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 운경과 무진은 또 서재에 들어가 업무 처리로 바빴다.조승호는 의학 자료들을 검토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 남은 성연이 안금여를 돌보게 되었다.평소처럼 할머니가 앉은 휠체어를 방 안으로 밀고 간 성연이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 드렸다.할머니를 돌보며 성연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이야기 중간에 노래를 곁들이니 할머니가 좀 더 빨리 잠이 들었던 것이다.10분도 안 되어 할머니 안금여가 잠이 들었다.성연이 가방에서 침을 꺼냈다.조명 아래 차가운 빛을 띠는 침이 특별 제작한 케이스에 한 줄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긴 것, 짧은 것, 굵은 것, 가는 것 모두 있었다.넓은 부위에는 굵은 침을 사용했다. 혈관은 그렇게 민감하지 않았다. 뇌나 눈 등 중요한 부위라면 가는 침을 쓸 수밖에 없다. 중요 부위의 신경들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만약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감히 침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성연은 케이스 안에서 가느다란 침 여러 개를 꺼내어 평소대로 안금여의 뇌에 꼽기 시작했다.동작 하나하나가 매우 신중했다.다행히 아무런 돌발 상황 없이 시침이 끝났다. 성연의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이미 습관이 된 지라 아무렇게 옆에서 휴지 한 장을 뽑아 등을 닦았다.그리고는 한쪽에 앉아 안금여를 바라보았다.이번에는 휴대폰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반드시 안금여의 반응을 관찰하며 침을 뽑을 시간을 추산해야 했다.다행히 평소 무진과 운경의 회의가 비교적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그 참에 성연도 한숨 돌릴 여유가 있었다.성연이 긴장을 풀려고 할 때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성연은 아직도 침이 꽂혀 있는 안금여를 보며 이마에 힘을 주었다. ‘지금 여기로 오는 건가?’지금 침을 꽂은 지 절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뽑을 수 없었다.뽑게 된다면 분명 영향이 있을 터.하지만 방이 이만큼 큰데도 숨을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잠시,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성
조승호와 무진이 서둘러 안금여의 방으로 달려왔다.안금여의 모습을 본 승호의 안색이 굳어지며 급히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혹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된 운경 또한 내내 긴장된 표정으로 엄마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틀 전만 해도 성연이 사려 깊다고 칭찬했던 운경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엄마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성연을 아무리 좋아했다 하더라도.뒤따라왔던 무진이 할머니 안금여의 머리에 꽂혀 있는 바늘을 보고 잠시 멍했다.그러나 화가 나진 않았다.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성연이 사용한 침은 그의 다리에 놓던 침구와 같은 것이다.성연의 실력은 뛰어났다. 그래서 성연이 할머니를 어떻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무진이 고모 운경 곁으로 가서 말했다. “고모,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 진정하세요.”“네가 직접 봐, 네 할머니 모습을. 내가 지금 진정할 수 있겠니?” 침 치료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시각적인 면에서 충분히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공포스럽기도 할 터.머리에 침을 놓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것이다.‘이렇게 긴 바늘에 찔려서 얼마나 아프실까?’생각할수록 무섭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모, 일단 진정하세요.” 무진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작은 소리로 달랠 뿐이다.“엄마가 이 지경이 되셨는데도 넌 쟤를 감싸고 싶니? 모두 엄마와 네가 평소 너무 관대하게 대하니까 저러는 거 아니야!” 성연을 돌아보는 운경의 얼굴은 노기로 충만했다.성연은 구석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운경이 자신을 믿지 않는 한 아무리 설명해 본들 무슨 소용인가.“고모부님이 검사하고 계시니 좀 기다려 보세요.” 무진 역시 지금은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최종적으로 결과가 나와야 납득시킬 수 있을 터.무진의 말을 들은 운경은 성연이 있는 쪽은 외면한 채 조승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간신히 진정이 되었다.빠른 시간에 남편이 잘 봐줄 것이다.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엄마를 살피던 남편이 손
