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현수는 학교를 떠났고 성연도 곧 기숙사로 돌아갔다.이날 우여곡절을 겪은 터라 성연은 푹 쉬고 싶었다.앨리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성연은 침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눈을 감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성연이 눈을 뜨자 송아연의 다급한 모습이 보였다.잡아먹을 듯한 얼굴 표정이다.성연이 눈살을 찌푸리자 송아연은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달려들었다.자세가 성연을 때리려는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성연은 침착하게 피한 뒤에 담담하게 물었다.“송아연, 너 또 왜 미쳐서 이러는 거야?”송아연은 입을 다문 채 길다란 손톱으로 성연의 얼굴을 그었다.송아연의 동작은 마치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거칠 게 없어 보였다.성연은 송아연이 정말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송아연에게 제압당한 채 손가락만 움직여 해 아무 내색 없이 은침을 이용했다.한순간에 송아연은 즉시 성연에게 눌려 땅바닥에 엎드렸다. 두발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송아연은 손을 놓았지만 힘을 써서 일어나려 해도 발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송아연의 입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었다.그녀는 성연을 매섭게 쳐다보며 지겨울 정도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송성연,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몰라? 왜, 왜 내가 간신히 얻은 행복을 네가 다 망쳐 놓는 거야?” 짙은 원한이 가득 담긴 송아연의 눈은 마치 성연을 찢어발길 듯했다.“우리 집이 너 때문에 그렇게 되었어. 아버지 회사도 파산 직전에 이르렀어. 단란했던 우리 집도 너 때문에 그렇게 파괴되었어. 그런데 설마 네 마음속에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단 말이야? 어쨌든 네 친아버지이기도 하잖아!”송아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맞은편의 성연에게 무슨 깊은 원한이 맺힌 것 같았다.성연은 입꼬리를 올렸다. 눈에는 냉소를 띈 채로.‘이제 와서 친아버지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니야?’“나는 돈 때문에 날 팔아먹는 그
성연이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이건 네 자업자득이야.”송아연은 모든 원한을 성연에게 쏟아 놓을 줄만 알았다.그러나 송아연은 자신이 고의로 성연을 무시하고 괴롭히지 않았다면 서로 잘 지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걸, 그랬다면 결코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은 몰랐다.아버지 송종철도 똑같았다.그러나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다른 입장에서 성연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성연의 반격은 합당했을 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만약 그때 송종철을 위시해서 그들에게 당하기만 했다면 성연의 현재 생활은 얼마나 비참해졌을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송아연 같은 애들은 양심이 뭔지 절대 모르지.’‘더 말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이런 지경에 처해서 비참해졌어도 송씨 집안은 아무 잘못 없다고 생각해?’‘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저들이야말로 모든 사태의 장본인이 아닌가?하지만 성연은 송아연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말해도 송아연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송아연은 계속 독기 오른 눈으로 성연을 노려보았다.“언젠가 반드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널 죽이고 말 거야.”“지켜볼 게.”성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송성연, 네가 뭔데 나한테 그래? 지금 네가 강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 운이 좀 트였다고 이렇게 배은망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송아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알 수 없는 죄명들을 성연에게 걸었다.침대에서 일어나 갑자기 쑥 다가온 성연의 눈이 매서웠다.송아연은 성연의 눈빛과 동작에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송, 송성연, 너 어쩔 생각이야?”“너희 송씨네 집안이 나에게 무슨 은혜를 베풀었다는 거야? 무슨 의리를 지켰다고? 네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할 거야.”성연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송아연은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어차피 지금 송성연의 손에 떨어졌으니 할 말이 없었다.성연은 송아연을 힐끗 보고 캐묻기 시작했다.“너 여기서 학교 다니는 거 누구 생각이었어?”송아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그러나 너를 잘 살게도 하지 않을 거야. 널 죽이지 않더라도 네가 말하게 하는 방법은 많아.”‘아수라문에는 온갖 고문 방법이 있지.’