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성씨 가문 저택을 떠난 후 성도윤과 서은아가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 한발 먼저 미스터 Q와 혼인 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좀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게다가 미스터 Q와 혼인 신고를 했다가 후회하게 되면 그녀는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여자로 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두 아이의 양육권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차설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타이어에 나사가 박혀 바람이 빠졌고 차는 도로 옆에 멈췄다.스포츠카를 운전하던 서은아가 클랙슨션을 울리더니 뒤에서부터 천천히 차설아의 차 옆에 멈춰 섰다.“차설아 씨, 타이어 펑크 났어요? 정말 안됐네요. 내가 태워다줄까요?”서은아는 머리를 창문에 기대면서 입꼬리를 올리더니 도발의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이제 보험 회사 부를 거예요.”차설아는 서은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보험 회사 부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요. 내 차에 견인고리가 있거든요. 수리센터까지 끌고 갈 수 있어요. 돈도 안 받고요...”서은아는 똑 클랙슨션을 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신세 진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보면 차설아 씨는 내 선배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죠, 안 그래요?”차설아가 고개를 들고는 우쭐거리는 서은아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선배요?”“차설아 씨는 도윤이의 전처잖아요. 나는 곧 도윤이의 아내가 될 사람이고. 굳이 따지자면 선배 아니겠어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서은아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겉으로는 덤덤한 척하지만 사실 엄청 화가 났죠? 나랑 도윤이가 언제 결혼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우리의 결혼식에 어디에서 열릴지 알고 싶지 않아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뭐, 사실 궁금하긴 하네요. 두 사람 혼인 신고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도윤 씨는 따라오지 않은 거죠? 아까는 당장이라도 구청에 갈 기세더니.”서은아의
뒤에서 차 한 대를 끌고 있는데도 커브 길에서 차 몇 대나 앞질렀는데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레이싱 좋아해요?”조수석에 앉은 차설아가 물었다.“나랑 도윤이는 모두 F-C1 레이싱 클럽에서 유명한 레이서예요. 내가 레이싱을 잘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도윤이보다는 조금 못하죠. 이는 내가 도윤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녀석은... 못 하는 것 없는 천재예요. 무슨 일을 하든 탑 클래스를 선보이니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말하는 사이에 서은아는 또 한 대의 차를 앞질렀다.차설아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손잡이를 쥐었다.“세상에, 좀 천천히 몰아요. 여기 커브가 60도는 되는 것 같은데 죽으려고 작정했어요?”“걱정하지 말아요. 고작 60도 커브로 안 죽어요. 내가 알아서 운전할게요.”서은아가 자신있게 말했지만 속도는 여전히 줄이지 않았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렸다.“서은아 씨야 안전하겠죠. 이런 커브에 이런 속도까지. 자칫하면 조수석에 앉은 내가 목숨을 잃을 거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차설아는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서은아를 바라봤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서은아는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힐끔 바라봤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짧은 순간의 눈빛이었지만 차설아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서은아는 일부러 이런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경고일 수도 있고, 작정하고 그녀를 죽이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서은아 씨, 아직도 많은 걸 숨기고 계시네요.”차설아는 서은아의 차분한 옆모습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방금까지 그녀는 서은아가 말은 날카롭게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명문 가문의 그녀가, 심지어 성도윤 무리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결코 만만하진 않을 것이다. 서은아가 아닌 그녀야말로 ‘순진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 나는 엄청 단순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를 먼
차설아의 말은 뭔가를 암시하는 듯했다.서은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때 차설아 씨가 도윤이와 이혼할 때도 많이 비참했던 걸로 기억해요. 성씨 가문에서 쫓겨난 건 물론이고 해안시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없었으니 말이에요...”여기까지 말한 서은아는 차설아에 대한 적개심이 조금 덜해졌다. 오히려 같은 처지였던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정말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죠. 그 여자는 순진한 얼굴을 믿고 이 게임의 승자가 되었으니까요. 도윤이가 그동안 그 여자의 곁을 지키고 그 여자를 아이처럼 보호했어요.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네요.”서은아는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세게 내리쳤다.차설아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그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차설아가 성씨 가문에서 내쫓기게 한 임채원이었다!“화가 나도 소용이 없어요, 당신 친구인 도윤 씨는 그 여자에게 제대로 홀렸거든요. 나를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임채원이 쓰던 수법으로 연약한 척, 불쌍한 척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예요. 그리고 기회를 엿보고 도윤 씨와 잠자리를 가져요.