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핑계를 대서든 우현을 돌려보내. 내가 잠들었다고 하든가.”강무진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집사 옆에 서 있던 진우현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이제 잘린 건가?’‘그런 거겠지?’여전히 걱정스러운 집사는 강무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선생님, 오늘 밤은 여기서 묵으세요. 만약 무진 도련님이 또 잠을 이루지 못하시면 화를 내실 거예요.”강무진은 불면증이 올 때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사람처럼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심할 때는 한밤중에 집안 사람들을 죄다 개운 적도 있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된 진우현도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강무진이 침대에 눕자, 성연은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소파에 누웠다.그는 습관처럼 향낭을 꺼내 베갯머리에 놓고 눈을 감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그는 이상했다. ‘이 향낭이 오늘 밤은 왜 쓸모가 없는 거지?’강무진은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마치 뜨거운 물이 끓어오르는 듯 짜증이 나면서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성연도 아직 깨어 있었다.낯선 환경에서 줄곧 경계심을 유지하느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성연이 물었다.“왜 그래요?”강무진의 안색이 매우 나빴다. 잘생긴 얼굴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이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침대 옆의 캐비닛에서 약병을 여러 개 꺼냈다.대부분 두통을 치료하거나 잠을 자는 데 도움을 주는 약들이었다. 성연의 물음에 잠시 멈칫한 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에게 신경 쓸 것 없어. 단지 잠을 못 자는 것뿐이니까.”성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면증 때문에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았다.순간, 떠돌던 소문이 생각났다. 혹시 불면증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난 걸까?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물었다.“혹시…… 잠이 안 와요?”같은 집에 살다 보면 그녀도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기에 그는 숨길 생각이 없
“이제부터 내가 잠잘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머리 좀 가까이해 봐요.” 성연이 소파에서 내려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무진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말을 아주 잘 들었다.성연은 웃음이 터졌다.“정말 날 믿는 거예요?”“잠이 오든 안 오든 지금 나한테는 똑같아.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강무진이 무심한 듯 말했다.그가 정말 편하게 잠들 수 있을지 어쩔지는 성연에게 달렸다.무진을 잠들게 했던 향낭이 그녀의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충분히 능력이 있음이 입증된 터였다. 성연이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믿는다니, 당신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그녀는 환자가 자신을 믿어주니 뿌듯했다.성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기다란 손끝을 두 번 매만진 다음 무진의 관자놀이와 뒤통수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이런 특이한 방법은 그녀 스스로 고안한 것이다. 효과가 탁월해서 장기간 불면증에 시달리는 강무진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강무진의 코끝에 익숙한 약재 향이 감돌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거꾸로 비쳤다.그는 얼굴 주위를 오가는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꼈다.무진의 신경이 점차 느슨해지면서 눈꺼풀이 축 처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깊이 잠들었다.방 안이 고요 속에 잠겼다.성연은 시큰시큰한 손을 흔들며 강무진의 머리를 가볍게 들어 베개 위로 옮겼다.그리고는 그의 손에서 향낭을 빼냈다.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강무진의 경맥에 닿았다.손 밑의 움직임을 느끼던 성연의 안색이 변했다.그녀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경맥에 놓고 자세히 관찰했다.손 밑의 경맥은 규칙적으로 뛰긴 했지만 무척 약했다.경맥이 약해진 원인은 한두 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장기간의 불면증과 정서적 문제, 그리고 오래 복용한 약이 원인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그 속은 텅 빈 것처럼 허약했다.이대로 가면 점점 더 몸이 나
