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경의 마음은 어찌되었든 가라앉았다. 그러나 입을 다문 채 여전히 냉담한 얼굴이다.잠시 생각해 보든 승호는 예전 자신의 장모 안금여가 갑자기 좋아졌던 상황이 생각났다.그의 기억에, 당시 안금여는 곧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셨다.그런데 누군가 저승 길에서 안금여를 도로 끌고 온 셈이었다.안금여의 몸에도 작은 바늘구멍이 몇 개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현미경으로 관찰한 후에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설마 지난번 장모님을 구했던 사람이 송성연이란 말이야?’그런 생각을 하던 승호는 저도 모르게 성연을 쳐다보았다.무진 또한 승호의 의심을 알아차렸다.성연이 자신의 의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모부 승호가 성연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까 싶은 무진이 얼른 끼어들었다.“고모, 고모부 말씀이 맞아요. 할머니가 괜찮으시니 됐어요. 성연이 어쩌다 실수를 한 거니 고모가 너그러이 봐 주세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지금 뭐하는 거니? 내가 일부러 성연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그럼 엄마의 목숨으로 실험을 해도 괜찮다는 거야?”옆에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무진이 성연을 위해 한 두 마디 거들자 운경이 보기에 무진의 마음이 이미 성연에게 기운 듯했다.“고모, 할머니는 별일 없으세요. 저희의 마음은 모두 할머니를 낫게 하려는 거잖아요. 성연이도 마찬가지예요. 절대 할머니에게 해가 되게 하지 않을 겁니다.”무진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말했다.“쟤는 지 스스로 제대로 말도 못하니? 네가 왜 대신 말해? 쟤가 무슨 침을 놓는다고 그래? 그러다 잘못 놓기라도 하면? 쟤가 책임 지기라도 할 거야?”운경의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성연을 몰아세우려던 건 아니었다.다만 절대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주의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화를 초래할 테니까.“고모, 성연이도 이미 자기가 잘못한 거 알고 있을 테니 그렇게 화 내실 필욘 없어요.”무진이 한숨을 내쉬었다.‘하, 이 고모 고집이 너무 세.’
방에 들어온 뒤에도 무진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마음이 불편했던 성연이 무진에게 해명하려 입을 뗐다.“할머니를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무진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알아.”그의 눈에 다 보였다. 성연이 단순하지 않다 해도 아직은 어린 소녀이다. 그 속이 쉽게 읽혔다.무진은 자신이 성연을 괘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뒤에서 몰래 이런 일을 할 성연이 아니었다.무진의 반응이 다소 의아한 성연이 물었다.“어, 어째서요? 그렇게 날 믿어요?”말투에 웃음기를 담고 있지만, 무진이 어떻게 자신을 믿을 수 있지, 하는 의문이었다.무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네가 정말 나쁜 마음을 가졌다면 내가 널 처리할 테니까.”“처리? 내가 진짜 할머니한테 손을 쓰면 당신이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성연이 무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마치 총탄 없는 전쟁처럼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응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물론. 네가 어디로 도망을 간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거야.” 이 말을 하는 무진은 차가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의외일 정도로.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착각이겠지만.잠시 멍했던 성연이 얼른 정신을 차리며 입을 삐죽거렸다.‘치, 큰 소리는.’중요한 건 성연이 하마터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뻔했다는 사실.그래도 무진의 믿음에 성연은 기분이 좋아졌다.방에 들어온 성연은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온 후 침대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머리만 갖다 대면 잠이 든다. 정말 잘 잔다.불면증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다.무진이 부러워하는 점이다.잠결에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성연이 눈은 살짝 뜨니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그림자가 무진이라는 걸 인식하자 아무런 경계심도 들지 않았다.“왜? 안 자요?”졸린 음성이 말랑말랑한 느낌이다.무진의 마음이 부드러워졌다.아이를 어르듯 무진이 이불 위로 성연의 어깨를
