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가장 차갑고, 가장 무정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성도윤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을까?“성도윤, 지금... 장난하는 거지? 아니면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거야?”이 남자의 주량에 대해서 그녀도 겪어봤으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아무튼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전에 남자의 가장 냉담하고 무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차설아의 물음은 찬물처럼 순식간에 성도윤의 모든 열정을 식히고, 이성을 되찾아주었다.열정 넘치던 눈빛은 점점 서늘하게 변하더니 차갑게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차설아, 당신 마음은 돌로 만들었어? 당신은 정말 내가 본 가장 냉철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야!”“어디서 적반하장이야? 대체 누가 냉철하고 누가...”“상관없어!”성도윤은 차갑게 여자의 말을 끊더니 더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줄곧 고상하고 당당하던 성대 그룹의 대표가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지금 자세를 한껏 낮췄지만, 얻은 것은 의심과 조롱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엄이 눈앞의 여자에게 무참히 짓밟혔다고 느꼈다.그는 성도윤이다. 다시는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떠나려는 성도윤을 보고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이거 갖고 가!”성도윤은 여자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처리해.”남자가 사무실을 나서자, 문밖에는 한 무리의 직원들이 엎드려 있었다.방금 안에서 일어난 일을 그들은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협박했다.“감히 안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한다면 알아서 하세요.”직원들은 전전긍긍하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성도윤이 떠나고, 서윤이 대표로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갔다.차설아는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금 일로 인해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듯했다.그녀에게 성도윤의 ‘미친 광기’는 단지 작은 에피소드일 뿐,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
저녁,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갖고 아파트로 돌아왔다.방안은 시끌벅적했다. 미스터 Q는 두 아이를 데리고 게임을 하고 있었고 부엌에는 그녀에게 정교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두었다.“여긴 왜 왔어요?”차설아는 문을 닫으며 당연하다는 듯 남자에게 물었다.전보다 이 남자를 그렇게 배척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을 연 후에 그가 집에 있는 것이 안심되기도 했다.“제가 말했잖아요. 지금은 설아 씨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니 이 집안의 생활을 돌보는 건 당연한 거죠. 당신에게 따듯한 음식을 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건 제 의무에요.”미스터 Q는 두 아이와 게임을 하며 고개를 돌려 차설아에게 설명했다.그의 말투를 보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맞아요, 엄마.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가족이니까 당연히 같이 살아야죠.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게요... 오늘 Q 아빠가 유치원에 우리 데리러 왔어요. 친구들이 이렇게 키 크고 대단한 아빠가 있다고 저를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달이는 미스터 Q의 허벅지를 껴안고 통통한 작은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미스터 Q는 이미 달이의 마음을 완전히 앗아갔고, 자칫하면 차설아의 지위를 넘을지도 모른다.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만이 두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터 Q의 연기는 그녀보다 훨씬 뛰어났다. 완벽한 남편이자 슈퍼맨 아빠의 모습으로 한 치의 허점도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늉만 했으니 언젠가 두 아이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시간이 늦었어, 너희 둘 빨리 가서 자. 그래야 내일 유치원에 가지.”차설아는 따로 미스터 Q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신나게 놀고 있는 두 녀석에게 말했다.똑똑한 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달아, 우리는 이제 가서 자자. 그래야 아빠와 엄마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잖아?”원이의 말에 차설아는 왠지 난처해졌고,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쯧쯧, 애가 너무 똑똑하면 골치 아프다니까!’