강무진은 밤새 깨지 않고 잠을 푹 잤다. 다음날 성연이 일어나보니, 침대 위의 이불은 가지런히 개켜져 있고, 그는 보이지 않았다.아래층.무진은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어 입에 넣었다.분명 평범한 아침식사인데 우아하게 먹는 그의 모습에는 최고급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느껴졌다.진우현은 무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젯밤 잠은 좀 잤어?”어젯밤 무진이 소동을 피울까 봐, 우현은 밤새 얕은 잠을 잤다.날이 밝아오고 나서야 어젯밤 아무런 소동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잘 잤어.” 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늘 차갑던 그의 얼굴이 오늘만큼은 평온해 보였다.우현은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최면을 걸어도 소용이 없더니, 송성연이 오고 나서는 저렇게 잠을 잘 자다니!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능력으로 그를 잠들게 했는지 꼭 확인해야 했다. 그때, 세수를 마친 성연이 책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발소리를 들은 무진이 고개를 돌렸다.높이 묶은 머리를 다시 땋아 내리고 이마를 드러낸 그녀는 앳된 이목구비가 그대로 드러나며 무척 활기차 보였다.또, 그녀가 입고 있는 교복은 전에 시골에서 입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흰 블라우스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주름스커트를 받쳐 입으니 더욱 생기발랄해 보였다.“좋은 아침입니다!”성연은 강무진의 맞은편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인사했다.우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성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속으로 요새 시골 아이들은 이렇게 생기발랄한가 보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여자아이가 엘리트 의사인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상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진에게 무슨 약을 쓴 겁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잠들게 한 거죠?”성연은 침착하고 분명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대답했다.“약은 쓰지 않았어요. 마사지 방법을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에요.”우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우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강무진이 송성연을 자기 옆에 앉힌 것만해도 희한할 일인데, 지금 자기 손으로 여자를 만져?성연은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라면 더.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뭐예요?”별다른 의도가 없었던 무진은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보고는 잡았던 손을 놓았다.“여기서 학교 다니기가 불편할 거야. 일러 두었으니 앞으로 기사와 함께 통학하도록 해.” 수고를 줄일 수 있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성연이다.“감사합니다.”짧은 감사를 전한 뒤, 돌아섰다.거침없고 시원스러운 동작엔 조금의 어색함이나 머뭇거림도 없어, 마치 자기 집에 있는 모양새다.성연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무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입가엔 느슨한 웃음이 걸려있었다.무진의 눈길은 한참이나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우현은 오늘 연신 놀라는 중이다.접착제처럼 성연의 뒷모습에 달라붙은 무진의 눈을 보며 불만에 찬 목소리로 그 시선을 잘라냈다.“그 정도 봤으면 이제 눈 좀 돌려라. 하, 저 만년 고목에도 꽃이 피는 거야…….”강무진의 성질과 그의 병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무진이 평생 고독하게 지낼 것이라 생각했었다.그런데 자신보다 더 빨리 솔로 탈출이라니!서서히 눈빛을 거둔 무진은 더 이상 성연에 관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곁눈으로 우현을 힐끗 쳐다본 뒤,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불면증의 특효약을 찾았어. 이제 넌 안 와도 돼.”말문이 막힌 우현은 똥 씹은 듯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오랜 시간 의학연구에 전념해 온 인생이 한순간에 부정당한 듯했다. 게다가 이제 실업의 위기에까지 직면했다.‘역시, 친구보다 여자가 먼저인 놈이었어!’한쪽에 섰던 손건호는 잔뜩 풀 죽어 있는 진우현을 보며 속으로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국제적 명성이 자자한 심리학의 대가가 일개 고등학생에게 밀리다니 말이다.자신이 밀린 이유를 진우현은 아직 모를 것이다.좌절에 빠져 허우적대는 진우현의 보기 드문 모습은 볼