이튿날, 아침을 먹은 후 무진이 성연을 데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가려 했다. 성연과 고모 운경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화원에서 나온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도련님, 며칠 더 안 계시고요?”“응.” 무진이 고개를 저었다.성연의 마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모의 말이 지나쳐 듣기 거북했다. 성연이 진짜 할머니의 목숨을 구했다면 더.나중에 후회할 사람은 고모일 것이다.상황을 잘 모르는 고모의 오해로 성연이 상처받지 않도록,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당분간 서로 못 만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모처럼 돌아오셨는데, 회장님이 또 이런 상태시니. 도련님이 고택에 계시면 회장님 기분이 더 좋아지실 텐데요.” 재차 권하는 집사였다.정신이 맑을 때 안금여가 가장 아끼던 사람이 손자 무진이었다.밖에서 무진을 ‘바보 미치광이’로 취급할 때도 손자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가끔 무진이 패기 없고, 말을 안 듣는다고 암암리에 투덜대긴 했지만.하지만 안금여 곁을 오래 지킨 사람으로서, 마음 깊이 무진을 아끼는 안금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무진이 돌아와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했다.몸이 좋지 않은 안금여가 가장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역시 무진이 아니겠는가.“고모와 고모부가 여기 계시면 돼지 뭐. 내가 여기 있어도 도움이 안되는 걸. 고택은 회사에서 너무 멀어 출근하기 불편해.” 무진의 말은 말도 안되는 핑계다. 여기나 거기나 사실 거리는 매한가지인 것을.하지만 틀리지 않은 것이 안금여는 지금 자각을 못하는 상태니 여기에 남아 있어도 별 도움이 못되긴 하다.성연과 고모의 일을 집사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집사가 성연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저…….” 집사는 어떻게 만류해야 할지 몰랐다.얼른 주방에 들러 떡 한 상자를 들고 나왔다.“작은 사모님이 이 떡을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오늘 특별히 좀 많이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시면 작은 사모님이랑 같이 드세요.”요 며칠 안금여를 대하는 성연의
이틀 뒤, 조승호는 안금여의 치료약을 받았다. 약을 시험해 볼 준비를 마치고 안금여를 다시 병원으로 데려왔다.자고 있는 성연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짜증이 가득한 얼굴로이다. 이제 가까스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실험을 할 필요 없이.‘아, 누구야 도대체? 사람 잠도 못 자게 하고.’성연이 마지 못해 눈을 뜨자 곧바로 무진의 잘생긴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썹, 별이 박힌 듯한 눈동자,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아 누우며 계속 자려는데.“송성연, 일어나, 빨리.” 이불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성연을 보며 무진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못 일어나요.” 성연아 단호하게 한마디 던졌다.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음성이 웅얼거렸다.“진짜 안 가?” 무진이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는 대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 한 마디 툭 던졌다.“그럼 나 혼자 병원에 가서 고모부의 해독제가 할머니에게 효과 있는지 볼 수밖에.”그 말을 들은 성연 즉시 침대에서 튀어나왔다.성연이 일어난 걸 확인한 무진이 입술 끝을 올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겨우 무진의 등만 보게 된 성연이 이를 갈았다.“이전에는 강무진이 이렇게 못된 걸 왜 몰랐지?”고의로 그런 게 틀림없다.고모부가 해독제를 받았다고 진작 말해 줬으면 됐을 걸.‘그래도 고모부 동작이 꽤 빠르시네.’자신이 예상한 시간보다 더 빨랐다.침대에서 일어난 성연이 세수하고 옷을 차려 입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무진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눈살을 찌푸리며 툭 뱉었다.“뭐 해요? 안 가고.”‘설마 나 혼자 가게 하는 건 아니겠지?’‘이것도 안돼?’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펼치며 무진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조급해하지 말고. 먼저 아침을 먹고 다시 이야기하지.”그제야 고개를 들어보니 식탁에 차려진 아침식사 일인분이 눈에 들어왔다.강무진은 이미 다 먹었을 테니 이건 자