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도윤 씨도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차설아는 경험자로서 서은아에게 어떻게 하면 성도윤의 마음을 공략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너무 진실한 모습이라 서은아조차 깜짝 놀랐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듯 차설아를 쳐다봤다.“왜 나를 봐요? 이게 다 내가 호되게 당한 경험들이에요. 성도윤 같은 남자들에게는 먹히는 수법이라 충분히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한 번 직접 해봐요. 해보면 알 거 아니에요.”“정말 도윤이에게 아무 미련이 남지 않은 거예요? 왜 나에게 도윤이의 마음을 공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죠?”“당연하죠.”차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만약 그 사람에게 마음이 남아있었으면 서은아 씨가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차설아는 너무나도 의외였다.그녀는 많은 서류를 조사했는데 모두 이 땅의 소유자가 조인성이라고 나타났기 때문이다.‘그럼 이 땅을 조작하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야?’“그분의 신분이 워낙 특수하기에 본인 명의로 직접 땅을 소유할 수는 없어요. 마침 우리 조씨 가문에서 그분을 도울 수 있기에 저는 그분 대신 이 땅을 샀죠. 사실 저는 그 어떤 결정권도 없어요. 그리고 칠색 유리병을 원했던 사람도 그분이지, 저는 아니거든요.”조인성은 또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설아 씨를 위해 하는 말인데, 그분은 쉽사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그분이 원하는 걸 될수록 들어주는 게 좋을 거예요.”“인성 씨도 리스펙하게 만드는 그분이 누군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건 차치하고 제가 대단한 분을 만나면서 견식을 넓히는 걸 좋아하거든요.”차설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마치 아직 동심을 잃지 않은 아이가 새로운 게임을 발견하듯이 잔뜩 신이 난 채 말했다.상대가 조인성이라 그녀는 지루하게 생각했었는데 조인성의 배후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니 그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큰 흥미를 보였다.“알겠어요. 나도 설아 씨를 도운 김에 끝까지 도와야 하죠...”조인성이 흠칫하고는 천천히 말했다.“이미 그분과의 식사 자리를 예약했으니 성공할 수 있을지는 설아 씨의 능력에 달렸어요.”“정말 고마워요.”이 식사 자리는 분명 조인성이 그분의 부탁으로 일부러 제안했다는 걸 알면서도 차설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집에 대한 달이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이 땅이 필요했고, 이 땅을 해결하려면 차설아는 직접 그분을 만나볼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늦었는데도 차설아가 돌아오지 않자 달이와 원이는 문 앞에 서 있으면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오빠, 오늘 엄마가 늦은 시간까지 안 돌아오네. Q아빠도 연락이 되지 않고. 설마 두 사람 데이트하러 나간 거 아니야?”희고 고운 얼굴의 달이는 고개를 들며 궁금한 듯 원이에게 물었다.평
“어머. 분명 Q아빠가 우리를 보러 왔을 거야. 내가 가서 문을 열게.”달이는 사과같이 빨간 볼을 한 채 미소를 지으며 문 쪽으로 뛰어갔다.“Q아빠,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너무 보고싶...”녀석은 까치발을 들며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밖에 선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미스터 Q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는 달이의 미소가 굳어졌다.달이는 큰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우와, 삼촌 엄청 잘생기셨네요. 혹시 길을 잃었나요? 누굴 찾으세요?”성도윤은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기자 바로 귀여운 달이를 발견하고는 차가웠던 그의 눈빛도, 목소리도 모두 부드러워졌다.“혹시 차설아가 이곳에 살고 있어?”순진무구한 달이는 전혀 경계심 없이 바로 대답했다.“네. 차설아는 우리 엄마예요. 우리 엄마는 무슨 일로 찾는 거예요?”성도윤이 눈썹을 찌푸렸다.“네 엄마라고?”“네. 우리 엄마가 차설아인데요. 아직 야근하고 있어요. 혹시 엄마를 찾는 거라면 잠깐 기다려야 할 거예요.”달이는 잘생긴 삼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 통통한 작은 손으로 성도윤의 큰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데려왔다.녀석은 남자의 손에 붉고 윤기가 흐르는 신선한 방울토마토 한 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른들처럼 사양하며 말했다.“잘생긴 삼촌, 굳이 선물까지 들고 오실 필요는 없는데요, 몸만 오셔도 돼요... 하지만 이 방울토마토가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엄마가 많이 좋아할 거예요.”“...”188cm의 성도윤은 뭔가에 홀린 듯 작은 손에 이끌려 들어오고는 가만히 서 있었고 말도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달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마음이 사르르 녹을 것 같았다.원이는 동생이 갑자기 낯선 남자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계심을 바짝 세웠다.“당신 누구예요? 왜 함부로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거죠?”원이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얼굴로 성도윤을 살펴봤다.성도윤도 똑같이 원이를 살펴봤는데 잘생긴
“달이야, 나 따라와.”원이가 성도윤을 째려보고는 달이를 끌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오빠, 무슨 일이야? 잘생긴 삼촌을 혼자 밖에 두는 건 너무 예의 없어 보이지 않을까? 그래도 손님인데 제대로 대접해야지.”달이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성도윤을 바라봤다. 달이는 한시라도 성도윤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다.하지만 원이는 서재 문을 닫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바보야, 저놈이 누군지 모르겠어?”“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저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오빠는 알고 있어?”“생각 안 나도 괜찮아. 내가 사진을 보여줄게...”원이가 휴대폰을 꺼내고는 한참을 찾더니 성도윤과 차설아의 웨딩 사진을 달이에게 보여줬다.“어머, 저 사람이 우리의 나쁜 아빠였어?”달이가 입을 가로막았는데 포도알처럼 큰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나쁜 아빠가 잘생긴 건 알았지만 현실에서의 나쁜 아빠가 이 정도의 미모를 자랑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달이가 못 알아본 거일 수도 있다.“아직도 저 사람이 좋아?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달이가 원이에게 물었다.“안 좋아. 하나도 안 좋아!”달이가 빠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엄마에게 상처를 안겨준 남자는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나쁜 놈이야. 달이는 하나도 안 좋아!”원이가 턱을 치켜들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그래도 대견스럽네. 우리가 해안에 왜 왔는지 절대 잊지 마. 내가 다시 한번 물어볼게. 우리는 무슨 이유로 해안에 온 거야?”“엄마를 보호하고 엄마의 곁을 지켜주고 엄마를 대신해 복수하기 위해서이지.”달이가 씩씩거리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쉿!”원이가 문 쪽으로 바라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나쁜 아빠가 전에 엄마를 그렇게 많이 괴롭혔으니 우리도 본때를 보여줘야지. 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어. 오늘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해. 고통이 뭔지 제대로 맛보게 해주자고.”“오빠,
