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 대문의 벨이 울렸다.반지훈이 일어서서 문을 열자 당황한 얼굴의 제인이 보였다.“반지훈 대표님, 혹, 혹시 천광 오빠와 연락이 되나요? 오늘 나간 뒤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전화도 받지 않아요.”반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구천광은 언제 나갔어요?” 제인은 얼굴이 창백했다.“9시쯤에 일이 있다고 하더니 홀로 나갔어요. 전화를 했지만 계속 받지 않아요.” “구천광씨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요?”제인과 반지훈의 대화를 들은 강성연도 방에서 나왔다.제인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네, 걱정돼요...... 천광 오빠가 그 사람들을 찾으러 갔을 것 같아요. 여기는 제주도잖아요. 홀로 나가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반지훈이 구천광에게 전화해 보니 그의 전화는 꺼져있었다.반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놈 정말 화난 거 아니야?”강성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투자 일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설마 구천광씨가 정말 그 사람들을 찾아간 건가요?”제인은 입을 가렸다.“천광 오빠는 무사하겠죠?”만약 구천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양 매니저에게 설명하겠는가!반지훈은 몸을 돌려 외투와 차 키를 챙겼다.“제가 찾으러 갈게요.”“저도 함께 갈게요.”강성연이 그를 잡자 반지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품에 안고는 정수리에 뽀뽀했다.“호텔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반지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갔다. 제인은 벽에 기대더니 허리를 숙이면서 얼굴을 가렸다.“모두 제 잘못이에요. 제가 천광 오빠를 혼자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데, 일찍부터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강성연은 그녀를 부축했다.“자책하지 마세요. 지금 저에게 방법이 있으니 제 말대로 해요.”반지훈은 차를 타고 어제 주소로 갔다. 오피스텔 사무실 문은 굳게 닫겨있었으며 “오늘 휴무”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그는 연희승에게 전화를 쳤다.“연희승, 이 번호의 위치를 조사해 봐. 3분 안에 알리도록.”그는 연희승에게 전화번호를 발송했고 연희승은 3분 안에 결과를 보
중년 남자는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인혁 형님.”주인혁은 담배를 빨더니 눈을 가늘게 뜨면서 반지훈을 바라보았다.“제가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오네요.”반지훈은 눈을 내리깔면서 웃었다.“제 친구는 어디에 있습니까?”주인혁이 중년 남자를 바라보자 중년 남자는 부하더러 구천광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반지훈은 안에서 걸어 나온 구천광을 훑어보았다. 얼굴에 멍이 좀 들었을 뿐 손발은 멀쩡했다.“이 배우 친구분은 아주 성격이 난폭하더라고요. 태도가 좋지 않아 손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주인혁은 잔을 들고 남아있는 와인을 모두 마셨다.반지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만약 얼굴에 상처가 난다면 골치 아플 겁니다.”“흥, 이곳은 제주도입니다. 제가 뭘 두려워하겠습니까?”주인혁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당신들이 일반인이 아니라 해도 이곳에서 급병으로 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저의 소행인 줄 모를 겁니다.”구천광은 무표정으로 말했다.“허튼소리 그만하고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 말해요.”주인혁은 곁에 있는 여자들을 밀치더니 온천탕에서 나와 부하들이 건네는 타월을 받았다.“패기 있네요. 어제 당신들이 방해한 저의 비즈니스를 어떻게 배상할 생각입니까?”반지훈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는 일찍부터 투자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주인혁은 제주도의 조직폭력배 두목임이 분명했기에 그와 강경하게 맞서면 안 되었다.구천광이 입을 열려고 하자 반지훈이 그를 저지했다.“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얼마를 원합니까?”주인혁은 그의 앞에 서더니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역시 비즈니스를 좀 아는 분이군요. 합작을 하려면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반지훈은 주인혁의 뜻을 알아차렸고 구천광도 곧 알아차렸다.주인혁은 그가 연예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이 기회에 합작을 강요하려는 거였다.지금 그들은 보디가드가 없었고 제주도는 서울시가 아니었다. 일단 그들과 충돌이 생긴다면 제주도에서 멀쩡하게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
200억은 아주 큰 유혹이었다.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주인혁은 원래 돈과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100억의 손해를 보고 200억을 얻었으니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휴대폰을 꺼낸 반지훈은 희승에게 연락하여 은행에 200억 현금을 마련하라고 통보하라고 했다. 희승은 반지훈 쪽에 일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은행에 200억을 준비하라고 일러둔 뒤 제주도로 사람을 파견했다.주인혁은 그가 통화하는 내용을 옆에서 듣고 있다가 반지훈이 수작을 부리지 않자 서서히 웃었다.“이렇게 쉽게 200억을 주는 걸 보니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어디 사람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를 모르네요.”반지훈은 웃었다.“전 서울시 사람입니다. 회사 운영하고 있고 성은 반 씨입니다.”“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주인혁은 고개를 돌려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뭘 넋 놓고 있어? 얼른 이분께 차 따라드려.”중년 남성은 정신을 차린 건지 다급히 차를 가지러 갔다.구천광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대체 뭐 하는 거예요? 저 사람들한테 200억을 넘긴다고요? 미쳤어요?”반지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잠시 뒤면 알게 될 거야.”제주도 은행은 연락을 받았다. 지금 당장 신분이 특별한 분을 위해 몸값 200억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현금 액수가 어마어마했기에 은행은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납치 사건인 듯하니 은행장은 전화를 받은 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몸값이 200억이라고 한다. 200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절대 평범한 신분이 아닐 것이고 때마침 강성연이 경찰서로 향해 누군가 그녀의 남편을 납치해 돈을 뜯어내고 있다고 신고했다.두 사건이 갑자기 이어지자 경찰서 쪽에서는 강성연이 제공한 자료를 뒤져봤고 강성연 남편의 이름이 은행장에게 200억의 몸값을 준비하라고 요구한 고객의 이름과 똑같음을 발견했다.경찰서에서는 곧바로 강성연에게 연락했다. 강성연은 마치 그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전화로 가련하게 상황을