강상철과 강상규에게도 소식이 들어갔다.큰집에서 저렇게 떠들썩하니 움직이는데 모르기가 더 어려울 판.거실에 앉은 강상철과 강상규 앞에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놓여 있었다.찻잔을 든 강상규가 코끝에 대고 가볍게 향을 맡은 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둘째 형님네 차가 제일입니다. 같은 차인데도 제가 우리면 이런 향이 안 나옵니다.”강상철은 픽 웃었다.“네 형수 아니냐. 온종일 쓸데없는 짓거리만 할 줄 알아도 차 우리는 솜씨만큼은 봐 줄만 하지.”“형님 복이네요.” 강상규는 슬쩍 웃었다.“차야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타라고 하면 돼지. 근데 큰집에서 해독제를 찾았다면서?” 강상철의 말투에는 알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해독제?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큰 형수 치료하려고 미칠 겁니다. 지금 꿈이냐 생시냐 하고 있을 테고.” 강상규 또한 대수롭잖게 여기는 표정이다.“이미 다 늙었는데 구할 건 또 뭐야. 저 늙은이가 죽지 않고 뒤에서 몰래 무진을 훈련시켜 결국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잖아?”회의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는 강상철은 치가 떨려왔다.전략을 잘 짰다고 생각했다. 곧 큰 집을 끌어내릴.그런데 또?설마 일평생 저 자리와는 인연이 없는 운명이라고?그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일이 이렇게 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강무진을 저 자리에서 쫓아낼 방법을 찾는 게 시급합니다.” 강무진이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고려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자신들이 평소 강무진을 너무 무시하는 바람에 진 거라고 여겼다.어떤 말도 소용없었다.“누가 생각이나 했겠냐? 강무진이 뒤에서 그렇게 큰 수를 숨기고 있을 줄. 지금 그 놈 위치에서 또 누가 건드릴 수 있겠어?” 강상철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했다.강무진이 화상으로 연결했던 회사들.저들의 지분은 볼 만한 정도가 못 된다. 하물며 강무진이 상속권을 가지고 있으니.그 늙은이들은 이런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든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쪽으로 붙을 터.
강상철이 냉소를 흘렸다.“강무진이 자리에 오른 후, 네 쪽에서는 몇이나 잘렸어?”“적어도 절반은 될 걸요.” 이 일만 생각하면 강상규도 머리가 아프다.최근 이쪽 세력이 엄청 약해졌다. 예전에 곳곳에 박아 뒀던 자기 편 인사들이 강무진 때문에 거의 다 잘려나가고 있는 판이었다.그 놈은 도대체 어쩜 그렇게 이쪽 라인들만 정확하게 골라 내는지. 분명 계속 이쪽을 주시해 왔을 것이다.그야말로 족집게 수준이다.이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었다.강무진 이 놈이 어찌나 전광석화 같이 손을 쓰는지 안금여 보다 더 지독했다. 예전에는 대충 눈감아 주기도 했는데, 지금 강무진이 실권을 쥐니 자신들의 손실이 막대했다.“다시 우리 사람을 심을 방법을 생각해야 해.” 자신들을 대신할 눈이 없으면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앞으로 강씨 본가에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방법을 생각해야 해. 무진이 자리에 오르고 처음 얼마간은 기세 등등 하겠지. 당분간은 그러라고 해.”무진의 능력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강경하게 맞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럴 땐 잠시 바람을 피하는 게 상책.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 손자 강일헌과 강진성이 들어왔다.한쪽에 잠자코 대기하면서 두 할아버님의 말씀을 들었다.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지금 사태가 긴박하니 아무래도 불똥이 튀지 않게 있어야 했다.“아니면, 무진이 그 놈 주변부터 손을 쓰면 어떨까? 강무진 주변에 손건호라는 비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진이 비밀을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약점만 쥘 수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강상철은 자신이 말하면서 점점 흥분되었다. 제법 그럴 듯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안 됩니다. 그 놈 주변의 것들은 모두 특수 훈련을 받은 놈들입니다. 무진이 우리 옆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엎드려 있으면서도 들키지 않았던 건 내부 결속력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그때 가서 괜히 인심도 얻지 못한 채 무진이 그 놈에게 되려 당
