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있긴 하지…… 명의 고학중을 찾을 수만 있다면…….”무진의 말을 들은 손건호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고학중은 신출귀몰해서 그 정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직도 없었다. 오랜 기간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는데 그를 찾기 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게다가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치료를 맡는 것도 아니었다.성질이 괴팍한 고학중은 오로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치료 여부를 결정했다.그에게는 신분과 권력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억만금을 줘도 환자를 치료하지 않는다고 하니. 반면 마음이 내킬 땐 한 푼도 받지 않고 치료해 주기도 한다고.적잖은 권세가들이 그의 치료를 원했지만 억지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아부하기에 급급했지.몇 해전, 강씨 집안에서도 무진을 치료하기 위해 다양한 루트를 통해 그를 수소문했었다.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종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즉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그러니 무진이 한 말은 하나 마나 한 얘기였다.침묵을 지키던 손건호는 보스를 위로하고자 입을 달싹거렸지만,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할 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무진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한 무진이 곧바로 방에서 나와 성연의 방 앞으로 가 노크했다.“송성연, 너 학교에 가야지…….”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성연은 부시시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내려왔다.졸린 눈을 반쯤 감은 채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잠에서 덜 깬 모습 그대로.아침 식사가 끝난 후 학교로 출발했다.무진의 차로 학교까지 이동하는 동안.성연은 차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왼쪽 창문에 기대어 있다가차체가 흔들리면서 몸도 덩달아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그리고 무진의 어깨에 안착.자신이 아닌 다른 신체의 따뜻한 기온에 깜짝 놀란 성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곧 자세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잠결에 또 무진에게 몸을 기대는 성연.졸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지만 천근만
당당한 성연의 말에 할말을 잃은 손건호.하마터면 잊을 뻔했다.작은 사모님은 아직 미성년자라는 걸.아직 몸이 자라고 있다는 게 맞았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무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성연의 정수리를 살짝 두드렸다.“계속 자. 학교에 도착하면 깨워 줄게.”고개를 끄덕인 성연은 무진의 품에 안겨 계속 잠을 청했다.무진의 품은 편안했다.학교에 도착하자 무진이 낮은 소리로 깨웠다.선잠을 자고 있던 성연은 바로 깨어났다. 차에서 내린 성연이 무진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한 뒤, 교실로 향했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한 편.모 삼류 고등학교.송아연이 새로 편입한 학교다.북성에서 그다지 좋은 학교가 아니었다.학생들 태반이 서민 계층의 자녀들로, 단체복은 고사하고 교복도 없었다. 각자 후줄근한 평상복 차림에 학습 분위기도 꽝이었다.여기저기 낙서 천지인 교실 벽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환경도 별로 좋지 않았다.여학생들은 진한 화장에 피어싱에, 알록달록 염색 두발까지. 촌스러운 옷차림은 마치 90년대 하드 록 스타일을 연상케 할 정도다.이전에 다니던 귀족 고등학교, 북성남고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강씨 집안은 아연에 대한 징계를 풀었다.강씨 집안이 입김을 넣지 않았다면 이런 삼류 고등학교조차도 편입이 불가능했을 터.흰색 원피스를 입고 교실에 앉아 있는 송아연은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걸핏하면 상스러운 욕도 서슴지 않고 뱉는 아이들.이 모든 것들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아연이다.꼿꼿한 자세로 앉아 같은 반 아이들의 장난치는 모습을 보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그저 책상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다. 살구색의 책상은 이전에 다니던 북성남고와 비슷했다.하지만 이전 학교에 비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로 인해책상 위는 온통 낙서 자국들과 칼로 새겨진 글자들이다.그것도 중2 아이들이나 쓸만한 유치한 말들.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성연은 깨달았다.‘북성남고와는 하늘과 땅 차이구나.’‘
