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성연의 말에 할말을 잃은 손건호.하마터면 잊을 뻔했다.작은 사모님은 아직 미성년자라는 걸.아직 몸이 자라고 있다는 게 맞았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무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성연의 정수리를 살짝 두드렸다.“계속 자. 학교에 도착하면 깨워 줄게.”고개를 끄덕인 성연은 무진의 품에 안겨 계속 잠을 청했다.무진의 품은 편안했다.학교에 도착하자 무진이 낮은 소리로 깨웠다.선잠을 자고 있던 성연은 바로 깨어났다. 차에서 내린 성연이 무진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한 뒤, 교실로 향했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한 편.모 삼류 고등학교.송아연이 새로 편입한 학교다.북성에서 그다지 좋은 학교가 아니었다.학생들 태반이 서민 계층의 자녀들로, 단체복은 고사하고 교복도 없었다. 각자 후줄근한 평상복 차림에 학습 분위기도 꽝이었다.여기저기 낙서 천지인 교실 벽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환경도 별로 좋지 않았다.여학생들은 진한 화장에 피어싱에, 알록달록 염색 두발까지. 촌스러운 옷차림은 마치 90년대 하드 록 스타일을 연상케 할 정도다.이전에 다니던 귀족 고등학교, 북성남고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강씨 집안은 아연에 대한 징계를 풀었다.강씨 집안이 입김을 넣지 않았다면 이런 삼류 고등학교조차도 편입이 불가능했을 터.흰색 원피스를 입고 교실에 앉아 있는 송아연은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걸핏하면 상스러운 욕도 서슴지 않고 뱉는 아이들.이 모든 것들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아연이다.꼿꼿한 자세로 앉아 같은 반 아이들의 장난치는 모습을 보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그저 책상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다. 살구색의 책상은 이전에 다니던 북성남고와 비슷했다.하지만 이전 학교에 비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로 인해책상 위는 온통 낙서 자국들과 칼로 새겨진 글자들이다.그것도 중2 아이들이나 쓸만한 유치한 말들.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성연은 깨달았다.‘북성남고와는 하늘과 땅 차이구나.’‘
이제 오전 수업 하나가 끝났음에도 아연은 참을 수가 없어 그냥 도망쳤다.이 학교의 학생 관리는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교문을 나서려 하자 경비원이 형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앞에서 막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아연이 거짓말로 몸이 아파 선생님에게 귀가 허락을 받았다고 하자,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학교를 나선 아연은 지체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괴상한 학교를 벗어났다.집에 도착한 아연은 아빠 송종철을 보자마자 분함을 못 참고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쓰레기 같은 학교인지, 또 학생들은 얼마나 무서운지, 송종철에게 울며불며 하소연했다.송종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연의 얼굴은 온통 눈물 범벅이었다.“아빠, 나 정말 그 학교 못 다니겠어. 다른 더 좋은 데로 갈래.”아연의 말을 듣는 송종철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임수정은 더 마음이 아렸다. 어릴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원하는 대로 다 가지며 귀하게만 자란 아연이가 어떻게 이런 분통 터지는 일을 겪어야 하는지?남편 송암종을 바라보며 졸랐다.“여보, 얼른 방법을 찾아봐요. 저런 학교에서 학위를 받으면 뭐해요?”사실 그녀는 강씨 집안이 어린 여자아이 하나 무에 그리 신경 쓰랴 생각하고 희망을 가졌었다.그런데, 강씨 집안이 이런 삼류고등학교를 아연에게 배정해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강씨 집안이 이렇게 했을 때는 체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지. 어린 여자아이를 겨냥해서 치졸했다는 안 좋은 소문이 외부로 나가도 괜찮다는 거야?어찌할 방도가 없기는 매한가지인 송종철이 이를 갈며 말했다.“지금 성연에게 가서 부탁하는 것 말고 무슨 다른 방법 있어?”강씨 집안이 아연을 처벌한 이유가 성연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닌가?역시 문제는 송성연인 것이다.성연이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강씨 집안에 어떤 말이든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성연밖에 없었다.성연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강씨 집안이 계속 자신들을 힘들게 하겠는가?방법은 이것뿐이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아연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거부