미스터 Q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덤덤하게 말했다.분명 이 싸움의 패배자인데도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보아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인 모양이다.“에이, 말도 안 돼요!”차설아는 남자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다.“이 물건이 역사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면 믿겠지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니요. 판타지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아예 칠색 유리병을 신선으로 만들지 그래요?”“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사실이에요. 성도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물건을 설아 씨에게 줬다는 건, 자기 목숨을 맡긴 것과 같아요. 분명 어떤 조건을 내걸었을 것 같은데요?”미스터 Q는 예리하게 분석했다.“아니요, 따로 조건은 없었어요. 아마... 저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서, 자기 마음 편하려고 줬을지도 모르죠.”“제가 아는 성도윤은 자기반성 같은 건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데요? 그 오만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빚졌다는 마음을 갖겠어요?”“그건... 그럼 왜 저에게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줬죠?”“아직 설아 씨에게 마음이 남았나 보죠.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미스터 Q는 정곡을 찔렀다.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낮에 성도윤의 횡포한 고백이 떠올랐다.‘어쩌면 그 말들이 진심이었을까?’“그래서 설아 씨는 어쩔 생각이에요? 성도윤과 다시 시작할래요? 아니면 계속 나랑 연기할래요?”미스터 Q는 덤덤한 미소를 짓더니 여자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저랑 그 인간은 절대 다시 시작할 수 없어요. 성도윤이 아직 나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그래요?”미스터 Q의 미소가 조금 어두워지더니 또 물었다.“그럼 저랑 계속 연기하겠다는 거네요?”“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요.”차설아는 거절하지 않았다.사실, 그동안 미스터 Q와 알고 지내면서 점점 그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만약 아이들에게 꼭 아빠가 필요하다면, 이 남자야
미스터 Q는 긴 손가락을 마주 꼬더니 느릿느릿 말했다.“만약 언젠가 성도윤과 양육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설아 씨의 가장 큰 약점이 뭐라고 생각해요?”“저는 약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차설아의 확신에 찬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두 아이 모두 제 손으로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성도윤은 양육권을 넘볼 자격이 없어요.”“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확실히 설아 씨 손에서 양육권을 빼앗을 능력이 없겠죠. 하지만 상대는 성도윤이에요. 그 뒤에는 거대한 성대 그룹이 있고, 사법기관부터 언론까지 모두 성도윤 편을 들어줄 거예요. 만약 그때도 백 프로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은데요?”여자는 주먹을 꽉 쥐더니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백 프로 확실한 대응책이 뭐죠?”“방금 제가 물은 대로, 만약 언젠가 성도윤과 양육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설아 씨의 가장 큰 약점은 경제 조건이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환경이라고 생각해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해가 되지 않네요.”“아이에게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성장환경이 필요해요. 만약 두 아이가 성도윤을 따른다면, 아이에게는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기는 거고, 또 성씨 가문 전체의 사랑을 독차지할 거예요...”“하지만 차씨 가문에는 설아 씨 혼자만 남았잖아요. 결손가정은 아이의 성장에 아주 불리해요.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법정에 서게 된다면 설아 씨는 아주 불리해질 거예요.”남자는 차근차근 분석했다.그의 말은 아주 잔혹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확신에 찼던 차설아의 눈빛은 조금씩 어두워졌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그러면 뭐요? 아이들은 저랑 정이 더 많으니 절대 절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도 아주 강한 변호사팀이 있으니 법정 다툼은 전혀 두렵지 않아요.”“아주 순진하네요...”미스터 Q는 피식 웃었다.“아시다시피, 여덟 살 미만인 아동은 누구를 따를지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변호사팀이라면
생각해보니 유일한 방법은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고, 온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진짜 미스터 Q와 가짜 혼인신고라도 해야 할까?이튿날.오랫동안 고민한 차설아는 끝내 칠색 유리병을 성도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비록 미스터 Q가 이 물건을 너무 허황하게 말해서 꼭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명연장 효과는 분명 겁주기 위함일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만약 이 물건이 없어 성도윤의 몸에 진짜 문제라도 생긴다면 감히 그 책임을 떠맡을 수 없었다.차설아가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한창 일할 시간이었으니, 성도윤도 아마 지금쯤 회사에서 일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솔직히, 어제 성도윤이 그녀에게 고백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고 나니, 지금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남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 시간에 성씨 저택으로 향했다.