성연은 엠파이어 하우스를 나선 얼마 후 학교에 도착했다.이른 아침, 학교 입구에서 도로변까지 이미 고급차들로 꽉 차 있었다.나란히 세워진 차들은 저마다 헉, 소리 날만큼의 고가라 마치 가격 경쟁이라도 붙은 듯했다.또한 과시하듯 명품 옷을 걸치고 한정판 운동화를 신은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이쯤 되니 안으로 계속 차를 타고 들어가는 게 불편했던 성연은 기사에게 도로변에 차를 세우게 한 뒤, 내려서 교문까지 걸어갔다.빽빽하니 붐비는 학생들 사이를 뚫고 교실에 도착했다.편입생인 성연을 선생님은 맨 뒷줄에 앉게 했다.입학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성연은 우등반에 배정되었다.그런데 의외로 송아연도 같은 반이었다.송아연의 수능 필수 과목들은 썩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등반에 배정될 수 있었던 까닭은 피아노와 무용 특기를 이유로 교장이 배려해 준 결과였다.교실에 들어서자, 모두들 뚫어져라 성연을 쳐다보았다.책상 사이로 지나가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여기저기서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쟤가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그 애야?]이 말이 들리자마자 곧 이어 누군가 또 반박의 말을 뱉었다.[설마, 가짜겠지. 뒷문으로 들어온 게 틀림없어.]모두가 북성남고에 들어오려 안달인 까닭은, 이 학교가 소위 귀족학교이기도 하지만 그 교육 수준이 북성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무엇보다 각종 시험의 출제 문제들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그러니 입학시험으로 학생의 거취를 결정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학교 입장에서는 이 부잣집 자제들의 기를 좀 꺾어서 알아서 물러서는 법을 일깨우고자 하는 면도 있었다.물론 돈으로 들어온 학생도 적지 않지만, 반을 정하고 그에 따른 대우는 철저히 성적에 따를 뿐이었다.송아연과 사이가 좋은 여자아이가 그 옆에서 말했다.“저 신입생, 너랑 같은 성이야. 설마 친척은 아니지?”책과 노트를 정리하던 아연이 성연이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언뜻 경멸의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의
오전 제4교시, 이제 막 편입한 성연은 원래 모범 학생으로 지낼 생각이었다. 적어도 선생님에게는 너무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아야 했다.선생님의 수업은 그냥 수면제였다. 어젯밤 강무진의 수면을 돕느라 밤새도록 잠을 설쳤던 성연은 졸음이 쏟아졌다.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잔뜩 힘을 주었으나, 서로 붙으려는 위, 아래 눈꺼풀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머리가 쿵 하고 한 차례, 또 쿵 하고 한 차례 내려오더니, 결국 사나운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린 채 잠에 빠졌다.공교롭게도 4교시 수업은 우등반의 담임 선생님, 이윤하였고, 수학 담당이었다.마른 체형에 높게 올라온 광대뼈, 등 뒤로 가지런히 내려온 긴 머리카락. 냉정하고 엄격해 보이는 선생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수업 방면과 학생에 대한 요구가 끔찍할 정도로 엄격했다.북성남고의 별종으로 유명한 이윤하를, 학생들은 모두 ‘독사’라고 불렀다.이윤하는 학습 태도가 나쁜 학생을 가장 싫어했다.그래서 그녀의 수업은 설령 시늉만 내더라도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막 칠판에 문제를 판서한 이윤하가 교실을 한 차례 휘 둘러보았다.모두 허리를 세운 채 앉아있는 가운데, 책상에 엎드린 송성연만 유독 눈에 띄었다.‘감히 내 수업에서 자는 사람이 있어?’이윤하의 표정이 착 가라앉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마지막 줄에서 자는 학생, 일어나서 문제에 답한다.”그 말에 모두 속으로 경탄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렇게 간 큰 사람이 있어? 감히 ‘독사'의 수업 시간에 잠을 자?’‘정말 그 용기가 가상하다!’그런데 잠자는 사람이 송성연인 것을 본 모두는 재미있는 연극을 보는 눈빛이 되었다.송성연은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그야말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개중에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거슬려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만점 받아도 뭐 잠 못 자는 건 똑같지 않아?]일부 아이들은 고소한 듯 소곤거리며, 이 만점자가 어떻게 ‘독사'의 분노에 대처할 것인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오로지 송성연에게 망신을 주어 더 이상 이 반에 있지 못하게 할 생각뿐이었던 송아연은 선생님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성연이 아예 못할 거라 생각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했다.아연이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 마. 인제 선생님도 네가 가르칠 셈이야? 차라리 그냥 네가 나가서 강의하지 그래?”팔짱을 낀 성연이 여유있는 태도로 이윤하를 바라보며 말했다.“맞는지, 아닌지는 네가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겠네. 이건 수업 외의 문제야. 고3 기본과정에서는 배울 수 없는, 최소한 대학 과정의 문제야. 내가 잠을 잔 건 확실히 문제들이 너무 간단해서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성연의 말이 떨어지자 교실 안은 온통 떠들썩해졌다.교육 경력 십여 년의 이윤하는 최우수 교사였다.시골에서 전학 온 송성연이 오만방자한 말로 이윤하의 위엄을 도발했다. 