지금의 WS 그룹은 거의 강무진이 한 손으로 받치고 있다 봐야했다.강일헌과 강진성 두 사람 모두 굳은 표정이다.자신들이 관리하는 계열사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강무진이 격노한 상항에 자신들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이제야 비로소 강무진이 상대하기 까다롭고 만만찮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할아버님, 계열사에서 지원금 20억을 지원 요청했는데, 강무진은 6억만 승인했어요. 이래서야 어떻게 사업을 합니까?” 화가 난 강일헌의 얼굴이 푸르죽죽하다.강무진이 결재하던 그 때가 마침 직원 월급이 나가는 날이었다.지원금이 너무 깍여서 하마터면 월급도 지불하지 못할 뻔했다.결국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제 돈으로 메꿨다.“겨우 6억? 그럴 리가…….”잠시 생각하던 강상철이 갑자기 미심쩍다는 듯이 강일헌을 째려보았다.“너 예전에 중간에서 리베이트 많이 해먹었지?”그렇지 않으면 20억을 올렸는데, 무진이 저렇게 깍았다는 게 말이 안된다.순간 멍해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강일헌은 무의식적으로 부정했다. “아니에요, 할아버님, 제가 어떻게…….”“너 지금 사실대로 말해! 그런 적 있어? 없어?” 강상철이 눈에 띄게 화를 내었다. 음성도 거칠었다.강일헌의 목이 움츠러들었다.원래 이런 배짱이 없는 사람이었다.강상철이 화가 난 걸 보니 더 무서워 말할 수가 없었다.상황을 지켜보던 강상규가 얼른 사태를 적당히 수습하고자 강일헌을 구슬렀다.“일헌아, 여기 우리뿐이야. 솔직히 말해 봐라. 무슨 일이든 우리끼리 같이 해결해야지.”강상규의 온화한 태도에 강일헌이 용기를 내어 이실직고했다.“매번 본사에서 돈을 보내오면 제가 1억 정도 하고 고객들이랑 친구들 접대도 하고 그랬어요. 이건 원래 본사가 결재해야 하는 겁니다. 예전에 큰할머니가 계셨을 때는 이렇게 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화가 난 강상철이 냉소를 지었다.“너, 눈을 크게 뜨고 봐라. 지금 회사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지금은 계열사뿐 아니라
안금여는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병실도 이미 다 준비 되었다. 필요한 의료기기들도 모두 세팅이 끝난 상태.조승호는 다음날 실험을 진행하기로 계획을 잡았다.성연은 병원에서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안금여의 쪽의 상태를 훤히 알고 있었다.오늘 밤에 약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그날 저녁, 평소대로 무진에게 침을 놓았다.그리고 무진에게 가져다 줄 약재를 들고 오는데 무진이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좀 멍해 보였다.모처럼 멍한 모습을 본 성연이 침대가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지금 무슨 생각 해요?”“할머니 생각.” 정신을 차린 무진이 눈앞에 있는 성연을 바라보며 무심결에 말했다.“하나도 안 걱정 안된다며?” 성연이 피식, 참지 못하고 웃었다.무진이 보이는 것처럼 차분하다고만 생각했다.어제도 자신에게 겁나지 않는다고 허세를 부렸었다.“거짓말을 너도 믿어?” 무진이 부인도 하지 않고 바로 솔직하게 인정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할머니 안금여가 줄곧 자신을 안아 키웠다.자신을 보호하던 할머니가 이렇게 되었는데 그가 어떻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자신도 나무토막이 아니었다.다만 표현을 잘하지 못할 뿐이다. 오래된 습관으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일 뿐.그래서 성연이 물었을 때 그의 태도는 좀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무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말한다 한들 별 소용도 없을 테고.“거짓말을 진짜로 믿으면 어떡하려고?” 성연이 눈을 깜박였다.강무진의 방식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원래 솔직한 사람인 성연은 있는 그대로 말한다.아마 무진도 자기 성격 때문이겠지.“나를 모르면 그렇겠지.”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성연이 눈을 부릅뜨고 째려봤지만 할 말이 없었다.‘사람들이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안다고?’‘이리저리 재고 따지는 건 싫다, 너무 피곤해.’욕실에 받아 놓은 물에 약재를 풀었다.