마당에서 채소를 심고 꽃에 물을 주던 성주혁은 멀리서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는 차설아를 보고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설아야, 또 날 보러 온 거냐? 내가 새로 심은 토마토가 마침 빨갛게 익었어. 네가 때맞춰 잘 왔어!”성주혁은 회사 일에서 물러난 후로부터 각종 꽃과 채소를 심는 데 푹 빠졌다. 매번 결과물들을 보며 큰 성취감을 느꼈다.그는 방금 딴 방울토마토를 바구니에 담았다. 하나같이 통통하고 불그스름하여 보기만 해도 먹음직했다.차설아는 사양하지 않고 토마토 한 알을 집어 들고 입안에 넣었다.“음, 아주 맛있어요. 밖에서 파는 것보다 백 배 더 맛있네요!”“당연하지, 이건 순 유기농이야. 할아버지가 직접 호미로 흙을 파면서 심었거든. 맛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가도 만점이지!”성주혁은 땀을 닦으며 매우 자랑스럽게 말했다.원이와 달이도 방울토마토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염치 불구하고 말했다.“할아버지, 저 따서 집에 가져가도 될까요?”“그래, 마음대로 따거라. 너희 같은 젊은이들을 먹이려고 심은 거니 마음껏 가져가!”한참을 더 인사를
“알겠어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칠색 유리병과 신선한 방울토마토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저택 거실로 들어섰다.성도윤의 침실은 2층에 있었다. 보통 그의 방에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차설아는 방울토마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남자의 침실로 갔다.처음에는 방문 앞에 놓고 가려 했지만,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밖에 두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몇 번을 망설인 끝에 그녀는 결국 방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그녀는 문손잡이를 비틀어 보았다. 뜻밖에도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쉽게 스르륵 열렸다.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비틀어 연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안에서 연 것이다.방 안에서는 우뚝 서 있는 성도윤이 보였다. 머리가 촉촉한 그는 윗옷을 입지 않아 근육이 한눈에 보였다. 아래에는 대충 회색 캐주얼 바지를 걸친 그의 모습은 섹시하면서도 소탈한 느낌을 주어 그야말로 매력적이었다.차설아는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즉시 돌아서고는 말을 더듬었다.“미, 미안해. 당신이 집에 있는 줄 몰랐어. 난 아무것도 못 봤어!”금방 샤워를 마친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차설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잘생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여전히 빙산처럼 차가웠다.“왜 왔어?”남자는 퉁명스럽게 물었다.여전히 차설아에게 화가 나 있고, 그녀가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그도 그럴 것이지, 어딜 가나 오만하고 당당하던 프린세스 성도윤이 그런 비굴한 고백을 하고, 또 무자비하게 거절당했으니 마음이 불편한 건 당연했다. 가능하다면 눈앞의 여자를 묶어 우주로 영원히 보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해하지 마. 칠색 유리병을 돌려주려고 왔으니까. 마침 당신이 집에 있으니 직접 돌려줄게. 앞으로 당신이 후회하고 날 찾아와서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해.”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에게 등을 돌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당당하게 말했다.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이 보물을 돌려준다는 것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은 덤덤한 눈빛으로 별말
남자의 소중한 부위는 가장 취약했기에 상처를 입으면 그 심각성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만약 성도윤이 이거로 인해 생육 능력이 저하된다면 반드시 자기를 찾아 따질 것이니 차설아는 절대 그 책임을 질 수 없었다. 방심하면 자칫 성도윤에게 당할 수 있으니 반드시 단단히 정신을 차려야 했다.그 모습을 본 성도윤은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여자의 손목을 꼭 잡고는 차갑게 말했다.“차설아, 그만하지? 나를 언제까지 능욕할 셈이야?”“뭐? 내가 언제 당신을 능욕했다고 그래? 방금 세게 맞았으니 혹시나 모를 경우를 대비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면 좋잖아. 본인이 자기 몸을 아껴야지. 내가 좋은 마음으로 의사를 불러주겠다는데 왜 화를 내? 정말 나의 호의를 몰라주네. 나도 당신이 유명한 회사 대표님이라는 걸 알고 있어. 체면을 차리고 싶겠지. 병원에서 그 부위를 검사받는 게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래서 내가 익명으로 도와주겠다는데 왜 내가 당신을 능욕하고 있다고 생각해? 난 분명을 당신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차설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허,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분노의 성도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는 손쉽게 여자를 방으로 끌어들인 다음 방문을 걸어 잠갔다.차설아는 일이 생각 밖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껴 어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왜 이래? 둘밖에 없는데 문은 왜 잠가?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우리를 오해할 거라고.”“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뭐 어때. 크게 달라질 거 있을까?’성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깊은 눈망울로 품 안에 안긴 여자를 바라봤다.“도윤 씨 그만해. 내가 오늘 당신에게 칠색 유리병을 준 것도 당신이랑 거리를 두기 위해서야. 그런데 이러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당신...”“너무 늦었어.”성도윤은 인내심을 잃었다. 그는 평소의 도도한 모습과는 다르게 거칠게 차설아를 끌어안고는 2미터가 넘는 큰 침대로 곧장 향했다.“당신 나
