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투약한 다음 날 아침, 안금여가 깨어났다.서서히 눈을 뜨며 깜빡거렸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지며 청명해졌다.“엄마, 깼어요? 지금 기분이 어때요?” 운경은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안금여의 상태를 확인하며 바라보았다.딸의 목소리를 들은 안금여가 고개를 돌려 딸을 한 번 보았다.“괜찮아.”깨어난 안금여는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했다. 이제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흥분한 운경은 어쩔 줄을 몰라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그럼 엄마,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딸을 알아본 표정을 지은 안금여가 기대에 찬 운경에게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내 딸을 내가 못 알아볼까 그래?”지금까지 참아왔던 눈물이 운경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안금여의 손을 붙잡았다.“엄마, 엄마, 절 알아보시는 거예요. 못 일어 나실까 걱정했어요.”안금여가 운경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이 아이들 모두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효심을 다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마음이 뿌듯함으로 충만했다. 모두 자신이 키운 아이들이었다.할머니가 회복된 것을 확인하자 운경의 뒤에 서 있던 무진의 미간이 서서히 풀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오래 동안 노력하는 건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만, 다 큰 애가 울면 어떻게 하니? 무진이도 있는데 나중에 창피해서 어쩌려고 그래.” 살짝 핀잔을 준 안금여가 휴지를 꺼내 운경에게 건넸다.“엄마, 그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드디어 일어나셨으니 한시름 놓았어요.”운경이 눈물을 닦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회사에 아무리 큰 위기가 닥쳤어도, 무진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흔들림 없었던 그때보다 더 힘든 시간들이었다.하지만 그 힘든 날들을 모두 견뎌냈다.가까스로 긴장을 풀 수 있게 된 운경은 이제부터라도 엄마가 여생을 평안히 누리시길 진심으로 바랬다.‘한평생 힘들게 사셨으니 이제라도 잘 돌보아 드려야지.’“아이고, 아직도 울 게 더 남았어?”
“감사하실 필요 없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인 걸요.” 할머니의 감사인사 한마디에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보답을 받은 기분이었다.안금여 또한 자신에게 무척 잘해 주지 않았는가. 그런 안금여의 선의에 보답하고 싶었을 뿐.부드러운 눈빛으로 성연을 바라보던 안금여가 운경을 쳐다보고는 가라앉은 표정을 지은 채 나지막한 음성으로 꾸짖었다.“운경아, 너는 하루 종일 이것저것 의심하느라 피곤하지도 않아. 나를 이렇게 열심히 돌본 성연이한테 그렇게 밖에 말을 못해? 정말 한심하구나?”운경이 입을 열어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확실히 그녀의 말의 좀 독단적이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성연이 나쁜 마음을 먹었는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나.운경이 말을 못 하고 있자 옆에 있던 성연이 입을 열었다.“할머님, 고모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고모님도 할머님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걸요. 제가 좀 신중하지 행동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미리 고모님에게 이런 치료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했었는데 오해가 좀 있었어요. 고모님이 말 한 게 모두 맞아요.”안금여는 이미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성연은 이전의 일을 왈가불가 따지고 싶지 않았다.앞으로 좀 더 강씨 집안에서 지내야 하니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가 있고 싶지 않았다.그리 대범한 편은 아니지만 몇 번을 생각한 끝에 운경을 위해 말을 거들기로 판단한 것이다.반대로 운경은 성연이 자신을 거들어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심지어 무진조차 자신을 탓하고 있었는데 말이다.그런데 외려 성연이 도량이 넓고 옹졸하지 않았다.성연이 자신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엄마가 깨어났으니 분명 운경 자신에 대해 일러바칠 거라고 생각했었다.하긴 자신이 사소한 일을 확대시킨 점도 있어 엄마가 뭐라고 말해도 듣기만 하던 참이었다.하지만 성연이 이 아이가 지금 이처럼 도량이 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운경은 성연을 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성연아, 미안해 방금 말을 실수했어. 내가
