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은 CCTV를 아주 영리하게 피하며 저택 내부를 빠져나갔다.저택 엠파이어 하우스는 강무진의 사적인 영역이다.오직 무진이 절대 신임하는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었기에 CCTV를 많이 설치하지 않았다.주로 저택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점 때문에 성연은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CCTV의 사각지대를 찾아낸 성연이 담 위에서 뛰어내렸다.깔끔한 동작으로 발끝을 세워 가볍게 착지했다.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성연은 저택을 둘러싼 숲을 지나 밖으로 빠져나갔다.성연은 오늘 일을 위해서, 움직이기 편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색 운동복을 입었다.평소에도 활동성 좋고 무난한 옷차림을 선호하는 성연인지라 무진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숲 반대편 길가에는 이미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성연을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있던 서한기가 성연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보스, 솜씨가 전혀 녹슬지 않았는데요?”서한기가 있던 곳에서는 담장을 넘는 성연의 모습이 다 보였다.동작이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예쁘게 담 넘는 사람은 우리 보스 말고는 없을 거야.’“어째 내가 많이 늙기라도 한 것 같다?” 성연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아, 보스, 그렇게 말하지 말죠? 사람이 칭찬하면 기분 좋게 받아주면 안돼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서한기가 마이바흐의 시동을 걸고 엠파이어 하우스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그럼 사실이 아니야?” 눈썹을 찡그린 성연은 좀 이해가 안된다는 어투였다.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거만함도 깔려 있고.서한기는 목이 막히는 듯했다.‘사실이 그렇다 해도 그렇지, 보스, 좀 겸손하면 안 돼요?’‘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해?’서한기는 한 차례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후, 입꼬리를 잡아당겨 올리며 대꾸했다.“물론 사실이죠. 우리 보스가 제일이지요.”서한기의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웃음을 본 성연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네 웃음이 조금만 더 진실해 보이면, 내가 믿어주지.”
송성연과 서한기는 두 길로 나뉜다.성연과 서한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각자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함께 병원 뒷문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한밤중에도 병원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안은 고요했다.병원의 불빛은 터무니없이 새하얗고 마치 사람을 스며들게 하는 것 같다.성연은 당직을 맡고 있는 간호사를 피해 위층으로 올라갔다.구석자리 한 곳을 찾아 노트북을 켠 서한기는 병원 내부 시스템으로 들어가 감시 시스템을 통제했다.이제 성연은 야간 순찰하는 간호사와 경비원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고모부 조승호가 약품을 보관하는 방을 찾았다.할머니 안금여의 약은 따로 보관하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병원을 자주 다니다 보니 이곳의 지형에 익숙했다.곧 약품을 보관실에 도착했다.약품 보관실이 있는 층은 평소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 성연이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실내.어둠 속에 몸을 감춘 성연은 실내를 자유자재로 누볐다.캐비닛을 열고 막 약을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성연이 동작을 멈추자 뒤쪽에서 불빛 한 줄기가 들어 왔다.순간 그녀는 날쌔게 몸을 움직여 얼른 뒤편의 책상 밑으로 숨었다.아무래도 경비원이 야간 순찰을 돌고 있는 것 같았다.과연 성연의 생각대로 야간 순찰을 돌고 있는 경비원이었다.경비원이 들어와 먼저 한 바퀴를 둘러 본 다음 손전등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중얼거렸다.“조심성 없이 누가 이런 거야? 캐비닛 문도 닫지 않고. 이 안의 약이 얼마나 비싼 건데. 만약 하나라도 잃어버려 봐, 그럼 누가 책임질 거야?”캐비닛을 닫은 경비원은 다시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본 후 문을 잠그고 나갔다.경비원이 나간 후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방금 방에 들어왔던 경비원이 동료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무 문제 없다니까! 다시 가서 확인해 봐? 믿지를 않으니 원, 설마 무슨 일 생기겠어?”“너 나중에 몰