“앞으로 정말 거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생각이면, 어디 한 번 해봐.”차설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발로 성도윤의 그 부위를 향해 걷어차려고 했다.“내가 못 할 줄 알아?”성도윤은 차설아의 협박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깊은 눈망울의 그는 차설아의 빨간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부을 셈이었다.“안돼!”차설아는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성도윤의 입술은 끝내 다가오지 않았다.“나 성도윤이 여자라면 안 가리고 다 덮치는 사람인 줄 알아?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 이제 가.”성도윤이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차설아에게 더는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마치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보면 스스로 치욕을 떠안는다는 것처럼 말이다.차설아도 드디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왠지 모르게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도 침대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떠나기 전, 그녀는 남자의 도도한 뒷모습을 보더니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설아야, 물건은 잘 갖다줬어?”차설아가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 정원에서 돌아온 성주혁과 마주쳤다. 그리고 옆에는 그를 부축하고 있는 서은아도 있었다.“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도윤이랑 이혼한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서은아는 성도윤의 방에서 나온 차설아를 보더니 마치 남편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아내처럼 마구 화를 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가 이 집 여주인인 줄 알 것이다.차설아도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 위에서 아래층에 있는 서은아를 내려다봤다.“이혼한 사이면 서로 방에 드나들 수 없다는 규정이 있나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이혼한 남자와 거리를 둬야 하는 거 아니에요?”“뭐?”서은아는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어 성주혁의 팔을 꼭 잡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저 사람 좀 봐요. 어떻게 저렇게 매너가 없을 수 있죠? 저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요. 그러면 이따 올릴 거니까 일단 로그인해 주세요.”’박서영이 핸드폰을 건네면서 차설아더러 자기 SNS 계정에 로그인하라고 했다.핸드폰을 받아쥔 차설아는 매우 협조적으로 SNS 계정에 로그인했다.구조를 요청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박서영도 차설아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고, 다소 놀라면서 말했다.“생각보다 자기 눈을 내놓을 만큼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이 당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거군요.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저에게 주는 칭찬이에요?”차설아가 박서영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싫어할 뿐이에요.”“저희 도련님께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도련님이 계속 바보 같이 지내는 것을 두고볼수 없어요. 박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은 결국 도련님만 겪는 거잖아요? 이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는 도련님께서 좀 더 냉정해져서 설아 씨를 곁에 뒀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연애의 신 같은 건 도련님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박서영은 어릴 적부터 성진 부모의 교육을 받아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며, 성진을 위해 무조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성진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중에서 배회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은 완전히 흑화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착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는 심연에 빠질 뿐이다.이번에는 박서영이 한눈파는 사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박서영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때 냉혹하고 교활하며 결단력 있는 성진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차설아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박서영에게 물었다.“그동안 성진은 어떻게 지냈나요?”“시각장애인이 뭘 어떻게 지냈겠어요.”박서영은 고개를 저으며
