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 후에야 비로소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송종철은 어떻게든 그녀를 강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려 했고, 그녀는 결혼을 깨 버릴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면서 말이야.’강씨 집안은 사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곳으로 백 년의 전통을 지닌 가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집안이 그저 북성 최고의 갑부라고만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세계 최고의 갑부였다. 강씨 가문 재산의 90% 이상이 지하에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들리는 말로는, 강씨 집안의 젊은 세대 중에 아주 유능한 키 맨이 있다고 한다. 업종을 망라하며 손 대지 않는 것이 없을 만큼 실세인 데다, 그의 영향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라고.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성연이 세운 ‘아수라문'의 정보팀에서도 그를 조사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그녀가 진상 파악을 위해 직접 강씨 집안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강씨 집안이 호랑이 소굴이라 해도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성연은 송종철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사실, 그는 성연을 속일 핑계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하던 참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임수정이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성연의 방으로 갔다.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던 성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임수정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전화를 봤다.임수정은 이를 악물었다. 예의 없고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분노가 솟아올랐다.‘자기가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분수도 모르고 말이야.’하지만 임수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연아, 여기서 지내는 게 좀 불편해 보이는구나. 환경을 좀 바꿔 보는 건 어떻겠니?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곳이야. 귀족 자제들이 살
성연과 송종철이 도착한 곳은 북성의 유명한 고급 빌리지였다.이 빌리지는 값비싼 땅 위에 지은 곳으로, 직위가 높은 정치인이나 재벌 일가가 주로 살았으며, 일반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엠파이어 하우스]성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입구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명필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힘차고 기세가 웅장한 글씨체는 사람들을 압도할 만했다. 송종철도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 듯, 차 문은 그대로 열어 둔 채였다. 그는 하나의 절차라도 되는 양 형식적으로 당부하는 말을 건넸다.“성연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이곳은 우리 집보다 백 배는 더 나은 곳이야. 네가 여기서 살 생각을 하니 나도 마음이 놓인다.”그는 말을 마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성연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송종철이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다시 떠날 때까지는 채 2분도 안 걸렸다. 마치,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마음이 놓인다고?’성연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그가 마음이 놓이는 이유는 아마도 번거로운 일을 해결해 버린 데에서 느끼는 안도감일 것이었다. 엠파이어 하우스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성연은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잠시 자리에 서서 건물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엠파이어 하우스는 매우 인상 깊은 곳이었다.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마다 값나가는 침향나무로 만들어진 긴 회랑이 있었다. 그곳에 서니 은은한 나무 향이 났다. 긴 화랑의 한쪽 끝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아래에는 연꽃이 심겨 있었고, 비단잉어 홍백이 바닥이 보이는 맑은 연못에서 보일 듯 말듯 헤엄쳐 다녔다.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찬 전형적인 정원식 건축물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그때, 검은 제복을 입은 집사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거실에 들어서자 곳곳에 놓인 값진 골동품과 명화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던 성연에게도 강
손을 잡힌 성연이 안금여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할머님.”성연의 말을 들은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성연의 손을 가볍게 감싸듯 두드렸다.“넌 참 좋은 아이 같구나. 긴장하지 않아도 돼.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 될 테니 말이야. 무슨 일이 있으면 이 할머니를 찾도록 해라. 내가 네 편이 되어 줄 거니까. 알겠지?”성연은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속으로 생각했다.‘어떻게 긴장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나랑 결혼할 남자는 조병이 있는 미친 사람이라 는데 말이에요.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다 저를 달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오늘 밤, 자신이 직면하게 될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성연은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지냈고 이제 겨우 이곳에 왔다. 이까짓 이유로 두려워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성연은 문득, 자신의 권리를 챙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상기된 얼굴을 하고 촉촉해진 눈으로 안금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 손끝을 오므렸다. “할머님, 우리 아버지한테 듣기로는…… 제가 결혼 때문에 이 곳에 왔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전에 먼저…… 학교에 다녀도 될까요? 