다음 날, 안금여에게 시약하기 시작했다.약이 안금여의 체내에 성공적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강씨 집안의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안금여의 상황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그 중에서도 가장 긴장한 사람은 강운경이었다.운경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한 채 엄마 안금여만 바라보았다.많은 사람들이 설득했음에도 운경은 한사코 식사를 거부했고, 결국 모두 포기한 상태였다.사람들의 거듭된 설득에 황급히 한두 수저 뜨는 둥 마는 둥 한 운경이 엄마의 병상을 지켰다.성연도 병실에 같이 있었지만, 운경이 귀찮아 하는 눈치라 병상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처음 약물을 투여했을 때, 안금여는 계속 잠만 잤다.별다른 반응은 없었다.운경은 남편 승호의 손을 잡은 채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을 했다.“엄마 이대로 잠이 들어서 안 깨시는 건 아니겠지?”“그럴 일 없을 거야.” 승호가 고개를 저었다.모두 안금여가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친구에게 약을 받을 때 승호는 재차 확인했었다.설령 이 약이 치매에 효과가 없다 해도 몸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안금여의 몸에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터였다.“그런데 엄마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반응이 없으시지?” 운경은 머리가 아팠다.낮에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은데 엄마의 몸상태까지 걱정해야 하니 그녀의 몸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지금 걱정까지 더해지자 몸 여기저기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운경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승호가 뒤에서 운경의 목, 어깨,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너무 조급해 하지 마. 어머님은 좋아지실 거야. 약 효과는 서서히 나타날 거야. 그리고 이거 한가지만 기억해.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일은 절대 없어. 어머님은 꼭 회복될 거야. 한 번해서 안 되면 두 번 하면 돼. 나는 절대 포기 하지 않아. 어머님이 좋아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계속 노력할 거야.”운경은 사실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과중한 업무로 수면 시간이 줄어들며 불규칙적이 되다 보니 어
약을 투약한 다음 날 아침, 안금여가 깨어났다.서서히 눈을 뜨며 깜빡거렸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지며 청명해졌다.“엄마, 깼어요? 지금 기분이 어때요?” 운경은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안금여의 상태를 확인하며 바라보았다.딸의 목소리를 들은 안금여가 고개를 돌려 딸을 한 번 보았다.“괜찮아.”깨어난 안금여는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했다. 이제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흥분한 운경은 어쩔 줄을 몰라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그럼 엄마,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딸을 알아본 표정을 지은 안금여가 기대에 찬 운경에게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내 딸을 내가 못 알아볼까 그래?”지금까지 참아왔던 눈물이 운경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안금여의 손을 붙잡았다.“엄마, 엄마, 절 알아보시는 거예요. 못 일어 나실까 걱정했어요.”안금여가 운경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이 아이들 모두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효심을 다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마음이 뿌듯함으로 충만했다. 모두 자신이 키운 아이들이었다.할머니가 회복된 것을 확인하자 운경의 뒤에 서 있던 무진의 미간이 서서히 풀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오래 동안 노력하는 건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만, 다 큰 애가 울면 어떻게 하니? 무진이도 있는데 나중에 창피해서 어쩌려고 그래.” 살짝 핀잔을 준 안금여가 휴지를 꺼내 운경에게 건넸다.“엄마, 그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드디어 일어나셨으니 한시름 놓았어요.”운경이 눈물을 닦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회사에 아무리 큰 위기가 닥쳤어도, 무진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흔들림 없었던 그때보다 더 힘든 시간들이었다.하지만 그 힘든 날들을 모두 견뎌냈다.가까스로 긴장을 풀 수 있게 된 운경은 이제부터라도 엄마가 여생을 평안히 누리시길 진심으로 바랬다.‘한평생 힘들게 사셨으니 이제라도 잘 돌보아 드려야지.’“아이고, 아직도 울 게 더 남았어?”