‘그래함과 무진 씨 사이는 썩 괜찮은 것 같아.’성연은 두 사람이 언제 번호를 교환했는지도 몰랐다.‘그런데 사형이 전화를 받는 속도가 꽤 빨랐어.’성연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사형하고 채연 언니는 뭐하고 있대요?”‘채연 언니가 멀미를 했으니까, 사형도 당연히 언니하고 같이 쉬고 있었을 텐데.’‘전화를 그렇게 빨리 받을 수가 없어.’그래서 성연은 약간 궁금해졌다.“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맞혀 봐?” “뭐 먹고 있었나...?” 성연이 머뭇거리며 답을 말했다.“두 사람은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도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성연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얼굴을 가렸다.‘사형하고 언니는 대낮인데도...’‘하필이면 무진 씨가 들었어.’‘하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 호텔에는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바로 불이 붙은 거야.’‘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도 정상일 거야.’말을 하던 무진이 성연에게 바로 키스를 했다.무진의 키스를 받은 성연은 숨을 헐떡이며 무진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무진의 동작은 갈수록 대담해졌다.성연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너무 조급하게 그러지 말아요.”‘여긴 집무실이라서 언제든지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문을 잠그더라도 누군가 보고하러 문을 두드릴 거야.’성연은 아직 이런 정도로 개방적이지는 않았다.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것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적어도 결혼식 후에 생각해야지.’‘나는 아직 그렇게 젊은데, 아이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생각만 해도 정말 귀찮아.’“안 돼,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성연이 사무실에서 그러는 걸 원하지 않는 이상, 무진도 개의치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곳이라면 조용하고 공간도 넓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야.’“무진 씨, 좀 진정해요...”성연은 얼굴을 붉히며 무진의 가슴을 밀어냈다.‘무진 씨는 정말 갈수록 대담해져.’‘누가 강무진을 금욕주의자라고 했어?’‘나를 잡아먹으려고 눈이 벌개져 있는데, 그런
무진은 전례 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문을 열고 성연의 뒷모습이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곧장 달려가서 성연을 백허그로 안았다.고개를 돌린 성연이 무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키스를 날렸다.무진은 키스를 잠시 중단하고 대표실 문을 잠궜다.이어서 성연에게는 숨막히고 공격적인 키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무진의 손도 슬슬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성연도 빨갛게 뺨이 달아올랐지만 무진의 손을 잡고 막았다.“지금은 회사라서 안 돼요.”성연이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려던 무진은 마음속의 욕망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그리고 성연을 품에 꼭 안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진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성연을 껴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나서야 성연에게 그래함의 일에 대해 물었다.“어떻게 됐어?”성연은 그래함과 유채연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그전의 우여곡절들은 많이 생략했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말했다.이야기를 듣고 난 무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그래함이 그렇게 다정한 남자인 줄 몰랐네.’‘그래함의 권력과 지위라면 어떤 여자인들 얻지 못하겠어?’‘줄곧 고향의 연인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니.’무진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가 성연과 함께 있을 때 성연의 신분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어.’‘감정이란 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느낌만 따라야 해.’무진은 유채연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궁금해졌다.‘그래함 같은 대단한 남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라니.’“무진 씨도 믿기지 않지요?” 성연이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그래.”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좀 믿기 힘든 일이야.’“이전에 사형이 채연 언니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사형이 예전에 채연 언니가 자신에게 준 증표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채연 언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걸