성도윤은 덤덤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민이 이모를 살펴봤는데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혹시... 설아를 모시던 이모님인가요?”그는 민이 이모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기억 속의 민이 이모는 분명 그와 차설아를 잘 엮어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 거지? 심지어 칼까지 꺼내고 말이다.민이 이모의 눈빛은 적개심으로 불탔다. 그는 성도윤을 노려보더니 칼을 휘두르며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고귀하신 성도윤 대표님께서 한낱 할망구에 불과한 저를 기억해 주고 계시다니 고마울 따름이네요. 그럼 우리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할 텐데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와요? 또 무슨 남모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 아니에요? 3초를 줄게요. 당장 여기서 꺼져요. 아니면 이 칼이 당신을 겨누게 될지 나도 모릅니다.”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차설아를 해치거나 두 아이를 뺏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와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성도윤은 두 손을 주머니에 꽂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씩 짓고는 말했다.“정말 충심 가득한 이모님이네요. 차설아가 그렇게 가르쳤어요?”“곧 죽는 할망구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겠어요? 당신이 우리 설아 아가씨에게 어떤 못된 짓을 했는지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도 누구보다 잘 알 거고요. 우리 설아 아가씨가 워낙 사람이 착해서 안 따졌을 뿐이지, 나는 달라요. 나는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 두려운 것도 없거든요. 만약 나를 계속 자극한다면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몰라요. 내 말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져요!”민이 이모는 막돼먹은 아줌마처럼 칼을 휘두르면서 상황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성도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토마토를 가리키며 말했다.“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거 가져다주려고 왔어요. 이곳까지 배달했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필요 없어요!”민이 이모는 비천한 신분의 하인이었지만 성격은 강직했다.그녀는 바구니에 담긴 토마토를 보더니 차설아
“아니에요, 민이 이모. 잘생긴 삼촌은 좋은 분이세요. 우리에게 방울토마토도 선물하고요. 방울토마토가 어찌나 달던지 아까 몇 개나 먹었어요. 민이 이모도 드세요. 방울토마토 드시면 잘생긴 삼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달이는 미꾸라지처럼 민이 이모의 뒤에서 쏙 빠져나가고는 방울토마토 하나 집어 순수한 눈빛으로 민이 이모에게 건넸다.“달이 아가씨, 너무 순진하네요. 나쁜 사람들은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적고 다녀요? 전에 민이 이모가 해줬던 ‘늑대와 빨간 모자’ 이야기가 생각 안 나요? 늑대는 항상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죠. 빨간 모자의 경계심을 늦춘 후 잡아먹으려는 속셈이죠. 이 사람도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늑대예요. 그러니까 눈 똑바로 뜨고 사람 잘 가려야 해요. 될수록 이 사람을 멀리 해요, 알겠죠?”민이 이모가 신신당부했다.“네, 민이 이모의 말이 맞아요. 달이가 경계심을 높일게요. 하지만... 이 토마토는 정말 맛있는걸요? 얼른 드셔보세요.”달이는 또 한 알의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는 작은 손가락으로 민이 이모에게도 한 알을 건넸다.“...”민이 이모는 말문이 막혔다.옆에 있던 원이도 방울토마토 한 알을 집고는 입 안에 넣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맞아요, 이 방울토마토 정말로 싱싱해요. 아마 이 삼촌도 좋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을 거예요. 민이 이모, 너무 긴장하지 마요. 엄마는 모든 손님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라고 가르치셨어요.”“원이 도련님, 괜찮아요? 왜 원이 도련님까지 그러는 거예요?”민이 이모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원이를 바라봤다.달이야 얼굴에 넘어가는 순진한 아이기에 잘생긴 성도윤에게 ‘포섭’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머리가 똑똑할 뿐만 아니라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고, 또 누구보다도 차설아를 보호하려는 원이는 분명 성도윤에게 살갑게 대하는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다.“민이 이모,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어요. 푹 쉬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은 저희에게 맡기세요.”원이는 민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봐!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완전히 부숴버릴 거라고!”서은아는 분을 못 이겨 울먹이더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차설아가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엄마, 엄청 멋졌어요! 나쁜 사람을 한 방에 쫓아내다니... 완전 슈퍼우먼이었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달이도 커서 엄마처럼 슈퍼우먼으로 될 거예요!”차설아는 달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슈퍼 우먼은 무슨... 