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마루 창가 앞에 서서 각도를 조절해가며 마치 비밀요원처럼 열심히 남자를 관찰했다.사람마다 정탐하는 취미가 있는데, 그 상대가 성도윤이라면?렌즈 속 성도윤은 꼿꼿이 책상에 앉아 계약서 검토에 여념이 없었다. 입체적인 옆모습은 지나치게 우월하고 완벽해 마치 화보 모델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쳇, 계속 진지한 척한다고? 너도 사람인데 설마 하품도 안 하고 콧구멍도 안 파겠어?”여자는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마루 창가 앞에 서서 성도윤의 망가진 모습을 포착하려고 기다렸다.잠시 후, 성도윤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젠장!”차설아는 도둑질이라도 한 듯 마음이 켕겼다.워낙 자기애가 강한 사람인데, 만약 차설아가 망원경으로 자신을 훔쳐본 것을 알게 된다면 백 마디 말로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남자가 이미 걸음을 옮겼을 거라고 짐작한 차설아는 다시 고개를 내밀고 조심스럽게 남자의 모습을 찾았다.“응? 어디 갔지? 왜 갑자기 사라졌어?”차설아는 망원경을 집어 들고는 까치발을 했다가, 허리를 굽혔다가 하며 남자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다.“뭐 보는 거야?”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당연히 성변태 보는 거지!”차설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계속 망원경을 들고 까치발을 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맞은편 성도윤의 사무실을 보며 유치하게 말했다.“혼자 있을 때 코를 파는지 확인해야겠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흐트러지는 모습도 있어야 하잖아? 아니면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해?”“그렇게 궁금하면 내 앞에서, 가까이 보도록 허락하지.”남자의 나지막하고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홱 돌아섰다.성도윤이 긴 다리를 포개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의 의자에 기대어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망원경이 탁하고 땅에 떨어졌고, 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어디 쥐구멍 없나?
사무실에 남은 차설아는 어리둥절했고, 성도윤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다.“저게 무슨 말이야? 자손만당이라니?”차설아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설마, 결국 원이와 달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일까?만약 사실이라면 곧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지금은 성씨 가문과 싸울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으니 차설아는 속으로 불안했다.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그녀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그 누구도 그녀의 손에서 달이와 원이를 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여기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숨기지 마. 아이에 관한 일은 이미 알고 있어.”성도윤은 덤덤한 표정으로 핵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여자는 주먹을 꽉 쥐며 머리가 어지러웠다.“아이라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만약 가문을 이어줄 후손이 필요하다면 우수한 유전자를 물색해봐. 이미 이혼한 전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 상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성도윤은 여자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이 내 아이를 임신해서 나더러 책임지라고 일을 크게 만든 줄 알았지. 솔직히... 나도 아이를 가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야.”“지금 이게 다 무슨 얘기야?”차설아는 점점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남자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내가 당신 아이를 임신했다고?”“모르고 있었어?”성도윤은 진지하게 말했다.“파파라치가 쓴 내용, 당신이 제공한 소재 아니었어?”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파파라치? 어떤 내용?”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내 이미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소식을 여자에게 건넸다.“직접 확인해 봐.”차설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받아 뉴스를 보더니... 폭발해버렸다.“젠장, 어느 미친 파파라치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내가 언제 임신을 했고, 언제 당신에게 책임져달라고 울며 매달렸어! 셰익스피어도 이 정도로 꾸며내진 못해!”성도윤은 몸을 일으켜 조금씩 차설아에게 다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만약 이
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더 경계심을 가졌다.‘설마, 진짜 알게 된 거야?’하지만 남자가 분명히 밝히지 않은 이상, 그녀도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돌아서 나가려던 순간, 차설아의 시선은 칠색 유리병이 들어 있는 상자에 떨어졌다.“잠깐.”성도윤의 커다란 체구가 멈칫하더니,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지만, 여전히 오만한 모습을 유지하며 돌아보았다.“왜, 생각이 바뀌었어?”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희번덕거렸다.‘이 자식, 진짜 자기애가 흘러 넘친다니까!’“김칫국 마시지 마. 이 물건 가져가. 난 이제 필요 없어.”여자는 차갑게 상자를 성도윤 쪽으로 밀었다.성도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차가워지더니 온몸에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허허, 필요 없다고?”“정확히 말하면, 당신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아주 귀중한 물건인 것 같은데, 내가 진짜 받으면 당신이랑 영원히 끝나지 못하잖아.”