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성씨 가문 저택을 떠난 후 성도윤과 서은아가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 한발 먼저 미스터 Q와 혼인 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좀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게다가 미스터 Q와 혼인 신고를 했다가 후회하게 되면 그녀는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여자로 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두 아이의 양육권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차설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타이어에 나사가 박혀 바람이 빠졌고 차는 도로 옆에 멈췄다.스포츠카를 운전하던 서은아가 클랙슨션을 울리더니 뒤에서부터 천천히 차설아의 차 옆에 멈춰 섰다.“차설아 씨, 타이어 펑크 났어요? 정말 안됐네요. 내가 태워다줄까요?”서은아는 머리를 창문에 기대면서 입꼬리를 올리더니 도발의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이제 보험 회사 부를 거예요.”차설아는 서은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보험 회사 부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요. 내 차에 견인고리가 있거든요. 수리센터까지 끌고 갈 수 있어요. 돈도 안 받고요...”서은아는 똑 클랙슨션을 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신세 진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보면 차설아 씨는 내 선배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죠, 안 그래요?”차설아가 고개를 들고는 우쭐거리는 서은아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선배요?”“차설아 씨는 도윤이의 전처잖아요. 나는 곧 도윤이의 아내가 될 사람이고. 굳이 따지자면 선배 아니겠어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서은아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겉으로는 덤덤한 척하지만 사실 엄청 화가 났죠? 나랑 도윤이가 언제 결혼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우리의 결혼식에 어디에서 열릴지 알고 싶지 않아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뭐, 사실 궁금하긴 하네요. 두 사람 혼인 신고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도윤 씨는 따라오지 않은 거죠? 아까는 당장이라도 구청에 갈 기세더니.”서은아의
뒤에서 차 한 대를 끌고 있는데도 커브 길에서 차 몇 대나 앞질렀는데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레이싱 좋아해요?”조수석에 앉은 차설아가 물었다.“나랑 도윤이는 모두 F-C1 레이싱 클럽에서 유명한 레이서예요. 내가 레이싱을 잘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도윤이보다는 조금 못하죠. 이는 내가 도윤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녀석은... 못 하는 것 없는 천재예요. 무슨 일을 하든 탑 클래스를 선보이니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말하는 사이에 서은아는 또 한 대의 차를 앞질렀다.차설아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손잡이를 쥐었다.“세상에, 좀 천천히 몰아요. 여기 커브가 60도는 되는 것 같은데 죽으려고 작정했어요?”“걱정하지 말아요. 고작 60도 커브로 안 죽어요. 내가 알아서 운전할게요.”서은아가 자신있게 말했지만 속도는 여전히 줄이지 않았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렸다.“서은아 씨야 안전하겠죠. 이런 커브에 이런 속도까지. 자칫하면 조수석에 앉은 내가 목숨을 잃을 거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서은아를 바라봤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서은아는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힐끔 바라봤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짧은 순간의 눈빛이었지만 차설아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서은아는 일부러 이런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경고일 수도 있고, 작정하고 그녀를 죽이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서은아 씨, 아직도 많은 걸 숨기고 계시네요.”차설아는 서은아의 차분한 옆모습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방금까지 그녀는 서은아가 말은 날카롭게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명문 가문의 그녀가, 심지어 성도윤 무리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결코 만만하진 않을 것이다. 서은아가 아닌 그녀야말로 ‘순진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 나는 엄청 단순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를 먼
차설아의 말은 뭔가를 암시하는 듯했다.서은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때 차설아 씨가 도윤이와 이혼할 때도 많이 비참했던 걸로 기억해요. 성씨 가문에서 쫓겨난 건 물론이고 해안시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없었으니 말이에요...”여기까지 말한 서은아는 차설아에 대한 적개심이 조금 덜해졌다. 오히려 같은 처지였던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정말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죠. 그 여자는 순진한 얼굴을 믿고 이 게임의 승자가 되었으니까요. 도윤이가 그동안 그 여자의 곁을 지키고 그 여자를 아이처럼 보호했어요.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네요.”서은아는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세게 내리쳤다.차설아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그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차설아가 성씨 가문에서 내쫓기게 한 임채원이었다!“화가 나도 소용이 없어요, 당신 친구인 도윤 씨는 그 여자에게 제대로 홀렸거든요. 나를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임채원이 쓰던 수법으로 연약한 척, 불쌍한 척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예요. 그리고 기회를 엿보고 도윤 씨와 잠자리를 가져요.