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연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강무진의 커다란 몸이 그녀를 눌렀다. 성연에게 그는 마치 커다란 산 같았다.그는 성연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도 도망갈 수 없게 압박했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그의 몸을 주먹으로 공격했다. 특히, 그의 급소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강무진이 막는 바람에 제대로 공격 한 번 하지 못했다. 성연은 더욱 화가 나 아까보다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의 실력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닌지라, 얼마 후 강무진 또한 당해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 몸의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그는 혹시라도 성연이 상처 부위를 공격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성연이 계속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그는 성연을 몸으로 힘껏 내리 누르며 압박했다.그리고는 커다란 손으로 성연의 두 손목을 수갑을 채우듯 채워 머리 위로 올렸다. 그녀의 두 다리 역시 그에게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커튼이 꼼꼼하게 쳐진 방안은 바람은커녕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가득한 방에서는 아무리 시력이 뛰어난 성연이라 해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진한 남자의 향기가 콧속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성연은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짓눌리고 있자니 너무 불쾌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이런 실력을 갖춘 자가 장애가 있다는 강무진일 리가 없어.’‘설마 강무진 집에 찾아온 손님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대담하잖아?’성연이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지금 당장, 그 손 놔! 나는 강무진의 약혼녀야.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그 손 놓는 게 좋을걸?”성연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곳은 강무진의 집이었고, 그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 혹시라도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 강무진은 오랜만에
강무진은 이런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까닭은 관심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접근해왔다. 그는 그녀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화장품 냄새가 지독히도 싫었다. 매번 그녀들과 스킨십을 시도해보았지만, 채 2분도 안 돼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었고 결국 여자들을 쫓아내고 말았다.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강무진은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는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방안이 다시 고요해졌다.성연은 자신이 이 남자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한 터라, 지금 손을 쓴다 해도 승산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 이 남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했다.위풍당당한 ‘아수라문’의 문주가 남자 하나 당하지 못하다니.이제껏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성연은 ‘세계 용병 랭킹’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했다.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뭐지?그녀는 강씨 집안에 숨은 인재들이 많은 것 같아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싸워서 이길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성연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협박했다.“당신 계속 이렇게 나오면 사람을 부를 거야!”그녀가 막 살려달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입이 막혔다. 깜짝 놀란 성연은 멍하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키스를 해봤다.성연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무진은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깊이 키스했다. 강무진은 지금 이 순간 마음 따위는 상관없이 본능에만 충실하고 싶었다.어차피 이 여자는 자신의 약혼녀 아닌가. 키스하면 안 될 이유가 없었다.길고 긴 입맞춤이 계속됐다.한참 후, 강무진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괜찮은데?”성연이 귓불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강무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복부를 팔로 감싸 안고 있는 그는 한눈에 봐도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송성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아니, 이 사람은?’강무진의 외모는 무척 빼어났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썹과 생기가 가득한 눈빛,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성연은 곧 그가 자신이 폐창고에서 구해준 재수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그녀는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한참을 강무진에게 잡혀 있었더니 온몸이 아팠다. 강무진은 그런 성연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여자애, 나를 알아본 것이 분명해.’‘그런데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자기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기왕 이렇게 된 바에 같이 연기나 하지 뭐.’‘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야.’허리를 짚고 일어난 강무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했다.“당신 남편을 죽일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성연은 깜짝 놀랐다.‘남편이라고?’‘이 사람이 강무진이야?’‘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세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당신, 장애를 가진 게 아니었어요?” 