“감사하실 필요 없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인 걸요.” 할머니의 감사인사 한마디에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보답을 받은 기분이었다.안금여 또한 자신에게 무척 잘해 주지 않았는가. 그런 안금여의 선의에 보답하고 싶었을 뿐.부드러운 눈빛으로 성연을 바라보던 안금여가 운경을 쳐다보고는 가라앉은 표정을 지은 채 나지막한 음성으로 꾸짖었다.“운경아, 너는 하루 종일 이것저것 의심하느라 피곤하지도 않아. 나를 이렇게 열심히 돌본 성연이한테 그렇게 밖에 말을 못해? 정말 한심하구나?”운경이 입을 열어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확실히 그녀의 말의 좀 독단적이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성연이 나쁜 마음을 먹었는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나.운경이 말을 못 하고 있자 옆에 있던 성연이 입을 열었다.“할머님, 고모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고모님도 할머님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걸요. 제가 좀 신중하지 행동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미리 고모님에게 이런 치료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했었는데 오해가 좀 있었어요. 고모님이 말 한 게 모두 맞아요.”안금여는 이미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성연은 이전의 일을 왈가불가 따지고 싶지 않았다.앞으로 좀 더 강씨 집안에서 지내야 하니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가 있고 싶지 않았다.그리 대범한 편은 아니지만 몇 번을 생각한 끝에 운경을 위해 말을 거들기로 판단한 것이다.반대로 운경은 성연이 자신을 거들어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심지어 무진조차 자신을 탓하고 있었는데 말이다.그런데 외려 성연이 도량이 넓고 옹졸하지 않았다.성연이 자신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엄마가 깨어났으니 분명 운경 자신에 대해 일러바칠 거라고 생각했었다.하긴 자신이 사소한 일을 확대시킨 점도 있어 엄마가 뭐라고 말해도 듣기만 하던 참이었다.하지만 성연이 이 아이가 지금 이처럼 도량이 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운경은 성연을 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성연아, 미안해 방금 말을 실수했어. 내가
안금여가 좋아지자 강상철과 강상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화가 나 이마에 핏줄이 섰으며 온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강상철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놓으며 호통을 쳤다.“애초에 회장님이 절대 회복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어?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요즘 정말 하는 일마다 순조롭지 않았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강일헌도 믿기지 않는지 분노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일을 위해 1억이나 써가며 공들였는데, 후회가 밀려왔다.“할아버지, 애초에 그 사람이 제게 말하기를 절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어요. 그리고 설사 회복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빠르게 회복지는 몸한다고요.”약을 주기 전에 자신에게 약의 효과에 대해 얼마나 허풍을 떨었냔 말이다.자기들 연구소의 아주 대단한 성과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없을 거라고 하더니. 강일헌은 지금 화가나 참을 수가 없었다.‘해독 할 수 없기는 개뿔! 일주일도 안 돼서 해독이 되었잖아? 내가 그 새끼 허튼소리에 속아 넘어가다니!’“그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 할 건데. 회장님이 회복되셨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거야?” 강상철은 화가 나서 목소리마저 음산했다.강일헌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수 십년 동안 할아버지가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강상규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형님, 이 일은 일헌이 탓이 아닙니다. 일헌도 우리를 도와 일을 잘 하려고 한 거고요. 일헌이 이런 것에 대해 잘 몰라 속은 것 같네요. 그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겁니다.”“하루 종일 멍청한 짓이나 하고, 사람 하나도 제대로 못 알아보고 사기나 당하고. 이것 밖에 못해?” 강상철이 온몸을 떨어가며 화를 냈다.‘큰 집이 비어있는 틈을 이용해 철저히 준비했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다니.’“형님, 회장님 정말 괜찮은게 맞을까요? 저는 그들이 회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유언비어를 퍼뜨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정말 치매에 걸렸던 형수 안금여가 그런대로 효과 있는 약 때문에 조금
