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석 창문이 내려오자 심유진은 허리를 굽혀 안쪽을 보았다.“어…… 허 대표님?”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허 대표님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여형민, 그 사람이 잠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대신 왔어.”“아……”그녀는 자기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랐다.허태준의 옆에 앉자니 민망하고, 뒷자리에 앉자니 그를 기사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가 불쾌할까 걱정이 됐다.“뭘 기다리는 거야?”허태준은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짜증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아니에요!”심유진은 하는 수 없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다행히 허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형민이라도 같이 있었으면 분위기가 좀 괜찮았을 텐데, 조용한 차에 둘 만있으니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30분이 지날 무렵. 차는 파르비엥 백화점 앞에서 멈추었다.“내려.”허태준이 안전벨트를 풀었다.파르비엥 백화점은 젊은이들이 많은 곳으로 프랑스 풍의 독특한 건물 형태를 지녔으며, 그 때문에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웨딩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붐볐다. 그래서 각종 사진관, 조형작업실, 헤어메이크업 샵 등이 즐비했으며 아티스트들이 많이 탄생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허태준은 그녀를 데리고 ‘V 스타일’이라는 샵에 도착했다.‘여기는 비비안 왕이라는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가 운영하는 곳 아닌가?’그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동경의 눈빛으로 V스타일을 지나쳤다.옷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만큼 사악한 가격으로 그녀는 엄두도 못내는 샵 중에 하나였다.“어서오십시오. 두 분 예약은 하셨겠지요?”“여형민.”두 사람을 맞이하던 사람이 여형민이라는 이름을 듣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여기로 오십시오!”두 사람은 중앙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화려한 조명과 함께 비비드한 색상의 옷들이 가득했다. “비비안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어요.”샵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의 뒤에 섰다.심유진은 허태준 뒤에서 걸으며 샵 여기저기를 관찰했다.3층은 통유리로
허태준의 말에 비비안과 심유진 모두 당황했지만, 비비안이 심유진보다 빠르게 반응했다.그녀는 심유진을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제가 엄선해서 고른 드레스들부터 보러갈까요? 그래야 헤어나 메이크업하기 편할 테니까요. 드레스들은 자체 제작한 것도 있고 샤넬이나 루이비통 등 브랜드 제품도 있어요. 다들 한정판 드레스니 파티에서 주목받기 딱 좋아요. 마음대로 골라보세요.”“네……. 좋아요.”심유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스타들도 입기 힘든 V스타일의 드레스. 심지어 탑 중에서도 가장 탑급의 연예인들만 이곳에서 헤어메이크업을 받는다는데…… 이곳에서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저기…… 비비안 씨”“네?”“정말로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건가요?”“물론이죠!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쪽은 고전이고 오른쪽은 신상품이에요.”“아 그렇군요.”심유진은 웃음이 세어나올까봐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여형민 씨는 여기 앉아 기다리시겠어요? 아니면……”허태준은 비비안의 말을 가로챘다.“같이 고르죠.”심유진은 몸을 흠칫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의 미적감각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심유진은 허태준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났다.그녀는 허태준에게 ‘방금 안 예쁘게 꾸며달라고 한 사람이 제 미적감각을 의심한다고요? 이상한 옷을 골라주려고 그러는 거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그럼…… 좀 도와주세요.”심유진은 여러 옷들을 몸에 대보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다들 고급스럽고 예뻤지만 평소 이런 드레스를 잘 입지 않는 심유진은 어떤 스타일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러나 허태준은 달랐다.그는 드레스를 쭉 보더니 딱 한 개를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우선 이것부터 입어보지 그래.”심유진이 피팅룸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서우연 씨, 지금 3층은 올라가실 수 없어요. 2층에서 옷을 고르시는 게 어떠세요? 모두 신상품에 협찬도 안나갔던
하이힐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발걸음이 그자의 다급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이윽고 계단 코너 쪽에서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비비안!”다급한 부름 소리에 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비비안은 다년간 연예계 활동을 한 탓에 눈치가 매우 빨랐다. 그녀는 허태준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곧바로 계단 입구로 달려와 서우연을 막아섰다.“우연 씨 왜 얘기도 없이 그냥 찾아오셨어요?”그녀가 아리송한 말투로 물었다.서우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나 원래부터 자주 얘기 없이 찾아왔잖아요? 하지만 지금처럼 직원에게 입구 컷을 당한 건 처음이네요.”그녀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비비안 앞에서는 조금 전 직원을 대하던 횡포와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퉁명스러운 말투로 불평을 늘어놓을 뿐이었다.비비안은 다정하게 그녀의 팔을 감싸 안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오늘 한 손님께서 3층을 통째로 빌리셨거든요! 먼저 아래에서 대기해 주세요. 이쪽 메이크업 끝마치면 곧바로 해드릴게요, 네?”“안 돼요.”서우연이 말했다.비비안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녀는 태도를 바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참석해야 할 파티가 있거든요. 7시 시작인데 늦어도 6시 반엔 이곳에서 출발해야 해요. 알잖아요, 매번 메이크업에만 두세 시간 소요되는거...”비비안과 서우연은 여러 번 합작한 덕에 꽤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서우연의 인지도도 꽤 높았기에 비비안은 섣불리 관계가 틀어질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게다가 여형민... 비록 말수가 없었지만 내뿜는 카리스마만으로도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비비안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방안을 생각해 냈다.“너무 급한 상황이라면 저쪽 손님과 한 번 얘기해 볼게요. 먼저 3층에서 드레스를 골라 피팅하고 계세요. 메이크업은 아만다가 맡아서 해줄 거예요, 어때요? 아만다 실력도 우리 샵에서 제 버금이에요. 전에 많은 셀럽의 메이크