너무 일찍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아서요.”안금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뻐했다.‘역시 진취적인 아이구나!’‘안타까울 정도로 철이 들었어.’“물론이지. 너를 오늘 여기 오라고 한 이유도 네가 이 집에서 생활하는데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야. 또 무진과 생활 습관을 맞출 시간도 필요하니까. 너에게 의무 같은 걸 지워줄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고 지내거라.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성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 집안은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닌 것 같았다.강씨 집안의 일 처리 수준은 놀라울 정도였다. 안금여와 대화하는 사이에 성연을 위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안금여는 곧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성연의 옷을 몇 벌 더 장만해 놓으라고 지시했
성연은 밖이 잘 보이지 않게 커튼을 내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회색 천장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 남자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영원히 피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스위치를 내려 불을 꺼버렸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잠든 척했다. 이렇게 하면 약혼자라는 사람과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밝았던 방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을 본 강무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야?”집사가 몸을 굽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할머님께서 오늘 그분을 이곳에 데리고 오셨습니다.”강무진은 못마땅한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보스, 그분을 다른 방으로 모실까요?”위층 방을 바라보는 손건호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강무진은 다른 사람이 자기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더군다나 그 방은…….강무진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그는 물음에 대해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나를 위층으로 데려다 줘.”손건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부축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집사는 뒤에서 휠체어를 들고 따라왔다.그를 방 앞까지 데려다 준 뒤, 손건호와 집사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무진은 자존심이 센 사람으로 자신의 ‘영역’이 다른 사람에게 침범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그 방은 평소 집사나 가정부가 청소할 때를 제외하면 신뢰가 두터운 몇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었다.휠체어를 타는 강무진 때문에 집안에는 턱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휠체어를 움직여 방으로 들어간 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다.이불 속에 숨어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이던 성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설마 그 많은 방 중에 하필 이 방이 그의 방은 아니겠지? 설마!’‘이게 다 무슨 일이람!’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다. 강무진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그의 몸으로 물줄기가 떨어졌다. 직
송성연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강무진의 커다란 몸이 그녀를 눌렀다. 성연에게 그는 마치 커다란 산 같았다.그는 성연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도 도망갈 수 없게 압박했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그의 몸을 주먹으로 공격했다. 특히, 그의 급소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강무진이 막는 바람에 제대로 공격 한 번 하지 못했다. 성연은 더욱 화가 나 아까보다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의 실력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닌지라, 얼마 후 강무진 또한 당해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 몸의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그는 혹시라도 성연이 상처 부위를 공격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성연이 계속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그는 성연을 몸으로 힘껏 내리 누르며 압박했다.그리고는 커다란 손으로 성연의 두 손목을 수갑을 채우듯 채워 머리 위로 올렸다. 그녀의 두 다리 역시 그에게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커튼이 꼼꼼하게 쳐진 방안은 바람은커녕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가득한 방에서는 아무리 시력이 뛰어난 성연이라 해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진한 남자의 향기가 콧속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성연은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짓눌리고 있자니 너무 불쾌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이런 실력을 갖춘 자가 장애가 있다는 강무진일 리가 없어.’‘설마 강무진 집에 찾아온 손님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대담하잖아?’성연이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지금 당장, 그 손 놔! 나는 강무진의 약혼녀야.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그 손 놓는 게 좋을걸?”성연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곳은 강무진의 집이었고, 그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면 혹시라도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 강무진은 오랜만에
