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을 하려고 막 로비를 지나던 안예지는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비 직원들은 오후 내내 그러고 있는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안예지의 모습을 확인한 선희수가 그제야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어서 다리가 저려던 걸까? 걸어오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예지야.”안예지가 뒤로 물러서면서 그녀를 피했다.“저를 왜 찾으시는 건데요?”“난…”안예지가 확실히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그녀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선희수는 철면피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안예지와 가까워져야 했다.“예지야, 네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선희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땐 나한테도 사정이 있었어.”안예지의 시선이 선희수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은 거친 일 한번 못 해본 것처럼 곱고 보드라웠다.그녀는 곧바로 선희수의 손을 뿌리쳤다.“그런 사정 따위가 절대 당신이 저랑 아빠를 버리고 떠난 이유가 될 순 없어요.”선희수가 당황했다.안예지가 돌아서자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예지야, 나도 알아. 내가 너랑 너희 아버지한테 큰 빚을 졌다는걸. 넌 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돼. 하지만 네 아버지는 나한테 이기적이지 않았는 줄 알아?”안예지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선희수가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가며 말했다.“너를 가진 건 순전히 사고였어. 그때 난 애를 낳을 준비가 안 됐었다고.”그녀가 안예지 앞으로 돌아가서 말을 이었다.“그때의 난 한창 승승장구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내 커리어를 다 포기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이 들었겠어. 네 아버지는 나한테 아이를 낳을 것을 강요했어.”안예지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러니까 난 당신이 원치 않았던 아이였다는 말이네요.”그녀는 아무런 답
반준성은 아들의 체면 같은 건 상관없이 되받아쳤다.“네 어머니한테 맞지 않았다면 네가 그 버릇을 고쳤겠니?”반지훈이 자신의 아버지를 힐끗 바라보았다.“아빠, 할머니가 예전에 아빠 때렸어요?”강해신이 말의 중점을 콕 찍어 되물었다.반지훈이 고개를 돌려 강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맞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강해신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강성연이 반지훈한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이제 자기 아들한테 협박도 하는 거예요?”반지훈이 짐짓 정색하며 답했다.“아들은 너무 예쁘다 예쁘다 하면 안 돼. 때려야 할 때는 때려야지.”강해신이 억울한 듯이 소리쳤다.“왜 아들만 때려요. 유이는요?”강유이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난 착하잖아.”강해신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한숨을 쉬었다.“아들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요. 엄마는 왜 절 여자로 낳지 않았어요?”강성연이 국을 담으며 말했다.“여자애가 되면 나중에 커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걸. 해신이는 아이를 낳고 싶어?”강해신이 머리를 긁적였다.“음… 역시 안 할래요.”아이를 낳는다는 건 아영 이모처럼 커다란 배를 안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힘든 것 같았다.강해신이 갑자기 한창 새우 껍질을 벗기고 있는 강유이를 돌아보았다.“그럼 유이도 나중에 크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해요?”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반준성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나중에 어떤 자식이 우리 유이를 데려갈지 모르겠구나.”반지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데려가긴 뭘 데려가요. 감히 누가 아버지 손녀한테 어울릴 급이 된다고요.”반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연이가 너한테 시집올 때, 네 장인어른 마음을 그렇게 생각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반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끝마친 후 강성연은 아이들을 데리고 정원을 산책했다. 강유이가 버블건을 들고 다니며 쏘아대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버블이 석양빛을 받아 오색찬란하게 빛났다.강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