또 자신의 분수를 제대로 아는 그런 겸손함이 전혀 없었다.원래부터 시골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반 학우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송성연은 조금도 겸손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서도 반성할 줄 몰랐다. 성연에 대한 혐오감이 한 층 더 깊어졌다.반 학우들의 반응에 아연은 매우 만족했다.이게 바로 그녀가 원했던 결과였다.이제 송성연이 계속 이 교실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학생들 앞에서 실력이 드러난 이윤하는 체면이 땅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이윤하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지켜보는 자신의 수업에서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도망가는 쪽을 선택한 이윤하는 핑계거리를 찾아 송성연을 교실에서 내쫓았다.“맞든 틀렸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수업시간에 잠을 잠으로서 수업 분위기를 해쳤어. 그러니 그 벌로 복도에 나가 서 있어. 내가 부르기 전에는 들어올 수 없다!”“그리고 또 넌 학습 태도가 단정하지 않아. 내가 네 보호자를 불러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이야기를'이라는 말을 할 때, 이윤하는 일부러 발음에 힘을
방과 후, 이윤하는 성연을 교무실로 불렀다.교편을 잡은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거역하는 학생은 없었던 터라 정말 체면이 서지 않았다.기록해 둔 보호자 연락처를 뒤져 송성연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무료한 듯 발끝을 쳐다보던 성연은 전화를 건 대상이 송종철인지 임수정인지 알 수 없었다.아마 그들 둘 다 창피하다며 오지 않을 것이다.아무도 안 오는 게 오히려 덜 성가실 터였다.오지 않게 해야 한다. 그때는 또 한바탕 비난과 조롱이 쏟아질 것이다.송종철의 가족은 하나같이 모두 체면을 목숨처럼 여겼다.일의 과정이 어떻고 누가 잘못했고 등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 이들이었다.만약 송종철이 정말 온다면 또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는 성연이었다.통화를 마친 이윤하 또한 성연을 보지 않았다. 일부러 성연을 한쪽에 둔 채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교안을 보는 척했다.만약 지금이라도 성연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굳이 억지로라도 보호자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한참을 기다렸어도 송성연에게서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곁눈질로 쳐다보니, 송성연은 처음 그 자리에 건들거리며 서서는 옆 자리 선생님의 교안에 대해 중얼거리고 있었다.순간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부러뜨릴 뻔했다.‘아, 가르쳐서 될 아이가 아니야!’약 20여 분이 지난 후,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돌아본 성은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송씨 집안에서 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강무진이었다.손건호가 미는 휠체어에 단정히 앉은 강무진이 교무실로 들어왔다.이윤하도 강무진을 보았다.휠체어에 앉았어도 강무진이 내뿜는 기세는 여전했다.마주한 남자는 맑고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볼록한 눈썹 뼈 아래 자리한 두 눈동자는 얼음처럼 시리고 아름다웠으며, 얄팍한 입술은 냉기를 품은 듯 다물려 있었다. 온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은 단지 저 휠체어에 앉아 있을 뿐임에도 강한 위압감을 주었다. 전신에서 고귀함이 흘러 넘쳤다.이윤하
지금의 성연은 고귀한 기질로 바뀐 데다가 날카롭고 노련해서 조금도 얕잡아볼 수 없었다.특히 칼처럼 예리한 눈빛은 가볍게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두 녀석이 차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자, 성연의 눈빛은 멀리 차창 바깥의 풍경을 향했다.‘5년의 시간이 지난 뒤, 운성에 돌아왔어.’...별장에 도착한 뒤, 성연이 여전히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 때, 두 녀석은 거실에서 재잘거리면서 떠들었다.갑자기 사무의 곁에 다가온 사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엄마가 이번에 우리를 데리고 온 게 아빠를 찾으러 온 걸까?”사진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초롱초롱한 맑은 눈을 깜박거렸다.‘아빠...’사진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한 사람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빠를 찾으러 왔다니 꽤 기대가 되는데.’‘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그러나 다음 순간 사무가 바로 말을 끊었다.사무의 작은 얼굴은 또래의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함과 침착함을 갖추고 있었다.“그렇지 않아.”미간을 약간 찌푸린 사무는 어른스럽게 사진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앞으로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돼. 