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칠색 유리병과 신선한 방울토마토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저택 거실로 들어섰다.성도윤의 침실은 2층에 있었다. 보통 그의 방에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차설아는 방울토마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남자의 침실로 갔다.처음에는 방문 앞에 놓고 가려 했지만,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밖에 두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몇 번을 망설인 끝에 그녀는 결국 방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그녀는 문손잡이를 비틀어 보았다. 뜻밖에도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쉽게 스르륵 열렸다.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비틀어 연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안에서 연 것이다.방 안에서는 우뚝 서 있는 성도윤이 보였다. 머리가 촉촉한 그는 윗옷을 입지 않아 근육이 한눈에 보였다. 아래에는 대충 회색 캐주얼 바지를 걸친 그의 모습은 섹시하면서도 소탈한 느낌을 주어 그야말로 매력적이었다.차설아는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즉시 돌아서고는 말을 더듬었다.“미, 미안해. 당신이 집에 있는 줄 몰랐어. 난 아무것도 못 봤어!”금방 샤워를 마친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차설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잘생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여전히 빙산처럼 차가웠다.“왜 왔어?”남자는 퉁명스럽게 물었다.여전히 차설아에게 화가 나 있고, 그녀가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그도 그럴 것이지, 어딜 가나 오만하고 당당하던 프린세스 성도윤이 그런 비굴한 고백을 하고, 또 무자비하게 거절당했으니 마음이 불편한 건 당연했다. 가능하다면 눈앞의 여자를 묶어 우주로 영원히 보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해하지 마. 칠색 유리병을 돌려주려고 왔으니까. 마침 당신이 집에 있으니 직접 돌려줄게. 앞으로 당신이 후회하고 날 찾아와서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해.”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에게 등을 돌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당당하게 말했다.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이 보물을 돌려준다는 것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은 덤덤한 눈빛으로 별말
남자의 소중한 부위는 가장 취약했기에 상처를 입으면 그 심각성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만약 성도윤이 이거로 인해 생육 능력이 저하된다면 반드시 자기를 찾아 따질 것이니 차설아는 절대 그 책임을 질 수 없었다. 방심하면 자칫 성도윤에게 당할 수 있으니 반드시 단단히 정신을 차려야 했다.그 모습을 본 성도윤은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여자의 손목을 꼭 잡고는 차갑게 말했다.“차설아, 그만하지? 나를 언제까지 능욕할 셈이야?”“뭐? 내가 언제 당신을 능욕했다고 그래? 방금 세게 맞았으니 혹시나 모를 경우를 대비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면 좋잖아. 본인이 자기 몸을 아껴야지. 내가 좋은 마음으로 의사를 불러주겠다는데 왜 화를 내? 정말 나의 호의를 몰라주네. 나도 당신이 유명한 회사 대표님이라는 걸 알고 있어. 체면을 차리고 싶겠지. 병원에서 그 부위를 검사받는 게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래서 내가 익명으로 도와주겠다는데 왜 내가 당신을 능욕하고 있다고 생각해? 난 분명을 당신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차설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허,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분노의 성도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는 손쉽게 여자를 방으로 끌어들인 다음 방문을 걸어 잠갔다.차설아는 일이 생각 밖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껴 어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왜 이래? 둘밖에 없는데 문은 왜 잠가?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우리를 오해할 거라고.”“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뭐 어때. 크게 달라질 거 있을까?’성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깊은 눈망울로 품 안에 안긴 여자를 바라봤다.“도윤 씨 그만해. 내가 오늘 당신에게 칠색 유리병을 준 것도 당신이랑 거리를 두기 위해서야. 그런데 이러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당신...”“너무 늦었어.”성도윤은 인내심을 잃었다. 그는 평소의 도도한 모습과는 다르게 거칠게 차설아를 끌어안고는 2미터가 넘는 큰 침대로 곧장 향했다.“당신 나