성연은 오늘 또 학교에서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는 것 외에 하는 일 없는 멍청한 하루를 보내었다. 이제 선생님들은 그런 성연을 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수업이 끝난 후,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내일은 주말이어서, 병원에서 할머니 안금여 곁에 있을 작정이었다.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안금여는 성연이 처음으로 호감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안금여 또한 성연을 옆에 앉혀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성연을 보자마자 안금여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성량이 왔구나. 매일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단다. 병원에는 이 할머니와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구나.” 안금여가 성연을 반기며 자신의 병상 옆에다 앉혔다.성연도 웃으며 인사했다.“할머니, 수업 끝나자마자 왔어요. 내일은 주말이라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어요.”“아이고,고마워라.” 곁에 성연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는 안금여가 바로 귀찮다는 듯이 딸 운경에게 말했다.“내일 성연이 여기 있을 테니, 너희들은 올 필요 없다.”괜히 사람이 많으면 성연이 불편하게 여길까 오히려 걱정이다.운경도 별 다른 의견이 없었다.아무튼 안금여는 성연을 좋아했다. 성연이 안금여를 즐겁게 하니, 몸도 빨리 회복될 수 있었고.하지만, 분명 사람을 쫓아내는 기색이라 운경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엄마, 자기 딸을 그렇게 미워하기예요?”“너는 내가 말도 못하게 하지 않니? 너도 한 번 생각해 봐라. 성연이 말고 너희들 중 누가 나 같은 노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니?” 안금여가 짐짓 책망하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네, 네. 엄마 말씀이 다 맞아요. 지금 바로 가 드릴게요. 더 이상 여기서 방해되지 않도록요.”운경은 어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했다.안금여의 이런 모습은 확실히 늙은 아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내 곁을 지킬 시간도 없으면서 쫓아낸다고 나를 탓할 생각이니?”안금여 역시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그래요. 이제 그만 갈게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운경이 대답했다.저리 기
그날 밤.팰리스 클럽.꼭대기 층의 룸에 자리잡고 앉은 강일헌이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낭창낭창한 허리의 여성을 품에 안고 있는 폼이 꽤나 호방해 보인다.그때, 룸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일헌이 품에 안고 있던 여성을 밀어내며 말했다.“베이비, 먼저 가 있어. 잠시 뒤에 갈게.”“사장님.”그의 팔을 끌어안은 여성이 끈적하게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강일헌이 가슴에다 카드를 한 장 찔러주자 그제야 마지못해 떨어졌다.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검은 옷 차림에 마스크를 쓴 남자가 들어왔다.강일헌을 보고 마스크를 벗은 남자가 품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건넸다.“이게 네가 원하던 물건이야.”상자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어 보던 강일헌이 뚜껑을 열었다. 안을 들여보니 검정색 알약 몇 알이 들어 있었다.일반 약과 별 다른 게 없어 보였다.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눈앞의 남자를 힐끔 쳐다본 뒤에 물었다.“이게 정말 네가 말한 것처럼 신묘하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안이 중대해. 만약 일이 틀어지면, 사정 봐 주지 않을 거야.”남자가 강일헌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우리가 어떤 사인데? 내가 너를 속일 거라 생각해? 안심해. 구입 후에 문제가 생기면 찾아와.”남자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원하던 효능임을 재차 확인한 강일헌은 약을 건네어 받은 즉시 최대한 빨리 강상철에게 갖다 주었다.앞에 놓인 알약을 보던 강상철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늦은 저녁, 병원 안.성연이 편히 잠자지 못할까 걱정이 된 안금여가 사위 조승호에게 자신의 침상 곁에 침상 하나를 더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어차피 병실도 충분히 넓어서 침상 하나를 더 들여도 상관없긴 했다.안금여 옆의 침상에 누운 성연은 할머니를 지키며 달게 잤다.간밤 아무 일도 없었다.다음날 아침.의료용 카트를 밀며 안금여 병실로 향하던 간호사가 복도에서 실수로 한 중년 남성과 부딪혔다.간호사와 부딪힌 남성이 바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안금여가 약을 먹은 그날 오후,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성연은 할머니에게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을 준비해 주었다.