아빠는 이미 죽었다고 엄마가 말했잖아!”사진도 ‘흥’ 코웃음을 치면서 포동포동한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니야,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아빠는 죽지 않았어!”눈동자를 굴리며 궁리하는 사진의 표정에서는 총명함이 그대로 드러났다.“오빠, 방금 서한기 아저씨의 말을 못 들었어?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이건 틀림없이 아빠가 안 죽었다는 거야.”방금 잠이 들었지만, 꼬마는 어렴풋이 어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사진은 큰 눈을 깜박였다. 마치 내가 이런 놀라운 발견을 했으니, 빨리 나를 칭찬해 달라는 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여동생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무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아니야. 사진이 네 말처럼 그런 게 아니야.”사진은 또 한바탕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이렇게 서로의 말을 인
5년 후, 운성 공항.한 여자가 두 아이와 함께 공항을 나오고 있었다.이마를 드러내고 새까만 긴 머리를 뒤로 둘둘 만 헤어 스타일에 연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에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옅은 미소를 담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아주 세련된 모습이었다.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5년이나 되었구나.” 성연이 마침내 다시 돌아온 것이다.“엄마, 여기가 운성이에요?” 옆에 있던 어린 소녀가 더욱 어린 느낌이 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성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작은 턱을 들고 마치 어른처럼 말했다.“맞아, 여기는 운성이 분명해. 운성이 아니라면 엄마가 왜 우리를 데리고 왔겠어?”송사무가 진지한 모습으로 정확하게 분석했다.“사진아, 너는 정말 바보야!”송사진은 말없이 입만 삐죽거렸다.송사진은 뽀로통한 작은 얼굴에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항변했다.“나는 바보가 아니야!”두 꼬마의 재잘거리는 모습을 본 성연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됐어, 계속 싸우면 너희들 모두 공항에 버리고 갈 거야.”‘이 두 장난꾸러기는 조금만 의견이 맞지 않아도 다투니 정말 골치 아파.’이 말이 나오자, 두 꼬마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바로 그때, 한 남자가 이들에게 다가왔다. 성연을 바라보는 눈에는 공손함이 가득했다.눈동자를 반짝이며 성연의 앞으로 걸어온 남자가 말했다.“보스!”말을 하면서 앞장서서 성연의 짐을 받았다. 그동안 줄곧 성연의 곁을 따라다녔던 서한기는 5년 동안 국내에서 줄곧 성연을 기다리고 있었다.성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가볍게 대답했다.“내가 시킨 일은 다 했어?”서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했다.“보스, 전에 지시했던 일들은 이미 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신그룹 빌딩은 이미 완공되었습니다.” “보스의 요구대로 산중턱의 별장도 구입했고, 수리도 다 끝났습니다.”보고를 듣고 난 후 성연의 표정
집에 돌아온 성연은 무진과 함께 느긋하게 차를 마실 생각이었다!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무진은 시종 연락이 없었다.걱정이 된 성연이 무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빠서 그런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오후 내내 연달아 전화를 걸고, 카톡을 보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갑자기 긴장한 성연은, 손건호와 서한기에게 연락해서 가능한 한 빨리 무진을 찾도록 했다.저녁이 되어서야 별장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된 서한기가 성연에게 소식을 알렸다.“괜찮아, 그 여자에게 알려도 돼!”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는 서한기를 마주하고도, 예민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무진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무진의 두 눈은 여전히 공허했지만, 예민주를 보면서 진지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민주야, 네가 함께 있으니 정말 좋아!”서한기는 이런 모습을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보스가 예민주를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면서, 심지어 아내라고 부르는 거지?’성연과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서한기는 차마 이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서한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빨리 말해! 무진 씨는 괜찮아?] [급해 죽겠는데 뭐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성연이 다급하게 재촉했다.