운경이 생각할 때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평소 가족들이 너무 감싸주니까 성연이 이러는 거였다.엄마가 괜찮다고 하니 다들 마음을 놓았다.그러나 엄마에게 문제가 생겼더라면 누가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운경이 성연을 책망하듯이 바라보았다.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말투다.“네가 의사 자격증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거니?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어쩌려고 그랬니?”성연이 바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고모님.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무진과 운경의 대화 시간을 제대로 계산 못한 자신의 불찰이었다.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할머니에게 침을 놓았었는데…….오늘 운이 정말 나빴다.운경에게 딱 걸렸을 뿐만 아니라 집안 다른 사람들도 알아버렸다.다음 번에는 지금보다 한층 더 어려울 테지.그렇지만 할머니 안금여를 도우려는 거지 무슨 나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운경은 마치 자신이 할머니에게 무슨 극악무도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경계하는 모습이다.성연의 마음이 착잡했다.선의로 도우려다 오해를 받은 셈이다.입이 있어도 제대로 해명할 길도 없고.자신에게 치료를 요청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지 이 강씨 집안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자신이 먼저 나서서 치료해주는 경우는 진짜 극소수였다.상대방이 내미는 준 수표를,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게 있는 지 등의 조건을 봤었다.이렇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치료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좋은 소리 못 듣다니.가끔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침술 방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운경으로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당연히 성연이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오해했을 터.운경의 입장이 되어 안금여를 외할머니라고 생각해 보니 자신의 표정도 좋을 것 같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많이 편안해져서 마음속의 불만을 잠재웠다.“사람의 목숨이 장난 같니? 더욱이 강씨 집안은 네가 실험 놀이를 하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아직 어린 데도 사리
운경의 마음은 어찌되었든 가라앉았다. 그러나 입을 다문 채 여전히 냉담한 얼굴이다.잠시 생각해 보든 승호는 예전 자신의 장모 안금여가 갑자기 좋아졌던 상황이 생각났다.그의 기억에, 당시 안금여는 곧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셨다.그런데 누군가 저승 길에서 안금여를 도로 끌고 온 셈이었다.안금여의 몸에도 작은 바늘구멍이 몇 개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현미경으로 관찰한 후에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설마 지난번 장모님을 구했던 사람이 송성연이란 말이야?’그런 생각을 하던 승호는 저도 모르게 성연을 쳐다보았다.무진 또한 승호의 의심을 알아차렸다.성연이 자신의 의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모부 승호가 성연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까 싶은 무진이 얼른 끼어들었다.“고모, 고모부 말씀이 맞아요. 할머니가 괜찮으시니 됐어요. 성연이 어쩌다 실수를 한 거니 고모가 너그러이 봐 주세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지금 뭐하는 거니? 내가 일부러 성연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그럼 엄마의 목숨으로 실험을 해도 괜찮다는 거야?”옆에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무진이 성연을 위해 한 두 마디 거들자 운경이 보기에 무진의 마음이 이미 성연에게 기운 듯했다.“고모, 할머니는 별일 없으세요. 저희의 마음은 모두 할머니를 낫게 하려는 거잖아요. 성연이도 마찬가지예요. 절대 할머니에게 해가 되게 하지 않을 겁니다.”무진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말했다.“쟤는 지 스스로 제대로 말도 못하니? 네가 왜 대신 말해? 쟤가 무슨 침을 놓는다고 그래? 그러다 잘못 놓기라도 하면? 쟤가 책임 지기라도 할 거야?”운경의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성연을 몰아세우려던 건 아니었다.다만 절대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주의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화를 초래할 테니까.“고모, 성연이도 이미 자기가 잘못한 거 알고 있을 테니 그렇게 화 내실 필욘 없어요.”무진이 한숨을 내쉬었다.‘하, 이 고모 고집이 너무 세.’