강유이는 의아해했다.“불편하게 느껴지는 행동이라는 건 어떤 거예요?”옆에 있던 강해신이 입을 열었다.“끌어안고 뽀뽀하고, 그런 거겠지. 아빠가 그러셨어.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막 만지면 안 된다고. 예의 없는 일이라고 했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잖아. 그리고 아빠가 그러셨어. 네가 자라면 오빠인 나도 마음대로 널 안으면 안 되고 의심 살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강성연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반지훈이 교욱 하나는 철저하게 시킨 것 같았다.강유이는 깨달았다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예전에는 오빠와 함께 잘 수 있었는데 지금은 혼자 자야 했다. 그리고 이제 더는 오빠가 자신을 안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그런데 무언가 떠올린 강유이가 물었다.“엄마, 그러면 머리를 쓰다듬는 건요?”강성연은 헛기침했다.“머리를 쓰다듬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니야.”“그러면 안거나 뽀뽀하지만 않으면 돼요?”강유이가 또 물었고 강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성연은 강유이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넌 아직 어려. 네가 성인이 되고 연애할 나이가 되면 안거나 뽀뽀하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야.”강유이가 또 물었다.“그러면 아빠랑 엄마가 끌어안고 뽀뽀하는 건요?”강성연은 이마를 짚었다. 아이에게 이런 방면의 지식을 알려주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강성연은 심호흡한 뒤 말했다.“유이야, 잘 들어. 네가 끌어안고 뽀뽀한 남자아이가 있다면 넌 앞으로 그 애하고만 결혼해야 해. 그러니까 절대 남자아이랑 쉽게 뽀뽀하고 끌어안으면 안 돼. 알겠어?”강유이는 강성연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그러면... 그러면 전 태군 오빠랑도 안았는데 태군 오빠랑 결혼해야 해요?”강성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다음 날, 안예지는 세수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원에서 아버지의 화가 난 음성이 들었다.“당신이 뭔데 감히 그런 요구를 하는 거야?”안예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문가로 향했다. 그녀는 선희수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마당에 서 있는 걸
선희수는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단호히 딸을 버리면서 다시는 딸과 만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기 아들을 위해 존엄을 내려놓고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아버지.”안예지의 목소리가 정원 안의 분위기를 깨부쉈다. 선희수는 울음을 그치더니 멍한 표정으로 안예지를 바라보았다.안지성이 안예지를 보았다.“예지야, 너 설마 다...”“다 들었어요.”안예지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선희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그녀의 뒤쪽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할게요.”안지성뿐만 아니라 선희수마저 놀랐다.“예지야, 너...”“제가 도와주는 이유는 우리 아버지 때문이에요.”안예지의 어조는 덤덤했다.“그리고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까요. 그냥 좋은 일 하는 거라고 생각할게요. 골수 검사받고 수술 마치면 다시는 저와 아버지의 삶을 방해하지 마세요.”선희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힘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반지훈은 직접 운전해서 강성연을 주얼리 회사로 데려다줬다. 강성연은 반지훈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놀랐다.“안예지 씨가 선희수 씨 아들을 위해 골수를 기증할 거라고 했다고요?”반지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본인이 원한 거래.”강성연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선희수가 딸을 찾은 이유는 아들의 골수 검사를 위해서였다. 선희수는 딸은 비정하게 버렸으면서 아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부었다.안예지에게 있어 그녀는 무책임한 엄마였지만 결과적으로 안예지는 승낙했다.반지훈은 손을 뻗어 강성연의 손등을 잡았다.“이 일에서 우리는 제삼자야. 그들의 일은 네가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내가 뭘 걱정했다고 그래요?”강성연은 입을 비죽였다.“그리고 안예지 씨는 우리 디자이너예요. 난 그녀의 사장이니까 부하직원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죠.”그는 웃음을 터뜨렸다.“넌 남편인 내게 많이 신경 쓰면 돼.”강성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신 걱정할