이제 오전 수업 하나가 끝났음에도 아연은 참을 수가 없어 그냥 도망쳤다.이 학교의 학생 관리는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교문을 나서려 하자 경비원이 형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앞에서 막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아연이 거짓말로 몸이 아파 선생님에게 귀가 허락을 받았다고 하자,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학교를 나선 아연은 지체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괴상한 학교를 벗어났다.집에 도착한 아연은 아빠 송종철을 보자마자 분함을 못 참고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쓰레기 같은 학교인지, 또 학생들은 얼마나 무서운지, 송종철에게 울며불며 하소연했다.송종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연의 얼굴은 온통 눈물 범벅이었다.“아빠, 나 정말 그 학교 못 다니겠어. 다른 더 좋은 데로 갈래.”아연의 말을 듣는 송종철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임수정은 더 마음이 아렸다. 어릴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원하는 대로 다 가지며 귀하게만 자란 아연이가 어떻게 이런 분통 터지는 일을 겪어야 하는지?남편 송암종을 바라보며 졸랐다.“여보, 얼른 방법을 찾아봐요. 저런 학교에서 학위를 받으면 뭐해요?”사실 그녀는 강씨 집안이 어린 여자아이 하나 무에 그리 신경 쓰랴 생각하고 희망을 가졌었다.그런데, 강씨 집안이 이런 삼류고등학교를 아연에게 배정해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강씨 집안이 이렇게 했을 때는 체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지. 어린 여자아이를 겨냥해서 치졸했다는 안 좋은 소문이 외부로 나가도 괜찮다는 거야?어찌할 방도가 없기는 매한가지인 송종철이 이를 갈며 말했다.“지금 성연에게 가서 부탁하는 것 말고 무슨 다른 방법 있어?”강씨 집안이 아연을 처벌한 이유가 성연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닌가?역시 문제는 송성연인 것이다.성연이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강씨 집안에 어떤 말이든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성연밖에 없었다.성연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강씨 집안이 계속 자신들을 힘들게 하겠는가?방법은 이것뿐이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아연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거부
성연은 오늘 또 학교에서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는 것 외에 하는 일 없는 멍청한 하루를 보내었다. 이제 선생님들은 그런 성연을 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수업이 끝난 후,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내일은 주말이어서, 병원에서 할머니 안금여 곁에 있을 작정이었다.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안금여는 성연이 처음으로 호감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안금여 또한 성연을 옆에 앉혀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성연을 보자마자 안금여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성량이 왔구나. 매일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단다. 병원에는 이 할머니와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구나.” 안금여가 성연을 반기며 자신의 병상 옆에다 앉혔다.성연도 웃으며 인사했다.“할머니, 수업 끝나자마자 왔어요. 내일은 주말이라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어요.”“아이고,고마워라.” 곁에 성연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는 안금여가 바로 귀찮다는 듯이 딸 운경에게 말했다.“내일 성연이 여기 있을 테니, 너희들은 올 필요 없다.”괜히 사람이 많으면 성연이 불편하게 여길까 오히려 걱정이다.운경도 별 다른 의견이 없었다.아무튼 안금여는 성연을 좋아했다. 성연이 안금여를 즐겁게 하니, 몸도 빨리 회복될 수 있었고.하지만, 분명 사람을 쫓아내는 기색이라 운경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엄마, 자기 딸을 그렇게 미워하기예요?”“너는 내가 말도 못하게 하지 않니? 너도 한 번 생각해 봐라. 성연이 말고 너희들 중 누가 나 같은 노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니?” 안금여가 짐짓 책망하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네, 네. 엄마 말씀이 다 맞아요. 지금 바로 가 드릴게요. 더 이상 여기서 방해되지 않도록요.”운경은 어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했다.안금여의 이런 모습은 확실히 늙은 아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내 곁을 지킬 시간도 없으면서 쫓아낸다고 나를 탓할 생각이니?”안금여 역시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그래요. 이제 그만 갈게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운경이 대답했다.저리 기