중년 남성은 반지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인혁 씨, 200억은 적은 액수가 아니에요.”주인혁은 남자를 무시하고 반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궁금하네요. 200억을 줄 수 있다면 왜 바로 계좌이체를 하지 않고 현금을 주는 거죠?”반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까 200억 현금이라고 했을 때 동의하셨잖아요.”주인혁은 무언가 떠올린 건지 벌떡 일어나며 흐린 안색으로 물었다.“지금 시간 끄는 거예요?”반지훈은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 들어와 주인혁을 불렀다.“형님!”그는 주인혁의 곁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뭐라고 말했고 주인혁은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역시 개수작 부리는 거였어!”주인혁의 부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반지훈이 도망치지 못하게 그를 단단히 둘러쌌다. 5층 목욕탕이었으니 구천광과 반지훈 두 사람에게 날개가 있지 않은 이상 도망치기 힘들었다.반지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호주머니에 넣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주인혁은 침을 뱉었다.“빌어먹을, 당신들 말을 믿다니. 난 당신들한테 기회를 줬어요. 감히 날 속이려고 해요? 그렇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죠.”주인혁이 손을 들자 건장한 남성 두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반지훈은 다리를 들어 의자를 차서 두 사람을 막은 뒤 구천광을 일으켰다.뒤에 서 있던 남자는 의자를 망가뜨려 그것을 무기로 삼아 반지훈을 공격하려 했다. 반지훈은 그를 향해 발길질했고 남자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반지훈은 옆에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있던 사람도 물리쳤다.하지만 수가 워낙 많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다들 힘이 셌고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훈련받은 적 있는 반지훈도 그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밀리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들은 입고 있던 정장 외투를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단추도 풀었다. 격렬한 싸움 속에서 와이셔츠가 찢기고 구겨졌다. 땀이 등을 잔뜩 적신 모습은 다소 볼품없었다.
경찰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총을 맞고 쓰러졌고 어떤 이들은 제압당했다. 아주 혼란스러운 장면이었다.주인혁은 두 경찰에게 제압당한 채로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반지훈은 시야가 흐릿해졌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구천광의 목소리였다.그리고...“반지훈 씨!”강성연은 울면서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품에 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피가 묻은 그의 뺨에 닿자 데일 듯이 뜨거웠다.반지훈은 엉엉 울고 있는 강성연을 보며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의식을 잃었다.반지훈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강성연은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면서 서서히 차가워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의사가 반지훈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다급히 길을 냈다.“비켜주세요!”강성연은 문밖에 가로막혔고 제인과 구천광이 뒤이어 도착했다.구천광도 상처를 입었지만 반지훈처럼 상황이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응급실로 실려 들어가는 반지훈을 바라보았다.제인은 강성연의 옆으로 걸어가 그녀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줬고 강성연은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로 울먹였다.강성연은 3년 전 반지훈이 그녀를 대신해 총을 맞고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던 기억이 떠오르자 너무 두려웠다.희승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제주도 병원에 도착한 뒤 그들을 봤다.“대표님은요?”구천광은 벤치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팔꿈치로 허벅지를 짚었다.“안에 있어요.”희승은 당황했다. 그는 말 한마디 뱉지 못하고 응급실을 바라봤다.구천광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요. 나 때문이에요.”희승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용한 위로였다.경찰은 그들에게 상황을 물었고 제인은 경찰들을 따라가 조사에 협조했다.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다가왔다.강성연은 의사에게 다가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어떤가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생명에 지장은 없습