비비안은 이토록 센 고집을 가진 사람을 만날 줄 미처 몰랐다.그 느낌이 매우 별로였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먼저 어긴 사람은 그녀였기 때문이다.“죄송합니다, 여형민 씨. 지금 바로 말씀 전하겠습니다.”그녀는 허리 숙여 사과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그녀가 가자마자 누군가 노란색 커튼을 열고 나왔다.심유진이 고개를 내민 채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비비안 씨~”하지만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허태준밖에 발견하지 못했다.“비비안 씨는요?”그녀는 의아한 말투로 허태준에게 물었다.“조금 번 분명 비비안 씨 목소리가 들렸는데.”“일 보러 잠깐 자리 비웠어.”허태준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무슨 일 있어?”그는 그녀의 앞에 멈춰서더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오늘 메이크업 받으러 오기로 한 탓에 심유진은 아직 생얼 상태였다.이토록 가까이 서 있으니 허태준은 그녀의 솜털과 오른쪽 귀 뒤에 있는 빨간색 점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녀의 하얀 피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심지어 귓불도 매혹적인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너무... 물어버리고 싶었다.순간 떠오른 생각에 허태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음...”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의 생각을 말할지 말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비비안 씨가 언제 올 거란 얘기는 했나요?”그녀가 물었다.“아니.”허태준은 여전히 그녀의 귓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온갖 낯부끄러운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귓불을 깨문 채 계속 빨아들이는 모습이었다.그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호흡도 따라서 거칠어졌다.“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심유진이 도로 커튼을 닫으려고 하는데 한 손이 나타나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마음은 복잡해도 허태준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비비안 씨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몰라.”“아...”심유진은 입술을 꽉
허태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빛에서 빨간 뭔가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혹시 지퍼에 낀 머리카락 봤어요?”심유진의 물음이 그의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허태준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잡생각을 떨쳐내고 고개 숙여 지퍼를 확인했다.심유진의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흰색 지퍼에 끼어있었다.“아플 수 있으니까 좀 참아.”허태준은 목이 마른 탓에 한껏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한 손으로 지퍼 꼭대기를 잡은 뒤 두 지퍼를 가지런히 놓고 다른 손으로 지퍼를 아래로 내렸다.그의 행동은 매우 부드러웠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 같았다.심유진은 실수로 거울로 그의 얼굴을 봤다가 깜짝 놀라 굳어버리고 말았다.지금 이 시각 허태준은... 그녀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뭔가 달랐다.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하더니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심유진의 귓가에는 오로지 자신의 심장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쿵쿵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뒤흔들었다.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숙여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허태준은 순조롭게 지퍼를 내린 뒤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빼냈다.“아파?”그가 물었다.“안 아파요.”심유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목을 틀자마자 두피가 걸린 탓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허태준은 가볍게 피식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바보.”심유진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지퍼가 열리자 그녀의 뒷등이 허태준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는 어렴풋이 그 촉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 매혹적이었다.심유진은 한참 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을 느끼고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됐어요?”“잠시만 더 기다려.”허태준이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그는 두 손가락으로 지퍼를 눌러 위로 올렸다. 그 과정에 중지가 그녀의 등을 살짝 스쳤는데 그 촉감은 마치 거위털처럼 두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실수로 닿은 스킨쉽인 걸 알면서도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숨을