안금여가 좋아지자 강상철과 강상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화가 나 이마에 핏줄이 섰으며 온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강상철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놓으며 호통을 쳤다.“애초에 회장님이 절대 회복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어?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요즘 정말 하는 일마다 순조롭지 않았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강일헌도 믿기지 않는지 분노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일을 위해 1억이나 써가며 공들였는데, 후회가 밀려왔다.“할아버지, 애초에 그 사람이 제게 말하기를 절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어요. 그리고 설사 회복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빠르게 회복지는 몸한다고요.”약을 주기 전에 자신에게 약의 효과에 대해 얼마나 허풍을 떨었냔 말이다.자기들 연구소의 아주 대단한 성과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없을 거라고 하더니. 강일헌은 지금 화가나 참을 수가 없었다.‘해독 할 수 없기는 개뿔! 일주일도 안 돼서 해독이 되었잖아? 내가 그 새끼 허튼소리에 속아 넘어가다니!’“그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 할 건데. 회장님이 회복되셨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거야?” 강상철은 화가 나서 목소리마저 음산했다.강일헌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수 십년 동안 할아버지가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강상규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형님, 이 일은 일헌이 탓이 아닙니다. 일헌도 우리를 도와 일을 잘 하려고 한 거고요. 일헌이 이런 것에 대해 잘 몰라 속은 것 같네요. 그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겁니다.”“하루 종일 멍청한 짓이나 하고, 사람 하나도 제대로 못 알아보고 사기나 당하고. 이것 밖에 못해?” 강상철이 온몸을 떨어가며 화를 냈다.‘큰 집이 비어있는 틈을 이용해 철저히 준비했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다니.’“형님, 회장님 정말 괜찮은게 맞을까요? 저는 그들이 회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유언비어를 퍼뜨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정말 치매에 걸렸던 형수 안금여가 그런대로 효과 있는 약 때문에 조금
강일헌은 머리를 써서 그 약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지 않았다.이전에 그에게 약을 줬던 왕명식에게 전화해서 그 약이 아주 유용하다며 다시 큰 거래를 하고 싶다는 말로 불러 내었다.예상대로 1시간 후에 왕명식이 클럽에 나타났다.화가 난 강일헌이 재빠르게 다가가 팔로 목을 조인 채 뒤로 끌고 갔다.왕명식이 곧 소리를 질렀다.“뭐야, 왜 그래, 강일헌? 무슨 일인데 그래? 놓고 말해. 나랑 거래하겠다면서? 날 죽일거야?”강일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룸안으로 끌고 들어 갔다.그런데 룸 안에는 강상철과 강상규가 같이 앉아 있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들어 보려고 같이 온 것이다.룸에 도착하자 강일헌이 손을 풀었다. 몰래 강일헌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왕명식의 눈에 자리에 단정히 앉은 두 노인이 보였다.강씨 가문의 강상철과 강상규는 큰형인 강상중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명성이 자자했다.북성에서 누가 그들을 모르겠는가?그들이 뒤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뿐. 당연히 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다행히 방금 욕설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왕명식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이다.앞으로 다가간 왕명식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 “강상철 사장님, 강상규 사장님, 안녕하세요.”그의 공손한 태도에 강상철과 강상규의 마음이 좀 풀렸다.“안 본 사이에 철이 들었구나.”“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왕명식이 웃으며 말하자, 순간, 강상철의 안색이 바로 변했다.“무릎 꿇어!”“네…… 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왕명신은 일이 갑자기 왜 이런 험악한 방향으로 흐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무릎을 꿇으라면 꿇어야지. 묻는 말에 대답 잘해.” 강일헌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눌렀다.앞에 있는 두 어르신을 보면서 왕명식의 마음이 가라앉았다.‘일 얘기면 일 얘기지, 왜 굳이 무릎까지 꿇으라고 그래?’그러나 왕명식은 내색 없이 반쯤 무릎을 꿇었다.