하나하나 시도한다면 송아연은 절대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다만, 송아연은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그저 성연이 겁만 준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싶으면 해 봐. 누가 너를 무서워한다고.”송아연이 성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성연이 그런 능력과 용기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성연은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송아연을 쳐다보기만 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잠깐, 송아연이 이렇게 고집을 피우고 말 안 할 줄은 몰랐네.’성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바닥에 쓰러져 있던 송아연은 시큰둥했다.“송성연, 너 도대체 무슨 뜻이야? 사람이 여기 있는데, 죽이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아니면 나를 풀어주든지. 나를 여기에 내버려 두는 건 무슨 의미야? 똑똑히 말해!”송아연은 성연이 자신에게 손을 쓰지 않을까 난리였다.마침 생각을 하고 있던 성연은 송아연이 시끄럽게 굴자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입 다물어.”왠지 모르게 그 순간 성연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낀 송아연이 몸을 벌벌 떨며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성연이 문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도대체 왜 송성연 그 촌뜨기를 무서워한 거지?’송아연은 잠시 겁먹고 졸아든 자신을 스스로 욕하면서 성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성연이 들어오면 조금 조심하면서 성연이 알아서 자신을 풀어주게 해야지 생각하며.복도에 나온 성연은 손가락으로 폰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했다.잠시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지 몰랐다.이곳은 학교이기 때문에 자신의 수하들을 안으로 들일 수 없을 게 뻔했다.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끌 게 될 터.결국 성연은 목현수가 자신에게 당부한 말을 떠올렸다. 일이 생겼는데 그를 찾지 않으면 화를 낼 거
상황을 대충 알아보긴 목현수는 지체 없이 전화를 끊은 후 성연의 학교로 달려갔다.성연의 기숙사에 도착하니 성연이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기숙사 안으로 갑자기 한 남자가 들이닥치는 것을 본 송아연은 성연이 일부러 사람을 불러서 자신을 욕보이려는 줄 알았다.그러나 목현수의 얼굴을 본 송아연은 다시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바꾸었다.‘만약 진짜 이 남자라면,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만약 송아연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성연이 알았다면 아마 피를 토하지 않을까?어쨌든 유럽 명문귀족 가의 미스 샤넬도 거들떠보지 않는 목현수의 눈에송아연이 들어올 리가.“송성연, 너 뭘 어쩌려는 거야?”송아연이 물었다.“네가 실토하려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성연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송아연을 바라보았다.송아연은 가식적으로 자신의 옷을 꽁꽁 여몄다.“내가 그런 방법을 쓸 거라 생각해? 내가 알려주지!”송아연의 동작을 보던 성연은 그녀가 착각하고 있음을 알고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송아연, 정말이지 네 머리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그제야 자신이 성연의 뜻을 착각했음을 깨달은 송아연.그녀의 시선은 줄곧 목현수의 몸에 머물고 있었다.성연에게서 송씨 집안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송아연에 대한 일말의 호감은커녕 동정심도 없는 목현수.한 마디 말도 없이 미리 준비한 밧줄로 송아연의 손발을 묶은 후에 밖으로 끌고 나갔다.송아연이 바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송성연, 송성연, 너 뭐 하는 거야? 너 어떻게 이렇게 악랄한 거야? 나는 어쨌든 너와 같은 피가 흐르는 여동생이야.”성연은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여동생 따위, 자신은 인정한 적도 없다.성연은 목현수의 뒤를 따라 나갔다.목현수는 보기에 그리 우람한 체격이 아니지만 힘이 셌다.송아연을 든 모습이 마치 종이 인형을 든 것 마냥 아주 가벼워 보였다.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자 송아연은 침묵할 수
성연과 목현수는 송아연을 버려진 폐공장으로 데려갔다.목현수의 별장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이런 인간 때문에 자신의 집을 더럽히기 싫어 이곳으로 데려온 것.송아연은 지금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송아연의 눈에는 원한에 맺힌 빛으로 가득했다.“송성연,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너는 내게 통쾌하게 복수할 능력도 있으면서 왜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거야?”“안심해, 금방 할 거니까 조급하게 굴지 말고.” 성연이 느릿느릿 말했다.지금 시험하는 것은 바로 송아연의 심리다.그러나 송아연도 나름 큰일을 겪은 사람. 이곳에 와서도 자신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일러바칠 생각은 없다.