북성에 도착하자 그래함은 유채연을 데리고 최고급 호텔을 체크인했다.뒤에서 그들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무진이 생각났다.‘나도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 뭐.’‘요 며칠 사형과 채연 언니가 애정을 과시하는 것만 바라보았지.’유채연과 그래함도 성연을 잊지 않았다.유채연이 물었다.“성연아, 너 우선 우리 호텔로 가서 쉬지 않을래? 차를 그렇게 오래 탔는데 힘들었잖아.”유채연은 멀미가 나서 창백한 표정으로 그래함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됐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두 사람의 세계를 방해할 수 있겠어요? 저는 먼저 갈게요.” 성연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혼자 차를 타고 떠났다.유채연은 성연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걱정했다.“성연이 걔가 갈 곳이 있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가 밖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해.”“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그래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채연아, 성연이는 이곳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잊었어? 전에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성연이에게는 아주 대단한 약혼자가 있다는 거 말이야.”유채연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성연에 대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래서 약혼자를 찾아간 거야?”“그래, 걱정하지 마. 지금 멀미하지? 힘들면 내가 밖에 나가서 약 좀 사올까?” 그래함은 유채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좀 자면 돼.”“그럼 그렇게 해.” 그래함도 마음 놓고 유채연을 혼자 둘 수 없었다.‘처음 이곳에 왔는데, 내가 채연이 곁에 없다면 채연이가 불안해할 가능성이 높아.’한편 성연은 바로 무진을 찾아갔다.그러나 자신이 돌아온 걸로 무진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려고 무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성연은 예전에 지문을 입력해 놓아서, 보고 없이 바로 최고층까지 갈 수 있었다.요 며칠 동안 무진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이제 곧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설레는 듯했다.성연이 집무실 입구에 도
외삼촌은 다가가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부축했다.여전히 울고 있던 유채연이 일어나자, 그래함이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다.“얼른 가거라.” 외삼촌도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함은 외삼촌을 한 번 본 뒤 유채연이 차에 타도록 부축해 주었다.유채연은 외삼촌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성연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외삼촌이 몸을 돌릴 때 눈물이 땅에 떨어지는 걸 봤지만, 유채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이 옆에서 따라서 소리쳤다.“외삼촌, 제가 채연 언니하고 자주 돌아올 게요. 저는 외삼촌 가게 하드가 좋아요.”그제야 서둘러 눈물을 닦은 외삼촌이 몸을 돌려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마.”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자, 창밖의 장면도 빠르게 바뀌었다.차에 앉아서도 유채연은 여전히 훌쩍거렸다.그래함은 유채연을 꼭 안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채연아, 외삼촌이 보고싶으면 앞으로 자주 돌아와서 볼 수 있어. 내가 같이 올게.”“정말?” 그래함을 바라보는 유채연의 눈은 마치 토끼의 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물론이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다 해 줄게.” 예전에는 그래함도 뭘 해도 혼자였다.하지만 이제 유채연이 있으니 모두 달라졌다.그래함은 틀림없이 유채연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어쩌면 유채연을 위해 정말 국내로 이주할 수도.“그런데 내가 없는데 외삼촌은 어떡하지? 자기 몸을 잘 추스릴까?”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책임졌지.’‘지금 내가 떠났으니 외삼촌은 잘 수습할 수 있을지 몰라.’성연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연은 일부러 그 자리에 앉아서 유채연과 그래함에게 공간을 내주었다.그 말을 듣고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채연 언니, 외삼촌은 마음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떠날 때 그래함은 외삼촌에게 체크카드를 남겨 두었다. 비밀번호도 쪽지에 써 두었다. 그 돈이면 외삼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이런 유채연의 모습을 보고 외삼촌은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정말 재수 없게 징징거리고 있지. 꼴이 그게 뭐야? 나는 상관하지 말고 빨리 가. 나한테 돈도 있고 차도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어. 너는 나한테 짐만 될 뿐이야!”유채연은 외삼촌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대부분 외삼촌은 그저 입으로만 모질게 굴었을 뿐이다.사실 자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애초에 집에 그렇게 많은 일이 생기자 친척들마다 모두 양보하면서 피했다.외삼촌만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모두들 유채연이 흉악한 외삼촌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좋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그러나 그동안 삶의 질이 좀 떨어진 걸 제외하면, 외삼촌은 진심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가게에 온 손님 중에 간혹 유채연의 예쁜 모습을 보고 희롱하려고 했지만, 모두 외삼촌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이전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자, 유채연은 외삼촌이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 준 걸 알게 되었다.