강일헌은 머리를 써서 그 약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지 않았다.이전에 그에게 약을 줬던 왕명식에게 전화해서 그 약이 아주 유용하다며 다시 큰 거래를 하고 싶다는 말로 불러 내었다.예상대로 1시간 후에 왕명식이 클럽에 나타났다.화가 난 강일헌이 재빠르게 다가가 팔로 목을 조인 채 뒤로 끌고 갔다.왕명식이 곧 소리를 질렀다.“뭐야, 왜 그래, 강일헌? 무슨 일인데 그래? 놓고 말해. 나랑 거래하겠다면서? 날 죽일거야?”강일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룸안으로 끌고 들어 갔다.그런데 룸 안에는 강상철과 강상규가 같이 앉아 있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들어 보려고 같이 온 것이다.룸에 도착하자 강일헌이 손을 풀었다. 몰래 강일헌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왕명식의 눈에 자리에 단정히 앉은 두 노인이 보였다.강씨 가문의 강상철과 강상규는 큰형인 강상중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명성이 자자했다.북성에서 누가 그들을 모르겠는가?그들이 뒤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뿐. 당연히 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다행히 방금 욕설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왕명식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이다.앞으로 다가간 왕명식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 “강상철 사장님, 강상규 사장님, 안녕하세요.”그의 공손한 태도에 강상철과 강상규의 마음이 좀 풀렸다.“안 본 사이에 철이 들었구나.”“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왕명식이 웃으며 말하자, 순간, 강상철의 안색이 바로 변했다.“무릎 꿇어!”“네…… 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왕명신은 일이 갑자기 왜 이런 험악한 방향으로 흐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무릎을 꿇으라면 꿇어야지. 묻는 말에 대답 잘해.” 강일헌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눌렀다.앞에 있는 두 어르신을 보면서 왕명식의 마음이 가라앉았다.‘일 얘기면 일 얘기지, 왜 굳이 무릎까지 꿇으라고 그래?’그러나 왕명식은 내색 없이 반쯤 무릎을 꿇었다.
안금여가 정신을 회복한 후, 성연은 할 일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충분한 수면 시간을 가지며 예전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히 게으른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었다.그리고 때마침 성연의 18세 생일 겸 성인식이 다가오고 있었다.성연은 안금여의 눈에 들어 아주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성인식은 아이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해주는 중요한 날이니 만큼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지금 집에는 운경과 안금여 두 사람만 있었다.죽을 다 먹은 안금여가 운경에게 말했다.“성연의 성인식이 곧 다가 오지 않니? 융성하게 치러 줘야지. 그 아이를 서운하게 해서는 안돼.”그때 성인식을 하는 김에 성연의 신분도 발표할 생각이었다.진작 마음속으로 성연을 손자며느리로 인정한 안금여이다.운경이 질투하는 척 투덜거리며 말했다.“엄마, 성연이 그 애가 그렇게 좋아요?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주지도 않으면서.”“너 좀 부끄러운 줄 알거라. 넌 어른이야. 성연이가 너보다 더 철이 든 것 같아. 성연이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날 돌보았는데도 넌 그 애한테 어떻게 했니? 애를 오해해서 서운하게 하지 않았니? 이번에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너 앞으로 성연이를 볼 낯이나 있겠니?” 안금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자신의 손자 며느리인 성연의 신분은 자연히 비할 데 없이 귀했다.‘이번 성인식을 통해 외부에도 성연의 얼굴도 알려야지.’‘어느 누구도 함부로 성연을 대하지 못하도록 말이야.’만약 누구든 강씨 가문의 사람으로 약정된 성연에게 무슨 짓이든 하려 할 땐 반드시 자신의 힘부터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엄마는 그래서 내가 사과했잖아요?” 안금여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훈계를 들은 운경이 당황했다.자기 보다 한참 어린 아이 때문에 한참이나 꾸지람을 듣게 되자, 정말 창피했다.“네가 성연에게 한 말들이, 가벼운 사과 몇 마디로 넘어갈 수 있겠니? 성연이 속이 깊으니까 별말 안 했지. 난 그리 쉽게 용서해 줄 생각 없어.” 안금여가 딸을 노려보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