‘보아하니 수단을 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성연은 전화를 걸어 서한기 일행을 불렀다.어차피 이미 신분이 많이 드러난 상태. 송아연이 알지 말아야 할 일들을 알게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곧 목현수 일행이 왔다.검은색 제복을 통일해서 입고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위협적으로 보였다.서한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송아연이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과연 송아연은 학교 보건교사였던 서한기를 알아보았다.북성남고에 다닐 때.학교 보건의사는 아주 온화한 인상에 학생들과 자주 농담도 했던 기억이 났다.‘원래 평범한 보건 교사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송성연과 한패였어!’송아연은 자신이 거대한 철창에 갇힌 듯이 느껴졌다.애초에 성연과 맞서 싸울 수가 없는 거였다.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연 앞에 가지런히 서서 공손하게 소리쳤다.“보스.”송아연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본 서한기가 고개를 돌렸다. 바라보는 그 눈빛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강렬한 살기를 띠었다.손에 피비린내를 묻힌 적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절대 이런 눈빛과 기운이 나오지 않는다.깜짝 놀 계속 뒤로 물러나는 송아연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성연이 손을 흔들자 서한기 일행은 뒤로 물러섰다.송아연의 표정을 본 성연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좋아, 그럼 말해봐.” 성연은 송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다만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뿐.지금 드디어 모든 진상이 밝혀질 참이다.송아연은 자백을 하고 나면 자신에게 결코 좋은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그러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결국 저 쇠몽둥이처럼 반으로 쪼개질 거니까.“소, 소지연 씨야...”마침내 송아연이 눈을 감은 채 한 사람의 이름을 토해 냈다.성연의 동공이 수축되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계속해.”“국내에 있을 때 소지연이 나를 찾아와 나와 손잡고 싶다고 했어. 돈을 주고 입학도 처리해주고 별장도 빌려주면서 나보고 너를 상대하라고 했어.”송아연은 울먹이며 여태까지의 일을 전부 똑똑히 자백했다.송아연의 말을 듣는 동안 성연의 눈에 분노가 가득 들어찼다.소지연을 아프리카로 보내면 행동을 좀 조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런데 오히려 더 심해지다니.’성연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차량 사고 또한 소지연과 관계가 있을 거라 추측했다. 아니, 소지연일 가능성이 높았다.‘소지연은 이 정도로 날 미워한다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성연은 마음속에서 치미는 울분을 느꼈지만 방법이 없었다.앞으로 받은 것들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는!이번에는 비교적 착실하게 불고 있는 송아연. 성연이 재차 묻기도 전에 계속 말했다.“소지연이 나를 매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어. 너희 학과의 그 교수도 마찬가지야.”그 말을 듣고도 놀랍지 않았다.‘어쩐지, 처음에 블레이크 교수가 다른 사람의 돈을 받고 나를 겨냥했다는 사실을 사형이 발견했지.’‘그리고 그 매수자는 여자였고.’‘바로 소지연이 맞았어.’‘내가 유럽에 왔을 때부터 온갖 방법을 썼는데, 그게 모두 소지연의 계획이라는 거지.’‘역시 수재다워. 생각하는 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수가 높네.’듣고 난 후에도 성연이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본 송아연이 조심스럽게 물
송아연은 비할 데 없이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그래, 만약 내가 나중에 또 그런다면, 나가서 물에 빠져 죽을 거야!”그러나 송아연은 마음속으로 어차피 말 한 마디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근본만 착실하게 갖춰져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송성연만 대충 넘기기만 하면 돼.’성연도 송아연을 어떻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송아연이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어떤 위협도 될 수 없기 때문.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고 송아연을 놓아주었다.“너는 돌아가. 네가 한 일을 모두 경찰에 똑똑히 밝히고.”‘국내 형법에 따라서만 송아연을 제재할 수 있어.’‘외국에서는 안 돼. 저들도 외국인의 일은 상관하지 않아.’성연은 도량이 그리 큰 사람이 아니다.송아연이 자신에게 그 많은 짓을 벌인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송아연을 놓아준다고?‘그건 절대로 불가능해.’‘그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니 송아연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해.’송아연의 마음은 온통 성연에 대한 원망이었다.하지만 성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송아연은 성연에게 너무 약했다. 