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서둘러 병실 밖으로 나가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들어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숙과 윤진도 병실에 도착했다.“티파니야!”강현숙은 침대에 앉아있는 딸을 확인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곁에 있는 한지욱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내 딸, 드디어 깨어났구나.”“깨서 다행이야. 깼으니 됐어.”윤진도 큰 시름을 던 것처럼 한숨을 돌렸다. 돌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던 마음이 그제야 쑥 내려간 것 같았다.윤티파니의 표정이 어딘가 멍해 보였다. 그녀는 깨어나긴 했지만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현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흐트러진 딸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티파니?”윤티파니가 퍼석퍼석해진 입술을 달싹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누구… 세요?”강현숙과 윤진이 그대로 얼어붙었다.두 사람이 동시에 한지욱을 바라보았다. 한지욱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윤티파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끔씩 머리를 들고 윤진과 강현숙, 그리고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증오가 서려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한테서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모든 걸 잊어버린 것이다.강현숙이 빨개진 눈으로 의사의 팔에 매달렸다.“선생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제 딸이 우리 모두를 잊어버린 거죠?”의사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설명했다.“지금 상황으로 볼 때, 단기기억상실증인 것 같습니다. 머리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걸로 보아 심리적 원인으로 기억 장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강현숙이 물었다.“그럼 언제 다시 기억할 수 있나요?”“단기기억상실증이라면 환자 개인의 상태에 따라 회복하는 시간이 결정됩니다.”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강현숙이 몸을 휘청거리자 윤진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속으로 자신을 자책하던 그녀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한지욱은 입술을 깨물
윤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남자의 사연이 궁금했다.한지욱이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녀와 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정략결혼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그때 저는 단지 집안 강요 때문에 결혼을 하겠다고 했었어요. 그녀를 좋아하진 않았죠…”그가 윤티파니를 처음 본 건 한 씨 집안과 윤 씨 집안끼리 이루어진 식사 자리에서였다. 사실 그는 그전에 티몬 그룹의 윤티파니를 본 적도 있었고 소문으로도 익히 들었었다. 오만방자한 철부지 아가씨가 뭇사람들의 비난의 상대로 전락한 건 몇 년 전 그 파티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였다.당시 한성연이 친 사고로 한 씨 집안은 꽤 큰 타격을 받았었다. HS 그룹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미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그는 그 상황이 우습기만 했었다.어떤 의미에서 그날이 그가 윤티파니를 제대로 보게 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교만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하고 단정한 여자였다. 그는 예전 그 일이 있은 후 윤티파니가 3년 동안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통 여자였다면 그런 일을 겪고 절대 그저 지독한 악몽을 꿨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마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달랐다.그녀는 그 악몽에서 벗어난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뼛속 깊은 곳까지 박힌 부잣집 아가씨의 오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예전보다 조금 더 유순해졌을 뿐이었다.그때 그는 신세를 망친 여자가 도도한척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 그녀를 자신의 와이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기껏해야 한 씨 집안에 시집온 여자 정도로 생각할 작정이었다.그날 밤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두 사람 사이에도 크게 교류가 오가지 않았다. 유일한 교류는 그의 아버지가 그더러 윤티파니를 집에까지 바래다줘라고 한 것뿐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가 그에게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녀가 자신한테 보여줬던 이해와 배려는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는 생각이 복잡해졌다.그가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한테 연민을 느끼고 보상해 주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그의 연민을 필요치 않았다.혹시 그한테 마음이 없는 걸까?그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유혜선이 알콩달콩 하게 지낼 때,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방해한 적 없었다. 그녀의 열등감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열등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냉정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그는 점점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가 그녀한테 조금만 잘해줘도 즐거워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는 잘 웃지도 않았다. 그가 먼저 그녀와 밥을 먹자고 해도 그녀는 각종 이유를 대며 회피하기 급급했다.그녀가 그를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녀의 순종에 습관이라도 되었던 걸까? 자신한테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리자 그는 그 상황이 적응되지 않았다.