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시 그녀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실패였기에 아주 큰 타격감을 입었다고 해도 말이다.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 벌어진 일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고 그녀의 컨트롤도 벗어났다.회사 대표를 찾아가 구해달라고 했는데도 돌아오는 건 오직 전보다 많은 수익뿐이었다.수익의 대가는 회사의 다른 여자 연예인들의 더 많은 스폰이었다.그녀는 회사 대표에게 구걸했지만 그는 매우 단호하게 얘기했다.“넌 이미 허 대표의 지시로 모든 스폰이 끊겼어. 그자를 손에 넣지 못하는 한 아무도 너를 배우로 쓰려고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회사를 위한 너의 마음은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있을게. 계약기간 동안 지금처럼 우월한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야.”현재 그녀의 우월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아직 이루고 싶은 꿈과 포부가 있었다. 그녀는 잠자리만 동반하는 아가씨로 몰락하고 싶지 않았다.때문에 그녀는 허태준을 만나 살려달라고 빌기 위해 갖은 노력을 들여 오늘 밤 파티 요청장을 겨우 손에 넣은 것이었다. 최대한 단번에 그를 쓰러 눕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이었다.아무래도 하느님이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했는지 파티가 시작되기 전 그와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준게 아닌가 싶었다.그녀는 이 기회를 반드시 꽉 잡아야 했다.“회사 대표님 협박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모든 일은 다 대표님께서 사주한 거예요! 만약 그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영원히 묻어버리겠다고 협박했거든요! 그래서 별다른 방법 없이...”서우연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허태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어떻게 울어야 가장 예쁘고 불쌍한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순간은 허태준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그는 누군가가 우는 게 싫었고 그를 안은 채 우는 건 더더욱 싫었다. 왜냐하면 그의 옷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그 시각 그는 오로지 눈앞의 여자가 사라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허태준을 제외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심장은 돌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나한테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고?”허태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하긴. 전에 당신과 함께 잠자리를 가진 남자만 봐도 알 수 있어. 당신 사람 보는 눈 별로야.”사정없이 까인 서우연은 맨 숨을 들이키다가 침이 기관지로 들어가는 바람에 정신없이 기침했다.허태준은 더욱 꺼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만히 서서 뭐 하고 있어요?”그는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안 끌어내요?”사람들은 그제야 정신 차리고 재빨리 달려가 서우연을 끌어냈다.서우연은 힘 있게 발버둥 치며 기침하는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내려줘!”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녀의 부름 소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계속 이어졌고 한참 지나서야 완전히 사라졌다.3층에는 드디어 허태준, 심유진과 비비안 단 세 사람만이 남겨져있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놓아준 뒤 고개 숙여 자신의 겉옷 단추를 풀었다.“남자 예복은 있어요?”그가 비비안에게 물었다.“있어요!”비비안이 다급히 대답했다.“이쪽에 있어요. 안내해 드릴게요.”“잠시만요.”허태준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윽고 넥타이를 풀어 셔츠를 벗었다.“그전에... 샤워 좀 하고 싶은데요.”그는 윗옷을 벗어 단단한 복근을 드러냈다.비비안은 순간 넋을 잃었다가 한참 지나서야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옮겼다.“욕실은 2층에 있습니다.”“안내해 줘요.”허태준이 말했다.“네, 네.”조금 전 목격한 그림에 적잖이 충격받은 비비안은 말을 더듬었다.허태준은 또 심유진에게 당부했다.“예복 한 벌 골라줘.”“네?”심유진은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름 불려 의아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의 놀란 표정을 불쾌함으로 받아들였다.“왜, 싫어?”그는 일부러 말끝을 길게 놀려 불쾌함을 잔뜩 드러냈
샵 2층과 3층의 구조는 완전히 달랐다. 인테리어와 세팅 스타일은 고급 클로즈샵에 더욱 가까웠다.심유진은 직원의 리드하에 건물을 한참 돌아서 겨우 맨 끝에 있는 욕실을 찾아냈다.직원의 소개에 따르면 이 욕실은 샵을 운영한 지 1년이 되던 해에 급한 스케줄 때문에 찾아온 연예인들이 잠깐 샤워하는 용으로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데다 비관계자들은 찾아올 일도 없었으니 프라이빗 수준이 아주 높았다.심유진이 두어 번 노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허태준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시죠?”심유진이 대답했다.“허 대표님, 옷 가져왔습니다.”“혼자?”“저 혼자예요.”허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뜨거운 수증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심유진은 고개를 들자마자 알몸에 넓고 단단한 데다 물방울까지 흐르고 있는 가슴팍을 발견했다.수도 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가슴골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물방울을 따라 아래로 옮겨졌다.심유진은 그제야 허태준이...