할머니가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주방에 부탁해서 음식을 더 부드럽게 조리하게 했다. 테이블을 가져다 침상에 올린 후, 할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그런데 안금여는 식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먹었던 음식을 모두 게워내었다.“우욱, 우욱, 우욱.”성연이 얼른 등을 두드려 주며 물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안금여는 지금 말을 나눌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위 속의 음식을 토해 내는 도중에 전신 경련이 일어나면서 주변이 온통 더러워졌다.성연은 조금도 꺼리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아주 잠시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성연이 안금여의 맥을 짚어 보았다.요 며칠 안정되었던 맥박이 지금은 흐트러진 듯 보였다.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얼른 벨을 눌러 조승호를 불렀다.안금여를 진찰해 본 조승호는 심각한 상태임을 즉시 알아차렸다.간호사를 불러 안금여를 응급처치실로 옮겼다.성연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응급실 앞에서 기다렸다.응급실로 옮길 때 이미 무진과 운경에게 연락해서 현재의 상황을 간단하게 알려 두었다.손건호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다가온 무진의 안색은 다소 침중한 빛을 띄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성연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분명히 아침에는 말짱하셨어요. 어떻게 식사를 하시다가 이렇게 되셨는지 모르겠어요.”“아침에 무슨 이상한 점은 없었어?”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멀쩡하게 잘 지내시다가 아무런 까닭 없이 이렇게 되셨을 리는 없을 터인데.심장이 안 좋은 것 말고 할머니에게서는 다른 어떤 합병증도 발견하지 못했었다.이런 증세가 있었다면 병원에 있는 요 며칠 진작 검사했을 것이다.발병의 상황도 평소와는 달랐다.“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모두 평상시와 같았어요. 아침에 약을 드셨어요. 입맛이 좋으셔서 죽 한 그릇을 더 드셨어요.” 성연이
운경이 먼저 소리를 높여 남편 조승호에게 물었다.“무슨 약물인데? 먹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데?”묻는 운경의 목소리는 계속 미세하게 떨렸다. 왠지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무진을 한 번 돌아본 조승호가 시선을 운경에게 돌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아마도…… 치매가 오지 싶어.”운경이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더니 이내 눈앞이 캄캄해지며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간신히 벽을 짚고서야 아래로 주저앉던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화가 난 조승호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된 거야? 원래 멀쩡하셨잖아? 약도 당신이 처방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운경은 정말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었지만 조금도 마을 써 줄 여유가 없었다.조승호가 얼른 말했다.“내가 처방한 게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런 약을 처방하겠어? 누군가 약을 몰래 들여와서 바꾼 게 틀림없어.”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여기는 그의 병원이었다. 주치의로서 안금여에게 다른 약을 처방할 마음을 먹었다면 절대 이런 방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안금여가 평소 사위인 그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던가. 운경은 언제나 효녀였고, 조승호 역시 어쨌든 약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운경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지금 운경이 얼마나 불안하고 정신없을 지 잘 아니까. 가까스로 호전되었다가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딸인 운경으로서는 당연히 견디기 힘들 것이다.“확실해?” 운경은 겨우 진정하기 시작했다. “고모, 고모부가 그러셨을 리는 없잖습니까? 고모부가 그러셨잖습니까? 누가 다른 약과 바꾼 것 같다고요.” 무진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만약 조승호가 정말 손을 쓰고 싶었다면,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굳이 지금 이 때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터.“고모, 할머님 아직 병상에 계세요. 고모와 고모부가 싸우는 건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우리 모두 진정하도록 해요.” 성연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정말 누군가 약을 썼다고 해도 고모부