강성연은 웃었다.“성숙해진 거죠. 자기가 선택한 것을 확고히 할 줄 알게 된 거예요.”문이 천천히 열리자 강성연과 손유린은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고 때마침 반크가 직원에게 일을 시키는 걸 보았다.그 직원은 고개를 끄덕인 뒤 떠났고 강성연 곁을 지나칠 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안부를 물었다.“안녕하세요.”반크는 강성연과 손유린을 보고 살짝 놀라더니 이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손유린을 바라보았다.“여기 일부러 온 거예요?”강성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줌마가 아저씨 배고플까 봐 걱정돼서 오셨대요. 사랑이 담긴 도시락까지 챙겨오셨어요.”손유린은 들고 있던 도시락을 그에게 건네며 일부러 불평하듯 말했다.“다음번에는 가져다주지 않을 거예요.”반크는 웃었다.“알겠어요. 다음번에 외출할 때는 도시락 들고나올게요.”그들을 바라보는 강성연은 내심 기뻤다.같은 시각, 병원.선희수는 초조하게 병실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골수 검사 성공률이 어느 정도일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친부모의 성공률이 아주 높다고 하지만 그것도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그녀와 민준혁 모두 검사해 봤었지만 두 사람 다 실패했다.그리고 안예지는 선희수가 낳은 딸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안지성은 벤치에 앉아 줄곧 침묵을 유지했다. 의사가 다가오자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선희수가 앞으로 나갔다.“의사 선생님, 어떤가요?”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완전히 적합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선희수는 당황했다. 그녀는 의사를 붙잡고 흥분해서 말했다.“완전히 적합한 건 아니라니요? 저랑 아이 아빠도 안 됐어요. 예지는 제 딸인데 왜 제 딸도 안 된다는 건가요?”그녀는 유일한 희망을 안고 안예지를 찾았지만 그 희망마저 부서졌다.하늘이 그녀에게 벌을 주는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 그녀의 업보였다. 그런데 그 벌을 받는 것이 왜 그녀가 아닌 걸까?의사는 곧바로 그녀를 위로했다.“사모님, 진정하세요. 의학적인 각도로 봤을 때
“네, 선생님이 책을 많이 읽으면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민서율은 미소를 지었고 안예지는 아이를 보았다. 겨우 11살짜리 남자아이가 병 때문에 입원했으면서도 공부하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안지성은 병실 문을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안예지는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아빠.”안예지는 시선을 내려뜨렸다.“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니?”“의사 선생님이 다시 한번 검사 받아보래요. 골수천자 방법으로요.”안예지의 대답에 안지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 방법은 아주 고통스러울 거야. 예지야, 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 아빠는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안예지는 병실 쪽을 보았고 병실 안 남자아이도 그녀를 보았다.*이틀 뒤, 강유이는 운동장 옆 큰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강유이는 민서율에게 장난감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민서율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강유이는 뺨을 긁적였다.“이상하네. 오빠가 잊은 걸까?”“천사 동생!”한 남자아이가 강유이를 향해 달려오더니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서율이 기다리지 마. 걔 아파서 입원했어.”강유이는 당황했다.“아파서 입원했다고요?”강유이는 민서율이 아프다고 했던 걸 기억했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그에게 건넸다.“그러면 저 대신 서율 오빠한테 돌려줘요. 엄마가 서율 오빠가 준 장난감 계속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다음번에 저한테도 장난감 생기면 오빠한테 빌려줄 거예요.”남자아이는 강유이에게서 비눗방울을 건네받았다. 민서율이 이렇게 유치한 물건을 사서 동생에게 놀라고 주다니?그의 다섯 살짜리 여동생도 비눗방울은 놀지 않았다. 인형 같은 걸 줘야 하는 게 아닐까?하지만 천사 동생의 나이에 아직도 인형을 가지고 놀까?*안예지는 골수천자를 통해 조혈모세포를 수집했고 그 뒤로 이틀 동안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밤에 잘 때도 아파서 깨어나기 일쑤였다.안지성은 딸이 무척 고통스러워하자 눈시울을 붉히며 가