안금여가 정신을 회복한 후, 성연은 할 일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충분한 수면 시간을 가지며 예전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히 게으른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었다.그리고 때마침 성연의 18세 생일 겸 성인식이 다가오고 있었다.성연은 안금여의 눈에 들어 아주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성인식은 아이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해주는 중요한 날이니 만큼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지금 집에는 운경과 안금여 두 사람만 있었다.죽을 다 먹은 안금여가 운경에게 말했다.“성연의 성인식이 곧 다가 오지 않니? 융성하게 치러 줘야지. 그 아이를 서운하게 해서는 안돼.”그때 성인식을 하는 김에 성연의 신분도 발표할 생각이었다.진작 마음속으로 성연을 손자며느리로 인정한 안금여이다.운경이 질투하는 척 투덜거리며 말했다.“엄마, 성연이 그 애가 그렇게 좋아요?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주지도 않으면서.”“너 좀 부끄러운 줄 알거라. 넌 어른이야. 성연이가 너보다 더 철이 든 것 같아. 성연이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날 돌보았는데도 넌 그 애한테 어떻게 했니? 애를 오해해서 서운하게 하지 않았니? 이번에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너 앞으로 성연이를 볼 낯이나 있겠니?” 안금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자신의 손자 며느리인 성연의 신분은 자연히 비할 데 없이 귀했다.‘이번 성인식을 통해 외부에도 성연의 얼굴도 알려야지.’‘어느 누구도 함부로 성연을 대하지 못하도록 말이야.’만약 누구든 강씨 가문의 사람으로 약정된 성연에게 무슨 짓이든 하려 할 땐 반드시 자신의 힘부터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엄마는 그래서 내가 사과했잖아요?” 안금여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훈계를 들은 운경이 당황했다.자기 보다 한참 어린 아이 때문에 한참이나 꾸지람을 듣게 되자, 정말 창피했다.“네가 성연에게 한 말들이, 가벼운 사과 몇 마디로 넘어갈 수 있겠니? 성연이 속이 깊으니까 별말 안 했지. 난 그리 쉽게 용서해 줄 생각 없어.” 안금여가 딸을 노려보
연구할 필요도 없어진 데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성연은 보건실 쪽으로 잘 가지 않았다.가끔씩 가서 잠만 잘 뿐이었다.서한기가 준비해 준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누운 성연은 온통 부드러운 구름 속에 빠진 듯 편안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다른 방면에서는 별다른 요구가 없는 성연이지만 잠자는 장소만큼은 반드시 편안한 곳을 고집했다.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을 제외하고 성연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바로 잠이었다.서한기는 의자에 기대어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단톡 방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 받으며.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냈다.채팅 내용을 보던 서한기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나른하게 누웠 있던 성연이 눈꺼풀을 들어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웃고 있는 거야?”난데없는 성연의 질문에 서한기가 깜짝 놀랐다.가볍게 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성연 앞으로 다가가 눈을 찡긋거렸다.“보스, 잊었어요? 보스 곧 열 여덟 살이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 조직 멤버들이 단톡 방에 모여 보스를 위한 생일파티를 상의하고 있었어요.”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성연의 리더십은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었다.수하들 대부분이 성연에게 은혜를 입고 기꺼이 그녀의 곁을 따르는 이들이었다.겉으로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이지만, 사실 친구라 해도 무방했다.성연이 내리는 지시를 어느 누구 하나 거절하지 않고 따랐다.성연이 하품을 했다.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이제 곧 18세였지만 평소에 맞는 생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기대하는 바도 딱히 없었다.외할머니가 계실 때면 미역국 한 그릇을 끓여 주시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외할머니가 안 계시니 생일을 보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성연의 조직 ‘아수라문’의 멤버들은 시끄럽고 어수선하기로 유명한데, 그들이 자신의 생일파티를 해준다고 상상하자 눈 앞이 깜깜해졌다. ‘현명한 결정이 아닌 것 같은데?’성연이 강하게 거부했다.“필요 없어. 자기 일들이나 잘 하라고 그래. 하루 종일 빈둥거릴 생각은 말라 그래.