송성연은 자신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송아연은 전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성연은 알아들었지만 관여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돌려 서한기에게 말했다.“너희들의 임무는 저 여자를 국내로 데려가는 걸 책임지는 거야.”성연은 송아연이 서한기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아차렸다.자신도 송아연이 뭘 할지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송아연은 그럴 배짱도 없기 때문이다.성연은 말을 끝낸 후 송아연을 바라보았다.“너는 귀국하거든 경찰서에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성실하게 모든 일을 바른대로 자백해.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날 지 기다려.”송아연은 굴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들은 성연은, 서한기에게 송아연을 데려가라고 했다.아무래도 송아연을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곧 폐창고에는 성연과 목현수 두 사람만 남았다.목현수는 그들 사이의 원한 관계를 몰랐다. 소지연이라는 사람
저녁에 성연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목현수의 별장에서 묵었다.이곳은 목현수가 자주 오는 곳은 아니지만,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성연이 혼자 이곳에서 지내기에도 편리했다.그리고 걔도 안 무서워할 거야.목욕을 하고 나온 성연은 무진에게 영상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가기 무섭게 무진이 전화를 받았다.성연의 전화를 혹여 놓치기라도 할까 봐 성연의 전화나 메시지에 별도의 알람을 설정해 놓은 것.그래서 성연의 전화라는 걸 화면을 보지 않고도 알았다.“오늘 업무는 끝났어요?” 화면에 보이는 무진의 뒷배경을 보니 서재가 아니라 집의 침실이었다.“거의. 요즘 좀 피곤해서 쉬면서 게으름을 좀 피우려 했지.” 무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사실 최근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들이 정상 궤도에 올라서면서 당분간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터였다.“그러는 게 당연히 맞죠. 일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에요. 쉬어가며 일하는 게 건강에도 좋아요.” 성연은 무진이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젠 혼자 쉴 생각도 하고 말이지.’“당연히 네 말이 옳아. 뭐든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무진이 성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지금부터 무진 씨에게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어요. 그렇지만 무진 씨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성연이 먼저 무진을 안심시키기 위한 언질을 주었다.무진이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회사 일도 내팽개치고 당장 날아올까 걱정이 된 것.성연의 말을 들은 무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무슨 일인데?”성연은 오늘 송아연이 자신에게 말도 안되는 약을 먹이려 했던 일과 블레이크 교수가 자신을 모함하려 했던 일을 무진에게 모두 말했다.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사주한 이가 소지연이라는 것 상상할 수 있겠어요?”무진의 눈이 충격과 분노의 빛으로 가득 찼다.지난 번에 비서 손건호에게 유럽에 가서 소지연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다.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을뿐더러 소지연이 도대체
북성에 도착하자 그래함은 유채연을 데리고 최고급 호텔을 체크인했다.뒤에서 그들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성연은 자기도 모르게 무진이 생각났다.‘나도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 뭐.’‘요 며칠 사형과 채연 언니가 애정을 과시하는 것만 바라보았지.’유채연과 그래함도 성연을 잊지 않았다.유채연이 물었다.“성연아, 너 우선 우리 호텔로 가서 쉬지 않을래? 차를 그렇게 오래 탔는데 힘들었잖아.”유채연은 멀미가 나서 창백한 표정으로 그래함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됐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두 사람의 세계를 방해할 수 있겠어요? 저는 먼저 갈게요.” 성연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혼자 차를 타고 떠났다.유채연은 성연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걱정했다.“성연이 걔가 갈 곳이 있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가 밖에 있으면 얼마나 위험해.”“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그래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채연아, 성연이는 이곳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잊었어? 전에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성연이에게는 아주 대단한 약혼자가 있다는 거 말이야.”유채연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성연에 대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래서 약혼자를 찾아간 거야?”