그날 밤.팰리스 클럽.꼭대기 층의 룸에 자리잡고 앉은 강일헌이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낭창낭창한 허리의 여성을 품에 안고 있는 폼이 꽤나 호방해 보인다.그때, 룸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일헌이 품에 안고 있던 여성을 밀어내며 말했다.“베이비, 먼저 가 있어. 잠시 뒤에 갈게.”“사장님.”그의 팔을 끌어안은 여성이 끈적하게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강일헌이 가슴에다 카드를 한 장 찔러주자 그제야 마지못해 떨어졌다.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검은 옷 차림에 마스크를 쓴 남자가 들어왔다.강일헌을 보고 마스크를 벗은 남자가 품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건넸다.“이게 네가 원하던 물건이야.”상자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어 보던 강일헌이 뚜껑을 열었다. 안을 들여보니 검정색 알약 몇 알이 들어 있었다.일반 약과 별 다른 게 없어 보였다.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눈앞의 남자를 힐끔 쳐다본 뒤에 물었다.“이게 정말 네가 말한 것처럼 신묘하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안이 중대해. 만약 일이 틀어지면, 사정 봐 주지 않을 거야.”남자가 강일헌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우리가 어떤 사인데? 내가 너를 속일 거라 생각해? 안심해. 구입 후에 문제가 생기면 찾아와.”남자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원하던 효능임을 재차 확인한 강일헌은 약을 건네어 받은 즉시 최대한 빨리 강상철에게 갖다 주었다.앞에 놓인 알약을 보던 강상철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늦은 저녁, 병원 안.성연이 편히 잠자지 못할까 걱정이 된 안금여가 사위 조승호에게 자신의 침상 곁에 침상 하나를 더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어차피 병실도 충분히 넓어서 침상 하나를 더 들여도 상관없긴 했다.안금여 옆의 침상에 누운 성연은 할머니를 지키며 달게 잤다.간밤 아무 일도 없었다.다음날 아침.의료용 카트를 밀며 안금여 병실로 향하던 간호사가 복도에서 실수로 한 중년 남성과 부딪혔다.간호사와 부딪힌 남성이 바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안금여가 약을 먹은 그날 오후,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성연은 할머니에게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을 준비해 주었다.할머니가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주방에 부탁해서 음식을 더 부드럽게 조리하게 했다. 테이블을 가져다 침상에 올린 후, 할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그런데 안금여는 식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먹었던 음식을 모두 게워내었다.“우욱, 우욱, 우욱.”성연이 얼른 등을 두드려 주며 물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안금여는 지금 말을 나눌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위 속의 음식을 토해 내는 도중에 전신 경련이 일어나면서 주변이 온통 더러워졌다.성연은 조금도 꺼리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아주 잠시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성연이 안금여의 맥을 짚어 보았다.요 며칠 안정되었던 맥박이 지금은 흐트러진 듯 보였다.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얼른 벨을 눌러 조승호를 불렀다.안금여를 진찰해 본 조승호는 심각한 상태임을 즉시 알아차렸다.간호사를 불러 안금여를 응급처치실로 옮겼다.성연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응급실 앞에서 기다렸다.응급실로 옮길 때 이미 무진과 운경에게 연락해서 현재의 상황을 간단하게 알려 두었다.손건호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다가온 무진의 안색은 다소 침중한 빛을 띄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성연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분명히 아침에는 말짱하셨어요. 어떻게 식사를 하시다가 이렇게 되셨는지 모르겠어요.”“아침에 무슨 이상한 점은 없었어?”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멀쩡하게 잘 지내시다가 아무런 까닭 없이 이렇게 되셨을 리는 없을 터인데.심장이 안 좋은 것 말고 할머니에게서는 다른 어떤 합병증도 발견하지 못했었다.이런 증세가 있었다면 병원에 있는 요 며칠 진작 검사했을 것이다.발병의 상황도 평소와는 달랐다.“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모두 평상시와 같았어요. 아침에 약을 드셨어요. 입맛이 좋으셔서 죽 한 그릇을 더 드셨어요.” 성연이
운경이 먼저 소리를 높여 남편 조승호에게 물었다.“무슨 약물인데? 먹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데?”묻는 운경의 목소리는 계속 미세하게 떨렸다. 왠지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무진을 한 번 돌아본 조승호가 시선을 운경에게 돌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아마도…… 치매가 오지 싶어.”운경이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더니 이내 눈앞이 캄캄해지며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간신히 벽을 짚고서야 아래로 주저앉던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화가 난 조승호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된 거야? 원래 멀쩡하셨잖아? 약도 당신이 처방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운경은 정말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었지만 조금도 마을 써 줄 여유가 없었다.조승호가 얼른 말했다.“내가 처방한 게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런 약을 처방하겠어? 누군가 약을 몰래 들여와서 바꾼 게 틀림없어.”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여기는 그의 병원이었다. 