묵묵히 옆에 서있던 성연은 한마디 꺼낸 이후로는 더 이상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눈썹을 찌푸린 채 조승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과 오늘,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이 할머니 곁을 지켰었다.그리고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말짱했다. 그녀와 웃고 떠들면서. 약을 쓰기 가능한 시간대는 오늘 아침과 점심 시간 사이뿐.잠시 이 문제에 골몰해 있던 성연이 입을 열었다.“아침에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왔어요. 제 생각엔, 아침 시간 할머님 병실을 담당했던 그 간호사를 고모부님이 불러서 당시 상황을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정해진 시간에 병실을 도는 간호사는 모두 기록이 남아 있을 터이니, 언제든 확인해 보면 누구였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고개를 끄덕인 조승호가 병동 스테이션으로 전화를 걸어 담당 간호사를 확인하고 불렀다.“원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연락을 받고 응급실 앞으로 올라온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러 사람이 둘러서 있는 것이 보였지만, 두리번거리지 않고 병원장 조승호에게만 시선을 맞추었다.“오늘 아침, 회장님께 드렸던 약은 어디서 꺼낸 겁니까?” 병원장의 위엄을 드러내며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병원에서의 경력이 오래된 노련한 간호사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조승호가 장모 안금여에게 붙여주지 않았을 터였다.오전에 있었던 전 과정을 그대로 보고했다.“평소대로 약국에서 받은 약을 회장님께 드리고 혈압, 체온을 체크했습니다.”자신이 체크했던 항목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간호사의 대답에서는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병실 담당 간호사의 대답과 태도로 보아 이 일과는 무관한 듯했다. 답변을 다 들은 조승호가 담당 간호사를 다시 돌려보냈다.한편, 안금여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유리를 사이에 두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무진과 운경 모두 중환자실 앞을 지켰다.뒤따라 간 성연은 구석 한편에 서 있었다.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안금여를 바라보는 운경과 무진은 침
조사에 따르면 문제가 될만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안금여는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나쁜 마음을 먹은 자에게 당한 것이 분명한 채로.무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운경은 끊임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그렇게도 당당하시던 분이 어떻게 이런 일을 당하신다는 말이야?’조승호가 티슈를 뽑아 운경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너무 힘들어하지 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볼 테니.”“어쩜 이런 법이 다 있어? 이렇게나 연세가 많으신데, 도대체 누가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을 수가 있다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엄마를 대신해 아프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운경아, 우리 모두 가슴 아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우리가 강해져야 해. 배후를 잡아내는 게 중요해. 안 그러면 어머님이 계속 안전상의 위협을 받으실 거야.”조승호가 운경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도대체 누구란 말이야? 단서가 전혀 없으니.” 운경이 목이 메인 소리로 말했다.“하늘의 법망은 관대한 듯해도 절대 악인을 그냥 두지 않는다고 했어. 누군가가 손을 썼다면, 반드시 증거가 남아있을 테니 조그만 기다려 봐.” 조승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성연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좀 가라앉은 표정이었으나 슬픈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고개를 돌려 조승호를 바라보았다.“고모부님, 그 약 성분은 언제쯤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요? 할머님을 살릴 수 있겠지요?”“아직 검사 중이야. 구체적인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어.”뇌에만 영향을 주는 약인지, 조금 전 음식을 먹는 동안 안금여의 신체 지표가 정상으로 회복되어 이미 특실로 옮겨졌다.특실 또한 중환자실과 별다를 바 없었다.많은 간호사와 전문의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을 위해 모두 대기중이었다.조승호의 말을 들은 성연은 고개만 끄덕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머리 속은 여러 생각들로 복잡했다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