“예지야, 미안하다...”선희수는 마음이 저렸다.“미안하단 말은 필요 없어요. 저희는 서로에게 빚진 게 없으니까요.”안예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한없이 덤덤한 표정이었다.이틀 뒤 안예지는 퇴원했고 안지성은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안예지는 회사에 한 번 가볼 셈이었지만 안지성이 그녀를 말렸다.안예지는 겨우 하루 쉬고 이튿날 바로 soul 주얼리로 향했다. 회사로 가는 길에 카페가 보였는데 정신이 좀 맑아지려고 커피 한 잔을 샀다.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안예지는 자신이 현금을 챙기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왠지 멋쩍었다.“죄송해요. 제가 지갑을 두고 왔네요. 일단 여기에 두고 돌아가서 지갑 가져올게요.”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저희 카페는 인터넷 뱅킹으로 결제 가능하세요.”“인터넷 뱅킹이요?”안예지는 당황했다. 그녀는 문득 송아영과 함께 쇼핑할 때 송아영이 휴대폰으로 결제한 사실을 떠올렸다.직원이 의아해했다.“모르세요? 지금 현금 쓰는 사람들 그렇게 많지 않아요. 대부분 휴대폰으로 결제하거든요. 본인 휴대폰이랑 계좌 연결하시면 결제할 수 있어요.”안예지는 입술을 짓씹었다.“제가... 그걸 안 해서요.”지금 인터넷 뱅킹이 유행하는 걸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한 직원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봤다.‘세상에, 지금 인터넷 뱅킹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휴대폰을 쥔 안예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할 때 손 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곁에서 튀어나왔다.“제가 대신 계산할게요. 얼마예요?”직원이 대답했다.“아메리카노 시키셔서 5,000원입니다.”안예지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선 늘씬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휴대폰으로 결제에 성공했다.곧이어 커피를 건네받은 그는 몸을 돌려 그것을 안예지에게 건넸다.“받으세요.”안예지는 당황했다. 눈앞의 남자는 병원 복도에서 휠체어에서 넘어진 어르신을 부축했었던 남자였다.안예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각공예 외에도 금은 형판 공예, 보석 절단, 액세서리 세팅, 연마 등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물론 3D, JCAD 소프트웨어 기술도 익혀야 해요.”강성연은 장갑을 꼈다.“예지 씨는 보석 디자인에 재능이 있어요. 이런 건 해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만약 안예지가 사고를 당하지 않고 음악 학원 합격 자격도 포기했더라면 그녀는 아마 보석 디자인 전공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보석 디자인 전공 수업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안예지는 테이블 위 도구들을 바라봤다.“직접 가르쳐주시려고요?”“난 예지 씨를 잘 키워보려고요. 예지 씨가 모든 기술을 익히게 되면 다른 디자이너들 몇 명 더 뽑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혼자 할 수 있을 거고요.”안예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열심히 배울게요.”*한 달 뒤, 겨울.강성연은 타지의 패션위크 행사에 초대되었다. 패션계 거물급 인사들 외에 유명한 연예인들도 있었다.강성연과 함께 레드카펫을 밟은 사람은 반크와 남여진이었다.강성연은 과감한 스타일의 레트로 스타일을 시도했다. 웨이브가 들어가 분위기 있는 머리카락은 옆으로 넘겼고, 새빨갛고 아름다운 입술과 입체적인 이목구비가 기자들의 카메라를 완전히 압도했다.강성연은 금속 단추로 된 남성용 블랙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의 얇은 망사 블랙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선이 강조되어 몸매를 돋보이게 했고 어깨와 목 근처의 검은색 아플리케 디자인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리고 검은색 레이스 장갑을 착용해 요염하면서도 멋졌다.그리고 그녀는 에메랄드 반지와 월계꽃 디자인의 목걸이를 착용했는데 독특하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패션계에서 유명한 부인이 남여진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강성연을 보며 말했다.“성연 씨가 착용한 주얼리 예쁘네요. 이런 스타일은 본 적 없는 것 같아요.”강성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이건 soul 브랜드에서 새로 출시한 맞춤 제작 상품이에요.”부인은 깜짝 놀랐다.“성연 씨가 디자인한 건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