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도윤 씨도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차설아는 경험자로서 서은아에게 어떻게 하면 성도윤의 마음을 공략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너무 진실한 모습이라 서은아조차 깜짝 놀랐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듯 차설아를 쳐다봤다.“왜 나를 봐요? 이게 다 내가 호되게 당한 경험들이에요. 성도윤 같은 남자들에게는 먹히는 수법이라 충분히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한 번 직접 해봐요. 해보면 알 거 아니에요.”“정말 도윤이에게 아무 미련이 남지 않은 거예요? 왜 나에게 도윤이의 마음을 공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죠?”“당연하죠.”차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만약 그 사람에게 마음이 남아있었으면 서은아 씨가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차설아는 너무나도 의외였다.그녀는 많은 서류를 조사했는데 모두 이 땅의 소유자가 조인성이라고 나타났기 때문이다.‘그럼 이 땅을 조작하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야?’“그분의 신분이 워낙 특수하기에 본인 명의로 직접 땅을 소유할 수는 없어요. 마침 우리 조씨 가문에서 그분을 도울 수 있기에 저는 그분 대신 이 땅을 샀죠. 사실 저는 그 어떤 결정권도 없어요. 그리고 칠색 유리병을 원했던 사람도 그분이지, 저는 아니거든요.”조인성은 또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설아 씨를 위해 하는 말인데, 그분은 쉽사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그분이 원하는 걸 될수록 들어주는 게 좋을 거예요.”“인성 씨도 리스펙하게 만드는 그분이 누군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건 차치하고 제가 대단한 분을 만나면서 견식을 넓히는 걸 좋아하거든요.”차설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마치 아직 동심을 잃지 않은 아이가 새로운 게임을 발견하듯이 잔뜩 신이 난 채 말했다.상대가 조인성이라 그녀는 지루하게 생각했었는데 조인성의 배후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니 그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큰 흥미를 보였다.“알겠어요. 나도 설아 씨를 도운 김에 끝까지 도와야 하죠...”조인성이 흠칫하고는 천천히 말했다.“이미 그분과의 식사 자리를 예약했으니 성공할 수 있을지는 설아 씨의 능력에 달렸어요.”“정말 고마워요.”이 식사 자리는 분명 조인성이 그분의 부탁으로 일부러 제안했다는 걸 알면서도 차설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집에 대한 달이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이 땅이 필요했고, 이 땅을 해결하려면 차설아는 직접 그분을 만나볼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늦었는데도 차설아가 돌아오지 않자 달이와 원이는 문 앞에 서 있으면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오빠, 오늘 엄마가 늦은 시간까지 안 돌아오네. Q아빠도 연락이 되지 않고. 설마 두 사람 데이트하러 나간 거 아니야?”희고 고운 얼굴의 달이는 고개를 들며 궁금한 듯 원이에게 물었다.평
“어머. 분명 Q아빠가 우리를 보러 왔을 거야. 내가 가서 문을 열게.”달이는 사과같이 빨간 볼을 한 채 미소를 지으며 문 쪽으로 뛰어갔다.“Q아빠,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너무 보고싶...”녀석은 까치발을 들며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밖에 선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미스터 Q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는 달이의 미소가 굳어졌다.달이는 큰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우와, 삼촌 엄청 잘생기셨네요. 혹시 길을 잃었나요? 누굴 찾으세요?”성도윤은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기자 바로 귀여운 달이를 발견하고는 차가웠던 그의 눈빛도, 목소리도 모두 부드러워졌다.“혹시 차설아가 이곳에 살고 있어?”순진무구한 달이는 전혀 경계심 없이 바로 대답했다.“네. 차설아는 우리 엄마예요. 우리 엄마는 무슨 일로 찾는 거예요?”성도윤이 눈썹을 찌푸렸다.“네 엄마라고?”“네. 우리 엄마가 차설아인데요. 아직 야근하고 있어요. 혹시 엄마를 찾는 거라면 잠깐 기다려야 할 거예요.”달이는 잘생긴 삼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 통통한 작은 손으로 성도윤의 큰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데려왔다.녀석은 남자의 손에 붉고 윤기가 흐르는 신선한 방울토마토 한 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른들처럼 사양하며 말했다.“잘생긴 삼촌, 굳이 선물까지 들고 오실 필요는 없는데요, 몸만 오셔도 돼요... 하지만 이 방울토마토가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엄마가 많이 좋아할 거예요.”“...”188cm의 성도윤은 뭔가에 홀린 듯 작은 손에 이끌려 들어오고는 가만히 서 있었고 말도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달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마음이 사르르 녹을 것 같았다.원이는 동생이 갑자기 낯선 남자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계심을 바짝 세웠다.“당신 누구예요? 왜 함부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거죠?”원이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얼굴로 성도윤을 살펴봤다.성도윤도 똑같이 원이를 살펴봤는데 잘생긴
“달이야, 나 따라와.”원이가 성도윤을 째려보고는 달이를 끌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오빠, 무슨 일이야? 잘생긴 삼촌을 혼자 밖에 두는 건 너무 예의 없어 보이지 않을까? 그래도 손님인데 제대로 대접해야지.”달이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성도윤을 바라봤다. 달이는 한시라도 성도윤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다.하지만 원이는 서재 문을 닫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바보야, 저놈이 누군지 모르겠어?”“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저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오빠는 알고 있어?”“생각 안 나도 괜찮아. 내가 사진을 보여줄게...”원이가 휴대폰을 꺼내고는 한참을 찾더니 성도윤과 차설아의 웨딩 사진을 달이에게 보여줬다.“어머, 저 사람이 우리의 나쁜 아빠였어?”