박서영은 그녀를 믿지 못하겠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기꺼이 두 눈을 내놓을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명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제가 성진한테 빚진 걸 갚는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어요.”차설아가 말했다.“저를 못 믿겠다면 제가 무사하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다만 그때 가서 일이 커지면 알아서 처리하세요.”거짓말할 마음도 없는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항상 성진의 헌신 덕분에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꼈고, 가끔 즐거울 때도 불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이 기간에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어떤 어둠 속에 처해있을지, 어떤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원수의 손에 잡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빚을 한 번에 갚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사하다고 전할 건데요?”박서영은 차설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다.“SNS에 올리면 되죠.”차설아가 웃으면서 말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SNS를 올릴 마음이 있겠어요? 제가 SNS를 올려버리면 적어도 제가 안전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SNS만 올리게요?”박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SNS면 충분해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성철도, 배경윤도, 선우 시원도 각자 바빴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쓸 새도 없었다.이럴 때 SNS를 올리면 최소한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좋아요. SNS 올리는 것만은 허락해 줄게요.”박서영이 여러 번 고민
“하하. 성도윤 씨랑 데이트하고, 선우가문의 도련님과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고, 배씨 가문 도련님과 술 마시는 시간은 있으면서 저희 도련님을 찾을 시간은 없었나 보죠? 저희 도련님을 잊어버릴 정도로 바빴나 봐요.”서영이 흥분한 나머지 차설아의 목을 직접 움켜잡으면서 말했다.“그거 알아요? 당신이 성도윤 씨랑 얽히고설켜 있을 때, 저희 도련님은 좌절감에 스스로 인생을 끝내려고 했어요. 손목에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아무리 칼날을 숨겨봤자 어떻게든 찾더라고요. 그렇게 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약해빠져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요. 알아요?”차설아는 저항하지도 않고 박서영이 자기 목을 조르는 대로 놔두었다.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의 두 눈에는 핏줄이 보이기 시작했다.“흥. 절대로 당신이 쉽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박서영은 그제야 차설아를 놓아주며 차갑게 말했다.“당신한테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이 저택으로 데려온 거예요.”“켁! 켁! 켁!”차설아는 잠깐의 질식 때문에 기침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박서영에게 물었다.“제가 어떻게 죗값을 치르기를 원해요?”“아주 간단해요. 저희 도련님의 시력을 돌려주면 돼요.”박서영은 앞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동안 저는 도련님을 위해 거부반응이 없고 잘 맞는 한 쌍의 눈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설아 씨의 건강 검진 데이터를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아주 특별한 두 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마침 저희 도련님한테 빚진 것도 있으니까, 설아 씨의 눈을 저희 도련님의 눈과 바꾸는 거 어렵지 않겠죠?”차설아는 박서영의 최종목적을 듣고 침묵하고 말았다.“제 눈이 정말 성진한테 맞나요?”그때 성도윤이 실명했을 때도 눈을 물색하고 다녔는데 오직 혈연관계가 있는 성진의 눈만 거부반응이 없었다.그때는 성도윤이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성진을 신경 쓰지도 못했다.하지만 마음의 빚 때문에 계속 숨이 안 쉬어졌다.만약 자기 눈으로 성진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마음의 위로 때문이라
차설아는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온통 흰색 인테리어인 낯선 이곳은 영안실에 온 기분이었다.“드디어 깨셨군요, 약효가 너무 강해서 무려 사흘 동안 혼수상태였어요. 이러다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요...”창가에서 한 여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는 생과 사가 그저 자거나 깨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경계 태세로 창가를 바라보던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당신이었어요?”그날 밤 병원에서, 몰래 차설아의 병실로 들어간 그녀였다.“저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네요. 영광이에요.”박서영은 창가에 앉아 꽃다발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놓인 꽃병에는 이제 막 정원에서 따온 해바라기가 꽂혀있었다.박서영은 황금빛으로 만개한 해바라기 줄기를 비스듬히 잘라 하나씩 예쁘게 꽃병에 꽂아 넣었다.“저희 주인님께서는 설아 씨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해바라기라면서 정원에 해바라기를 심으라고 했어요. 이제는 만개했는데 볼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마치 다른 사람한테 보이지 않는 주인님의 마음처럼 말이에요.”이때 박서영은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꽃가지를 단단히 잘라버렸다.“주인님이라 하면 성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차설아는 사고가 날카로운 사람이라 바로 상대방을 추측해 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일편단심이면서 실명한 사람은 성진뿐이었다.“도련님을 아직 기억하고 계셔서 다행이네요. 도련님 정성이 헛되지 않았네요.”박서영은 차설아가 성진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나마 그녀를 향한 증오가 줄어드는 듯했다.“정말 성진이에요?”차설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이 무기력해 마치 마비된 것처럼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박서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저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마취제 때문에 잠깐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이니까요.”차설아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일어나고 싶어