주치의로서 안금여에게 다른 약을 처방할 마음을 먹었다면 절대 이런 방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안금여가 평소 사위인 그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던가. 운경은 언제나 효녀였고, 조승호 역시 어쨌든 약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운경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지금 운경이 얼마나 불안하고 정신없을 지 잘 아니까. 가까스로 호전되었다가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딸인 운경으로서는 당연히 견디기 힘들 것이다.“확실해?” 운경은 겨우 진정하기 시작했다. “고모, 고모부가 그러셨을 리는 없잖습니까? 고모부가 그러셨잖습니까? 누가 다른 약과 바꾼 것 같다고요.” 무진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만약 조승호가 정말 손을 쓰고 싶었다면,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굳이 지금 이 때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터.“고모, 할머님 아직 병상에 계세요. 고모와 고모부가 싸우는 건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우리 모두 진정하도록 해요.” 성연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정말 누군가 약을 썼다고 해도 고모부
묵묵히 옆에 서있던 성연은 한마디 꺼낸 이후로는 더 이상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눈썹을 찌푸린 채 조승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과 오늘,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이 할머니 곁을 지켰었다.그리고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말짱했다. 그녀와 웃고 떠들면서. 약을 쓰기 가능한 시간대는 오늘 아침과 점심 시간 사이뿐.잠시 이 문제에 골몰해 있던 성연이 입을 열었다.“아침에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왔어요. 제 생각엔, 아침 시간 할머님 병실을 담당했던 그 간호사를 고모부님이 불러서 당시 상황을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정해진 시간에 병실을 도는 간호사는 모두 기록이 남아 있을 터이니, 언제든 확인해 보면 누구였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고개를 끄덕인 조승호가 병동 스테이션으로 전화를 걸어 담당 간호사를 확인하고 불렀다.“원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연락을 받고 응급실 앞으로 올라온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러 사람이 둘러서 있는 것이 보였지만, 두리번거리지 않고 병원장 조승호에게만 시선을 맞추었다.“오늘 아침, 회장님께 드렸던 약은 어디서 꺼낸 겁니까?” 병원장의 위엄을 드러내며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병원에서의 경력이 오래된 노련한 간호사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조승호가 장모 안금여에게 붙여주지 않았을 터였다.오전에 있었던 전 과정을 그대로 보고했다.“평소대로 약국에서 받은 약을 회장님께 드리고 혈압, 체온을 체크했습니다.”자신이 체크했던 항목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간호사의 대답에서는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병실 담당 간호사의 대답과 태도로 보아 이 일과는 무관한 듯했다. 답변을 다 들은 조승호가 담당 간호사를 다시 돌려보냈다.한편, 안금여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유리를 사이에 두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무진과 운경 모두 중환자실 앞을 지켰다.뒤따라 간 성연은 구석 한편에 서 있었다.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안금여를 바라보는 운경과 무진은 침
무진의 표정은 굳어졌고, 마음은 마치 무거운 망치에 맞은 것 같았다.성연은 멍한 표정이었다. 마치 바늘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곧 순식간에 슬픔에 휩싸이면서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고, 곧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졌다.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목현수의 눈도 순식간에 뿌옇게 변했다.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자,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졌다.설사 모두 마음속으로는 이미 이런 결말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도, 끝내 작은 기대라도 품은 채 기적이 나타나기만 기다리는 듯했다.그러나 눈앞에서 스승님의 딸인 예민주가 직접 발표했으니, 모든 기회가 다 무너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불세출의 천재였던 예중천 스승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예민주는 비통하게 울었고, 성연은 자신의 목소리를 억누른 채 억지로 참았지만 끝내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성연의 곁으로 다가간 무진이 성연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성연아, 너무 슬퍼하지 마! 스승님은 분명히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야!”무진이 조용히 말했다.실제로 예중천이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진도 마찬가지로 슬펐다. 한때 자신이 정말 닮고 싶었던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최고봉의 성과를 이룬 사람이었기에.