한 쌍의 긴 다리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심유진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 쌍의 눈동자는 자신의 치맛자락밖에 보려고 들지 못했다.그녀와 달리 허태준은 아주 덤덤했다.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옷.”심유진은 재빨리 손에 든 옷을 그에게 건넸다.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스타일이 마음에 드는지 한번 봐봐요.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비비안 씨가 바꿔준다고 했어요.”“잠시만 기다려.”허태준은 문을 닫았다.다시 문이 열렸을 때는 그가 이미 자신의 몸을 꽁꽁 싸맨 뒤였다.가장 심플한 검은색 예복에 가장 심플한 흰 셔츠를 매치하니 우아한 카리스마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온몸으로 섹시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심유진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안 올라가?”허태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올라가요!”그녀가 다급히 대답했다.허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
서우연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시간은 이미 5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그는 비비안에게 경고했다.“심유진 메이크업...”비비안은 곧바로 심유진을 자리에 앉혔다.“지금 바로 시작할게요!”비비안은 심유진에게 가벼운 메이크업을 해주었다.그러면서 그녀가 말했다.“심유진 씨는 원래 예쁘게 생기셨기에 별로 손을 댈 필요가 없어요. 가볍게 톤만 입혀주면 딱 좋아요.”허태준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심유진의 얼굴은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그녀를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비비안은 심유진의 머리를 가르마로 나눈 뒤 모두 뒤로 넘겨 포니테일로 묶었다.그녀가 말했다.“이렇게 하면 목선과 어깨선이 드러나거든요. 심유진 씨는 목선과 어깨선이 예뻐서 별다른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줄 필요가 없어요. 사실상 제가 느끼기에 액세서리를 하면 더 별로일 것 같거든요.”허태준이 말했다.“그럼 그냥 이렇게 해요. 액세서리는 필요 없어요.”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호두까기 인형에 불과했다.어차피 마지막 결과물이 허태준의 마음에 들면 그만이었다.비비안은 손에 든 도구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맞아요!”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심유진 씨한테 어울리는 하이힐도 준비해 드려야겠네요!”심유진이 입은 옷은 우아한 반면 신발은 아주 캐주얼했기에 파티에 참석할 때 신고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쁜 드레스와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발은 모두 2층에 있었다. 심유진이 자신의 신발사이즈를 알려주자 비비안이 달려가 그녀 대신 신발을 골라주려고 했다.“내가 갈게요.”허태준이 긴 팔을 뻗어 비비안을 붙잡았다.비비안과 심유진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비비안은 재빨리 눈치채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허 대표님 안목이 저보다 나으실 거예요.”반면 심유진은 발언할 자격도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이 자리를 뜨자 비비안과 심유진이 간단한 토크를 시작했다.
“허 대표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비비안은 진심으로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이 신발은 오해 JC에서 출시한 한정판 디자인이거든요. 전 세계에 이천 켤레밖에 없어요!”허태준은 그녀의 리액션을 무시한 채 덤덤한 표정으로 심유진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어?심유진은 깜짝 놀라 허태준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비비안도 적잖이 깜짝 놀랐다.허태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발.”그가 손을 뻗었다.심유진은 한참 지나서야 자신의 발을 달라는 뜻이라는 걸 알아챘다.“... 제가 할게요!”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허태준은 그녀의 왼쪽 발목을 꽉 잡았다.“움직이지 마.”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심유진은 순간 얼어붙어 얌전히 도로 자리에 앉았다.허태준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앞으로 당겼다.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심유진의 살결에 닿자 마치 전율이 통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고 그와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그는 그녀의 신발을 벗긴 다음 앞으로 발을 당겼다.심유진은 키가 170센티미터를 넘겼기에 보통 여자들처럼 발사이즈가 아담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발을 움츠리려고 했지만 허태준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움직이지 마.”그는 조금 전보다 더 사나워진 말투로 말을 번복했다.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파운데이션을 바른 덕에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허태준의 손이 아래로 향하더니 굳은살 박인 발뒤꿈치를 붙잡았다.심유진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고 체온도 따라서 급격히 상승하는 것 같았다.“허 대표님...”그녀는 모기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응?”허태준은 대답하는 동시에 그녀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심유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설마... 더럽다고 느끼시지 않는 건가?!’“더러워요.