“앞으로 정말 거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생각이면, 어디 한 번 해봐.”차설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발로 성도윤의 그 부위를 향해 걷어차려고 했다.“내가 못 할 줄 알아?”성도윤은 차설아의 협박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깊은 눈망울의 그는 차설아의 빨간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부을 셈이었다.“안돼!”차설아는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성도윤의 입술은 끝내 다가오지 않았다.“나 성도윤이 여자라면 안 가리고 다 덮치는 사람인 줄 알아?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 이제 가.”성도윤이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차설아에게 더는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마치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보면 스스로 치욕을 떠안는다는 것처럼 말이다.차설아도 드디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왠지 모르게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도 침대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떠나기 전, 그녀는 남자의 도도한 뒷모습을 보더니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설아야, 물건은 잘 갖다줬어?”차설아가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 정원에서 돌아온 성주혁과 마주쳤다. 그리고 옆에는 그를 부축하고 있는 서은아도 있었다.“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도윤이랑 이혼한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서은아는 성도윤의 방에서 나온 차설아를 보더니 마치 남편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아내처럼 마구 화를 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가 이 집 여주인인 줄 알 것이다.차설아도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 위에서 아래층에 있는 서은아를 내려다봤다.“이혼한 사이면 서로 방에 드나들 수 없다는 규정이 있나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이혼한 남자와 거리를 둬야 하는 거 아니에요?”“뭐?”서은아는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어 성주혁의 팔을 꼭 잡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저 사람 좀 봐요. 어떻게 저렇게 매너가 없을 수 있죠? 저게
“뭐? 정말 차설아 씨에게 고백을 한 거야? 재결합하자고?”서은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성도윤에게서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서은아는 마음이 괴로울 뿐이었다.“진짜야.”성도윤이 스스럼없이 인정했다.“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무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차설아의 옆을 지나갈 때도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차설아는 멍한 채 제자리에 서 있었고, 얼굴도 빨개졌다.그녀가 방금 일부러 서은아를 도발하기 위해 우쭐거리며 그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성도윤이 그 말을 듣게 될 줄이야.‘나 진짜 없어 보이네. 여자애가 자랑하는 것처럼 더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야. 왜 나는 나도 모르게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으로 되었지?’성도윤의 말을 들은 서은아는 잔뜩 신이 났다. 눈이 사라질 만큼 활짝 웃으면서 예전처럼 똑같이 성도윤을 끌어안고는 친구인 척 스스럼없이 행동했다.“이게 맞지. 네가 정말 차설아 씨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에게 실망할 거야. 넌 성도윤이라고. 해안에서 아무도 쉽게 다가올 수 없는 일인자야. 그러니까 정신을 차려, 알겠어?”잘생긴 성도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고,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됐어. 쓸데없는 말은 이만하고. 내가 오늘 왜 너를 찾아왔는지 알아?”서은아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성도윤에게 말했다.“대충 짐작은 가지.”성도윤이 거실에 있는 소파 위에 앉고는 덤덤하게 대답했다.“역시 내 친구야. 똑똑해!”서은아는 남자를 더 꼭 끌어안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 생각은 어때? 그냥 어르신들이 마음을 놓으실 수 있게 결혼을 하는 건 어때?”그 말을 들은 성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은아야, 뭐가 그렇게 성급해? 네가 네 할아버지보다 더 급해하는 것 같은데? 네 할아버지가 저번 주에 그 얘기를 꺼낸 게 아니야? 왜 도윤이랑 벌써 결정을 내리려고 해?”서은아가 대답했다.“할아버지께서
차설아의 말에 서은아와 성주혁도 궁금한지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성도윤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덤덤하게 대답했다.“서로 윈윈하는 비즈니스 정략결혼이라고 생각하는데?”차설아는 조금 흠칫했다.성도윤이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그래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실패한 결혼 경험과 서로 윈윈하는 정략결혼. 정말 나를 끝까지 무시하는 발언이네.’서은아는 행복에 겨워 두 눈을 반짝였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성도윤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도윤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우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성도윤은 서은아가 아닌 차설아를 빤히 쳐다보면서 도발하듯 씩 웃으며 말했다.“적어도 실패했던 그 결혼 경험보다는 낫지. 우리 엄청 잘 어울릴 거야.”“그래? 잘 생각했어!”서은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성도윤의 손을 잡고는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더 기다릴 것도 없겠네. 오늘 당장 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 우리가 워낙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내왔잖아. 나 좋은 아내로 될 자신이 있어.”“안돼!”차설아는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뺏긴 듯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특히 깊은 눈망울의 성도윤은 마음이 복잡했다.그는 무정한 차설아가 자기를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왜 여자 문제에는 간섭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서은아의 얼굴색은 확 어두워졌다. 그녀는 적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차설아 씨 혹시 경찰인가요? 별일에 다 참견하네요. 나랑 도윤이가 혼인신고를 한다는데 차설아 씨와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이 반대할 자격도 없고요.”성주혁은 서은아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정색을 하고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은아야, 우리 설아에게 화를 내지 마. 만약 네가 정말 도윤이와 결혼하고 싶다면 너에게 내려진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설아를