“그래, 걱정하지 마. 지금 멀미하지? 힘들면 내가 밖에 나가서 약 좀 사올까?” 그래함은 유채연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좀 자면 돼.”“그럼 그렇게 해.” 그래함도 마음 놓고 유채연을 혼자 둘 수 없었다.‘처음 이곳에 왔는데, 내가 채연이 곁에 없다면 채연이가 불안해할 가능성이 높아.’한편 성연은 바로 무진을 찾아갔다.그러나 자신이 돌아온 걸로 무진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려고 무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성연은 예전에 지문을 입력해 놓아서, 보고 없이 바로 최고층까지 갈 수 있었다.요 며칠 동안 무진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이제 곧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설레는 듯했다.성연이 집무실 입구에 도
외삼촌은 다가가서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부축했다.여전히 울고 있던 유채연이 일어나자, 그래함이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다.“얼른 가거라.” 외삼촌도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함은 외삼촌을 한 번 본 뒤 유채연이 차에 타도록 부축해 주었다.유채연은 외삼촌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성연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외삼촌이 몸을 돌릴 때 눈물이 땅에 떨어지는 걸 봤지만, 유채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이 옆에서 따라서 소리쳤다.“외삼촌, 제가 채연 언니하고 자주 돌아올 게요. 저는 외삼촌 가게 하드가 좋아요.”그제야 서둘러 눈물을 닦은 외삼촌이 몸을 돌려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마.”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자, 창밖의 장면도 빠르게 바뀌었다.차에 앉아서도 유채연은 여전히 훌쩍거렸다.그래함은 유채연을 꼭 안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채연아, 외삼촌이 보고싶으면 앞으로 자주 돌아와서 볼 수 있어. 내가 같이 올게.”“정말?” 그래함을 바라보는 유채연의 눈은 마치 토끼의 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물론이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다 해 줄게.” 예전에는 그래함도 뭘 해도 혼자였다.하지만 이제 유채연이 있으니 모두 달라졌다.그래함은 틀림없이 유채연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어쩌면 유채연을 위해 정말 국내로 이주할 수도.“그런데 내가 없는데 외삼촌은 어떡하지? 자기 몸을 잘 추스릴까?”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책임졌지.’‘지금 내가 떠났으니 외삼촌은 잘 수습할 수 있을지 몰라.’성연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성연은 일부러 그 자리에 앉아서 유채연과 그래함에게 공간을 내주었다.그 말을 듣고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채연 언니, 외삼촌은 마음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떠날 때 그래함은 외삼촌에게 체크카드를 남겨 두었다. 비밀번호도 쪽지에 써 두었다. 그 돈이면 외삼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이런 유채연의 모습을 보고 외삼촌은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정말 재수 없게 징징거리고 있지. 꼴이 그게 뭐야? 나는 상관하지 말고 빨리 가. 나한테 돈도 있고 차도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어. 너는 나한테 짐만 될 뿐이야!”유채연은 외삼촌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대부분 외삼촌은 그저 입으로만 모질게 굴었을 뿐이다.사실 자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애초에 집에 그렇게 많은 일이 생기자 친척들마다 모두 양보하면서 피했다.외삼촌만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모두들 유채연이 흉악한 외삼촌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좋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그러나 그동안 삶의 질이 좀 떨어진 걸 제외하면, 외삼촌은 진심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가게에 온 손님 중에 간혹 유채연의 예쁜 모습을 보고 희롱하려고 했지만, 모두 외삼촌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이전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자, 유채연은 외삼촌이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 준 걸 알게 되었다.유채연이 갑자기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외삼촌, 그동안 거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본 그래함도 유채연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외숙부님, 채연이의 부모님이 안 계시니 외숙부님이 채연이 아버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맹세하겠습니다.”