진찬영은 배경윤에게 핸드폰을 건네면서 이 둘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고마워요. 찬영 오빠는 역시 최고예요.”배경윤은 배시시 웃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차설아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정말 제가 좋다면 이제는 찬영 오빠라고 부르지 마요...”진찬영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찬영 씨라고 불러요.”“아, 그게...”배경윤은 진찬영의 갑작스러운 감정변화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심지어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찬영 오빠는 팬분들이 불러주는 호칭인데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 이제부터는 찬영 씨라고 부르는 거 어때요?”“알았어요. 찬영 씨...”호칭을 바꿔 부른 배경윤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왜 이렇게 부끄럽지?’역시 호칭은 알게모르게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지 설명할 수 있었다.찬영 오빠라고 부를 때에는 팬이 연예인에 대한 애정으로 별로 부끄럽지 않았는데 찬영 씨라고 부르니 확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옆에 있던 사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지금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거예요?”지금 사도현이 비꼬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느낄수 있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 보기 싫으면 나가든가.”배경윤의 말을 비수처럼 심장에 박혔고, 사도현의 체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흥! 누가 설아에 대해 나쁜 말을 하라고 했어?’배경윤은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해서 무응답 상태였다. 반복해서 네다섯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무슨 일이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뭔가 잘못됐어.”비경윤은 불안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지금쯤 병원에 있어야 하는 설아는 원래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언제나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분명 무슨 일이 있어!’배경윤이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나려 한다.“제발 가만히 있어!”사도현이 다시 그녀를 침대에 눕히면서 말했다.“설아가 어린애야? 실력도 좋은데 무슨 일이 있겠어. 다른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두세 시간 뒤에요.”진찬영이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모든 독소를 제거하려면 세 시간 후에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물을 마시면 안 돼요.”“아직 시간이 많네요...”배경윤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제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설아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거든요.”사도현이 배경윤을 다시 침대에 눕히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너나 잘 챙겨. 설아를 챙기는 사람은 많고도 많아.”“누군데? 설마 너의 그 쓰레기 같은 친구 성도윤은 아니지?”배경윤이 무례하게 반박했다.“난 그 자식이 방해할까 봐 걱정돼서 설아랑 계속 연락하려고 하는 거야.”사도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도윤이 형이 대체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그래?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그 두 사람은 딱봐도 재능과 미모를 갖춘 천생연분인데, 그냥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잖아. 우리 도윤이 형을 바람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지?”“그 사람이 바람둥이 아니면 누가 바람둥이인데!”배경윤은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사도현과 따지려고 했다.“혼인 중에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겨우 설아 마음을 되돌리더니 또 다른 재벌 딸과 약혼하고. 이게 바람둥이가 아니면 뭔데?”“설아도 너의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요즘에는 선우 가문 도련님과도 뜨겁게 보내더니. 그리고 도윤이 형은 왜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실명하고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설아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야?”“그건 그냥 사고일 뿐인데 설아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원망할 거면 하느님을 원망해. 누가 그런 악행을 많이 저지르라고 했어. 하느님도 노해서 가만두지 않은 거지.”“배경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한테 막말은 해도 도윤이 형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내가 뭘 어쨌다고? 너도 방금 우리 설아한테 뭐라고 했잖아!”두 사람은 마치 싸움닭처럼 감정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이것은 두 사람이 계속 다투게 되는 주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