이제 유혜선이 돌아왔으니 두 사람의 약혼을 깨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 분명했다.하지만 어쩐지 그는 이 혼담을 깨기 싫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혼담을 깨기 싫어하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그가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하게 된 건가?그럴 리가 없었다.그가 그런 불결한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혜선은 완벽한 여자였다. 유혜선은 그에게 잊지 못할 옛 정인이었고 그가 열렬히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데. 윤티파니는 그녀와 전혀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윤티파니라니, 가당치도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와 유혜선의 낯 뜨거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놀란 그녀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날 그는 분명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임신한 유혜선은 마치 시한폭탄처럼 그의 곁에서 터져버렸고 한지욱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한쪽은 그가 잊지 못한, 심지어 그의 아이를 가진 전 여자친구였고 다른 한쪽은 그와 결혼할 여자였다. 한지욱은 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유혜선이 울며불며 난리를 치면 한지욱은 항상 윤티파니를 떠올렸다. 윤티파니는 단 한 번도 울며불며 난리를 친 적이 없었다. 윤티파니를 알게 되고부터 지금까지 윤티파니는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결혼이 취소되고 윤티파니가 아파트에서 떠나자 한지욱은 더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윤티파니를 안았고 결과적으로는 한때 싫어했던 그녀에게 손을 댔다.윤티파니는 사실 한지욱의 상상과는 좀 달랐다. 윤티파니는 울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이었다. 한지욱은 윤티파니가 울면 마음이 아렸기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한지욱은 자신이 윤티파니에게 애정이 생겼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아마 한지욱이 윤티파니를 신경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게 됐을 때부터 이미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유혜선이 유산한 일로 윤티파니를 모함했다는 것과, 그녀가 나체 사진을 찍어 대출을 받았던 일의 진상이 밝혀지며 한지욱은 자신이 사랑했던 건 과거의 유혜선이고, 자신이 차마 놓지 못했던 건 예전의 아름다운 감정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한때 아름다웠던 그 사람에게 약간의 흠집이 생기자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지욱은 저런 모습의 유혜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유혜선보다 더욱 별로라고 생각했던 윤티파니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혜선이 달라져서 그런 걸까?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저 감정의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다.그리고 달라진 사람은 한지욱이었다.만약 유혜선이 그가 윤티파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한지욱은 분명 윤티파니에게
“해신아...”강성연이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해신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한태군 얘기를 꺼냈다.역시나 강유이는 한태군의 이름을 듣자 기쁘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강해신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지하고 머리를 긁적였다.“미안해. 고의는 아니었어. 초대하고 싶으면 해. 난...”강해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유이는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쾅 닫았다. 강성연은 강해신을 바라봤고 강해신은 입을 비죽였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강성연은 강해신의 머리를 토닥였다.“얼른 가서 네 동생 달래줘.”“알겠어요.”강해신은 들고 있던 꽃을 내려놓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강해신은 강유이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유이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과할게. 문 좀 열어줘!”아래층에 있던 강성연은 강해신의 목소리를 듣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해신은 말을 좀 못되게 할 뿐,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동생을 아꼈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빠랑 똑같았다.강유이는 단순하고 제멋대로인 아이였고 오빠가 달래주는 것에 익숙했기에 오빠가 사과하자 곧바로 화가 풀렸다.강유이는 방 안에서 대답했다.“들었어. 말이 참 많네.”강해신은 문 앞에서 팔짱을 둘렀다.“화 풀렸어?”강유이는 큰 소리로 말했다.“아니. 오늘 밤 선물 열 개 받아야 화가 풀릴 것 같아!”강해신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래, 그래. 열 개 줄게.”역시 여동생을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점심이 되자 김아린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구희나는 6개월이라 옹알거리며 말을 배우고 있었는데 2개월 때보다 훨씬 큰 듯했다.강유이와 강해신은 구희나를 데리고 마당에서 놀았고 강성연은 정자에 앉아 김아린과 차를 마셨다. 김아린이 말했다.“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아이들이 들떴어.”강성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선물을 받잖아. 유이는 선물 받을 때 가장 기뻐해.”김아린은 차를 마신 뒤 뭔가 생각했다.“윤티파니가 기억을 잃은 뒤에 만난 적 있어?”강성연은 고개