그러나 서한기는 정말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때 또 무진이 예민주를 ‘여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서한기는 자기도 모르게 예민주를 향해 화를 냈다.[예민주 씨, 도대체 보스에게 무슨 짓을 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강 대표님은 당신 선배의 남편이야!][서한기, 무슨 소리야? 너 제정신이야? 감히 민주에게 이렇게 고함을 치다니?]무진은 돌연 서한기를 노려보더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예민주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인다고 나무랐다.그 말을 들은 서한기는 온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아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성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쓰러질 정도로 아팠다손건호가
종업원은 그 알약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변화시킬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예민주는 친구가 위가 좋지 않은데도 매번 커피를 마시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데, 이 약을 커피에 넣으면 위장을 보호할 수 있다고 종업원을 속였다.무진은 평소의 한가한 정취는 전혀 없이 단숨에 커피를 다 마셨다. 단지 빨리 해독제를 얻어서, 아내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5분도 안 돼 커피를 다 마신 무진이 예민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이제 해독제를 줘야겠지? 그리고 내 기억 상실은 도대체 또 어떻게 된 일이야?”“그래요, 해독제를 줄게요.”말을 마친 예민주는 가방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낸 뒤 알약 하나를 무진에게 건네주었다.사실, 이 알약은 전혀 상관이 없다. 예민주가 연구하다가 실패한 불량품일 뿐, 해독제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예민주가 허세를 부리는 이유는, 커피 속의 약이 효과를 발휘해서 무진이 깊은 잠에 빠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의 기억 상실 현상은 앞으로는 없을 거예요. 그건 단지 내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향기 중 하나로 만들었을 뿐이에요.”예민주는 완전히 사실을 왜곡해서, 자신의 몸에서 나는 고혹적인 향기를 무진의 기억 상실 원인이라고 말했다.알약을 받던 무진은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테이블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곧 마음속으로 크게 경계하면서 예민주를 바라보았다.예민주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더욱 득의양양해서 조롱하듯이 눈빛을 반짝였다.“무진 오빠, 이제 말해 줄게요. 방금 오빠는 더 심각한 독을 먹었어요! 이 독은 오빠로 하여금 평생 송성연을 완전히 잊게 해 줄 거예요!” “그리고 오빠는 단지 오늘부터 내가 오빠 아내고, 오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 예민주라는 것만 기억하면 돼요!”무진은 이미 천지가 빙빙 도는 상태인 데다가 속도도 빨라서, 반항할 기회도 전혀 없었다.무진의 눈앞에서 주변의 모든 것이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점차 변화했고, 무지개 같은 흐름이 결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여전히 오랫동안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7명의 임원들을 전부 강씨 가문으로 보냈어요.” “당신들이 예씨 가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기를 희망하면서요!”예민주는 차갑게 무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예민주는 무진에게 거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무진의 각진 얼굴과 그 그윽한 눈동자를 보면서, 예민주의 마음속 분노는 사라지고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그럼 우리 예씨 가문이 당신네 강씨 가문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할머니는 심지어 아버지에게 앞으로 당신과 나를 결혼하게 하겠다고 약속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당신의 할머니는 이 일을 잊어버린 것 같더군요!”‘예민주가 자신의 가장 큰 집념을 완전히 드러냈어.’‘원래 자신이 해야 할 아내의 역할을 선배인 성연에게 뺏겼다는 거지.’‘이 세상의 인연이 바로 이렇게 황당하고 웃기지도 않다니.’사건을 다 듣고 난 뒤에, 무진은 한참 동안 침묵한 채 말이 없었다.결국 무진은 예민주를 바라보면서 약간 누그러진 말로 물었다.“당신이 말한 걸 나는 확신할 수가 없어. 적어도 내 부모님이 가문을 그런 위기에 빠뜨리고, 결국 예씨 가문까지 연루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흥! 믿든 말든!” 차갑게 코웃음을 치면서, 예민주는 몹시 화가 난 눈빛으로 무진을 쓸어 보았다.그때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오자, 커피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예민주는 커피를 들고 냄새를 맡던 예민주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정말 좋은 향이야. 정통 블루마운틴 커피네.”“그래, 알겠어. 완전히 이해했어! 그럼, 성연이에게는 도대체 무슨 독약을 쓴 거야? 해독제는 있겠지.” “그리고 이렇게 내 기억이 깜빡하는 상황 역시 당신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무진이 문제의 핵심을 꺼냈다.그러나 예민주는 한바탕 차갑게 웃었다.“하하하,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무진 오빠, 당신네 강씨 가문은 우리 예씨 가문에게 그렇게