유채연이 갑자기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외삼촌, 그동안 거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본 그래함도 유채연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외숙부님, 채연이의 부모님이 안 계시니 외숙부님이 채연이 아버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맹세하겠습니다.”“저희는 곧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읍내에서 잔치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연이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할 테니, 채연이를 제게 주시면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채연이에게 정말 잘 하겠습니다.”남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성이다.그러나 그래함은 유채연을 위해 외삼촌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역시 그래함의 성의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을 외삼촌은 더욱 눈에 새겨 두었다.‘채연이가 그래함과 함께 있으면서 미소도 눈에 많이 많아졌어.’“너희들 빨리 일어나!”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었다.입으로는 듣기 싫은 말을 하지면, 개를 길러도 이
이전에 유채연이 입었던 옷은 전부 그래함과 성연이 함께 골라준 옷으로 교체되었다.유채연은 트렁크를 사서 물건을 다 넣었다.곧 떠나야 할 때, 유채연이 외삼촌과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갈게.” 유채연을 도와 트렁크를 닫고서 그래함이 일어났다.“그래도 나 혼자 갈래...”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이제는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외삼촌은 우리 관계의 증인이자 네 유일한 가족이야. 내가 널 데리고 갔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함이 유채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유채연은 자연스럽게 그래함과 더 가까워졌다.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만약 외삼촌이 그래함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마음이 더 괴로울 거야.’“그래, 같이 가자.”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섰다.나오다가 마침 두 사람을 찾으려던 성연과 마주쳤다.“성연아, 우리 외삼촌 보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유채연은 요 며칠 성연과 계속 붙어 있어서, 성연에 대한 감정도 이미 예전처럼 좋았다.어디를 가든지 성연을 데리고 가야 해서, 그래함이 한바탕 질투하기도 했다.“출발하기 전에 외삼촌과 작별인사 하러 가는 거예요?”성연이 물었다.“그래.”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함께 갈게요.” 눈치 빠른 성연은 유채연의 손을 잡지 않고 뒤에서 따라갔다.‘채연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이 나란히 다정하게 가는 모습을 보면, 외삼촌이 좀 안심할 수 있겠지.’유채연과 그래함은 앞에서 함께 걸어갔다.유채연의 마음은 여전히 좀 불안했다.‘예전에 외삼촌이 못마땅했을 때는 여기를 탈출하겠다는 생각도 했지.’그러나 정말로 외삼촌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유채연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다지 내 생각대로 지내지는 못했지만.’‘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내 유일한 피난처였지.’“걱정 마, 외삼촌은 좋은 분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자, 유채연은 코가 시큰거리면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지만 뜬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지금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다.유채연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걸 보자, 가볍게 한숨을 쉰 그래함이 휴지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해? 앞으로 나하고 있으면서 내가 잘 해줄 테니까 이렇게 울면 안 돼.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안타까워.”그래함의 부드러운 말을 들으면서 유채연의 감정도 점차 가라앉았다.감정이 진정되자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맛보았다.아주 달았다. 이 달콤함이 유채연의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마음을 천천히 따뜻하게 했다.“고마워, 그래함.” 유채연은 코를 훌쩍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내가 좀 일찍 너를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함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우리는 지금이 좋아.” 유채연은 그래함의 이런 의기소침한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그래,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는 더 좋아질 거야.”그래함이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성연은 어느새 감정이 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그러나 계속 뒤를 따라 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성연은 정말 기뻤다.자신도 그런 분위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예전에는 그저 단순하게 그래함 사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그러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정말 두터운 그래함의 깊은 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성연은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처음에 굳어 있던 두 사람이 점차 풀어질 때까지 이미 정말 잘 지나왔어.’“두 분, 연애하면서 여동생도 잊어버렸지요? 나 너무 배가 고파요. 밥 먹으러 가고 싶어요.” 성연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게에서 별로 먹지 않고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그 말을 들은 유채연이 바로 뒤돌아서 미