차설아가 떠난 후 서은아 얼굴에 띤 미소는 더 깊어졌다.“설아 씨 드디어 떠났네. 이제 우리 둘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녀는 고개를 들어 성도윤을 바라보고는 그의 팔을 꼭 안으며 말했다.“가자, 도윤아. 우리 혼인 신고하러 가자.”성도윤은 그녀에게서 팔을 빼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장난으로 말한 걸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방금까지 밝았던 서은아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녀는 이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조심스럽게 성도윤을 향해 물었다.“도윤아,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장, 장난이라니?”“내가 혼인 신고를 하겠다는 거. 장난이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성도윤이 싸늘하게 말하고는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방금까지 서로 윈윈하는 정략결혼이라며? 우리 두 사람 잘 어울릴 거라며?”“그것도 장난이야. 난 우리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쉽게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서은아는 깊은 모욕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다른 장난은 몰라도 이런 일로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거 몰라? 결혼이 장난이야? 네가 입 밖으로 뱉은 말이니 나는 당연히 그렇게 믿었다고. 난...”“너도 말했다시피 다른 건 몰라도 유독 결혼은 장난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그래서 서로 잘 어울린다고만 해서 결혼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 서로에게 책임감 없는 일이기도 하고, 결혼에 대한 모독이기도 해.”성도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는 차갑고 도도한 사람이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했다. 차설아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 이런 장난도 치지 않았을 것이고.“하하하, 이거야말로 장난 아니야? 나와 결혼하는 게 결혼에 대한 모독이라면 그때 차설아 씨랑은 왜 결혼했어? 두 사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잖아. 두 사람 전에 알던 사이도 아닌데 3일 만에 결혼식 잡았어. 그런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온 나와 결혼하는 건 결혼에 대한 모독이야?”서은아는 격앙된 목소리로 성도윤에게 따져 물었다
차설아는 성씨 가문 저택을 떠난 후 성도윤과 서은아가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 한발 먼저 미스터 Q와 혼인 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좀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게다가 미스터 Q와 혼인 신고를 했다가 후회하게 되면 그녀는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여자로 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두 아이의 양육권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차설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타이어에 나사가 박혀 바람이 빠졌고 차는 도로 옆에 멈췄다.스포츠카를 운전하던 서은아가 클랙슨션을 울리더니 뒤에서부터 천천히 차설아의 차 옆에 멈춰 섰다.“차설아 씨, 타이어 펑크 났어요? 정말 안됐네요. 내가 태워다줄까요?”서은아는 머리를 창문에 기대면서 입꼬리를 올리더니 도발의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이제 보험 회사 부를 거예요.”차설아는 서은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보험 회사 부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요. 내 차에 견인고리가 있거든요. 수리센터까지 끌고 갈 수 있어요. 돈도 안 받고요...”서은아는 똑 클랙슨션을 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신세 진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보면 차설아 씨는 내 선배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죠, 안 그래요?”차설아가 고개를 들고는 우쭐거리는 서은아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선배요?”“차설아 씨는 도윤이의 전처잖아요. 나는 곧 도윤이의 아내가 될 사람이고. 굳이 따지자면 선배 아니겠어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서은아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겉으로는 덤덤한 척하지만 사실 엄청 화가 났죠? 나랑 도윤이가 언제 결혼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우리의 결혼식에 어디에서 열릴지 알고 싶지 않아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뭐, 사실 궁금하긴 하네요. 두 사람 혼인 신고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도윤 씨는 따라오지 않은 거죠? 아까는 당장이라도 구청에 갈 기세더니.”서은아의
