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남은 차설아는 어리둥절했고, 성도윤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다.“저게 무슨 말이야? 자손만당이라니?”차설아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설마, 결국 원이와 달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일까?만약 사실이라면 곧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지금은 성씨 가문과 싸울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으니 차설아는 속으로 불안했다.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그녀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그 누구도 그녀의 손에서 달이와 원이를 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여기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숨기지 마. 아이에 관한 일은 이미 알고 있어.”성도윤은 덤덤한 표정으로 핵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여자는 주먹을 꽉 쥐며 머리가 어지러웠다.“아이라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만약 가문을 이어줄 후손이 필요하다면 우수한 유전자를 물색해봐. 이미 이혼한 전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 상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성도윤은 여자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이 내 아이를 임신해서 나더러 책임지라고 일을 크게 만든 줄 알았지. 솔직히... 나도 아이를 가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야.”“지금 이게 다 무슨 얘기야?”차설아는 점점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남자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내가 당신 아이를 임신했다고?”“모르고 있었어?”성도윤은 진지하게 말했다.“파파라치가 쓴 내용, 당신이 제공한 소재 아니었어?”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파파라치? 어떤 내용?”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내 이미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소식을 여자에게 건넸다.“직접 확인해 봐.”차설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받아 뉴스를 보더니... 폭발해버렸다.“젠장, 어느 미친 파파라치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내가 언제 임신을 했고, 언제 당신에게 책임져달라고 울며 매달렸어! 셰익스피어도 이 정도로 꾸며내진 못해!”성도윤은 몸을 일으켜 조금씩 차설아에게 다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만약 이
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더 경계심을 가졌다.‘설마, 진짜 알게 된 거야?’하지만 남자가 분명히 밝히지 않은 이상, 그녀도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돌아서 나가려던 순간, 차설아의 시선은 칠색 유리병이 들어 있는 상자에 떨어졌다.“잠깐.”성도윤의 커다란 체구가 멈칫하더니,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지만, 여전히 오만한 모습을 유지하며 돌아보았다.“왜, 생각이 바뀌었어?”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희번덕거렸다.‘이 자식, 진짜 자기애가 흘러 넘친다니까!’“김칫국 마시지 마. 이 물건 가져가. 난 이제 필요 없어.”여자는 차갑게 상자를 성도윤 쪽으로 밀었다.성도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차가워지더니 온몸에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허허, 필요 없다고?”“정확히 말하면, 당신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아주 귀중한 물건인 것 같은데, 내가 진짜 받으면 당신이랑 영원히 끝나지 못하잖아.”차설아는 팔짱을 낀 채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사실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칠색 유리병이 성씨 가문이나 성도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씨 가문이나 성도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다.하지만, 그녀는 성도윤을 걱정해서 칠색 유리병을 돌려준다는 것을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남자가 자신을 냉담하고 무자비한 여자로 여기길 바랐다.역시, 이 말은 불씨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성도윤의 이성을 말끔히 불태웠다.그는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아 자신의 품으로 와락 껴안더니, 깊은 눈동자는 맹수처럼 차설아를 당장이라도 삼킬 듯 노려보았다.“차설아, 내가 그렇게 싫어? 고생을 자초하면서도 나랑 인연을 끊고 싶은 거야?”남자는 차갑고 위험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차설아는 두려워하지 않고 시종일관 이성적이고 평온한 모습으로 남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인연을 끊는 건, 당신도 원하던 바 아니야? 근데 지금은 왜 또 미쳐 날뛰는 건데?”“설마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남은 건
성도윤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가장 차갑고, 가장 무정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성도윤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을까?“성도윤, 지금... 장난하는 거지? 아니면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거야?”이 남자의 주량에 대해서 그녀도 겪어봤으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아무튼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전에 남자의 가장 냉담하고 무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차설아의 물음은 찬물처럼 순식간에 성도윤의 모든 열정을 식히고, 이성을 되찾아주었다.열정 넘치던 눈빛은 점점 서늘하게 변하더니 차갑게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차설아, 당신 마음은 돌로 만들었어? 당신은 정말 내가 본 가장 냉철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야!”“어디서 적반하장이야? 대체 누가 냉철하고 누가...”“상관없어!”성도윤은 차갑게 여자의 말을 끊더니 더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줄곧 고상하고 당당하던 성대 그룹의 대표가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지금 자세를 한껏 낮췄지만, 얻은 것은 의심과 조롱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엄이 눈앞의 여자에게 무참히 짓밟혔다고 느꼈다.그는 성도윤이다. 