성연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강무진은 침대 맡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떤 의미에서는 장애인이 맞지.”‘엄살이야!’성연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그는 이 어린 여자애가 자신에게 해가 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늘 조심해야 했기에 이번에도 자신의 비밀을 그리 쉽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강무진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조금 전, 너 때문에 다리를 다쳤는데 몇 년간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을 것 같아.”성연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성연은 한참만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녀는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이 사람과 ‘잘’ 이야기해보려고
성연의 말을 들은 강무진은 픽 웃으며 베개에 기댄 채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어떤 말이든 들어줄 수 있지만, 별거는…… 허락할 수 없어.”손건호는 전에 향낭 안의 약물 성분을 조사했는데, 그 중에 유해물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약재가 포함되어 있어서 수면에 도움이 되었다. 불면증 때문에 일에 방해를 받던 그로서는 잠을 잘 자기 위해 그녀가 꼭 필요했다. 송성연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이건 범법이에요.”마치 짐승을 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도 강무진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범법이라고? 내가 단지 내 약혼녀와 한 이불을 덮고 순수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뿐인데?”말은 이렇게 하지만 한 이불을 덮고 누워서 정말 그럴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다. 어쨌든 이 남자는 좀 전의 일로 전과가 생겼기 때문에 성연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농담도 정말 잘하시네요.”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을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문손잡이를 비틀어 보아도 밖에서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힘껏 몇 번이나 당겨 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침대에 걸터앉은 강무진이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으면 소파에서 자도 돼.”침대에 누운 그가 천천히 향낭을 꺼냈다.그리고는 일부러 향낭을 든 손을 흔들며 성연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강무진 손에 들린 향낭을 본 그녀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당신이…….”강무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내가 왜?”성연이 입술을 깨물며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향낭은 역시 이 사람이 가져간 거였다. 그녀는 향낭이 창고에 버려진 줄로만 알았지, 이 남자 손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향낭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것은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때 창고에서 구한 사람이 강무진이라는 것을 인정
“무슨 핑계를 대서든 우현을 돌려보내. 내가 잠들었다고 하든가.”강무진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집사 옆에 서 있던 진우현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이제 잘린 건가?’‘그런 거겠지?’여전히 걱정스러운 집사는 강무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선생님, 오늘 밤은 여기서 묵으세요. 만약 무진 도련님이 또 잠을 이루지 못하시면 화를 내실 거예요.”강무진은 불면증이 올 때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사람처럼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심할 때는 한밤중에 집안 사람들을 죄다 개운 적도 있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된 진우현도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강무진이 침대에 눕자, 성연은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소파에 누웠다.그는 습관처럼 향낭을 꺼내 베갯머리에 놓고 눈을 감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그는 이상했다. ‘이 향낭이 오늘 밤은 왜 쓸모가 없는 거지?’강무진은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마치 뜨거운 물이 끓어오르는 듯 짜증이 나면서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성연도 아직 깨어 있었다.낯선 환경에서 줄곧 경계심을 유지하느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성연이 물었다.“왜 그래요?”강무진의 안색이 매우 나빴다. 잘생긴 얼굴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이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침대 옆의 캐비닛에서 약병을 여러 개 꺼냈다.대부분 두통을 치료하거나 잠을 자는 데 도움을 주는 약들이었다. 성연의 물음에 잠시 멈칫한 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에게 신경 쓸 것 없어. 단지 잠을 못 자는 것뿐이니까.”성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면증 때문에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았다.순간, 떠돌던 소문이 생각났다. 혹시 불면증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난 걸까?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물었다.“혹시…… 잠이 안 와요?”같은 집에 살다 보면 그녀도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기에 그는 숨길 생각이 없