눈 깜짝할 사이에 성연의 생일날이 다가왔다.안금여는 퇴원했다. 옷장 안에 들어있는 상자를 열어 치마 아래에 금박이 붙은 자주색 한복을 꺼내 입었다. 병원에서 휴양하고 있는 동안 많이 좋아진 혈색 탓에 자주색 한복을 입으니 더 품격 있고 우아해 보였다.상당히 정성 들여 곱게 치장했다.고택 내부의 대형 홀을 개방하여 연회장으로 꾸몄다. 북성 거물들은 모두 연회에 초대했다.초대받은 이들 모두 북성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었다.고급세단들이 길가에서부터 고택 입구까지 줄지어 늘어섰다.고택 뒤를 둘러싼 일대 전체가 강씨 가문 소유였다.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주차장, 개인 영역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주변이 모두 개인 소유이니 마음대로 주차한들 아무도 관여할 수 없었다.강씨 가문의 고택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곳으로, 원래는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이었다. 이후 리모델링을 통해 동서양의 건축 스타일을 결합시켜 아름다운 오늘의 고택이 된 것이고. 멀리서 바라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눈이 즐거워졌다.강씨 집안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경우에만 초대장을 보내 사람들을 고택으로 초대했다.그만큼 안금여가 성연의 성인식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 알 수 있었다.연회장은 운경이 직접 꾸몄다.매일 시간을 내서 진행 상황을 직접 확인하며.안금여가 계속 신경 쓰라 다그치기도 했지만 운경 자신도 한 점 실수 없이 성연의 성인식을 준비하고 싶었다.어쨌든 성인식은 한 아이의 일생에 정말 중요한 날이기도 하니까.성연이 치렁치렁한 걸 싫어하지 않을까 싶은 운경이 사진 견본을 안금여에게 보여주며 상의하기도 했다.안금여는 소녀라면 당연히 몽환적인 핑크색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운경에게 연회장을 온통 핑크색으로 장식하라 일렀다.하지만 운경의 의견은 정반대였다.성연은 평범한 여자애들과 달리 핑크색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운경과 안금여의 의견이 엇갈리며 이 때문에 하마터면 싸울 뻔하기도 했다.물론 안금여가 일방적으로 화내는 것이었지만.
불현듯 어떤 예감이 든 성연이 입을 열어 뭔가 물어보기도 전에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등이 우르르 달려들어 성연을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얼른 일어나려 하는데 큼직한 손이 성연의 작은 어깨를 덮었다.“왜 일어나?”이어 무진의 음성이 들리자 성연이 입을 삐죽였다.“이거 뭐예요?”“오늘 네 열 여덟 성인식이 있을 거야. 스타일링 끝나면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자.”담담하게 들리는 음성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뭍은 듯하다고 느껴졌다.성연의 예쁜 얼굴이 온통 짜증났음을 감추지 않았다.“필요 없다고 했잖아요?”“할머니 의견이야. 나랑은 상관없다고.” 물론 무진은 막지 않았지만,지금 완전히 오리발 내미는 격이었다.무진의 말에 성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두 거절했을 테지만, 할머니 안금여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할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하시는 거니까.“이 스타일리스트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 일이 있으면 전화해. 밖에 나가 있을게.” 무진이 밖으로 나갔다.성연은 의자에 앉아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얼굴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작은 사모님 피부가 정말 좋으시네요. 베이스는 가볍게 해도 되겠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성연의 깨끗한 피부를 보고 부러워했다.메이크업을 업으로 하는 프로들이니 얼마나 다양한 피부를 봐 왔겠는가.대부분 화장을 지우고 나면 피부가 엉망이었다. 그런데 성연은 모두가 꿈꾸는 그런 피부를 가진 것이다.한 번 터치했을 뿐인데 감촉이 하도 좋아 손에서 떼고 싶지가 않았다.메이크업 팀은 오기 전에 이미 성연의 신분에 대해 들었다.성연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당부를 모두 들었고.저택에서 열리고 있는 연회의 성대함을 그들도 눈으로 본 바였다.그러니 성연이 얼마나 아낌을 받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터. 성연의 얼굴에서 손을 놀리는 하나하나가 무척 조심스러웠다.하지만 성연의 나이가 이렇게 어리다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작은 사모님, 평소에 어떻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
사진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제 오빠 컴퓨터에서 아빠의 사진을 봤을 때도 천하제일 미남인 아빠 모습에 감탄했지만!오똑한 콧날에 굳게 닫힌 두 입술, 단정한 헤어 스타일에 온몸에 남성미가 가득한 건장한 모습!지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외심이 들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 모든 아우라는 바로 책상 앞에 앉은 무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야!’‘우리한테 이런 멋진 아빠가 있다니!’ 지금 사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빠!”두 아이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고, 사진이 크게 외쳤다.가뜩이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자, 무진은 미간을 점점 찌푸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훑어보았다.“어디서 온 애들이야?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게 됐지?”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뒤로 젖혔다.“게다가 아무 데서나 아빠라니?”기쁨에 겨워 아빠에게 다가가려던 사진은 무진의 바로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다.애절하게 흐느끼면서 사진이 말했다.“아빠, 바로 우리 아빠잖아! 우리는 오늘 특별히 아빠를 찾으러 온 거야.”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무진은 마치 가슴속이 꽉 막힌 듯했다. 당황한 무진은 얼른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는 왠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너희들 아빠가 아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야지.”잠시 후, 수화기에서 시원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네, 보스.]무진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들어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아이들요?] 