달이가 입을 가로막았는데 포도알처럼 큰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나쁜 아빠가 잘생긴 건 알았지만 현실에서의 나쁜 아빠가 이 정도의 미모를 자랑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달이가 못 알아본 거일 수도 있다.“아직도 저 사람이 좋아?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달이가 원이에게 물었다.“안 좋아. 하나도 안 좋아!”달이가 빠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엄마에게 상처를 안겨준 남자는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나쁜 놈이야. 달이는 하나도 안 좋아!”원이가 턱을 치켜들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그래도 대견스럽네. 우리가 해안에 왜 왔는지 절대 잊지 마. 내가 다시 한번 물어볼게. 우리는 무슨 이유로 해안에 온 거야?”“엄마를 보호하고 엄마의 곁을 지켜주고 엄마를 대신해 복수하기 위해서이지.”달이가 씩씩거리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쉿!”원이가 문 쪽으로 바라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나쁜 아빠가 전에 엄마를 그렇게 많이 괴롭혔으니 우리도 본때를 보여줘야지. 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어. 오늘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해. 고통이 뭔지 제대로 맛보게 해주자고.”“오빠,
성도윤은 덤덤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민이 이모를 살펴봤는데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혹시... 설아를 모시던 이모님인가요?”그는 민이 이모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기억 속의 민이 이모는 분명 그와 차설아를 잘 엮어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 거지? 심지어 칼까지 꺼내고 말이다.민이 이모의 눈빛은 적개심으로 불탔다. 그는 성도윤을 노려보더니 칼을 휘두르며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고귀하신 성도윤 대표님께서 한낱 할망구에 불과한 저를 기억해 주고 계시다니 고마울 따름이네요. 그럼 우리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할 텐데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와요? 또 무슨 남모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 아니에요? 3초를 줄게요. 당장 여기서 꺼져요. 아니면 이 칼이 당신을 겨누게 될지 나도 모릅니다.”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차설아를 해치거나 두 아이를 뺏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와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성도윤은 두 손을 주머니에 꽂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씩 짓고는 말했다.“정말 충심 가득한 이모님이네요. 차설아가 그렇게 가르쳤어요?”“곧 죽는 할망구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겠어요? 당신이 우리 설아 아가씨에게 어떤 못된 짓을 했는지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도 누구보다 잘 알 거고요. 우리 설아 아가씨가 워낙 사람이 착해서 안 따졌을 뿐이지, 나는 달라요. 나는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 두려운 것도 없거든요. 만약 나를 계속 자극한다면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몰라요. 내 말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져요!”민이 이모는 막돼먹은 아줌마처럼 칼을 휘두르면서 상황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성도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토마토를 가리키며 말했다.“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거 가져다주려고 왔어요. 이곳까지 배달했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필요 없어요!”민이 이모는 비천한 신분의 하인이었지만 성격은 강직했다.그녀는 바구니에 담긴 토마토를 보더니 차설아
“아니에요, 민이 이모. 잘생긴 삼촌은 좋은 분이세요. 우리에게 방울토마토도 선물하고요. 방울토마토가 어찌나 달던지 아까 몇 개나 먹었어요. 민이 이모도 드세요. 방울토마토 드시면 잘생긴 삼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달이는 미꾸라지처럼 민이 이모의 뒤에서 쏙 빠져나가고는 방울토마토 하나 집어 순수한 눈빛으로 민이 이모에게 건넸다.“달이 아가씨, 너무 순진하네요. 나쁜 사람들은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적고 다녀요? 전에 민이 이모가 해줬던 ‘늑대와 빨간 모자’ 이야기가 생각 안 나요? 늑대는 항상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죠. 빨간 모자의 경계심을 늦춘 후 잡아먹으려는 속셈이죠. 이 사람도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늑대예요. 그러니까 눈 똑바로 뜨고 사람 잘 가려야 해요. 될수록 이 사람을 멀리 해요, 알겠죠?”민이 이모가 신신당부했다.“네, 민이 이모의 말이 맞아요. 달이가 경계심을 높일게요. 하지만... 이 토마토는 정말 맛있는걸요? 얼른 드셔보세요.”달이는 또 한 알의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는 작은 손가락으로 민이 이모에게도 한 알을 건넸다.“...”민이 이모는 말문이 막혔다.옆에 있던 원이도 방울토마토 한 알을 집고는 입 안에 넣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맞아요, 이 방울토마토 정말로 싱싱해요. 아마 이 삼촌도 좋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을 거예요. 민이 이모, 너무 긴장하지 마요. 엄마는 모든 손님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라고 가르치셨어요.”“원이 도련님, 괜찮아요? 왜 원이 도련님까지 그러는 거예요?”민이 이모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원이를 바라봤다.달이야 얼굴에 넘어가는 순진한 아이기에 잘생긴 성도윤에게 ‘포섭’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머리가 똑똑할 뿐만 아니라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고, 또 누구보다도 차설아를 보호하려는 원이는 분명 성도윤에게 살갑게 대하는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다.“민이 이모,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어요. 푹 쉬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은 저희에게 맡기세요.”원이는 민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