다시는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떠나려는 성도윤을 보고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이거 갖고 가!”성도윤은 여자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처리해.”남자가 사무실을 나서자, 문밖에는 한 무리의 직원들이 엎드려 있었다.방금 안에서 일어난 일을 그들은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협박했다.“감히 안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한다면 알아서 하세요.”직원들은 전전긍긍하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성도윤이 떠나고, 서윤이 대표로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갔다.차설아는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금 일로 인해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듯했다.그녀에게 성도윤의 ‘미친 광기’는 단지 작은 에피소드일 뿐,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
저녁,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갖고 아파트로 돌아왔다.방안은 시끌벅적했다. 미스터 Q는 두 아이를 데리고 게임을 하고 있었고 부엌에는 그녀에게 정교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두었다.“여긴 왜 왔어요?”차설아는 문을 닫으며 당연하다는 듯 남자에게 물었다.전보다 이 남자를 그렇게 배척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을 연 후에 그가 집에 있는 것이 안심되기도 했다.“제가 말했잖아요. 지금은 설아 씨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니 이 집안의 생활을 돌보는 건 당연한 거죠. 당신에게 따듯한 음식을 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건 제 의무에요.”미스터 Q는 두 아이와 게임을 하며 고개를 돌려 차설아에게 설명했다.그의 말투를 보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맞아요, 엄마.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가족이니까 당연히 같이 살아야죠.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게요... 오늘 Q 아빠가 유치원에 우리 데리러 왔어요. 친구들이 이렇게 키 크고 대단한 아빠가 있다고 저를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달이는 미스터 Q의 허벅지를 껴안고 통통한 작은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미스터 Q는 이미 달이의 마음을 완전히 앗아갔고, 자칫하면 차설아의 지위를 넘을지도 모른다.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만이 두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터 Q의 연기는 그녀보다 훨씬 뛰어났다. 완벽한 남편이자 슈퍼맨 아빠의 모습으로 한 치의 허점도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늉만 했으니 언젠가 두 아이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시간이 늦었어, 너희 둘 빨리 가서 자. 그래야 내일 유치원에 가지.”차설아는 따로 미스터 Q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신나게 놀고 있는 두 녀석에게 말했다.똑똑한 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달아, 우리는 이제 가서 자자. 그래야 아빠와 엄마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잖아?”원이의 말에 차설아는 왠지 난처해졌고,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쯧쯧, 애가 너무 똑똑하면 골치 아프다니까!’
미스터 Q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덤덤하게 말했다.분명 이 싸움의 패배자인데도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보아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인 모양이다.“에이, 말도 안 돼요!”차설아는 남자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다.“이 물건이 역사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면 믿겠지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니요. 판타지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아예 칠색 유리병을 신선으로 만들지 그래요?”“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사실이에요. 성도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물건을 설아 씨에게 줬다는 건, 자기 목숨을 맡긴 것과 같아요. 분명 어떤 조건을 내걸었을 것 같은데요?”미스터 Q는 예리하게 분석했다.“아니요, 따로 조건은 없었어요. 아마... 저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서, 자기 마음 편하려고 줬을지도 모르죠.”“제가 아는 성도윤은 자기반성 같은 건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데요? 그 오만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빚졌다는 마음을 갖겠어요?”“그건... 그럼 왜 저에게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줬죠?”“아직 설아 씨에게 마음이 남았나 보죠.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미스터 Q는 정곡을 찔렀다.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낮에 성도윤의 횡포한 고백이 떠올랐다.‘어쩌면 그 말들이 진심이었을까?’“그래서 설아 씨는 어쩔 생각이에요? 성도윤과 다시 시작할래요? 아니면 계속 나랑 연기할래요?”미스터 Q는 덤덤한 미소를 짓더니 여자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저랑 그 인간은 절대 다시 시작할 수 없어요. 성도윤이 아직 나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그래요?”미스터 Q의 미소가 조금 어두워지더니 또 물었다.“그럼 저랑 계속 연기하겠다는 거네요?”“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요.”차설아는 거절하지 않았다.사실, 그동안 미스터 Q와 알고 지내면서 점점 그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만약 아이들에게 꼭 아빠가 필요하다면, 이 남자야