뒤에서 차 한 대를 끌고 있는데도 커브 길에서 차 몇 대나 앞질렀는데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레이싱 좋아해요?”조수석에 앉은 차설아가 물었다.“나랑 도윤이는 모두 F-C1 레이싱 클럽에서 유명한 레이서예요. 내가 레이싱을 잘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도윤이보다는 조금 못하죠. 이는 내가 도윤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녀석은... 못 하는 것 없는 천재예요. 무슨 일을 하든 탑 클래스를 선보이니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말하는 사이에 서은아는 또 한 대의 차를 앞질렀다.차설아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손잡이를 쥐었다.“세상에, 좀 천천히 몰아요. 여기 커브가 60도는 되는 것 같은데 죽으려고 작정했어요?”“걱정하지 말아요. 고작 60도 커브로 안 죽어요. 내가 알아서 운전할게요.”서은아가 자신있게 말했지만 속도는 여전히 줄이지 않았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렸다.“서은아 씨야 안전하겠죠. 이런 커브에 이런 속도까지. 자칫하면 조수석에 앉은 내가 목숨을 잃을 거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서은아를 바라봤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서은아는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힐끔 바라봤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짧은 순간의 눈빛이었지만 차설아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서은아는 일부러 이런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경고일 수도 있고, 작정하고 그녀를 죽이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서은아 씨, 아직도 많은 걸 숨기고 계시네요.”차설아는 서은아의 차분한 옆모습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방금까지 그녀는 서은아가 말은 날카롭게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명문 가문의 그녀가, 심지어 성도윤 무리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결코 만만하진 않을 것이다. 서은아가 아닌 그녀야말로 ‘순진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 나는 엄청 단순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를 먼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요. 그러면 이따 올릴 거니까 일단 로그인해 주세요.”’박서영이 핸드폰을 건네면서 차설아더러 자기 SNS 계정에 로그인하라고 했다.핸드폰을 받아쥔 차설아는 매우 협조적으로 SNS 계정에 로그인했다.구조를 요청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박서영도 차설아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고, 다소 놀라면서 말했다.“생각보다 자기 눈을 내놓을 만큼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이 당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거군요.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저에게 주는 칭찬이에요?”차설아가 박서영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싫어할 뿐이에요.”“저희 도련님께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도련님이 계속 바보 같이 지내는 것을 두고볼수 없어요. 박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은 결국 도련님만 겪는 거잖아요? 이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는 도련님께서 좀 더 냉정해져서 설아 씨를 곁에 뒀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연애의 신 같은 건 도련님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박서영은 어릴 적부터 성진 부모의 교육을 받아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며, 성진을 위해 무조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성진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중에서 배회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은 완전히 흑화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착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는 심연에 빠질 뿐이다.이번에는 박서영이 한눈파는 사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박서영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때 냉혹하고 교활하며 결단력 있는 성진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차설아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박서영에게 물었다.“그동안 성진은 어떻게 지냈나요?”“시각장애인이 뭘 어떻게 지냈겠어요.”박서영은 고개를 저으며