강무진은 이런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까닭은 관심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접근해왔다. 그는 그녀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화장품 냄새가 지독히도 싫었다. 매번 그녀들과 스킨십을 시도해보았지만, 채 2분도 안 돼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었고 결국 여자들을 쫓아내고 말았다.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강무진은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는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방안이 다시 고요해졌다.성연은 자신이 이 남자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한 터라, 지금 손을 쓴다 해도 승산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 이 남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했다.위풍당당한 ‘아수라문’의 문주가 남자 하나 당하지 못하다니.이제껏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성연은 ‘세계 용병 랭킹’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했다.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뭐지?그녀는 강씨 집안에 숨은 인재들이 많은 것 같아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싸워서 이길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성연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협박했다.“당신 계속 이렇게 나오면 사람을 부를 거야!”그녀가 막 살려달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입이 막혔다. 깜짝 놀란 성연은 멍하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키스를 해봤다.성연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무진은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깊이 키스했다. 강무진은 지금 이 순간 마음 따위는 상관없이 본능에만 충실하고 싶었다.어차피 이 여자는 자신의 약혼녀 아닌가. 키스하면 안 될 이유가 없었다.길고 긴 입맞춤이 계속됐다.한참 후, 강무진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괜찮은데?”성연이 귓불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강무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복부를 팔로 감싸 안고 있는 그는 한눈에 봐도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송성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아니, 이 사람은?’강무진의 외모는 무척 빼어났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썹과 생기가 가득한 눈빛,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성연은 곧 그가 자신이 폐창고에서 구해준 재수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그녀는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한참을 강무진에게 잡혀 있었더니 온몸이 아팠다. 강무진은 그런 성연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여자애, 나를 알아본 것이 분명해.’‘그런데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자기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기왕 이렇게 된 바에 같이 연기나 하지 뭐.’‘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야.’허리를 짚고 일어난 강무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했다.“당신 남편을 죽일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성연은 깜짝 놀랐다.‘남편이라고?’‘이 사람이 강무진이야?’‘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세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당신, 장애를 가진 게 아니었어요?” 성연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강무진은 침대 맡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떤 의미에서는 장애인이 맞지.”‘엄살이야!’성연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그는 이 어린 여자애가 자신에게 해가 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늘 조심해야 했기에 이번에도 자신의 비밀을 그리 쉽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강무진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조금 전, 너 때문에 다리를 다쳤는데 몇 년간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을 것 같아.”성연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성연은 한참만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녀는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이 사람과 ‘잘’ 이야기해보려고
성연의 말을 들은 강무진은 픽 웃으며 베개에 기댄 채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어떤 말이든 들어줄 수 있지만, 별거는…… 허락할 수 없어.”손건호는 전에 향낭 안의 약물 성분을 조사했는데, 그 중에 유해물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약재가 포함되어 있어서 수면에 도움이 되었다. 불면증 때문에 일에 방해를 받던 그로서는 잠을 잘 자기 위해 그녀가 꼭 필요했다. 송성연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이건 범법이에요.”마치 짐승을 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도 강무진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범법이라고? 내가 단지 내 약혼녀와 한 이불을 덮고 순수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뿐인데?”말은 이렇게 하지만 한 이불을 덮고 누워서 정말 그럴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다. 어쨌든 이 남자는 좀 전의 일로 전과가 생겼기 때문에 성연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농담도 정말 잘하시네요.”