차설아는 팔짱을 낀 채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사실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칠색 유리병이 성씨 가문이나 성도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씨 가문이나 성도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다.하지만, 그녀는 성도윤을 걱정해서 칠색 유리병을 돌려준다는 것을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남자가 자신을 냉담하고 무자비한 여자로 여기길 바랐다.역시, 이 말은 불씨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성도윤의 이성을 말끔히 불태웠다.그는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아 자신의 품으로 와락 껴안더니, 깊은 눈동자는 맹수처럼 차설아를 당장이라도 삼킬 듯 노려보았다.“차설아, 내가 그렇게 싫어? 고생을 자초하면서도 나랑 인연을 끊고 싶은 거야?”남자는 차갑고 위험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차설아는 두려워하지 않고 시종일관 이성적이고 평온한 모습으로 남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인연을 끊는 건, 당신도 원하던 바 아니야? 근데 지금은 왜 또 미쳐 날뛰는 건데?”“설마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남은 건
성도윤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가장 차갑고, 가장 무정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성도윤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을까?“성도윤, 지금... 장난하는 거지? 아니면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거야?”이 남자의 주량에 대해서 그녀도 겪어봤으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아무튼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전에 남자의 가장 냉담하고 무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차설아의 물음은 찬물처럼 순식간에 성도윤의 모든 열정을 식히고, 이성을 되찾아주었다.열정 넘치던 눈빛은 점점 서늘하게 변하더니 차갑게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차설아, 당신 마음은 돌로 만들었어? 당신은 정말 내가 본 가장 냉철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야!”“어디서 적반하장이야? 대체 누가 냉철하고 누가...”“상관없어!”성도윤은 차갑게 여자의 말을 끊더니 더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줄곧 고상하고 당당하던 성대 그룹의 대표가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지금 자세를 한껏 낮췄지만, 얻은 것은 의심과 조롱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엄이 눈앞의 여자에게 무참히 짓밟혔다고 느꼈다.그는 성도윤이다. 다시는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떠나려는 성도윤을 보고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이거 갖고 가!”성도윤은 여자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처리해.”남자가 사무실을 나서자, 문밖에는 한 무리의 직원들이 엎드려 있었다.방금 안에서 일어난 일을 그들은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협박했다.“감히 안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한다면 알아서 하세요.”직원들은 전전긍긍하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성도윤이 떠나고, 서윤이 대표로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갔다.차설아는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금 일로 인해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듯했다.그녀에게 성도윤의 ‘미친 광기’는 단지 작은 에피소드일 뿐,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
저녁,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갖고 아파트로 돌아왔다.방안은 시끌벅적했다. 미스터 Q는 두 아이를 데리고 게임을 하고 있었고 부엌에는 그녀에게 정교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두었다.“여긴 왜 왔어요?”차설아는 문을 닫으며 당연하다는 듯 남자에게 물었다.전보다 이 남자를 그렇게 배척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을 연 후에 그가 집에 있는 것이 안심되기도 했다.“제가 말했잖아요. 지금은 설아 씨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니 이 집안의 생활을 돌보는 건 당연한 거죠. 당신에게 따듯한 음식을 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건 제 의무에요.”미스터 Q는 두 아이와 게임을 하며 고개를 돌려 차설아에게 설명했다.그의 말투를 보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맞아요, 엄마.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가족이니까 당연히 같이 살아야죠.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게요... 오늘 Q 아빠가 유치원에 우리 데리러 왔어요. 친구들이 이렇게 키 크고 대단한 아빠가 있다고 저를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달이는 미스터 Q의 허벅지를 껴안고 통통한 작은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미스터 Q는 이미 달이의 마음을 완전히 앗아갔고, 자칫하면 차설아의 지위를 넘을지도 모른다.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만이 두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터 Q의 연기는 그녀보다 훨씬 뛰어났다. 완벽한 남편이자 슈퍼맨 아빠의 모습으로 한 치의 허점도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늉만 했으니 언젠가 두 아이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시간이 늦었어, 너희 둘 빨리 가서 자. 그래야 내일 유치원에 가지.”차설아는 따로 미스터 Q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신나게 놀고 있는 두 녀석에게 말했다.똑똑한 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달아, 우리는 이제 가서 자자. 그래야 아빠와 엄마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잖아?”원이의 말에 차설아는 왠지 난처해졌고,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쯧쯧, 애가 너무 똑똑하면 골치 아프다니까!’