박서영은 그녀를 믿지 못하겠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기꺼이 두 눈을 내놓을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명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제가 성진한테 빚진 걸 갚는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어요.”차설아가 말했다.“저를 못 믿겠다면 제가 무사하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다만 그때 가서 일이 커지면 알아서 처리하세요.”거짓말할 마음도 없는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항상 성진의 헌신 덕분에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꼈고, 가끔 즐거울 때도 불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이 기간에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어떤 어둠 속에 처해있을지, 어떤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원수의 손에 잡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빚을 한 번에 갚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사하다고 전할 건데요?”박서영은 차설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다.“SNS에 올리면 되죠.”차설아가 웃으면서 말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SNS를 올릴 마음이 있겠어요? 제가 SNS를 올려버리면 적어도 제가 안전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SNS만 올리게요?”박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SNS면 충분해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성철도, 배경윤도, 선우 시원도 각자 바빴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쓸 새도 없었다.이럴 때 SNS를 올리면 최소한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좋아요. SNS 올리는 것만은 허락해 줄게요.”박서영이 여러 번 고민
“하하. 성도윤 씨랑 데이트하고, 선우가문의 도련님과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고, 배씨 가문 도련님과 술 마시는 시간은 있으면서 저희 도련님을 찾을 시간은 없었나 보죠? 저희 도련님을 잊어버릴 정도로 바빴나 봐요.”서영이 흥분한 나머지 차설아의 목을 직접 움켜잡으면서 말했다.“그거 알아요? 당신이 성도윤 씨랑 얽히고설켜 있을 때, 저희 도련님은 좌절감에 스스로 인생을 끝내려고 했어요. 손목에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아무리 칼날을 숨겨봤자 어떻게든 찾더라고요. 그렇게 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약해빠져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요. 알아요?”차설아는 저항하지도 않고 박서영이 자기 목을 조르는 대로 놔두었다.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의 두 눈에는 핏줄이 보이기 시작했다.“흥. 절대로 당신이 쉽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박서영은 그제야 차설아를 놓아주며 차갑게 말했다.“당신한테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이 저택으로 데려온 거예요.”“켁! 켁! 켁!”차설아는 잠깐의 질식 때문에 기침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박서영에게 물었다.“제가 어떻게 죗값을 치르기를 원해요?”“아주 간단해요. 저희 도련님의 시력을 돌려주면 돼요.”박서영은 앞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동안 저는 도련님을 위해 거부반응이 없고 잘 맞는 한 쌍의 눈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설아 씨의 건강 검진 데이터를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아주 특별한 두 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마침 저희 도련님한테 빚진 것도 있으니까, 설아 씨의 눈을 저희 도련님의 눈과 바꾸는 거 어렵지 않겠죠?”차설아는 박서영의 최종목적을 듣고 침묵하고 말았다.“제 눈이 정말 성진한테 맞나요?”그때 성도윤이 실명했을 때도 눈을 물색하고 다녔는데 오직 혈연관계가 있는 성진의 눈만 거부반응이 없었다.그때는 성도윤이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성진을 신경 쓰지도 못했다.하지만 마음의 빚 때문에 계속 숨이 안 쉬어졌다.만약 자기 눈으로 성진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마음의 위로 때문이라
차설아는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온통 흰색 인테리어인 낯선 이곳은 영안실에 온 기분이었다.“드디어 깨셨군요, 약효가 너무 강해서 무려 사흘 동안 혼수상태였어요. 이러다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요...”창가에서 한 여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는 생과 사가 그저 자거나 깨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경계 태세로 창가를 바라보던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당신이었어요?”그날 밤 병원에서, 몰래 차설아의 병실로 들어간 그녀였다.“저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네요. 영광이에요.”박서영은 창가에 앉아 꽃다발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놓인 꽃병에는 이제 막 정원에서 따온 해바라기가 꽂혀있었다.박서영은 황금빛으로 만개한 해바라기 줄기를 비스듬히 잘라 하나씩 예쁘게 꽃병에 꽂아 넣었다.“저희 주인님께서는 설아 씨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해바라기라면서 정원에 해바라기를 심으라고 했어요. 이제는 만개했는데 볼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마치 다른 사람한테 보이지 않는 주인님의 마음처럼 말이에요.”이때 박서영은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꽃가지를 단단히 잘라버렸다.“주인님이라 하면 성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차설아는 사고가 날카로운 사람이라 바로 상대방을 추측해 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일편단심이면서 실명한 사람은 성진뿐이었다.“도련님을 아직 기억하고 계셔서 다행이네요. 도련님 정성이 헛되지 않았네요.”박서영은 차설아가 성진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나마 그녀를 향한 증오가 줄어드는 듯했다.“정말 성진이에요?”차설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이 무기력해 마치 마비된 것처럼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박서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저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마취제 때문에 잠깐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이니까요.”차설아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일어나고 싶어