손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응.”무진은 단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아빠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갑자기 사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사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래야 해?”다시 한 번 우유 막대사탕을 입에 넣은 채, 사진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그럼, 오빠 그건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데?”“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설마 네 오빠가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사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빌딩을 바라보았다.“우리 그래도 일을 해야지. 사람들이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올라가게 할까?”웃음을 거둔 사무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앞을 보면서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할 거야.”“그럼 어떡해?”사진은 바로 풀이 죽었다.‘이미 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정말 피곤해.’다음 순간.사진은 익숙한 오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사무가 앞에 서고 사진은 따라서 함께 빌딩의 옆쪽의 작은 문으로 걸어갔다.입구에 선 두 아이는 작은 키 때문에 아주 순조롭게 입구의 경비원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한바탕 민첩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이미 계단 앞에 도착했다.고개를 든 두 아이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텔레비전에 나오는 회장 사무실은 모두 맨 꼭대기층에 있어. 오빠, 아빠도 꼭대기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사무도 이 많은 계단을 보자 약간 풀이 죽었다.그래도 앳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무가 나지막히 말했다.“그 점은 드라마도 틀리지 않았어.”“아!” 오빠가 말을 하자 사진의 작은 다리는 벌써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만약에 이렇게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늘 내 다리는 아마 망가지겠지?사진이 자신의 짧은 다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자, 위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2층.지금은 출근 시간이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느라, 오히려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진 오빠의 이전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 내가 했던 짓도 모두 드러나지 않을까?’예민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느꼈다.‘약효가 줄어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거야.’ ‘안 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찢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무진을 보자, 예민주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그 약을 다시 한번 더 먹여도 될까?’‘하지만... 하지만 또 복용하면, 나도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겨.’‘이거 어떻게 해야 해?’일시에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뜩이나 초조한 예민주는 머리가 터질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돌린 무진의 눈은 전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암울해 보였다.걸음을 떼고도 마음의 피로로 인해서 이미 얼마나 붕 떠있는지도 몰랐다.무진이 예민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예민주가 무의식중에 무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 듯이 아주 교묘하게 예민주의 손길을 피했다.차로 향하면서 예민주에게 단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좀 있다가 너 혼자 돌아가. 오늘 일은 잠시 미루자.”그리고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남겨진 예민주만 어수선한 심정이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무진은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낮에는 업무를 볼 뿐만 아니라 접대도 해야 했다.그날, 산기슭의 별장 2층.위층에서 성연의 차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본 두 아이는 신속하게 작은 숄더백을 꺼냈다.사진은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사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오빠, 정말로 이렇게 할 거야?”고개를 끄덕이는 사무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가득했다.“응, 엄마가 그날 돌아온 뒤 요 며칠 상태가 어떤지 못 봤어?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를 만났을 거야.” “내가 이미 아버지 위치를 알아냈어. 우리는 곧 아버지를 찾아갈 거야!”지금 집에 두 아이들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성연은 낯선
“그렇게 트집을 잡겠다고?”“나는 단지 이 옷을 매우 좋아할 뿐이에요. 나와 무진 오빠의 결혼식에서 입고 싶은데 당신들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는데요?”억울한 듯한 예민주의 얼굴.임서희는 마음이 우울했다. ‘무슨 이런 여우 같은 년이 다 있어? 그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년이네!’“2억2천만 원! 빨리 카드 결제해요!”말을 마친 성연이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예민주는 마치 성연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성연의 앞을 막았다.짝!성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얼굴의 통증을 느끼자 예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직접 만든 독약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은 이미 진작부터 예민주가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성연의 오른손에 갑자기 가는 은침 하나가 나타나더니, 예민주의 팔에 바로 박히면서 순식간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야!”