미스터 Q는 긴 손가락을 마주 꼬더니 느릿느릿 말했다.“만약 언젠가 성도윤과 양육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설아 씨의 가장 큰 약점이 뭐라고 생각해요?”“저는 약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차설아의 확신에 찬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두 아이 모두 제 손으로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성도윤은 양육권을 넘볼 자격이 없어요.”“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확실히 설아 씨 손에서 양육권을 빼앗을 능력이 없겠죠. 하지만 상대는 성도윤이에요. 그 뒤에는 거대한 성대 그룹이 있고, 사법기관부터 언론까지 모두 성도윤 편을 들어줄 거예요. 만약 그때도 백 프로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은데요?”여자는 주먹을 꽉 쥐더니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백 프로 확실한 대응책이 뭐죠?”“방금 제가 물은 대로, 만약 언젠가 성도윤과 양육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설아 씨의 가장 큰 약점은 경제 조건이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환경이라고 생각해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해가 되지 않네요.”“아이에게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성장환경이 필요해요. 만약 두 아이가 성도윤을 따른다면, 아이에게는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기는 거고, 또 성씨 가문 전체의 사랑을 독차지할 거예요...”“하지만 차씨 가문에는 설아 씨 혼자만 남았잖아요. 결손가정은 아이의 성장에 아주 불리해요.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법정에 서게 된다면 설아 씨는 아주 불리해질 거예요.”남자는 차근차근 분석했다.그의 말은 아주 잔혹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확신에 찼던 차설아의 눈빛은 조금씩 어두워졌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그러면 뭐요? 아이들은 저랑 정이 더 많으니 절대 절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도 아주 강한 변호사팀이 있으니 법정 다툼은 전혀 두렵지 않아요.”“아주 순진하네요...”미스터 Q는 피식 웃었다.“아시다시피, 여덟 살 미만인 아동은 누구를 따를지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변호사팀이라면
생각해보니 유일한 방법은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고, 온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진짜 미스터 Q와 가짜 혼인신고라도 해야 할까?이튿날.오랫동안 고민한 차설아는 끝내 칠색 유리병을 성도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비록 미스터 Q가 이 물건을 너무 허황하게 말해서 꼭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명연장 효과는 분명 겁주기 위함일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만약 이 물건이 없어 성도윤의 몸에 진짜 문제라도 생긴다면 감히 그 책임을 떠맡을 수 없었다.차설아가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한창 일할 시간이었으니, 성도윤도 아마 지금쯤 회사에서 일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솔직히, 어제 성도윤이 그녀에게 고백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고 나니, 지금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남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 시간에 성씨 저택으로 향했다.마당에서 채소를 심고 꽃에 물을 주던 성주혁은 멀리서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는 차설아를 보고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설아야, 또 날 보러 온 거냐? 내가 새로 심은 토마토가 마침 빨갛게 익었어. 네가 때맞춰 잘 왔어!”성주혁은 회사 일에서 물러난 후로부터 각종 꽃과 채소를 심는 데 푹 빠졌다. 매번 결과물들을 보며 큰 성취감을 느꼈다.그는 방금 딴 방울토마토를 바구니에 담았다. 하나같이 통통하고 불그스름하여 보기만 해도 먹음직했다.차설아는 사양하지 않고 토마토 한 알을 집어 들고 입안에 넣었다.“음, 아주 맛있어요. 밖에서 파는 것보다 백 배 더 맛있네요!”“당연하지, 이건 순 유기농이야. 할아버지가 직접 호미로 흙을 파면서 심었거든. 맛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가도 만점이지!”성주혁은 땀을 닦으며 매우 자랑스럽게 말했다.원이와 달이도 방울토마토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염치 불구하고 말했다.“할아버지, 저 따서 집에 가져가도 될까요?”“그래, 마음대로 따거라. 너희 같은 젊은이들을 먹이려고 심은 거니 마음껏 가져가!”한참을 더 인사를
“알겠어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칠색 유리병과 신선한 방울토마토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저택 거실로 들어섰다.성도윤의 침실은 2층에 있었다. 보통 그의 방에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차설아는 방울토마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남자의 침실로 갔다.처음에는 방문 앞에 놓고 가려 했지만,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밖에 두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몇 번을 망설인 끝에 그녀는 결국 방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그녀는 문손잡이를 비틀어 보았다. 뜻밖에도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쉽게 스르륵 열렸다.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비틀어 연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안에서 연 것이다.방 안에서는 우뚝 서 있는 성도윤이 보였다. 머리가 촉촉한 그는 윗옷을 입지 않아 근육이 한눈에 보였다. 아래에는 대충 회색 캐주얼 바지를 걸친 그의 모습은 섹시하면서도 소탈한 느낌을 주어 그야말로 매력적이었다.차설아는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즉시 돌아서고는 말을 더듬었다.“미, 미안해. 당신이 집에 있는 줄 몰랐어. 난 아무것도 못 봤어!”금방 샤워를 마친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차설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잘생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여전히 빙산처럼 차가웠다.“왜 왔어?”남자는 퉁명스럽게 물었다.여전히 차설아에게 화가 나 있고, 그녀가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그도 그럴 것이지, 어딜 가나 오만하고 당당하던 프린세스 성도윤이 그런 비굴한 고백을 하고, 또 무자비하게 거절당했으니 마음이 불편한 건 당연했다. 가능하다면 눈앞의 여자를 묶어 우주로 영원히 보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해하지 마. 칠색 유리병을 돌려주려고 왔으니까. 마침 당신이 집에 있으니 직접 돌려줄게. 앞으로 당신이 후회하고 날 찾아와서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해.”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에게 등을 돌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당당하게 말했다.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이 보물을 돌려준다는 것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은 덤덤한 눈빛으로 별말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