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을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문손잡이를 비틀어 보아도 밖에서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힘껏 몇 번이나 당겨 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침대에 걸터앉은 강무진이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으면 소파에서 자도 돼.”침대에 누운 그가 천천히 향낭을 꺼냈다.그리고는 일부러 향낭을 든 손을 흔들며 성연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강무진 손에 들린 향낭을 본 그녀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당신이…….”강무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내가 왜?”성연이 입술을 깨물며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향낭은 역시 이 사람이 가져간 거였다. 그녀는 향낭이 창고에 버려진 줄로만 알았지, 이 남자 손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향낭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것은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때 창고에서 구한 사람이 강무진이라는 것을 인정
이튿날 오후, 가게문을 닫은 뒤 유채연은 성연의 안내로 그래함을 만났다.이번에는 유채연의 수줍은 성격을 고려해서, 밀크티 가게가 아니라 칸막이가 있는 식당을 골랐다.엉성한 칸막이지만 그래도 모두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는 잘생긴 그래함을 보자, 유채연의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유채연이 그래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없었다면 그 옥노리개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채연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함이 유채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나는, 다 괜찮아.” 유채연은 그래함을 똑바로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래함은 이렇게 멋스러운데, 나는 진흙밭의 진흙일 뿐이야.’요 몇 년 동안 유채연은 전혀 자신을 꾸미지도 않았다.날마다 그럭저럭 지냈을 뿐이다.지금은 그래함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래함에게 어울릴 수 있겠어?’그래함이 종업원을 불러서 가정식 요리를 몇 개 시켰다.모두 유채연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다.그래함이 시키는 요리 이름을 들으면서, 유채연은 놀라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그래함이 유채연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어?”“당신...”그래함이 자상하게 대할수록 유채연은 더 열등감을 느꼈다.‘나한테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서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겠어?’“애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음식부터 먹자.” 그래함의 마음은 더 긴장하면서 안절부절 못했다.이번에 또다시 거절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성연은 턱을 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그다지 먹고 싶은 것 같지 않았다. 그래함은 수시로 유채연에게 음식을 집어 줬지만, 식사하는 내내 유채연을 쳐다보느라 음식도 그다지 먹지 않았다.안타까움이 가득한 식사였다.가까스로 식사를 마친 뒤, 그래함은 종업원에게 앞의 음식을 치우고 주스와 과일을 내오도록 했다.그래함이 유채
“나도 모르겠어.” 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이 옥노리개를 보고 유채연은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그러나 여전히 모든 걸 맡길 용기를 내지 못했다.“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언니가 사형을 믿지 않는다면, 먼저 사형을 좀 지켜보다가 적당할 때 다시 승낙하면 돼요.” 성연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유채연을 너무 팽팽하게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할 수밖에 없어.’“하지만...”유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별거 아니에요, 이건 언니하고 사형 두 사람의 일이잖아요.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그래도 사형을 한번 만나보세요.” 성연은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 언제 유채연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느꼈다.합쳐진 옥노리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채연이 마침내 용기를 냈다.“알았어. 그래함과 얘기해 볼게.”유채연도 그래함이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말만 하는 거니까 별거 아니야.’마침내 이 말을 듣자 성연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드디어 유채연을 설득한 것이다.“그래요. 언니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함 사형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만 그래도 고려해 봐야겠지요.” 성연은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다.‘오늘 헛걸음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야.’“고마워.” 유채연은 손에 든 옥노리개를 꼭 쥐었다.‘만약 성연이가 내게 그렇게 많이 권하지 않았다면.’‘아마 그래함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하지만 이렇게 비참해진 나한테 더이상 비참한 일은 없을 거야.’‘그러니 나도 한번 노력해보겠어.’“언니,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고 선택하면 좋겠어요.” ‘채연 언니가 사형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 아니야.’“그럴게.” 유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채연이 성연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성연은 그래함 때문에 사양했다.유채연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호텔로 돌아온 성연이 문을 열자, 그래함이 옆방에서 걸어 나왔다.‘사형이 계속 이쪽의