비록 지금은 무진의 사업에서의 성과가 이미 예중천을 넘어섰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숭배했던 사람이다.목현수가 예민주를 위로하면서 어깨를 토닥거렸다.“막내 사매, 너무 슬퍼하지 마...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나하고 성연이가 너를 잘 돌볼게. 스승님은 반드시 네가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라실 거야!”비록 예민주가 목현수에게 처음에 준 느낌은 좋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순간의 슬픔은 진실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목현수는 마음속으로 예민주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잠시 후 사람들의 감정이 비로소 좀 진정되었다.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눈물을 닦은 예민주는,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난 뒤 아버지의 과거를 다시 이야기했다.“
“성연아, 성연아, 일어나, 네 사형이 왔어!”무진이 가볍게 부르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성연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무진의 목을 덥석 안았다.처음 깨어났을 때의 그 얼떨떨한 성연의 표정을 보고 있던 무진이 갑자기 성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뽀뽀하지 마요. 아직 양치질도 안 했는데!”성연이 큰 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오랜만에 무진에게 애교를 부리자, 무진은 또 다시 살인미소를 지었다.일어나서 세수를 마친 성연은 아래층의 거실로 내려갔다.목현수는 이미 도착했고 손건호도 돌아와 있었다.목현수의 곁에 수줍은 듯이 조용히 앉아 있던 예민주는 성연을 보자 곧바로 인사를 했다.“언니, 일어났네요! 그래도 정말 여유롭네요.”“성연아, 너 다음에는 이렇게 무모하게 굴면 안 돼? 무진 씨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도 사람들을 데리고 유럽에서 너를 찾을 준비까지 다 마쳤어. 너는 그때 무진 씨의 말투를 모를 거야!”목현수가 곧바로 무진의 내막을 폭로하자, 무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난감한 상황을 완화시키려고 했다.그러나 그 말을 듣자, 성연은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정말 기뻤다.“사형, 알겠어요!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 그런데 샤넬은요? 왜 함께 오지 않았어요?”성연이 물었다.“어떻게 와?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져서 배가 수박만 해! 나는 이제 아빠가 된다고!” 목현수가 눈썹을 실룩거리면서 무진에게 한껏 자랑했다.무진이 썩소를 날리면서 성연을 힐끗 쳐다보자 성연도 따라서 썩소를 날렸다.부창부수인 이 젊은 부부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린 목현수가 물었다.“설마... 너희들도 생긴 거야?”성연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자, 무진은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그래! 어차피 내 아이가 너희 아이보다 일찍 태어날 거야. 너희 애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맏이가 되겠지!”목현수는 자신을 위로했다.지금 예민주는 확실히 모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꼈다.예민주의 마음은 몹시 불편했다.게다가 목현수 사형이 자신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런 느낌은
깊은 밤, 저택의 서재.7명의 임원들과 전화 통화를 한 무진은 예민주의 말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7 명의 임원들은 확실히 곧 돌아올 것이다.마음이 안정되자 무진은 잠시 생각한 뒤 즉시 홍보부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 12시에 모든 인터넷 매체에 통보하도록 해. WS그룹 7명의 고위 임원들은 출국해서 비밀리에 현지 조사를 마친 뒤 돌아왔다.” “모든 소문은 일부 인사들의 악의적인 조작일 뿐이라고 말이야!”구체적인 통보 기준은 홍보 부장이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반드시 잘 처리할 테니 마음 놓으세요. 그럼 악의적인 비방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묻습니까?]“정도에 따라서 해. 너희 홍보팀에서 시행하도록 해. 만약 일부 네티즌들이 말을 와전했을 정도라면 그냥 놔 둬. 만약 누군가 엉큼한 심보를 품고 그랬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해!”[알겠습니다.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대표님은 일찍 쉬시지요!]전화를 끊은 후, 무진이 깊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은 마침내 푹 잘 수 있겠어.’‘할머니와 고모는 이미 본가로 돌아가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시지 않게 내일 한 번 가서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어.’마침 수프 그릇을 손에 든 성연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무진 씨, 눈 밑에 이 다크서클 좀 봐요. 항상 밤을 새울 수는 없어요. 자, 이걸 마셔봐요. 정신을 안정시키고 두뇌를 보양하는 작용이 있어요!”성연의 수프는 그냥 끓이는 게 아니다. 매번 자신의 처방을 첨가하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인이 끓이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무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수프는 됐으니까 이리 와 봐. 우리 아기하고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맞다, 할머니와 고모에게는 말씀드렸어?”자신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지는 무진의 손을 보자, 성연의 두 눈에는 달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아직요! 할머니와 고모님을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임원들이 실종된 사건 때문에 걱정하셔서 나도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경사니까 언제 아시더라도 기뻐하