진찬영은 배경윤에게 핸드폰을 건네면서 이 둘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고마워요. 찬영 오빠는 역시 최고예요.”배경윤은 배시시 웃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차설아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정말 제가 좋다면 이제는 찬영 오빠라고 부르지 마요...”진찬영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찬영 씨라고 불러요.”“아, 그게...”배경윤은 진찬영의 갑작스러운 감정변화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심지어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찬영 오빠는 팬분들이 불러주는 호칭인데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 이제부터는 찬영 씨라고 부르는 거 어때요?”“알았어요. 찬영 씨...”호칭을 바꿔 부른 배경윤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왜 이렇게 부끄럽지?’역시 호칭은 알게모르게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지 설명할 수 있었다.찬영 오빠라고 부를 때에는 팬이 연예인에 대한 애정으로 별로 부끄럽지 않았는데 찬영 씨라고 부르니 확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옆에 있던 사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지금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거예요?”지금 사도현이 비꼬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느낄수 있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 보기 싫으면 나가든가.”배경윤의 말을 비수처럼 심장에 박혔고, 사도현의 체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흥! 누가 설아에 대해 나쁜 말을 하라고 했어?’배경윤은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해서 무응답 상태였다. 반복해서 네다섯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무슨 일이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뭔가 잘못됐어.”비경윤은 불안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지금쯤 병원에 있어야 하는 설아는 원래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언제나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분명 무슨 일이 있어!’배경윤이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나려 한다.“제발 가만히 있어!”사도현이 다시 그녀를 침대에 눕히면서 말했다.“설아가 어린애야? 실력도 좋은데 무슨 일이 있겠어. 다른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두세 시간 뒤에요.”진찬영이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모든 독소를 제거하려면 세 시간 후에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물을 마시면 안 돼요.”“아직 시간이 많네요...”배경윤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제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설아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거든요.”사도현이 배경윤을 다시 침대에 눕히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너나 잘 챙겨. 설아를 챙기는 사람은 많고도 많아.”“누군데? 설마 너의 그 쓰레기 같은 친구 성도윤은 아니지?”배경윤이 무례하게 반박했다.“난 그 자식이 방해할까 봐 걱정돼서 설아랑 계속 연락하려고 하는 거야.”사도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도윤이 형이 대체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그래?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그 두 사람은 딱봐도 재능과 미모를 갖춘 천생연분인데, 그냥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잖아. 우리 도윤이 형을 바람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지?”“그 사람이 바람둥이 아니면 누가 바람둥이인데!”배경윤은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사도현과 따지려고 했다.“혼인 중에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겨우 설아 마음을 되돌리더니 또 다른 재벌 딸과 약혼하고. 이게 바람둥이가 아니면 뭔데?”“설아도 너의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요즘에는 선우 가문 도련님과도 뜨겁게 보내더니. 그리고 도윤이 형은 왜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실명하고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설아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야?”“그건 그냥 사고일 뿐인데 설아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원망할 거면 하느님을 원망해. 누가 그런 악행을 많이 저지르라고 했어. 하느님도 노해서 가만두지 않은 거지.”“배경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한테 막말은 해도 도윤이 형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내가 뭘 어쨌다고? 너도 방금 우리 설아한테 뭐라고 했잖아!”두 사람은 마치 싸움닭처럼 감정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이것은 두 사람이 계속 다투게 되는 주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