성연이 보니 이제 때가 된 듯했다.그래서 유채연에게 그래함 얘기를 꺼냈다.“채연 언니, 사형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바로 언니 때문이에요. 사형은 바로 언니를 찾으려고 온 거죠. 사형이 언니한테 어떻게 너에게 대하는지 언니도 봤을 거예요. 사형은 정말 언니를 좋아해서 언니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언니도 앞으로 결혼하겠죠, 그렇죠? 그런데 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아요?”성연이 한 말도 일리가 있지만 유채연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그동안 자신의 모든 것이 소멸되다시피 했다.유채연에게는 전혀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유채연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래함에게 어울리지 않아.”말을 마친 유채연이 또 눈물을 흘렸다.그래함의 찾아와서 유채연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그러나 유채연은 자신과 그래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자신은 이미 감히 그래함을 원할 수 없었다.성연은 유채연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감정의 일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어.’‘좋아하는데 그냥 함께 하면 돼잖아.’‘게다가 두 사람은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어.’‘하지만 지금 채연 언니에게는 사형의 신분이 큰 문제야.’성연도 이해할 수 있었다.‘미래가 정말 너무 막막할 거야.’성연이 갑자기 반쪽짜리 옥노리개를 꺼냈다.옥노리개를 본 유채연은 깜짝 놀라면서 뭔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이 옥노리개를 뜻밖에도 그래함이 여전히 가지고 있었어.’성연이 옆에서 말했다.“그래함 사형은 줄곧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여자친구도 없이 줄곧 언니를 기다린 거예요.”유채연이 목에 차고 있던 다른 반쪽의 옥노리개를 이어 붙이자, 완전한 옥노리개가 되었다.흥분한 유채연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나는 원래 그리움에 이 옥노리개를 남겨 두었을 뿐이야.’‘그동안 그래함도 나와 같은 생각일 줄은 전혀 몰랐어.’“그동안 그래함에게 정말 여자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 유채연
저녁 무렵에 성연이 다시 왔다.두 사람이 이번에 온 목적이 유채연을 데려가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그래함도 오고 싶었지만, 유채연의 감정이 너무 격해질까 봐 성연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메로나 두 개요.” 카운터 앞으로 바로 간 성연이 유채연을 향해 말했다.성연의 출현에 유채연의 마음도 흔들렸다.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본 성연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채연은 말없이 묵묵히 냉장고에서 메로나 두 개를 꺼냈다.“여기 있어. 돈은 필요 없어.”성연은 미소를 지었다. ‘채연 언니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언니 마음은 항상 착해.’성연도 계산을 하지 않고 포장을 뜯고 먹으면서 나머지 한 개는 유채연에게 주었다.“채연 언니, 여기요.”성연이 자신에게 줄 줄은 몰랐기에 유채연은 놀라서 성연을 바라보았다. 성연이 웃으면서 말했다.“예전에 언니도 우리에게 하드를 많이 사줬잖아요.”유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과거의 기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사람이든 일이든 다 똑같아.’유채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성연이 주는 하드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성연이 고개를 돌려 유채연을 보면서 감탄했다.“채연 언니, 언니는 이전보다 더 예뻐졌어요.”‘채연 언니는 정말 예뻐.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부드럽고 아름다워.’‘이전과 달리 언니의 미모가 세월 속에 쌓였어.’유채연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이렇게 거친 얼굴이 어디가 예쁘겠어.”‘내가 좀 더 나은 모습이라면 그래함과 함께 할 용기가 있을 텐데.’‘그러나 세상 일은 종종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피부 관리만 잘하면 돼요. 화장만 하면 천상의 선녀보다 더 예뻐요.” 성연은 유채연의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때때로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오거나 손님이 많은데 유채연이 바쁠 때면, 성연도 옆에서 도와주었
이때 산책하고 돌아오던 외삼촌이 성연을 보고는 불만을 표시했다.“걔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왜 또 강요하는 거야? 나는 성질 좋은 사람이 아니야. 채연이를 괴롭히지 마.”외삼촌의 말을 들은 성연은 유채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성연도 중재자일 뿐이기에 유채연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지금 유채연의 외삼촌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더 불편했기에,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성연이 나간 뒤 외삼촌을 보면서 유채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그 자리에 선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없이 가슴 아프게 했다.유채연의 이런 모습을 본 외삼촌은 크게 화를 냈다.바로 유채연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너 왜 그래? 아까 그 남자가 바로 네 사진 속에 있던 걔가 맞지? 그 사진을 몇 년이나 보고 있었는데,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그럼 나가. 이 작은 가게는 나 혼자서도 관리할 수 있어.”예쁘고 부지런한 유채연이 요 몇 년 동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유채연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채연은 응하지 않았다.맞선을 볼 때마다 유채연은 자기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언젠가 문을 잠그는 걸 깜빡했을 때, 외삼촌이 무심코 유채연의 손에 든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유채연은 마치 보물을 대하듯이 사진을 보고 있었다.그때 외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 사람이 정말 나타났는데 조건도 아주 좋아 보여.’‘채연이가 그 남자와 함께 한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야.’외삼촌의 말에 유채연은 순간 멍해졌다.유채연은 자신이 나간다고 하면 외삼촌이 제일 먼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자신이 떠나면 외삼촌을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유채연의 눈에 외삼촌은 줄곧 나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래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삼촌이 자신을 돌보고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다.‘외삼촌이 가끔씩 말을 거칠게 해도 속마음은 부드러워.’