경호원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차를 타고 떠났다.“엄마!”강유이는 민서율을 끌고 와 강성연의 옆에 서서 소개했다.“엄마. 제가 말했던 오빠예요.”민서율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전 유이랑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6학년 민서율이라고 합니다.”강성연은 웃었다.“안녕.”강성연은 소년의 겸손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강성연은 강유이를 보고 말했다.“오늘 저녁 주최자는 너야. 그러니까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해.”강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잘 대접할게요!”강유이가 민서율을 데리고 떠나자 김아린이 구희나를 안고 다가왔다.“네 딸 남자아이들에게 인기 많은가 보다.”강유이는 아직 어린데도 외모가 출중했다. 아마 몇 년 더 지나면 아주 예뻐질 것 같았다.강성연은 이마를 짚었다.“그게 가장 골치 아픈 점이야.”부모가 된 강성연은 차라리 자신의 딸이 좀 평범하게 생기길 바랐다. 비록 예쁘게 생긴 것이 아이의 잘못은 아니지만 자꾸 걱정됐다.날이 저물자 반씨 저택 밖엔 환한 조명이 켜지고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강유이는 민서율 외에도 리사와 미소를 초대했다.반크는 미소를 데리고 왔다. 미소는 이미 만으로 한 살이라 걸을 수도 있고 옹알거리며 간단한 말을 하거나 사람을 부를 수 있었다.강성연은 미소를 안아 들었다.“잠깐 안 본 사이에 이제 걸을 줄도 아네요.”반크는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아이들은 정말 빨리 크는 것 같아. 예전에는 안아야 했었는데 지금은 가끔 안지도 못하게 해.”“이모.”미소는 앳된 목소리로 강성연을 불렀고 강성연은 활짝 웃었다.반지훈과 구천광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살짝 멈칫했고 구천광이 다가와 말했다.“크리스마스에도 활동이 있네요.”강성연이 대답했다.“유이가 하고 싶대서요. 아이들이 기뻐하면 좋잖아요.”강성연이 미소를 내려놓자 미소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강유이에게 달려갔다. 김아린은 갑자기 구희나를 구천광의 품에 안겼다.“당신이 안고 있어. 난 고기 구우러 갈래
“오빠, 나 이거 들어줘. 연기 때문에 사레들렸어.”강유이는 다 굽지 못한 꼬치를 강해신에게 건넸고 강해신은 겉으로는 싫은 척했지만 결국 그것을 건네받았다.김아린은 휴지로 닦아주며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고기 굽는 것뿐인데 얼굴이 숯검정이 됐어.”민서율은 강해신을 보고 말했다.“내가 구울게.”“필요 없어.”강해신은 쭈그리고 앉아 꼬치를 다시 그릴에 올려놓았다. 강유이는 강해신의 머리를 툭 때렸다.“내 손님 막 대하지 마!”“그래, 그래. 안 그럴게.”리사는 자리에 앉아 시끄러우면서도 화목한 광경을 바라봤다. 리사는 그 화면에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처럼 다소 외로운 표정을 지었다.반씨 저택은 떠들썩한 데 비해 윤씨 집안은 한산했다. 윤진은 회사 일을 처리해야 해서 집에 없었고 윤티파니와 윤티파니의 어머니 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했다.윤티파니는 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속이 메슥거려 다급히 입을 가리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티파니?”윤티파니의 어머니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윤티파니는 변기에 엎드려 먹었던 걸 토해내고 물을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티파니는 어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는 걸 보았다.“티파니, 너... 생리 안 한 지 얼마나 됐어?”윤티파니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윤티파니의 어머니는 윤티파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물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딸이 어쩌면 임신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어렵사리 딸과 한지욱의 관계를 청산했는데 하필 이 시점에 임신이라니, 정말 최악이었다.그녀는 윤티파니를 붙잡고 말했다.“티파니, 내일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받자. 정말 임신한 거라면... 엄마 말 들어. 절대 한지욱한테 임신한 걸 들켜서는 안 돼.”“제가 임신했다고요?”윤티파니는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임신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어머니가 왜 한지욱이 그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건지 알지 못했다.윤티파니의 어머니는 고
윤티파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윤티파니는 임신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한지욱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한지욱은 한 여자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다고 했고 항상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그런 일들이 마치 뚝뚝 끊기는 비디오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재생됐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꽉 막혀 숨을 쉬기 어려웠다.“티파니 씨, 왜 그래요?”한지욱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려 하자 윤티파니는 갑자기 피했다.“피곤해요. 좀 쉬고 싶어요.”한지욱의 손은 허공에 멈췄다. 아주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윤티파니의 말에 한지욱은 서서히 손을 거두어들인 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뒤 한지욱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그러면 먼저 쉬어요. 난 다음에 다시 보러 올게요.”한지욱이 떠나자 윤티파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울시 공항.차에서 내린 강성연은 지윤이 캐리어를 끌고 출구에서 나오는 걸 봤다. 거의 1년 만에 지윤을 만나는 것이라 조금 변화가 있었다. 지윤은 예전보다 머리카락이 길어져 어깨에 닿았다. 예전에는 언뜻 보면 남자 같아 보였는데 지금은 여성미가 풍겼다.지윤은 강성연의 앞에 섰다.“저 돌아왔습니다.”“환영해요.”강성연이 짐을 받아 들려고 하는데 지윤이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제가 하면 돼요.”지윤은 깔끔한 동작으로 짐을 트렁크에 싣고 강성연과 함께 차에 탔다.차 안에서 강성연은 그녀의 부모님에 관해 물었다. 지윤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더군요. 전 떠도는 것에 익숙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건 적합하지 않아요.”그녀의 부모님은 아이가 넷이 있었고, 오래전에 버려진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 지윤의 출현은 그녀의 부모님에게 기쁨이 아니라 스트레스였다.예전에 지윤은 부모님이 왜 자신을 모질게 버렸는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을 만난 뒤에야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형편이 좋지 않아 아이를 키울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