다.저 어린애 같이 팩, 하는 성질은 잠시 그대로 두면 곧 괜찮아질 터였다.눈을 감고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하지연은 진한 자스민 향에 취한 듯 탄성을 뱉었다.“아, 정말 좋다.”“마음에 들면, 다음 번에 출장 갈 때 또 사다 줄게.” 미소 띈 얼굴로 하지연을 바라보는 연강훌의 눈에 은근 다정한 빛이 넘실거렸다.진정한 사랑을 담은 눈빛이다.남편의 말에 별 대답 없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하지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아들의 방문을 가볍게 노크했다.곧이어 안에서 아들의 볼멘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지금은 저를 부르지 마세요!”아들의 대답에 하지연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을 뻔했다.“너 잊었지? 오늘 무진이와 계약 체결할 게 있는 거. 무진이 지각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 그러니 알아서 해.”무진이를 언급하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경훈이 튕기듯 일어나며 소리쳤다.“잠깐만요. 옷 갈아 입고 나갈게요.”경훈은 강무진을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했다. 그래서 때로 무진의 말이 부모인 두 사람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어릴 때의 무진은 그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고, 경훈이 늘 숭앙하던 대상이었다.나중에 무진의 부모가 죽었을 때, 경훈은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무진은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고 일어섰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진심으로 탄복한 경훈은 기꺼이 아우가 되어 무진을 따르고자 했다.그래서 매번 무진이 올 때면 최대한 예를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훈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하지연이 아들의 옷 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잊지 않고 당부했다.“우리가 강씨 집안과 관계가 좋긴 하지만 너도 열심히 해야 해. 무진이에게 폐 끼치지 말고, 알았지?”“당연
성연은 반 달 동안 계속해서 연수호 어르신을 치료하였다.어르신의 병세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호전되었으며, 체내에 남은 독도 거의 사라졌다.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걸을 수도 있었다.비록 좀 느리긴 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부지런히 단련하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 터였다.어르신의 변화를 연씨 일가족 모두 눈으로 확인하며, 성연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그전에 많은 의사들을 만나봤던 연씨 가족은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전설 같은 실력을 가진 의사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제자가 이런 실력을 가졌다면, 그 스승은 말해 무엇하랴.하지연이 시아버지 연수호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던 연수호가 말했다.“얘야, 정말 고맙구나.”원래 연수호는 남은 생을 침대에 누워 고통 속에 지낼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그런데 자신을 수렁에서 끌어올릴 사람이 있을 줄이야.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의 성연은 대답이 없었다.잠시 후, 어르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얘야, 우리 연씨 집안이 너에게 큰 신세를 졌다. 앞으로 언제든 네가 찾아오면 우리 집안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연씨 집안의 최고 어른인 연수호의 한 마디는 천금과도 같았다. 군인이었던 연수호의 말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연수호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성연이 감당기에는 너무 무거웠다.처음 왔을 때에도 어르신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르신이 정말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드시면 다음에 사부님께 돌려 드리면 됩니다.”연씨 집안의 보은은 솔직히 말해서 성연의 입장에서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다.요 며칠 이곳에 왔지만, 가족 모두가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그러나 어르신의 치료가 끝나면 자신과 연씨 집안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잘 알았다.어찌 되었든 자신은 가면을 쓴 것이다.맨 처음 왔을 때부터 연씨 집과는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으로 정해져
이날, 성연은 평소대로 연수호에게 침을 놓으러 연씨 저택에 가기 위해 교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교문에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저지당한 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바로 교무주임 선생님이 교문 앞을 지키고 선 까닭이었다.눈살을 찡그린 성연이 주변에 있던 한 학생의 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무슨 일이니?”성연에게 옷을 잡힌 남학생은 성연의 얼굴을 보고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대답했다.“최, 최근에 교무주임 샘이 학생행동 규정을 담당하면서 한동안 점심 시간에 외출을 할 수 없게 됐어.”“그래? 고마워.” 성연이 머리가 아픈 듯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왠지 매우 초조해 보이는 성연의 모습을 본 남학생이 몰래 흘깃거리며 말했다.“너, 너 나가려면 선생님에게 결석계 써달라고 하면 돼.”“아니, 됐어. 고마워.” 성연이 손을 흔들며 교실로 돌아왔다.자신이 정말 나가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심지어 담을 넘을 수도 있고.하지만 성연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녀였지만, 선생님들에게 심어진 이미지가 이제야 간신히 조금씩 바뀌고 있는 있는 참이라 조용히 있기로 했다.연씨 저택에 가는 일도 서두를 필요 없었고.그래서 성연은 어르신 위한 치료시간을 다시 저녁으로 바꾸었다.오후 늦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성연은 연씨 저택으로 쫓아갔다.그런데 집사가 아니라 하지연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성연의 눈에 놀란 빛이 들어찼다.“사모님…….”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하지연이 성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고 선생이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어요.”서로 카톡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평소 하지연은 성연을 귀찮게 해서 싫어할까 봐 일절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순간 성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하지연의 말을 들은 성연은 마음이 복잡했다. 연씨 가족이 진심으로 자신을 이 집의 일원처럼 대하고 있는 듯해서.이들의 과분한 애정이 놀랍고 고마우면서도 연씨 집안 사람들과 너무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