“이제부터 내가 잠잘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머리 좀 가까이해 봐요.” 성연이 소파에서 내려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무진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말을 아주 잘 들었다.성연은 웃음이 터졌다.“정말 날 믿는 거예요?”“잠이 오든 안 오든 지금 나한테는 똑같아.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강무진이 무심한 듯 말했다.그가 정말 편하게 잠들 수 있을지 어쩔지는 성연에게 달렸다.무진을 잠들게 했던 향낭이 그녀의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충분히 능력이 있음이 입증된 터였다. 성연이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믿는다니, 당신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그녀는 환자가 자신을 믿어주니 뿌듯했다.성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기다란 손끝을 두 번 매만진 다음 무진의 관자놀이와 뒤통수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이런 특이한 방법은 그녀 스스로 고안한 것이다. 효과가 탁월해서 장기간 불면증에 시달리는 강무진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강무진의 코끝에 익숙한 약재 향이 감돌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거꾸로 비쳤다.그는 얼굴 주위를 오가는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꼈다.무진의 신경이 점차 느슨해지면서 눈꺼풀이 축 처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깊이 잠들었다.방 안이 고요 속에 잠겼다.성연은 시큰시큰한 손을 흔들며 강무진의 머리를 가볍게 들어 베개 위로 옮겼다.그리고는 그의 손에서 향낭을 빼냈다.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강무진의 경맥에 닿았다.손 밑의 움직임을 느끼던 성연의 안색이 변했다.그녀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경맥에 놓고 자세히 관찰했다.손 밑의 경맥은 규칙적으로 뛰긴 했지만 무척 약했다.경맥이 약해진 원인은 한두 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장기간의 불면증과 정서적 문제, 그리고 오래 복용한 약이 원인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그 속은 텅 빈 것처럼 허약했다.이대로 가면 점점 더 몸이 나
강무진은 밤새 깨지 않고 잠을 푹 잤다. 다음날 성연이 일어나보니, 침대 위의 이불은 가지런히 개켜져 있고, 그는 보이지 않았다.아래층.무진은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어 입에 넣었다.분명 평범한 아침식사인데 우아하게 먹는 그의 모습에는 최고급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느껴졌다.진우현은 무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젯밤 잠은 좀 잤어?”어젯밤 무진이 소동을 피울까 봐, 우현은 밤새 얕은 잠을 잤다.날이 밝아오고 나서야 어젯밤 아무런 소동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잘 잤어.” 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늘 차갑던 그의 얼굴이 오늘만큼은 평온해 보였다.우현은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최면을 걸어도 소용이 없더니, 송성연이 오고 나서는 저렇게 잠을 잘 자다니!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능력으로 그를 잠들게 했는지 꼭 확인해야 했다. 그때, 세수를 마친 성연이 책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발소리를 들은 무진이 고개를 돌렸다.높이 묶은 머리를 다시 땋아 내리고 이마를 드러낸 그녀는 앳된 이목구비가 그대로 드러나며 무척 활기차 보였다.또, 그녀가 입고 있는 교복은 전에 시골에서 입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흰 블라우스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주름스커트를 받쳐 입으니 더욱 생기발랄해 보였다.“좋은 아침입니다!”성연은 강무진의 맞은편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인사했다.우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성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속으로 요새 시골 아이들은 이렇게 생기발랄한가 보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여자아이가 엘리트 의사인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상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진에게 무슨 약을 쓴 겁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잠들게 한 거죠?”성연은 침착하고 분명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대답했다.“약은 쓰지 않았어요. 마사지 방법을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에요.”우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우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강무진이 송성연을 자기 옆에 앉힌 것만해도 희한할 일인데, 지금 자기 손으로 여자를 만져?성연은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라면 더.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뭐예요?”별다른 의도가 없었던 무진은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보고는 잡았던 손을 놓았다.“여기서 학교 다니기가 불편할 거야. 일러 두었으니 앞으로 기사와 함께 통학하도록 해.” 수고를 줄일 수 있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성연이다.“감사합니다.”짧은 감사를 전한 뒤, 돌아섰다.거침없고 시원스러운 동작엔 조금의 어색함이나 머뭇거림도 없어, 마치 자기 집에 있는 모양새다.성연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무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입가엔 느슨한 웃음이 걸려있었다.무진의 눈길은 한참이나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우현은 오늘 연신 놀라는 중이다.접착제처럼 성연의 뒷모습에 달라붙은 무진의 눈을 보며 불만에 찬 목소리로 그 시선을 잘라냈다.“그 정도 봤으면 이제 눈 좀 돌려라. 하, 저 만년 고목에도 꽃이 피는 거야…….”강무진의 성질과 그의 병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무진이 평생 고독하게 지낼 것이라 생각했었다.그런데 자신보다 더 빨리 솔로 탈출이라니!서서히 눈빛을 거둔 무진은 더 이상 성연에 관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곁눈으로 우현을 힐끗 쳐다본 뒤,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불면증의 특효약을 찾았어. 이제 넌 안 와도 돼.”말문이 막힌 우현은 똥 씹은 듯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오랜 시간 의학연구에 전념해 온 인생이 한순간에 부정당한 듯했다. 게다가 이제 실업의 위기에까지 직면했다.‘역시, 친구보다 여자가 먼저인 놈이었어!’한쪽에 섰던 손건호는 잔뜩 풀 죽어 있는 진우현을 보며 속으로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국제적 명성이 자자한 심리학의 대가가 일개 고등학생에게 밀리다니 말이다.자신이 밀린 이유를 진우현은 아직 모를 것이다.좌절에 빠져 허우적대는 진우현의 보기 드문 모습은 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