서한기는 정중하게 예민주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예민주 씨,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사람을 시켜서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예민주는 서한기도 준수하게 생긴 데다가 아주 강렬한 기운을 지니고 있는 걸 보고는, 마음속으로 좀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일부러 침대로 달려간 뒤 옆으로 누워서 요염한 자세를 취한 채 서한기를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본 서한기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얼른 시선을 돌리고는 감히 예민주와 시선도 부딪치지 못했다.“저는 예민주라고 해요. 당신은요?” 예민주는 마치 어린 아가씨가 자신을 드러내듯이 조심하지 않으면서도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저는 서한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여태까지 없었던 상황이 펼쳐지자 서한기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나를 이렇게 당황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어.’ ‘좀 이해가 안 되는데.’“안녕하세요, 한기 오빠! 이렇게 불러도 되겠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상대방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자, 예민주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 그래도 만족스러웠다.‘그러나 이런 매력도 강무진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어.’‘송성연은 도대체 어떻게 강무진을 꼬신 거야?’심장이 격렬하게 뛰자,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서한기가 급히 방에서 나오려고 했다.“한기 오빠, 잠깐만요. 성연 언니를 보면 제가 할 얘기가 있다고 오라고 전해주세요.”“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나는 갈 테니까 먼저 푹 쉬도록 해요.”말이 끝나자 서한기는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 크게 호흡을 하고 자신의 뺨을 때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내가 왜 이러지? 저 예민주에게 무슨 마력라도 있는 걸까?’30분 후, 성연이 방문을 두드리자 예민주가 대답했다.“들어오세요!”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물었다.“사매, 어때, 이 방은 맘에 들어?”“괜찮아요. 아주 맘에 들어요! 언니, 정말 부러워요. 무진 오빠하고 결혼도 한 데다가 아
“무진 씨, 그 7명의 임원들은 곧 귀국할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임원들은 유럽의 한 클럽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곧바로 전용기로 데려간 거예요.”“그런데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모든 핸드폰을 수거하는 바람에 감쪽같이 실종된 걸로 변한 거예요.”차안에서 성연은 임원들의 일에 대해서 대충 설명했다.예민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성연이 완전히 자신이 주입한 지시에 따라서 말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클럽 얘기는 더욱 사실무근이었다.다 듣고 나서도 무진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예민주에게 물었다.“민주 씨는 발견한 다음에 왜 바로 내게 알리지 않고 성연이에게 알린 거야?”예민주의 눈빛에 교활함이 스쳐 지나가면서 일찌감치 마련해 둔 대답을 말했다.“무진 오빠, 오빠는 분명히 주도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빠가 국내에 있을 때 주변에는 필연적으로 상대방에서 감시하는 첩자들이 있었어요.” “오빠가 하는 모든 행동은 상대방도 알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언니에게 아무도 모르게 유럽에 오라고 해서 저와 함께 이 사건을 조사했어요.”“그런데 그 클럽은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었던 거야?” 무진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성연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그 클럽은 원래 MS 가문과 관계가 있었던 걸로 추측이 돼요. 보복으로 그 7명의 임원들을 통해서 WS그룹을 파괴하려던 거지요.”“아니면 진교철일 수도 있어요. 내가 사매와 함께 7명의 임원들을 찾았을 때, 모두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면서 중간에 생겼던 일들의 이유도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지금은 추측할 수밖에 없어요!”미간을 짚은 채 생각하던 무진은 아내가 말한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고 인정했다.‘연계진은 결국 진교철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했어. 하지만 진교철이 도대체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그러나 7 명의 임원들이 곧 돌아온다는 걸 알게 되자, 무진의 마음도 다소 홀가분해졌다.“무진 오빠,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 7 명의 임원들