방에 들어온 뒤에도 무진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마음이 불편했던 성연이 무진에게 해명하려 입을 뗐다.“할머니를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무진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알아.”그의 눈에 다 보였다. 성연이 단순하지 않다 해도 아직은 어린 소녀이다. 그 속이 쉽게 읽혔다.무진은 자신이 성연을 괘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뒤에서 몰래 이런 일을 할 성연이 아니었다.무진의 반응이 다소 의아한 성연이 물었다.“어, 어째서요? 그렇게 날 믿어요?”말투에 웃음기를 담고 있지만, 무진이 어떻게 자신을 믿을 수 있지, 하는 의문이었다.무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네가 정말 나쁜 마음을 가졌다면 내가 널 처리할 테니까.”“처리? 내가 진짜 할머니한테 손을 쓰면 당신이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성연이 무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마치 총탄 없는 전쟁처럼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응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물론. 네가 어디로 도망을 간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거야.” 이 말을 하는 무진은 차가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의외일 정도로.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착각이겠지만.잠시 멍했던 성연이 얼른 정신을 차리며 입을 삐죽거렸다.‘치, 큰 소리는.’중요한 건 성연이 하마터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뻔했다는 사실.그래도 무진의 믿음에 성연은 기분이 좋아졌다.방에 들어온 성연은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온 후 침대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머리만 갖다 대면 잠이 든다. 정말 잘 잔다.불면증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다.무진이 부러워하는 점이다.잠결에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성연이 눈은 살짝 뜨니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그림자가 무진이라는 걸 인식하자 아무런 경계심도 들지 않았다.“왜? 안 자요?”졸린 음성이 말랑말랑한 느낌이다.무진의 마음이 부드러워졌다.아이를 어르듯 무진이 이불 위로 성연의 어깨를
이튿날, 아침을 먹은 후 무진이 성연을 데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가려 했다. 성연과 고모 운경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화원에서 나온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도련님, 며칠 더 안 계시고요?”“응.” 무진이 고개를 저었다.성연의 마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모의 말이 지나쳐 듣기 거북했다. 성연이 진짜 할머니의 목숨을 구했다면 더.나중에 후회할 사람은 고모일 것이다.상황을 잘 모르는 고모의 오해로 성연이 상처받지 않도록,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당분간 서로 못 만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모처럼 돌아오셨는데, 회장님이 또 이런 상태시니. 도련님이 고택에 계시면 회장님 기분이 더 좋아지실 텐데요.” 재차 권하는 집사였다.정신이 맑을 때 안금여가 가장 아끼던 사람이 손자 무진이었다.밖에서 무진을 ‘바보 미치광이’로 취급할 때도 손자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가끔 무진이 패기 없고, 말을 안 듣는다고 암암리에 투덜대긴 했지만.하지만 안금여 곁을 오래 지킨 사람으로서, 마음 깊이 무진을 아끼는 안금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무진이 돌아와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했다.몸이 좋지 않은 안금여가 가장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역시 무진이 아니겠는가.“고모와 고모부가 여기 계시면 돼지 뭐. 내가 여기 있어도 도움이 안되는 걸. 고택은 회사에서 너무 멀어 출근하기 불편해.” 무진의 말은 말도 안되는 핑계다. 여기나 거기나 사실 거리는 매한가지인 것을.하지만 틀리지 않은 것이 안금여는 지금 자각을 못하는 상태니 여기에 남아 있어도 별 도움이 못되긴 하다.성연과 고모의 일을 집사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집사가 성연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저…….” 집사는 어떻게 만류해야 할지 몰랐다.얼른 주방에 들러 떡 한 상자를 들고 나왔다.“작은 사모님이 이 떡을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오늘 특별히 좀 많이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시면 작은 사모님이랑 같이 드세요.”요 며칠 안금여를 대하는 성연의