미스터 Q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덤덤하게 말했다.분명 이 싸움의 패배자인데도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보아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인 모양이다.“에이, 말도 안 돼요!”차설아는 남자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다.“이 물건이 역사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면 믿겠지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니요. 판타지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아예 칠색 유리병을 신선으로 만들지 그래요?”“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사실이에요. 성도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물건을 설아 씨에게 줬다는 건, 자기 목숨을 맡긴 것과 같아요. 분명 어떤 조건을 내걸었을 것 같은데요?”미스터 Q는 예리하게 분석했다.“아니요, 따로 조건은 없었어요. 아마... 저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서, 자기 마음 편하려고 줬을지도 모르죠.”“제가 아는 성도윤은 자기반성 같은 건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데요? 그 오만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빚졌다는 마음을 갖겠어요?”“그건... 그럼 왜 저에게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줬죠?”“아직 설아 씨에게 마음이 남았나 보죠.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미스터 Q는 정곡을 찔렀다.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낮에 성도윤의 횡포한 고백이 떠올랐다.‘어쩌면 그 말들이 진심이었을까?’“그래서 설아 씨는 어쩔 생각이에요? 성도윤과 다시 시작할래요? 아니면 계속 나랑 연기할래요?”미스터 Q는 덤덤한 미소를 짓더니 여자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저랑 그 인간은 절대 다시 시작할 수 없어요. 성도윤이 아직 나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그래요?”미스터 Q의 미소가 조금 어두워지더니 또 물었다.“그럼 저랑 계속 연기하겠다는 거네요?”“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요.”차설아는 거절하지 않았다.사실, 그동안 미스터 Q와 알고 지내면서 점점 그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만약 아이들에게 꼭 아빠가 필요하다면, 이 남자야
미스터 Q는 긴 손가락을 마주 꼬더니 느릿느릿 말했다.“만약 언젠가 성도윤과 양육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설아 씨의 가장 큰 약점이 뭐라고 생각해요?”“저는 약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차설아의 확신에 찬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두 아이 모두 제 손으로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성도윤은 양육권을 넘볼 자격이 없어요.”“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확실히 설아 씨 손에서 양육권을 빼앗을 능력이 없겠죠. 하지만 상대는 성도윤이에요. 그 뒤에는 거대한 성대 그룹이 있고, 사법기관부터 언론까지 모두 성도윤 편을 들어줄 거예요. 만약 그때도 백 프로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은데요?”여자는 주먹을 꽉 쥐더니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백 프로 확실한 대응책이 뭐죠?”“방금 제가 물은 대로, 만약 언젠가 성도윤과 양육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설아 씨의 가장 큰 약점은 경제 조건이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환경이라고 생각해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해가 되지 않네요.”“아이에게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성장환경이 필요해요. 만약 두 아이가 성도윤을 따른다면, 아이에게는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기는 거고, 또 성씨 가문 전체의 사랑을 독차지할 거예요...”“하지만 차씨 가문에는 설아 씨 혼자만 남았잖아요. 결손가정은 아이의 성장에 아주 불리해요.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법정에 서게 된다면 설아 씨는 아주 불리해질 거예요.”남자는 차근차근 분석했다.그의 말은 아주 잔혹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확신에 찼던 차설아의 눈빛은 조금씩 어두워졌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그러면 뭐요? 아이들은 저랑 정이 더 많으니 절대 절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도 아주 강한 변호사팀이 있으니 법정 다툼은 전혀 두렵지 않아요.”“아주 순진하네요...”미스터 Q는 피식 웃었다.“아시다시피, 여덟 살 미만인 아동은 누구를 따를지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변호사팀이라면
생각해보니 유일한 방법은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고, 온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진짜 미스터 Q와 가짜 혼인신고라도 해야 할까?이튿날.오랫동안 고민한 차설아는 끝내 칠색 유리병을 성도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비록 미스터 Q가 이 물건을 너무 허황하게 말해서 꼭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명연장 효과는 분명 겁주기 위함일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만약 이 물건이 없어 성도윤의 몸에 진짜 문제라도 생긴다면 감히 그 책임을 떠맡을 수 없었다.차설아가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한창 일할 시간이었으니, 성도윤도 아마 지금쯤 회사에서 일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솔직히, 어제 성도윤이 그녀에게 고백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고 나니, 지금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남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 시간에 성씨 저택으로 향했다.마당에서 채소를 심고 꽃에 물을 주던 성주혁은 멀리서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는 차설아를 보고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설아야, 또 날 보러 온 거냐? 내가 새로 심은 토마토가 마침 빨갛게 익었어. 네가 때맞춰 잘 왔어!”성주혁은 회사 일에서 물러난 후로부터 각종 꽃과 채소를 심는 데 푹 빠졌다. 매번 결과물들을 보며 큰 성취감을 느꼈다.그는 방금 딴 방울토마토를 바구니에 담았다. 하나같이 통통하고 불그스름하여 보기만 해도 먹음직했다.차설아는 사양하지 않고 토마토 한 알을 집어 들고 입안에 넣었다.“음, 아주 맛있어요. 밖에서 파는 것보다 백 배 더 맛있네요!”“당연하지, 이건 순 유기농이야. 할아버지가 직접 호미로 흙을 파면서 심었거든. 맛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가도 만점이지!”성주혁은 땀을 닦으며 매우 자랑스럽게 말했다.원이와 달이도 방울토마토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염치 불구하고 말했다.“할아버지, 저 따서 집에 가져가도 될까요?”“그래, 마음대로 따거라. 너희 같은 젊은이들을 먹이려고 심은 거니 마음껏 가져가!”한참을 더 인사를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봐!