구두 굽은 아주 높았는데 평소 심유진이 신던 힐보다 두 배 정도 높았다.그녀는 컨트롤이 어려워 두어 걸음 내딛자마자 곧바로 옆으로 넘어지려고 했다. 다행히도 눈치 빠른 허태준이 그녀를 잡아주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힘을 빌려 자세를 바로 한 뒤 곧바로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또 넘어지고 싶어?”그가 싸늘한 말투로 되물었다.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동안 입을 꾹 닫고 있던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심유진 씨 스타일링... 이 정도면 되나요?”“네.”허태준이 대답했다.“그럼 허 대표님은...”비비안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듬을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다.“난 이 상태면 돼요.”허태준은 그녀의 시선을 단칼에 무시한 채 차갑게 거절했다.비비안은 단번에 어깨가 축 처졌다.“앉아.”허태준은 의자를 툭툭 치며 심유진에게 앉으라고 명령했다.심유진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명령대로 의자에 도로 앉았다.허태준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구두를 벗긴 다음 도로 원래 신발을 신겨주었다.“파티장에 도착하면 다시 바꿔 신겨줄게.”심유진은 흠칫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욱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파티 장소는 한 개인 별장이었다.별장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가는 길 내내 온통 무성한 나무들뿐이었다.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를 담은 곳, 대구 시중심에 이처럼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아마 이곳뿐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별장 가격도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보통 재벌도 쉽사리 구매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심유진은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긴장감이 몰려왔다.그녀는 손에 땀을 쥔 채 안전벨트를 꽉 부여잡았다.허태준은 차를 한 마당에 주차했다.마당이라기보단 공원에 가까웠다.면적은 놀라울 정도로 드넓었고 각종 식물과 조각상들이 마당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넓은 큰길과 좁은 돌길도 있었다. 게다가 마당
여형민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그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경에 가려져 있던 눈빛이 순간 교활한 미소로 이어졌다.“허 대표?”그는 손을 거둬들이더니 미간을 치켜올리며 경고를 건넸다.“내 기억대로라면... 심 매니저는 내가 요청한 파트너인 것 같은데.”“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꽉 잡은 채 어두운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량 하나를 바라보았다.“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흰색 람보르기니, 아무래도 나은희 차같은데...”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여형민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심유진은 여형민의 도망치는 속도에 깜짝 놀랐다. 거의 슝 소리와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그녀는 깜짝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벙했다.“들어가자.”허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그의 부축하에 자리에서 일어선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흰색 람보르기니를 바라보았다.거센 엔진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몇초도 안 되는 사이에 번개처럼 드넓은 주차장에 들어섰다.예쁜 유턴에 이어 급브레이크와 함께 차는 완벽하게 주차되었다.심유진은 이토록 화려한 스킬을 텔레비전으로만 봤었다.하마터면 람보르기니 운전수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낼 뻔했다.람보르기니 문이 열리자 브라운톤의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채 베이지색 옷을 입은 여자가 느긋하게 차에서 내렸다.그녀의 메이크업은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이목구비는 확연히 보아낼 수 있었다.짙은 눈썹, 크고 맑은 눈, 높은 콧대, 날렵한 이목구비를 자랑하고 있었다.“허 대표.”그녀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불러세웠다.심유진은 그제야 최근 들어 많은 여자연예인들이 자신에게 남편 컨셉을 세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힐끗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그녀는 단번에 보통 남자들보다 몇 배는 멋진 여자한테 반해버리고 말았다.“나 대표.”허태준도 미소로 회답했다.“여형민을 찾는 거면... 조금 전에 이미 갔어.”나은희의 표정에는
“허태준 씨!”한 무리의 사람들이 허태준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에워쌌다.그 속에는 남자와 여자, 어르신과 젊은이들이 있었고 각종 향수 냄새도 뒤섞여진 바람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재채기했다.그녀의 옆에 붙어 서 있던 두 젊은 아가씨가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더러워...”그녀들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죄송합니다!”심유진은 다급히 사과했다.어르신들에게 인사하고 있던 허태준은 휙 고개를 돌려 매우 예의 바른 말투로 두 아가씨에게 말했다.“좀 멀리 떨어져 있어 줄래요? 향수 냄새가 역겨워서요.”두 여자는 얼굴이 하얗고 파랗게 질린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향수 냄새는 옅어졌지만 여전히 역겨웠다.심유진은 최대한 입으로 숨을 쉬는 것으로 코에 주는 자극을 줄이려고 했다.허태준은 그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어르신들과 친구들을 제쳐두고 심유진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리 찾아 먼저 앉아있어. 금방 찾으러 갈게.”바로 심유진이 바라던 바였다.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허태준의 손을 놓고 떠나는 모습을 훤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녀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심유진은 인적이 드문 모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멍하니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어머, 허 대표님 파트너 아니세요?”조금 전 자리를 떴던 두 여자가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어머, 왜 혼자 앉아있어요? 허 대표님한테 쫓겨난 거예요?”그녀를 비웃는 두 여자의 표정은 매우 거슬렸다.“말했잖아, 허 대표님이 어떻게 이딴 여자를 좋아하겠어? 봐봐, 그새 허 대표님한테 버림받았잖아?”“쳇, 진짜 자기가 예쁜 줄 아는 거야? 거울 좀 보라 그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어!”그녀들이 하는 말은 듣기 거북했지만 심유진이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진 아니었다.왜냐하면 그녀는 허태준의 진짜 파트너가 아니었고 그녀들이 질투를 쏟아부은 곳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단지그녀들의 목소리가 너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