마음속으로는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무진의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았다.누가 뭐라고 해도 예전의 예중천은 명성이 자자했던 대단한 천재였다.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사업의 재질과 의학에서의 조예, 무학 수준도 아주 높았다. 심지어 국제 비즈니스 행사에 참석했을 때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우러러보던 존재이기도 했다.예중천이 감쪽같이 실종되자 놀란 주요 기관들이 전국과 전 세계를 샅샅이 뒤지면서 찾았다.그러나 지난 십여 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그 예중천의 딸이 바로 무진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예민주는 아주 잘 위장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남자가 본다면, 마치 이웃집 아가씨처럼 상큼 발랄하고 순박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예민주의 시선을 마주한 무진은 섬뜩했다. 그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마치 드넓은 심해처럼 사람을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신비로우면서도 뭔가 꺼림직해!’“안녕하세요, 당신이 바로 언니의 남편이신 강무진 씨인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면서, 예민주가 환한 표정으로 무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예중천 선생님의 따님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무진도 예의 바르게 손을 뻗어 가볍게 악수했다.그러나 이렇게 악수만 했는데도 예민주는 마치 심장이 떨리는 듯했다.‘이 남자는 내가 꿈꾸던 훌륭한 남자가 분명해. 내게 어울리는 남자야!’무진과 성연의 대단했던 결혼식 동영상이 인터넷에 너무나 많이 퍼져 있었기에, 예민주도 본 적이 있었다.그때 예민주는 컴퓨터 화면을 부수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마음속으로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할 뿐이었다. ‘강무진 같은 이런 남자가 어떻게 송성연에게 어울릴 수 있단 말이야?’‘오직 나만이 강무진의 곁에 있으면서 강무진의 모든 업적을 지켜볼 자격이 있어!’예민주는 심지어 이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더 빛날 것이라고 믿었다.“무진 오빠, 제 이름은 예민주고, 제 아버지
공항 입국 게이트.암담한 눈빛의 성연은 걸음도 부자연스러워서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이 상황을 본 예민주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인 모양이네.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겠어.’이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은침으로 성연의 허리에 있는 혈을 찔렀다.순간 아픈 표정을 드러냈지만, 곧 눈빛이 되살아난 성연이 고개를 돌려 예민주를 바라보았다.“막내 사매? 여기가 어디야?”성연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자 예민주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보아하니, 내가 연구해서 만든 독이 그래도 썩 효과가 좋은 것 같네.’사람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 뒤 인식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이 독은, 여민주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그 실험 대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F국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언니, 이제 귀국했으니까 곧 무진 오빠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무진 오빠가 보고싶죠?” 예민주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약은 성연이 무진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민주의 계획은 전혀 시행할 수가 없다.‘그래, 한 걸음씩 차근차근 해야 해.’ 예민주의 인내심은 대단했다.“응, 무진 씨가 내 남편이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어. 무진씨가 잘해 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운성시에서 살면 돼.” “더 이상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스승님이 너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하셨어!”지금 성연은 더 이상 예전의 성연이 아니라 이미 완전히 변했다. 성연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기억들과 지시가 박혀 있었다.그래서 예민주에 대한 말투는 더없이 온화했다.“응, 언니가 정말 잘해 주시는 걸요! 언니가 외국에 와서 나를 찾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거기에 갇혀 있었을 거예요. 언니가 제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예요!”예민주는 마음속으로는 그야말로 통쾌하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주 선량한 척 가장하면서 묵묵히 성연의 기억을 강화하고 있었다.예민주가 설계한 기억 속에서 성연은 어제 오후 3시에