허태준은 내내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에 대한 그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허태준은 깜짝 놀랐다가 이성을 되찾았다.“뭐?”그가 물었다.심유진은 약간 풀이 죽었다.역시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서도 넋을 놓고 있으니 말이다.“이 드레스 어떤 것 같아요?”그녀는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은 채 되물었다.“괜찮아.”허태준은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역시.심유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럼 나가줘요. 다른 드레스 입어볼게요.”“됐어.”허태준은 손을 휘두르다가 심유진의 의아한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늦었어. 그냥 이걸로 해.”“아, 네.”허태준이 입을 연 이상 심유진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그럼 비비안 씨가 와서 메이크업 해줄 때까지 기다릴게요.”허태준은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자리를 떴다.“내가 부르러 갈게.”그는 그녀와 협소한 공간에 단둘이 계속 있고 싶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주체를 못 할까 봐 두려웠다.다른 한편.비비안이 계단 입구에 도착했다. 서우연은 여전히 그곳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죄송해요, 우연 씨”비비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쪽 손님분들께서 외부인 출입을 원치 않는다고 하시네요.”“그럼 난 어떡해요?!”서우연은 다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나 파티 참석할 때마다 한정판만 입는 거 몰라요? 게다가 오늘 밤 파티에 참석하는 셀럽들이 얼마나 많은데, 비교당하기 싫단 말이에요! 상관없어요,”그녀는 힘 있게 비비안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난 오늘 반드시 한정판 드레스를 입어야겠어요!”“하지만...”비비안은 매우 난감했다.“안되고 말고 없어요!”서우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짜고짜 앞으로 걸어갔다.“드레스 하나 고르는 게 뭐 어때서요? 일 생기면 나 혼자 책임질게요!”“아, 우연 씨!”비비안은 미처 그녀를 막지 못했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커튼 고리와 철봉이 마찰하는 소리가 비비안의 귓가에 들려왔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공포에 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었고 심장 소리도 반 박자 느려지는 것 같았다.“비비안 씨!”심유진은 커튼 밖으로부터 비비안의 목소리를 듣고 허태준보다 먼저 피팅룸을 나섰다.“드레스 골라뒀어요, 한 번 피팅해보세요.”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도로 진정시킨 뒤 비비안은 재빨리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한 채 뒤돌아섰다.“알겠어요.”그녀는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심유진이 예쁘거니와 드레스가 화려한 건 알고 있었지만 양자가 결합하면 이토록 신비로운 조합을 이룰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 진심을 입 밖으로 드러내고 말았다.“너무 잘 어울려요.”어울리다 못해 마치 이 드레스가 심유진을 위해 제작된 것처럼 보였다.비비안의 인정을 받은 심유진은 도로 자신감을 되찾았다.그녀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다행이네요.”“잠시만 안에서 기다려 줘요.”비비안이 그녀에게 말했다.“잠깐 일이 생겨서 해결한 다음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을 해드릴게요.”심유진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서우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인사할까 말까 2초간 머뭇거리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저번 만남이 두 사람에게 기분 좋은 만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알겠어요.”심유진이 말을 마치자마자 서우연이 곧바로 손을 들었다. 그녀는 심유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저 드레스 한번 입어볼래요.”그녀의 말에 주위는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비비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희 샵은 드레스당 한 벌밖에 없어요, 게다가 저 드레스는 손님분께서 이미 고르셨어요... 사실 새로 들어온 드레스 중에 예쁜 것도 많은데 한번 보실래요?”“아니요.”서우연은 심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꼭 저 드레스로 할래요.”심유진도 무척 난감했다.그저 아무렇게나 시도해 본 드레스인데 허태준의 인정도 받지 못했을뿐더러 서우연의 픽으로 뽑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럼 제가 다른 드레스로 바꿀게요.
허태준은 그녀에게 해명하지 않았다.“지금 바로 내려보내면 이 일은 없었던 일로 할게요. 그렇지 않으면,”그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목소리 톤을 확 낮추어 말했다.“계약서대로 처리하죠.”비비안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우연 씨, 먼저 내려가요!”그녀는 서우연에게 미친 듯이 눈치 줬지만 서우연은 그녀를 봐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허태준에게 향해있었다.“허 대표님!”서우연의 눈가에는 어느샌가 이미 눈물이 고여있었다.그녀는 심유진을 밀어낸 채 빠른 걸음으로 허태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두 팔로 힘 있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저번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모두 회사의 뜻이었지 제 뜻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세요!”그녀는 허태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흰 셔츠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허태준의 표정은 파랗게 질렸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그의 옆에서 코를 어루만지고 있던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고 비비안도 두려운 마음에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하필 서우연만 눈치 없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주절거리고 있었다.“뭐든 할게요! 영화제작사만 막아놓지 않으면 뭐든 할게요!”저번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그녀는 로열 호텔에서 쫓겨났다.이윽고 그녀는 두 달 동안 신작 촬영에서 끊임없이 배역에서 밀려났다. 그러자 감독이 그녀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했다.“우연 씨가 아무래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아요.”이윽고 반년 전부터 계약했던 예능프로그램에서도 하차하고 한 달 동안 아무런 대본도 손에 넣지 못했다. 원래 그녀에게 대본을 건넸던 회사에서도 그녀의 등장에 하나같이 배우선정이 완료되었다고 전했다.물러설 길이 없게 된 그녀는 비굴하게 촬영팀 네다섯 개를 오가면서 오디션을 봤지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그녀의 매니저도 그녀에게 한두 번 물어본 게 아니었다.“대체 누구한테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그녀가 누구한테 잘못을 저지른단 말인가?그건 아마 허태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