...반지훈이 혼수상태에 빠진 넷째 날, 반지훈의 할아버지는 개인 비행기로 반지훈을 서울시 병원으로 옮겼다. 희승은 제주도에 남아 개발회사, 주인혁과의 일을 처리했다. 반지훈의 할아버지는 단단히 화가 났다.게다가 구천광이 다친 일로 구세준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주도 관할구역 상부를 탄핵했다.제주도에서 폭력이나 투자 사기와 관련된 온천 사업은 전부 조사당했다. 개발회사 대표는 꼬리를 자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주인혁 명하의 온천 사업과의 관계를 부인했다.그러고는 익명으로 경찰에게 주인혁 일당의 자료와 그간 그들이 불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은 증거를 넘겼다.반씨 집안과 구씨 집안이 제주도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아들을 위해서 구씨 집안과 반씨 집안은 처음으로 같은 목적을 안고 함께 제주도 내부의 불법 사업의 싹을 잘라냈다.구씨 본가.구천광의 할아버지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쾅 내려놓았고 그 바람에 테이블이 살짝 흔들렸다.“진짜 날 속 터져 죽게 만들 셈이냐?”구천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얼굴에 든 멍이 살짝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분명한 흔적이 보였다.구세준은 아버지를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아버지, 천광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이제 그만 혼내세요.”“얘가 이 꼴인 건 네가 자꾸 봐줘서야.”구세준은 구천광의 할아버지가 화가 난 걸 알고 인정했다.“제가 소홀했습니다.”“말 한마디면 끝날 일이야, 이게?”구천광의 할아버지는 구천광을 손가락질했다.“내가 왜 얘가 사업하지 않길 바랐는지 아니? 사업하는 사람들은 다 속이 음험하니까. 근데 이놈은 반씨 집안 그놈 투자하러 제주도 가는 데 그곳까지 같이 갔잖아.”구세준은 고개를 숙였다.구천광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할아버지, 그 말씀은 틀리셨어요.”구천광의 할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구천광은 파문 하나 일지 않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제주도에 투자하려던 사람은 반지훈이 아니라 저예요. 반지훈은 이 일이랑 상관없어요. 오히
어른들은 반지훈 같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건 구천광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구천광은 어릴 때 반지훈을 만난 덕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후회하지 않을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그가 말했다.“반지훈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구천광 할아버지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결국 그는 흐려진 얼굴로 자리를 떴다.구세준은 자신의 앞에 선 아들을 보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감명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네가 하고 싶은 거 해.”구천광은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아버지...”구세준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손을 거두어들인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구천광은 별장에서 나왔고 구의범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형, 난 예전에 형을 내 우상으로 삼았어요. 형이 나보다 잘나서 할아버지에게 귀염받았잖아요.”그는 구천광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씩 웃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형보다 훨씬 더 행복한 것 같네요. 나도 형이 바라는 모습을 갖고 있었네요.”구천광은 피식 웃었다.“구씨 집안은 이제 너한테 달렸어. 나 배우지 마.”구의범은 코웃음을 쳤다.“난 싫은데요. 난 지금 내 삶이 좋아요. 가업을 잇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귀찮아요.”“술 마시러 갈래?”구의범은 놀랐다.“형이 나한테 술 마시러 가자고 하다니, 나 속이는 건 아니죠?”구천광은 어깨동무를 했다.“내가 살게.”같은 시각, 병원.강성연은 의자에 앉아 반지훈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호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원래는 반지훈이 제주도에서 돌아오면 디자인을 마친 반지를 서프라이즈로 선물해 주고 싶었다.송아영이 밖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성연아.”강성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더니 입꼬리를 당겼다.“아직 병원에 있었네.”“난 어제 퇴원했어. 너 보러 온 거야...”송아영은 그녀의 옆에 서서 손에 들린 반지 케이스를 바라보았다.“이거... 네가 디자인한
돌연 반지훈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았다. 아주 살짝 말이다.송아영은 싱긋 웃으며 강성연의 어깨를 흔들었다.“난 널 속이지 않았어. 반지훈 씨 의식이 있다니까!”강성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자기 뺨에 가져다 대더니 감격해 말했다.“반지훈 씨, 느낄 수 있는 거죠? 내 목소리 들려요?”하지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반지훈은 반응이 없었고 깨어나지도 못했다.그러나 의식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저녁, 룸살롱.구의범은 구천광을 부축해 룸에서 나갔다. 구천광은 술을 꽤 많이 마셔서 취한 상태였다.“형, 취하려고 술 마셨어요?”그는 구천광에게 모자와 선글라스를 씌웠고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무언가 발견했다.“나 지갑 두고 나왔어요. 형, 여기서 나 기다려요. 떠나지 말아요.”구천광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허리를 숙였다. 그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토하고 싶어도 토할 수가 없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카운터에서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해 마신 뒤 소파에 앉았다.구천광은 모자를 벗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어두운 불빛 아래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도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무척 매력적이었다.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여자가 술잔을 들고 그의 옆에 앉으며 갑자기 거리를 좁혔다.“어머, 왜 여기 혼자 앉아 있어?”구천광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무시해 버렸다.여자는 대담히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돌려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가냘픈 다리가 그의 종아리에 감겼다. 여자는 거리를 좁히며 구천광을 향해 숨을 내뱉었다.“나랑 게임 할래?”구천광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떼어냈다.“관심 없어요.”“밤인데 왜...”여자는 손을 뻗어 그의 선글라스를 빼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구천광에게 가로막혔다.구천광은 여자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났다.“적당히 해요.”떠나려는데 여자가 갑자기 사람을 불러 그의 앞길을 막았고 술잔을 내려놓은 뒤 그를 향해 다가갔다.“여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