얼이 빠진 무진이 예민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말해! 네 아버지 예중천이 어떻게 우리 강씨 가문의 은인이 된 건지!”예민주는 마치 그때의 아버지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처럼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바로 당신네 강씨 가문의 은인이지요! 그 때, 당신의 부모님과 우리 아버지는 그야말로 막역한 친구였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에게 소개한 거예요.” “일찍이 강씨 가문과 예씨 가문은 각각 남쪽과 북쪽에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호응해서 동맹을 맺었지요. 사업에서는 줄곧 두각을 보이면서, 두 가문 모두 점차 유니콘 같은 기업이 될 수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순조롭게 예씨 가문의 가주 지위를 계승한 뒤에는, 당신네 강씨 가문과 더욱 많이 협력했지요!”“당신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때는 북쪽의 도시들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고, 지금처럼 남쪽의 경제도 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 아버지는 여러 방면에서 당신 부모님을 도왔어요.”“다만 너무 급하게 자신을 증명하려던 당신의 아버지가, 사사로이 유럽의 한 조직과 협력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요.” “확실히 처음에 당신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벌면서 강씨 가문을 키웠어요. 그러나 나중에...”갑자기 말을 멈춘 예민주가 복잡한 눈빛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할머니도 더 이상 언급하기를 꺼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무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나중에, 당신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다년 간의 주문 계약을 체결했어요.” “원자재의 가격이 갑작스럽게 오르자, 당신의 아버지는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 조직과의 협력 관계를 파기하려고 했다가 배신을 당한 거예요!” “당신네 강씨 가문은 그 조직에게 철저한 미움을 사게 됐어요! 이것이 바로 모든 사건의 시작이에요!”“그 조직에서는 당신 부모님께 손을 쓰기 위해서 여러 국적의 킬러들을 사들였어요! 당신의 부모님은 그야말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된 거예요. 알겠지요?” “우리 아버지는 그
병원에서 성연은 검사를 모두 마쳤다. 산부인과의 경험 많은 여의사가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성연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태아의 위치는 여전히 정상이에요! 검사 결과를 보면 탯줄이 목을 감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상황을 잘 유지하면, 두 녀석 모두 건강해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의사의 미소는 아주 감화력이 강해서, 성연의 걱정을 단번에 깨끗하게 사라지게 했다.‘하긴 이상해. 나도 의사지만 이쪽에서는 다른 사람이 긍정적인 말을 해야 안심할 수 있어.’의사에게 감사를 표한 성연은 병원을 나온 뒤 무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여보, 나는 검사 다 마쳤어요. 모든 게 다 좋다고 해요. 너무 바쁘게 일하지 말고 점심 먹는 거 꼭 기억해요!] [그리고 병원에 가서 머리 검사하는 거 잊지 마세요!]커피숍 입구로 걸어가던 무진은 핸드폰을 보고 아내에게 답장을 보냈다.[여보, 난 다 괜찮아. 병원에 가서 검사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어!] [검사가 끝나면 함께 차를 마시러 가자!]답장을 본 성연은 행복감에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커피숍에 들어선 무진은 단번에 예민주를 발견했다.무진이 다가가자, 예민주가 종업원을 불러서 주문했다.“블루마운틴 두 잔요. 설탕하고 우유 넣지 말고요!”“네, 잠시만요!” 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예민주의 맞은편에 앉아서, 무진은 숙연한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커피는 무슨 커피야. 겉으로 전혀 무해해 보이는 이 여자에게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지만 알고 싶을 뿐이야.’“간단하게 말해 봐. 넌 도대체 누구야? 정말 예중천의 딸이 맞아?”무진은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곧바로 물었다.“호호, 무진 오빠, 왜 나를 이렇게 사납게 대하는 거예요? 저는 좀 무서운 걸요!” 예민주는 여전히 가장하고 있지만, 무진의 눈빛은 오히려 더 싸늘해졌다.