“저희는 곧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읍내에서 잔치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연이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할 테니, 채연이를 제게 주시면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채연이에게 정말 잘 하겠습니다.”남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성이다.그러나 그래함은 유채연을 위해 외삼촌 앞에 무릎을 꿇었다.이 역시 그래함의 성의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다.두 사람의 감정을 외삼촌은 더욱 눈에 새겨 두었다.‘채연이가 그래함과 함께 있으면서 미소도 눈에 많이 많아졌어.’“너희들 빨리 일어나!” 외삼촌은 유채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었다.입으로는 듣기 싫은 말을 하지면, 개를 길러도 이
이전에 유채연이 입었던 옷은 전부 그래함과 성연이 함께 골라준 옷으로 교체되었다.유채연은 트렁크를 사서 물건을 다 넣었다.곧 떠나야 할 때, 유채연이 외삼촌과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내가 같이 갈게.” 유채연을 도와 트렁크를 닫고서 그래함이 일어났다.“그래도 나 혼자 갈래...”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이제는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외삼촌은 우리 관계의 증인이자 네 유일한 가족이야. 내가 널 데리고 갔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함이 유채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유채연은 자연스럽게 그래함과 더 가까워졌다.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만약 외삼촌이 그래함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마음이 더 괴로울 거야.’“그래, 같이 가자.”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섰다.나오다가 마침 두 사람을 찾으려던 성연과 마주쳤다.“성연아, 우리 외삼촌 보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유채연은 요 며칠 성연과 계속 붙어 있어서, 성연에 대한 감정도 이미 예전처럼 좋았다.어디를 가든지 성연을 데리고 가야 해서, 그래함이 한바탕 질투하기도 했다.“출발하기 전에 외삼촌과 작별인사 하러 가는 거예요?”성연이 물었다.“그래.” 유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함께 갈게요.” 눈치 빠른 성연은 유채연의 손을 잡지 않고 뒤에서 따라갔다.‘채연 언니하고 그래함 사형이 나란히 다정하게 가는 모습을 보면, 외삼촌이 좀 안심할 수 있겠지.’유채연과 그래함은 앞에서 함께 걸어갔다.유채연의 마음은 여전히 좀 불안했다.‘예전에 외삼촌이 못마땅했을 때는 여기를 탈출하겠다는 생각도 했지.’그러나 정말로 외삼촌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유채연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다지 내 생각대로 지내지는 못했지만.’‘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내 유일한 피난처였지.’“걱정 마, 외삼촌은 좋은 분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듣자, 유채연은 코가 시큰거리면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지만 뜬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지금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다.유채연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걸 보자, 가볍게 한숨을 쉰 그래함이 휴지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해? 앞으로 나하고 있으면서 내가 잘 해줄 테니까 이렇게 울면 안 돼.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안타까워.”그래함의 부드러운 말을 들으면서 유채연의 감정도 점차 가라앉았다.감정이 진정되자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맛보았다.아주 달았다. 이 달콤함이 유채연의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마음을 천천히 따뜻하게 했다.“고마워, 그래함.” 유채연은 코를 훌쩍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내가 좀 일찍 너를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함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우리는 지금이 좋아.” 유채연은 그래함의 이런 의기소침한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그래, 이제 네가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는 더 좋아질 거야.”그래함이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성연은 어느새 감정이 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그러나 계속 뒤를 따라 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성연은 정말 기뻤다.자신도 그런 분위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예전에는 그저 단순하게 그래함 사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그러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 정말 두터운 그래함의 깊은 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성연은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처음에 굳어 있던 두 사람이 점차 풀어질 때까지 이미 정말 잘 지나왔어.’“두 분, 연애하면서 여동생도 잊어버렸지요? 나 너무 배가 고파요. 밥 먹으러 가고 싶어요.” 성연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게에서 별로 먹지 않고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그 말을 들은 유채연이 바로 뒤돌아서 미