이틀 뒤, 조승호는 안금여의 치료약을 받았다. 약을 시험해 볼 준비를 마치고 안금여를 다시 병원으로 데려왔다.자고 있는 성연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짜증이 가득한 얼굴로이다. 이제 가까스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실험을 할 필요 없이.‘아, 누구야 도대체? 사람 잠도 못 자게 하고.’성연이 마지 못해 눈을 뜨자 곧바로 무진의 잘생긴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썹, 별이 박힌 듯한 눈동자,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아 누우며 계속 자려는데.“송성연, 일어나, 빨리.” 이불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성연을 보며 무진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못 일어나요.” 성연아 단호하게 한마디 던졌다.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음성이 웅얼거렸다.“진짜 안 가?” 무진이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는 대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 한 마디 툭 던졌다.“그럼 나 혼자 병원에 가서 고모부의 해독제가 할머니에게 효과 있는지 볼 수밖에.”그 말을 들은 성연 즉시 침대에서 튀어나왔다.성연이 일어난 걸 확인한 무진이 입술 끝을 올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겨우 무진의 등만 보게 된 성연이 이를 갈았다.“이전에는 강무진이 이렇게 못된 걸 왜 몰랐지?”고의로 그런 게 틀림없다.고모부가 해독제를 받았다고 진작 말해 줬으면 됐을 걸.‘그래도 고모부 동작이 꽤 빠르시네.’자신이 예상한 시간보다 더 빨랐다.침대에서 일어난 성연이 세수하고 옷을 차려 입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무진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눈살을 찌푸리며 툭 뱉었다.“뭐 해요? 안 가고.”‘설마 나 혼자 가게 하는 건 아니겠지?’‘이것도 안돼?’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펼치며 무진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조급해하지 말고. 먼저 아침을 먹고 다시 이야기하지.”그제야 고개를 들어보니 식탁에 차려진 아침식사 일인분이 눈에 들어왔다.강무진은 이미 다 먹었을 테니 이건 자
강상철과 강상규에게도 소식이 들어갔다.큰집에서 저렇게 떠들썩하니 움직이는데 모르기가 더 어려울 판.거실에 앉은 강상철과 강상규 앞에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놓여 있었다.찻잔을 든 강상규가 코끝에 대고 가볍게 향을 맡은 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둘째 형님네 차가 제일입니다. 같은 차인데도 제가 우리면 이런 향이 안 나옵니다.”강상철은 픽 웃었다.“네 형수 아니냐. 온종일 쓸데없는 짓거리만 할 줄 알아도 차 우리는 솜씨만큼은 봐 줄만 하지.”“형님 복이네요.” 강상규는 슬쩍 웃었다.“차야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타라고 하면 돼지. 근데 큰집에서 해독제를 찾았다면서?” 강상철의 말투에는 알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해독제?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큰 형수 치료하려고 미칠 겁니다. 지금 꿈이냐 생시냐 하고 있을 테고.” 강상규 또한 대수롭잖게 여기는 표정이다.“이미 다 늙었는데 구할 건 또 뭐야. 저 늙은이가 죽지 않고 뒤에서 몰래 무진을 훈련시켜 결국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잖아?”회의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는 강상철은 치가 떨려왔다.전략을 잘 짰다고 생각했다. 곧 큰 집을 끌어내릴.그런데 또?설마 일평생 저 자리와는 인연이 없는 운명이라고?그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일이 이렇게 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강무진을 저 자리에서 쫓아낼 방법을 찾는 게 시급합니다.” 강무진이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고려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자신들이 평소 강무진을 너무 무시하는 바람에 진 거라고 여겼다.어떤 말도 소용없었다.“누가 생각이나 했겠냐? 강무진이 뒤에서 그렇게 큰 수를 숨기고 있을 줄. 지금 그 놈 위치에서 또 누가 건드릴 수 있겠어?” 강상철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했다.강무진이 화상으로 연결했던 회사들.저들의 지분은 볼 만한 정도가 못 된다. 하물며 강무진이 상속권을 가지고 있으니.그 늙은이들은 이런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든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쪽으로 붙을 터.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