조수경은 바로 손민철을 찾아갔다.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만났다.칸막이가 쳐진 룸에서 손민철은 조수경을 껴안고 뺨에 키스를 했다.“왜 그래, 우리 자기, 겨우 며칠 못 봤을 뿐인데 내가 보고 싶었어?”“나도 보고 싶었어요.” 조수경이 당당하게 대답했다.손민철의 표정이 일순 흐려졌다. 자신이 보고싶었다고 조수경이 자신의 입으로 처음 시인한 것이다.손민철이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말을 하면서 조수경에게 입을 맞추었다.조수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목을 껴안고 고개를 들어 키스를 받아들였다.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모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부족하다고 느낀 손민철은 다시 키스하고 싶었다.조수경이 손민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가로막았다.“민철 씨에게 할 말이 있어.”손민철은 키스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일인데?”“내가 더 큰 성과를 올리게 해 줘요. 지금으로서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해!”조수경의 눈에 모질고 포악한 기색이 번쩍였다.‘내가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무진 씨가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손민철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러지.”그러고는 조수경의 손을 더듬거리면서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 무조건 나와 같이 있어야 해!”농담하듯이 웃는 조수경의 표정에는 이전의 내키지 않아 하던 모습은 전혀 없었다.“그래.”“밤은 짧아. 지금 가자!” 손민철은 한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다급한 모습으로 조수경을 이끌고 호텔로 가서 방을 잡았다.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조수경을 벽에다 밀어붙인 채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조수경의 옷을 벗기려던 순간, 조수경이 손민철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오늘 밤은 충분히 기니까 천천히 즐겨요.”손민철은 애가 타면서도 속으로는 동시에 조수경이 자신에게 어떤 즐거움을 선사할지 기대감마저 가지고 있었다.천천히 객실 안으로 들어선 조수경이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베란다로 나가 앉은 조수경이 손민철에게 손을 흔들었
조수경은 두 사람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이를 갈았다.‘나는 지금 무진 씨를 만날 수도 없건만.’‘송성연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불러낼 수 있는 거지?’‘도대체 송성연의 어디가 좋다는 거야!’조수경은 이렇게 앉아서 무진의 처분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계속 이러면 무진 씨가 나를 거들떠보기나 하겠어?’저녁에 퇴근한 조수경은 또 다시 많은 선물과 건강기능식품을 사서 고택으로 찾아갔다.집사는 바로 안으로 들이는 대신 조수경의 방문을 먼저 안금여에게 보고했다.안금여와 강운경이 고개를 돌려 서로 쳐다보았다.그날 밤의 일에 대해 나중에야 알게 된 두 사람.정말이지 조수경이 무진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하마터면 무진과 성연 사이에 오해가 생길 뻔했던 것.조수경을 쉽게 믿었던 안금여는 마음속으로 성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수경에서 고택 외부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옛 친구의 체면을 고려해서 안금여는 그래도 조수경이 계속 회사에 남아있게 해서 체면을 세워주었다.조수경이 방문했다는 말에 안금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됐어, 가서 한번 만나 봐야겠어.”강운경이 안금여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회사에서부터 화를 참고 왔던 조수경은 자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자 더 화가 났다.‘이전에는 이 집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거절당하다니!’안금여와 강운경이 나타나자 조수경은 억지로 눈물 몇 방울을 쥐어짜내며 불쌍한 척 쇼를 하기 시작했다.“할머니, 고모,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 용서해 주세요. 두 분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드럽고 여리여리한 외모의 조수경의 두 눈은 촉촉하면서 약간 충혈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이 더 동정심을 갖게 했다.안금여는 조수경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래 여린 마음을 가진데다가 지금 조수경이 보이는 모습에 더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안금여는 강씨 가문의 입장 또한 잊지 않았다.안금여 또한 차마 조수경에게 심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