다음 날 아침 일찍 성연이 왔다.성연은 바로 가게에서 유채연과 이야기하고 싶었다.“채연 언니.”어제 두 사람에 대한 유채연의 태도는 좋았다.그러나 오늘 유채연은 냉담하게 거부하는 모습이었다.성연을 보고 정색을 하면서 미소도 전혀 짓지 않았다.“성연아, 물건을 사지 않으면 나가. 우리 가게는 작으니까 여기에 있지 마.” 축객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그런 유채연을 보면서 성연은 단지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두 사람에게는 분명히 좋은 미래가 있어.’‘그러나 채연 언니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해.’“채연 언니,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 사이에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잘 이야기하면 오해도 잘 해결될 거예요.” 성연도 두 사람이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함께 있기를 바랐다.하지만 매번 뜻대로 되지 않았다.“우리 사이에 무슨 이야기할 만한 게 있겠어. 나를 찾아온 거라면 돌아가. 만약 나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면, 여기서 즐기면서 나한테는 더 이상 오지 마.”이렇게 말하면서, 유채연은 마음속으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그러나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그래함과 성연만 여기서 나가면 돼.’‘이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을 거야.’‘예전의 꿈만 기억하면 돼.’‘나는 다시 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어.’“언니, 언니는 지금 사형에게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성연은 유채연이 그래함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걸 믿지 않았다. 유채연의 눈빛이 반짝거렸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성연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더욱 분발해서 열심히 권유했다.“채연 언니, 언니의 생각이 어떤 지를 떠나서 나는 단지 언니가 사형하고 잘 얘기하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하기를 바랄 뿐이에요.”유채연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자신과 맺어질 수 없는 그 사람을 지나치게 원하지 않기 위해서, 아예 생각을 끊으려는 것이다.“나는 여기에 남아서 가게를 봐야 해. 성연아, 네
외삼촌에게 밥을 차려준 뒤 유채연은 혼자 가게를 지켰다.손님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면서.오늘 밤, 유채연은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을 좀 연장했다.외삼촌이 의심할까 봐 유채연도 너무 오래 끌지는 못했다.마침내 작은 슈퍼마켓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유채연은 혼자 길모퉁이까지 걸어가 보았다.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더없이 서글퍼지자, 유채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그래함은 납득했겠지.’‘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데, 또 어떻게 그래함을 연루시킬 수 있어?’‘나도 너무 뜬구름 잡는 생각만 한 거야.’유채연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하긴, 그래함이 왜 내게 반했겠어?’‘지금의 내게 그래함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겠어.’유채연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방 문을 잠근 뒤 이불 속에 눕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모든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마음은 그래도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그때 어머니의 병이 아니었다면 집안이 망하지는 않았을 거야.’‘아마도 나도 대학에 갔을 거고, 그래함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겠지.’‘어쩌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몰라.’‘그런데 지금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나와 그래함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이제 나는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고 살아가면 돼.’‘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헛된 망상을 할 자격도 없어.’‘현실로 돌아가는 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유채연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똑똑똑- 넓은 방안에 문 밖의 노크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유채연은 이런 장면에 익숙한 듯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외삼촌, 무슨 일이세요?”약간 갈라진 듯한 유채연의 목소리는 특히 표시가 났다.하지만 유채연은 그렇게 많은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맘대로 하면 돼.’“너 오늘 저녁 안 먹었지?” 밖에서 외삼촌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먹을래요.” 생각할수록 슬퍼서 유채연은