“언니, 빨리 나와서 사형에게 보여주세요.” 성연이 바로 유채연을 데리고 나갔다.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유채연은 바로 그래함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래함은 지금도 유채연이 겉모습만 꾸민 여자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약간 수줍어하는 그 모습은 언제나 그래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래함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유채연도 그래함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걸 정말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한참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그래함의 눈을 마주한 유채연이 어색하게 치마자락을 잡고 말했다.“어때? 보기 싫어?”“예뻐. 내가 홀딱 반할 정도야.” 그래함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유채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화장을 마친 뒤 그들은 계속 쇼핑을 했다.성연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게 자리를 양보했다.그래함이 바로 앞으로 가서 유채연의 손을 잡았다.유채연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래함은 꼭 쥔 채 유채연이 벗어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성연이도 여기 있잖아.” 유채연은 20여 년을 살면서 그래함 이 한 사람만 좋아했다.평소에도 남자와 스킨십을 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래함과 함께 걸으면서 유채연은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러나 그래함의 따뜻한 손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끼자 마음은 달콤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그래함이 바로 말했다.두 사람 뒤에 있던 성연은 하마터면 그래함을 흘겨볼 뻔했다.‘이건 날 훼방꾼으로 여기는 거야.’유채연은 감히 고개를 돌려 성연을 보지 못하고, 손을 잡힌 채 얼굴만 빨개졌다.그래함은 유채연이 자신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자 불만스러웠다.“채연아, 팔장을 낄래.”“아니, 손을 잡았잖아.” 유채연은 입술을 깨물며 수줍어했다.“우리 연인 사이잖아?” 그래함이 유채연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열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자 유채연은 더욱 부끄러워했다.‘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외삼촌에게 차를 주자, 외삼촌은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겠다고 말했다.그래함이 자신을 속이는 건지 보려는 것이다.외삼촌이 차를 몰고 가자 성연과 그래함, 유채연만 남게 되었다.오늘 손님이 오기 때문에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자세히 헤아려 보니 외삼촌은 정말 디테일한 사람이야.’“채연 언니, 우리 쇼핑하러 가요.” 성연이 다가가서 유채연의 팔장을 꼈다.“그래.” 유채연은 성연이 쇼핑을 하려는 걸로 생각하고 함께 갔다.성연이 유채연을 데리고 온 곳은 모두 고급 쇼핑몰이었다.유채연도 옷을 좀 사고 싶었지만, 가격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성연은 흰색 원피스를 유채연의 몸에 대고 비교해 보았다.“채연 언니, 이 원피스가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 보세요.”“난 됐어. 네가 맘에 들면 사.” 방금 유채연은 가격표를 언뜻 봤다.‘너무 엄청난 가격이야.’‘원피스 한 벌에 어떻게 가격이 이렇게 비쌀 수 있는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야!’“언니, 이 치마가 정말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보고 싶지 않아요?” 성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채연을 바라보았다.눈앞의 원피스를 보고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한번 입어 봐.” 그래함도 유채연이 이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유채연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기대되면서도 머뭇거렸다.마침내 결정을 내린 뒤에 옷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확실히 잘 어울리네.’유채연은 한번 입어 본 걸로 만족했고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성연과 그래함이 번갈아 설득해서 유채연도 결국 옷을 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또 유채연에게 많은 옷을 사주었다.처음에는 유채연도 두 사람이 돈을 쓰는 걸 걱정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유채연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중에는 돈을 쓰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예쁜 옷을 많이 산 뒤 그래함이 뒤에서 가방을 들어주었다.그래함의 두 손으로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였다.성연은 또 유채연을 끌고