무진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세에 넋이 나간 듯이 자기도 모르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그날 밤. 별장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자, 예민주는 아예 일어나서 트렁크안의 병과 단지들을 꺼내서 또 주무르기 시작했다.이번에 예민주는 바로 15일치 분량을 전부 하나의 알약으로 만들었다.무진이 이 알약을 먹고 다시 깨어나게 되면 모든 기억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그리고 예민주가 그때 무진의 곁에서 모든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을 도와서, 성연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어야 했다.불빛 아래서 옅은 갈색을 띤 알약은 독한 냄새를 풍겼다. 예민주의 눈에서는 음산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날이 밝자, 넓은 침대에 누워 있던 성연은 제멋대로 몸을 뒤척였다. 침대가 이렇게 부드럽고 편안해서 수면의 질이 특히 좋았다.무진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성연이 일어나자 하인들이 세면 도구를 가져왔고, 주방 아주머니가 공손하게 말했다.“사모님, 아침식사는 이미 준비되었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세수를 마치자, 갑자기 뱃속이 한바탕 뒤척이는 걸 느꼈다. 두 녀석도 잠에서 깬 듯 힘껏 몸부림치고 있었다.‘마치 세탁기처럼 구르면서 정말 한껏 몸부림치네.’성연은 아기가 너무 소란스럽게 움직이다가 자칫 탯줄이 목을 감는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의사가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좀 긴장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곧 평정을 되찾았다.아침을 먹고 나자, 손건호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보스께서 오늘은 사모님이 검사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알았어! 지금 갈게.”손건호는 성연이 흔들리지 않고 차내의 쾌적함을 유지할 수 있게 아주 천천히 운전했다.이때 예민주는 이미 WS그룹빌딩의 아래층에 도착했다.그녀는 우뚝 솟은 빌딩을 쳐다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곧 내가 이 거대한 빌딩의 여주인이 될 거야! 지금 강무진에게 그 알약을 먹게 만들기만 하면 돼.’물론 무진이 반드시 자신을 만나러 나올 거라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무진 오빠, 저 예민주인데요. WS그룹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전화를 건 예민
바닷가의 별장에 솔솔 부는 해풍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5층 베란다의 벤치에 앉은 성연은 온몸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거대한 발코니 바로 아래는 수영장이고 주위는 온통 풀밭이다. 입구에서 별장까지는 긴 길을 따라서 가야 했다. 이 부지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몰랐다.“고생했어요, 여보! 이제 매일 출퇴근하는 거리가 많이 멀어졌네요!” 무진이 손에 칵테일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고개를 저은 무진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나는 회장이니까 아무 때나 출근해도 돼. 게다가 차도 마이바흐로 바꿨으니까, 자면서 회사까지 갈 수도 있어.” “아무 영향도 없어. 당신의 기분이 좋아지는 게 가장 중요해!”고개를 숙인 무진이 성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딥 키스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 또 빠져들면, 분명히 곤란해질 것이기에.성연은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곳은 원래 살던 빌라보다 시설도 더 완비되었고 공간도 더 넓어서, 확실히 가슴이 탁 트이면서 기분이 좋았다.물론 주방 아주머니와 하인들도 다 따라왔다. 성연의 입맛을 잘 알고 있고 게다가 임신기의 주의사항도 알고 있어서, 무진이 따로 조치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손건호도 당연히 같이 와서 지내면서, 진성의 대원 10여 명을 배치해서 주변의 경비를 책임지게 했다.전반적으로 말해서 이곳은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다.“막내 사매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매는 항상 좀 진실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프로방스에서 사매를 만났던 그 날, 내가 왜 그렇게 쉽게 믿었는지 모르겠어요!”예민주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성연에게 일어났다. 예민주가 성연에게 세 번의 약물을 먹였던 때가 마침 성연의 임신했을 때였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사람의 기억 인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지만, 성연의 몸에서는 배척당하면서 약효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그래서 성연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었다.이에 고무된 무진이 아예 대놓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