우리 달이는 그냥 예쁜 공주님이면 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진 말되 누군가를 두려워하진 마.”원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려 한 거라고요! 뺨 몇 대만 맞고 도망가게 내버려두다니... 너무 쉽게 놔준 거 아니에요?”“원이야, 오늘 충분히 화풀이했잖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해.”차설아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줌마 아무리 꿍꿍이를 가지고 왔다 해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지 좀 삐뚤어진 것뿐이지.”“사실 저 아줌마도 피해자이긴 해. 불쌍한 사람이거든. 오늘 받은 교훈이면 충분할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다독였다.솔직히 말해서 서은아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수단이 좀 극단적일 뿐이지 말이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진심으로 성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서은아같이 대놓고 싸움을 거는 유형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뒤에서 몰래 함정을 파고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임
겨우 눈을 뜬 서은아는 원이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지난 일까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망할 꼬맹이가... 또 너야? 지난번엔 날 강에 빠뜨릴 뻔하더니 이번엔 물총까지 쏘면서 날 도발한다고? 죽고 싶어?”서은아는 이를 악물고 원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녀는 물을 또 한 번 맞았다.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자기가 어른인 것처럼 경고했다.“아줌마는 우리 집 손님이 아니에요. 여긴 아줌마를 환영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어린놈이 감히!”서은아는 자기가 어린아이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원이의 민첩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아무리 쫓아다녀도 그녀는 원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풀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이 입안 가득 들어가고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원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래도 여자잖아.”“엄마,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먼저 덤벼든 거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나쁜 놈이죠! 완전 악당이에요! 지난번에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나쁜 사람도 봐줘야 하나요?”원이의 입이 뿌루퉁해졌다.차설아만 옆에 없었더라면 원이는 벌써 ‘필살기’까지 써버렸을 것이다.“뭐라고? 널 호수에 빠뜨렸다고?”차설아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은아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원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말 어린 애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서은아가 어릴 때부터 삐뚤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어른들끼리의 다툼에 아이를 끌어들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서은아는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입 안은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글썽하
“내가 말했었잖아! 도윤이만 가질 수만 있다면 망가뜨려도 상관없다고. 모든 걸 잃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때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거야. 그러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지.”서은아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 웃기지도 않네!”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윤 씨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쪽이 부순다고 해서 부서질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리고 도윤 씨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도윤 씨가 대기업 대표님이든, 그저 평범한 사람이든 나랑 아이들은 절대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차설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야. 만약 도윤이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된다면? 도윤이와 엮이면 너까지 불행해지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떠나지 않을 자신 있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네까짓 게 어떻게 장담해? 사람이 발밑으로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면 도윤이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야. 결국 모든 사람이 도윤이를 외면할 거고 도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첫째, 그럴 리 없어요. 둘째, 그렇게 될 때까지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무너지면 제가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비록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저한테도 나름대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데 부족할 게 없을걸요?”차설아가 말하는 ‘작은 회사’는 신흥 IT 강자인 천신 그룹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KCL 그룹이었다.하지만 두 그룹 모두 차설아의 소유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서은아도 그녀 앞에서 저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만약 서은아가 알게 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었다.“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겨우 작은 회사라고 말이야. 그걸로 성대 그룹 같은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꿈도 크네. 만약 진짜 도윤이를 위한다면 헤어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