“정말 변변치 못하게!” 외삼촌은 유채연을 노려보았다.그래함은 외삼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했다.‘외삼촌은 이게 채연이가 만약에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거야.’그래서 그래함도 지나친 요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이런 것들을 채연이에게 주는 것도 당연한 거야.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채연이에게 훨씬 더 잘 해 줄 거야.게다가 외삼촌과 유채연은 그래함의 지위에 대해서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이 정도의 돈은 그래함에게 있어서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유채연이 직접 음식을 준비해서, 외삼촌 가게 뒤의 정원에서 모두 함께 밥을 먹었다.외삼촌의 표정은 시종 좋지 않있다.밥을 다 먹고 유채연이 치우려고 하자 외삼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놔 둬! 나 혼자 해도 돼! 너는 그럴 시간이 있으면 가서 너 자신이나 좀 꾸며.”외삼촌은 말하면서 유채연을 물러서게 했다. 유채연이 비틀거리자 그래함이 뒤에서 유채연을 부축해 주었다.그리고 유채연을 데리고 나갔다.집 앞에 와서야 유채연은 그래함과 성연에게 미안한 듯이 웃었다.“정말 미안해. 외삼촌이 바로 저런 성격이셔. 미안해.”“언니, 외삼촌이 이런 성격인 건 우리도 이해할 수 있어요. 외삼촌이 치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우리 좀 걸어요. 이쪽의 풍경이 좋네요.” 성연은 유채연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래함과 성연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고, 유채연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그들은 주변을 한가롭게 걸었다.길가에서 자동차 판매점을 본 그래함이 걸음을 멈추었다.유채연과 성연은 고개를 돌려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연이 그래함에게 물었다.“사형, 왜 그래요?”“우리 들어가서 한번 보자.” 그래함은 판매점 안으로 들어갔다.그래함이 뭘 하려는 건지 몰랐지만, 유채연과 성연도 그래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그래함은 한참동안 살펴보았다.여기는 읍내라서 그다지 비싼 차가 없었다. 겉모습이 좋아 보이는 차는 성능이 좋지 않았고 성능이 좋은 차는 스타일이 좋지 않았다.겨
“그렇게 하겠습니다.” 외삼촌이 말한 걸 그래함은 모두 승락했다.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외삼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유채연은 외삼촌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해서 아주 불만이었다.‘내가 그래함과 함께 하는 건 두 사람이 예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그러나 지금 외삼촌이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는데, 오히려 내가 그래함의 돈 때문에 그래함과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유채연이 항의했지만 외삼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함을 바라보았다.“어때? 내 이 조건들을 자네가 승낙한다면 채연이가 자네와 함께 떠나도 돼. 자네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그럼 말할 필요도 없지!”유채연이 다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바로 뒤에 있던 성연이 유채연의 옷소매를 당기면서 권유했다.“사형에게 저런 요구를 한 건, 외삼촌이 언니에게 사고가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이 몰락하게 될까 봐 일부러 이런 요구를 한 거예요. 만약 언젠가 정말 의외의 사고가 생긴다 해도, 언니가 읍내로 돌아올 수 있게 말이죠.”옆에 있던 성연은 벌써 외삼촌의 뜻을 알아차렸다.‘외삼촌이 말한 조건은 모두 채연 언니에게 유리한 것들이야.’‘외삼촌은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돈도 채연 언니 계좌에 넣고, 집 명의도 채연 언니 앞으로 하라고 했어.’‘모두 채연 언니에게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거야.’성연도 그제서야 외삼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삼촌의 마음이 이렇게 세심한 줄은 몰랐어.’‘사형이 채연 언니를 아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외삼촌이 말한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야.’‘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해. 결국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유채연도 그제서야 외삼촌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외삼촌의 요구는 모두 나를 위해서였어.’유채연은 더더욱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저 그래함을 바라볼 뿐이다.“외숙부님이 말씀하신 건 다 문제없습니다. 채연이에게 사 줄 집을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