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지금 성연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서희야, 가자!”말이 끝나자 성연은 임서희를 데리고 웨딩 숍을 나섰다.오른쪽 얼굴의 화끈한 통증과 주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화가 난 예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무진 오빠!”그러나 다음 순간, 곧바로 문밖으로 나간 무진은 차의 시동을 걸고 바로 성연을 따라갔다. 울부짖는 예민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방금 회사를 나섰던 성연은, 임서희를 먼저 회사로 돌려보낸 뒤에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다.차 안.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무진을 발견하자, 성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뭘 하려는 거야?’마음이 초조하자,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끝까지 밟았다. 성연의 차는 넓은 도로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고가도로 위.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진의 차가 성연의 차에 부딪치면서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서 부딪친 것이다.성연은 입가가 찢어지면서 끈
이곳의 웨딩드레스는 모두 디자이너의 작품들로, 이 웨딩드레스도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이걸 예민주가 가져가면, 자신은 당연히 다른 웨딩드레스를 찾을 수밖에 없다.‘게다가 이건 분명히 우리가 먼저 보고 결정했어.’임서희가 무의식적으로 막았다.“아가씨, 이 옷은 우리가 방금 이미 고른 거예요. 면사포도 모두 골랐는데, 아가씨의 이런 행동은 우아하지 않은데요?”임서희는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하지만... 예민주는 임서희의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호호, 당신이 어떻게 먼저 골랐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 웨딩드레스는 이미 오랫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원래 일찍부터 내 소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예민주는 임서희의 반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식 비웃으면서 다시 직원에게 그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했다.직원이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고민하자, 예민주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움직여?”직원은 양쪽의 손님들 사이에 낀 채 난처한 표정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이 두 손님들은 척 봐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웨딩드레스 하나를 놓고 서로 싸우려는 기세인데, 우리는 이쪽을 도와도 안 되고, 저쪽을 위해도 안 돼.’“저는...”직원은 순간 말을 더듬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 좋은 기분이던 성연은 예민주에게 방해를 받자, 아예 신용카드를 꺼내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이 웨딩드레스는 우리가 사겠어요. 카드로 결제할게요.”성연의 목소리에는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성연의 이 말은 또 마침 직원도 정확한 답안을 제시할 수 있게 도왔다. ‘옷을 입어보는 목적은 옷이 어울리는지 보기 위한 것이고, 어울리면 사는 거야.’‘하지만 이들은 지금 입어보는 단계를 건너뛰고 구매하겠다고 하니 가장 명확한 답이겠지.’“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포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말하면서 직원이 은행카드를 받으려고 했다.“잠깐만
지금 직원의 설명을 듣자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어때? 직원에게 한번 입어보게 가져오라고 해볼까?”임서희가 정말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눈치챈 성연이 다가와서 건의했다.가게 앞.바로 같은 시간에 한 쌍의 남녀가 밖에서 들어왔다. 여자는 앙증맞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무진 오빠, 이 브랜드의 웨딩 숍은 운성에 이곳 한 곳밖에 없어요.” “이 가게 웨딩드레스가 정말 예쁘다고 해요. 심플한 스타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 화려한 스타일이 좋을까요?”예민주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마치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웨딩 숍 안으로 들어섰다.예민주가 팔을 꽉 잡고 있어서 무진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천천히 팔을 풀었지만 눈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좀 심플한 스타일로 해. 그렇게 화려한 걸 입을 필요는 없어.”예민주는 사실 결코 온화한 사람이 아니지만, 무진의 곁에 있으면서 오히려 많이 순해졌다.하지만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무진의 말이 떨어지자, 예민주는 무의식 중에 그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지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저건... 송성연이잖아?’머릿속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성연이 맞았다.말을 하다가 만 예민주가 마치 뭔가에 시선이 고정된 듯이 바라보자, 무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예민주의 시선을 따라갔다.‘왜 또 저 여자야?’성연을 보는 순간, 무진은 다시 한번 참기 힘든 두통을 느꼈다.‘왜, 왜 매번 저 여자를 볼 때마다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 또 익숙한 느낌도 있지만, 분명히 저 여자를 만난 적도 없잖아.’또각또각!무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예민주는 성연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갔다. 이미 조금 전처럼 놀라지 않았고, 온통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공교롭게도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임서희와 함께 면사포를 고르고 있던 성연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눈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