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완전히 부숴버릴 거라고!”서은아는 분을 못 이겨 울먹이더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차설아가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엄마, 엄청 멋졌어요! 나쁜 사람을 한 방에 쫓아내다니... 완전 슈퍼우먼이었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달이도 커서 엄마처럼 슈퍼우먼으로 될 거예요!”차설아는 달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슈퍼 우먼은 무슨... 우리 달이는 그냥 예쁜 공주님이면 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진 말되 누군가를 두려워하진 마.”원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려 한 거라고요! 뺨 몇 대만 맞고 도망가게 내버려두다니... 너무 쉽게 놔준 거 아니에요?”“원이야, 오늘 충분히 화풀이했잖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해.”차설아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줌마 아무리 꿍꿍이를 가지고 왔다 해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지 좀 삐뚤어진 것뿐이지.”“사실 저 아줌마도 피해자이긴 해. 불쌍한 사람이거든. 오늘 받은 교훈이면 충분할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다독였다.솔직히 말해서 서은아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수단이 좀 극단적일 뿐이지 말이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진심으로 성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서은아같이 대놓고 싸움을 거는 유형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뒤에서 몰래 함정을 파고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임
겨우 눈을 뜬 서은아는 원이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지난 일까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망할 꼬맹이가... 또 너야? 지난번엔 날 강에 빠뜨릴 뻔하더니 이번엔 물총까지 쏘면서 날 도발한다고? 죽고 싶어?”서은아는 이를 악물고 원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녀는 물을 또 한 번 맞았다.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자기가 어른인 것처럼 경고했다.“아줌마는 우리 집 손님이 아니에요. 여긴 아줌마를 환영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어린놈이 감히!”서은아는 자기가 어린아이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원이의 민첩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아무리 쫓아다녀도 그녀는 원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풀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이 입안 가득 들어가고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원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래도 여자잖아.”“엄마,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먼저 덤벼든 거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나쁜 놈이죠! 완전 악당이에요! 지난번에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나쁜 사람도 봐줘야 하나요?”원이의 입이 뿌루퉁해졌다.차설아만 옆에 없었더라면 원이는 벌써 ‘필살기’까지 써버렸을 것이다.“뭐라고? 널 호수에 빠뜨렸다고?”차설아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은아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원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말 어린 애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서은아가 어릴 때부터 삐뚤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어른들끼리의 다툼에 아이를 끌어들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서은아는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입 안은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글썽하
“내가 말했었잖아! 도윤이만 가질 수만 있다면 망가뜨려도 상관없다고. 모든 걸 잃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때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거야. 그러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지.”서은아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 웃기지도 않네!”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윤 씨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쪽이 부순다고 해서 부서질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리고 도윤 씨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도윤 씨가 대기업 대표님이든, 그저 평범한 사람이든 나랑 아이들은 절대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차설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야. 만약 도윤이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된다면? 도윤이와 엮이면 너까지 불행해지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떠나지 않을 자신 있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네까짓 게 어떻게 장담해? 사람이 발밑으로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면 도윤이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야. 결국 모든 사람이 도윤이를 외면할 거고 도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첫째, 그럴 리 없어요. 둘째, 그렇게 될 때까지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무너지면 제가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비록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저한테도 나름대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데 부족할 게 없을걸요?”차설아가 말하는 ‘작은 회사’는 신흥 IT 강자인 천신 그룹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KCL 그룹이었다.하지만 두 그룹 모두 차설아의 소유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서은아도 그녀 앞에서 저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만약 서은아가 알게 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었다.“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겨우 작은 회사라고 말이야. 그걸로 성대 그룹 같은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꿈도 크네. 만약 진짜 도윤이를 위한다면 헤어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