다시 유채연이 고함을 치자 외삼촌은 크게 놀랐다.‘요 몇 년 동안 채연이는 내 앞에서 줄곧 순종했어.’‘지금 뜻밖에도 두 명의 외부인 때문에 감히 말대꾸를 하고 있어.’갑자기 외삼촌이 또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보니까 네가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내가 그동안 너를 거뒀는데, 너는 전부 너는 짖어라 라는 식이야?”“나 아니면 누가 너를 신경이나 쓰겠어. 그 사람들은 돈이 있잖아. 진작에 갔다가 왜 이제야 온 거야?”“만약 또 내게 이렇게 말할 거면, 앞으로 너를 상관하지 않아도 탓하지 마.”외삼촌은 유채연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서 심하게 말을 했다.유채연은 그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온통 그래함을 생각하고 있었다.‘예전에 나와 그래함은 죽마고우여서 다른 사람에겐 하지 않았던 일도 많았지.’‘그래함이 병이 났을 때 내가 그래함을 돌보았어.’‘그때 사랑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그래함에게 감정이 생겼어.’‘그래함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가 맞은편 마을로 가지도 않았을 거야.’‘심지어 그래함은 나중에 나하고 결혼할 거라고 예전에 말하기도 했어.’나중에 일어난 그 일들이 오히려 유채연을 심연 속으로 매섭게 끌고 갔다.만약 유채연의 집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유채연도 그래함과 함께 하는 걸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래함은 내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럴 리가 없어.’‘그래함은 단지 일시적으로 감정이 복받쳤을 뿐이야.’‘곧 후회할지도 몰라.’그들의 처지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에.유채연은 감히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할 수 없었다.일을 너무 좋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다.‘빛나는 보석이 된 그래함은 가장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야.’‘그러나 지금 진흙투성이인 유채연은 그저 서민들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어.’‘지금까지 그렇게 좋지 않았던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어.’‘예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포자기하기도
유채연은 넋이 나간 채 슈퍼마켓으로 돌아왔다.머릿속에 맴도는 건 그래함의 자신에 대한 태도와 자신에게 했던 말뿐이다.슈퍼마켓을 지키던 외삼촌은 유채연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가게에서 나가며 야단쳤다.“누구를 만났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집안 일은 할 필요가 없어?”“이 정도로 시간을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집에 잘 있는 게 낫겠어.”유채연은 반박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다.유채연이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뜻밖에도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어.’‘지금은 확실히 시간이 좀 늦었어.’평소에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주 엄격했다. 유채연은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은 채 매일 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유채연이 감히 항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 외삼촌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를 찾아왔던 그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야?”유채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그저 고향 사람일 뿐이에요.”“고향 사람이 왜 너를 찾아왔어?” 외삼촌은 여전히 예민했다.유채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너무 오랫동안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나를 찾아왔지요.”“너는 지금 류씨 집안에 사는 게 아니야. 너를 찾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텐데, 그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한가해서 너를 찾아온 거야?” 외삼촌은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다.유채연의 상태가 아직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외삼촌이 그렇게 묻는 말을 듣자 외삼촌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평소에 외삼촌은 자신의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렇게 세세하게 물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그때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구태여 알아볼 필요도 없이 조금만 물어봐도 알 수 있지요. 외삼촌, 그걸 왜 물어보세요?” 유채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외삼촌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들이 정말 호사스럽게 손을 쓰던데, 부자인 모양이야. 그 사람들한테서 돈을 좀 구할 수 없을까?”방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