“언니, 빨리 나와서 사형에게 보여주세요.” 성연이 바로 유채연을 데리고 나갔다.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유채연은 바로 그래함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래함은 지금도 유채연이 겉모습만 꾸민 여자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약간 수줍어하는 그 모습은 언제나 그래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래함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유채연도 그래함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걸 정말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한참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그래함의 눈을 마주한 유채연이 어색하게 치마자락을 잡고 말했다.“어때? 보기 싫어?”“예뻐. 내가 홀딱 반할 정도야.” 그래함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유채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화장을 마친 뒤 그들은 계속 쇼핑을 했다.성연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게 자리를 양보했다.그래함이 바로 앞으로 가서 유채연의 손을 잡았다.유채연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래함은 꼭 쥔 채 유채연이 벗어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성연이도 여기 있잖아.” 유채연은 20여 년을 살면서 그래함 이 한 사람만 좋아했다.평소에도 남자와 스킨십을 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래함과 함께 걸으면서 유채연은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러나 그래함의 따뜻한 손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끼자 마음은 달콤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그래함이 바로 말했다.두 사람 뒤에 있던 성연은 하마터면 그래함을 흘겨볼 뻔했다.‘이건 날 훼방꾼으로 여기는 거야.’유채연은 감히 고개를 돌려 성연을 보지 못하고, 손을 잡힌 채 얼굴만 빨개졌다.그래함은 유채연이 자신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자 불만스러웠다.“채연아, 팔장을 낄래.”“아니, 손을 잡았잖아.” 유채연은 입술을 깨물며 수줍어했다.“우리 연인 사이잖아?” 그래함이 유채연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열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자 유채연은 더욱 부끄러워했다.‘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외삼촌에게 차를 주자, 외삼촌은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겠다고 말했다.그래함이 자신을 속이는 건지 보려는 것이다.외삼촌이 차를 몰고 가자 성연과 그래함, 유채연만 남게 되었다.오늘 손님이 오기 때문에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자세히 헤아려 보니 외삼촌은 정말 디테일한 사람이야.’“채연 언니, 우리 쇼핑하러 가요.” 성연이 다가가서 유채연의 팔장을 꼈다.“그래.” 유채연은 성연이 쇼핑을 하려는 걸로 생각하고 함께 갔다.성연이 유채연을 데리고 온 곳은 모두 고급 쇼핑몰이었다.유채연도 옷을 좀 사고 싶었지만, 가격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성연은 흰색 원피스를 유채연의 몸에 대고 비교해 보았다.“채연 언니, 이 원피스가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 보세요.”“난 됐어. 네가 맘에 들면 사.” 방금 유채연은 가격표를 언뜻 봤다.‘너무 엄청난 가격이야.’‘원피스 한 벌에 어떻게 가격이 이렇게 비쌀 수 있는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야!’“언니, 이 치마가 정말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보고 싶지 않아요?” 성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채연을 바라보았다.눈앞의 원피스를 보고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한번 입어 봐.” 그래함도 유채연이 이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유채연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기대되면서도 머뭇거렸다.마침내 결정을 내린 뒤에 옷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확실히 잘 어울리네.’유채연은 한번 입어 본 걸로 만족했고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성연과 그래함이 번갈아 설득해서 유채연도 결국 옷을 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또 유채연에게 많은 옷을 사주었다.처음에는 유채연도 두 사람이 돈을 쓰는 걸 걱정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유채연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중에는 돈을 쓰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예쁜 옷을 많이 산 뒤 그래함이 뒤에서 가방을 들어주었다.그래함의 두 손으로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였다.성연은 또 유채연을 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