하룻밤 사이에 연운그룹은 완전히 무너졌다. 연계진 회장은 탈세 문제로 구속되었고, 많은 부문의 책임자들도 잇달아 사직했다. 인터넷의 여론이 폭발하면서, 주가는 이튿날에도 어김없이 또 다시 20%나 폭락하며 하한가를 기록했다.회장 대행인 조수경도 이미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도저히 국면을 만회할 수가 없었다. 진교철과도 연락을 시도했지만 결국 진교철은 여전히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대리인을 시켜서 연운그룹에 한 투자마저 철회했다.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조수경도 재빨리 연운그룹과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수경은 오후에 바로 회장 대행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그룹 전체가 이미 완전히 끝장이 났다. 게다가 여러 여직원들의 고소에 직면해 있어서, 탈세 문제뿐만 아니라 성범죄 문제와도 엮여 있었다.이 보도를 접하면 당연히 즐거운 마음이 들어야 했지만, 지금 무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커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그 7 명의 임원들 사건이 무진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그래함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이른 아침에 전화를 건 그래함은, 성연의 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줄곧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래서 무슨 사고가 생길까 봐, 어젯밤에 성연과 짜고 거짓말을 했다고 무진에게 빨리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무진은 비로소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성연의 핸드폰으로 연달아 전화를 걸었지만 줄곧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렸다.손건호와 서한기에게 반드시 단서를 찾으라고 지시한 뒤 지금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곧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손건호의 전화였다.얼른 전화를 받은 무진이 다급하게 물었다.“소식이 있어?”[보스, 사모님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어제 오후 3시 비행기로 F국 프로방스로 갔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추적하기 위해서 제가 이미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그래, 어서 가.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보고하고. 하지만 반드시 은밀히 해야 해. 실혼전에서 틀림없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무진은 당황
완전히 놀란성연은 멍한 상태가 되었다.실혼전의 캐서린을 마주해도 지금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너 정말 예중천 스승님의 딸이 맞아? 왜, 왜 이렇게 하려는 거야?” 질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예민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수잔이 주는 커피를 받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선배,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언니에게 그렇게 많이 가르쳐 줬어요. 언니도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 언니가 강무진 씨를 양보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은혜에 보답하는 게 되겠지요!”“웃기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돼!”이를 악문 성연의 눈빛에는 살기도 확고하게 배어 있었다.“언니는 안 죽어도 돼요! 그리고 언니가 죽는다면 소용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언니가 순순히 양보하는 거예요! 나하고 강무진 씨가 행복해야 지내는 모습을 봐야지요.” “그리고 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언니가 키우게 할 수도 있어요. 내가 갑자기 아이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내게 줘도 돼요.”예민주의 말투는 마치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연은 예민주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놀라서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수잔은 마치 로봇처럼 성연에게 홍차를 가져다주었다.“송성연 씨, 차 드세요!”“예민주, 네가 말한 계획들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그 7명의 임원들이 없어도 내 남편이 충분히 조정할 수 있어.” “그리고 강씨 가문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겠다는 그런 말을 하니 더 터무니가 없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 넌 스승님의 딸도 아니면서 왜 딸이라고 사칭한 거야?”성연의 거듭되는 질문에 갑자기 화가 난 예민주는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변했다.“나를 화나게 해서 더 많은 사실을 드러내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좋아요, 그럼 내가 아예 말해 줄게요.” “예전에 강무진 씨 부모님 죽음은 우리 예씨 가문과 관계가 있어요. 강씨 가문이 우리 예씨 가문에게 빚진 거지요! 알겠어요?”“내가 강씨 가문의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