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아파!”뜨거운 숯이 서은아의 발등에 떨어졌고, 그녀는 아파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천막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들은 소리를 듣고 달려왔고, 모두 서은아를 빙 둘러쌌다.“무슨 일이야? 그릴이 왜 엎어졌어? 고기를 구우라고 했더니 왜 자기 살을 굽고 있어!”사도현은 혼란스러운 현장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나 발 데인 거 안 보여? 빨리 처리해 줘. 흉터라도 남으면 어떡해!”서은아는 발을 껴안고 아파서 이를 악물고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추이준은 두들겨 맞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했다.“은아 누나에게도 이렇게 연약한 모습이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 숯불이 참 우리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했군!”서은아는 주먹을 휘두르며 이를 갈았다.“너, 그게 지금 사람이 할 소리야? 딱 기다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모두들 상황을 보고 서둘러 말렸고, 모두들 하나같이 긴장해서 서은아의 화상 상태를 확인했다.강진우는 묵묵히 관찰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은아야, 상처가 심각해 보여.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그러니까요, 오빠. 제 발등 좀 봐요. 다 타버렸어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걸을 수 있겠어?”“아니요. 움직이기만 해도 아픈데 어떻게 걸어요? 누가 나 좀 업어줘!”말을 마친 서은아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성도윤을 가리키며 말했다.“도윤아, 이 녀석들 중에 너랑 진우 오빠가 가장 믿음직스러워. 진우 오빠를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네가 나 좀 업어줘!”성도윤의 시선은 줄곧 차설아에게 향했고, 그의 차가운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서은아가 부르자 그는 마치 부정행위를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거두더니 허리를 굽혀 서은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덤덤하게 말했다.“가서 약 발라 줄게.”나머지 사람들도 긴장한 상태로 그 뒤를 따라갔다.처음부터 끝까지 사도현 말고 그 누구도 차설아를 관심하지 않았다.“설아 쨩, 진짜 안 다쳤어?
차설아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실망스럽기도 하고 약간 의외였다.“진우 씨?”강진우는 마치 소설 속 백마 탄 왕자처럼 빛을 거슬러 자상하게 말했다.“이 연고 효과 좋아요. 얼른 처리하세요.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제가 다친 걸 어떻게 아셨어요...”차설아는 약간 난처하고 낭패한 표정이었다.방금 그녀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자신이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긴 것은 심리소질이 좋아서도 아니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도 아니었다.다만, 모두가 서은아 옆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방금 표정이 어색해서 설아 씨도 화상을 입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티를 내지 않으니 설아 씨만의 생각이 있겠구나 했죠.”강진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다정한 오빠처럼 큰 안정감을 주었다.차설아는 한숨을 쉬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어느새 남자에게 마음을 열고 말했다.“다들 은아 씨 챙기느라 바쁘니 저까지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엄살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몇 년 전,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살 때, 그녀도 자신의 ‘연약함’을 표현하기 좋아했다.하지만 요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그녀는 이미 강인함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었다.“참 바보네요. 울 줄 아는 아기가 젖을 먹는 법인데. 여자는 너무 강하면 삶이 힘들어요...”강진우는 차설아 옆에 앉아 따스한 봄바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은아 봐봐요. 겉으로는 남자처럼 왈과닥해도, 똑똑해서 연약함을 표현할 줄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것도 잘 표현하기 때문에 애들도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공주님처럼 떠받들고 있는 거예요.”“진짜 공주님 대접을 받고 있던데요? 전 그런 성격이 참 부러워요. 어딜 가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잖아요. 저한테는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이에요.”“맞아요, 설아 씨는 아주 착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져요. 도윤이와 부부로 지냈던 몇 년 동안 우리 무리들은 자주 만났
차설아는 성씨 저택을 떠난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어젯밤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 그리고 팔에 입은 화상 때문에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두 아이와 민이 이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컨디션을 조절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이모, 요 며칠 일이 너무 바빠서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일 끝나는 대로 돌아갈게요.”차설아는 민이 이모에게 안부를 전한 후, 주소록을 열어 누군가와 마음속의 우울함을 털어놓고 싶었다.하지만 주소록을 다 뒤져보았지만 배경윤 외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그리고 공주 대접을 받던 서은아를 떠올리니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배경윤은 실연당한 상처로 타히티로 휴가를 떠나, 적어도 보름은 지나야 돌아올 것이다.주소록을 뒤적거리다가 차설아는 머릿속에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참, 그 친구가 있었지! 이 방면으로는 전문가잖아!”저녁 8시, 화려한 등불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밤 생활이 시작되었다.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시크한 자태를 뽐내며 여자들을 위한 ‘보이 바’로 향했다.술집 내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활기가 넘쳤다.무대에서 섹시한 춤을 추는 미남들을 둘러싸고 여자들은 열광적인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차설아는 술집 구석구석을 보았지만, 에이스 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앞에서 가장 신나게 뛰는 한 소녀를 툭툭 치며 물었다.“오늘 택이 공연 있어요?”“당연하죠. 택이는 보이 바의 기둥인걸요. 택이가 공연을 안 하면 보이 바가 어떻게 돈을 벌겠어요? 저희 모두 택이 보러 왔어요. 이 잘생긴 남자들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해 전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어요!”차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매일 밤 공연하나요?”“맞아요. 매일 공연하기도 힘들겠네요.”다른 여자들도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시작했다.“들어보니 택이 가정 형편이 별로 안 좋대. 원래는 모범생이었는데 부모님
술집 사장은 아마 차설아의 요구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웃고 떠들게 하는 건 결국 돈 벌기 위함이잖아요. 그 돈을 제가 지금 한꺼번에 드리겠다는건데, 뭘 고민하는 거죠?”차설아는 돈이 만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돈에 눈이 먼 이런 인간들에게 돈은 특히 효과가 좋았다.“설아 씨 말씀이 맞지만, 택이를 파는 건 저희가 잘 상의해봐야겠어요. 제가 동업자와 상의한 후에 대답을 드려도 될까요?”술집 사장은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갔다.동업자와 상의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성도윤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택이를 산다고요?”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흥미를 느꼈다.잠시 고민하더니 술집 사장에게 명령했다.“팔 수는 있지만 조건이 있다고 하세요...”“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성도윤의 지령을 받은 술집 사장은 재빨리 휴게실로 돌아갔다.차설아는 이미 기다리다 지쳐서 재촉했다.“어떻게 됐어요? 되는지 안 되는지 한마디만 하세요.”“동업자에게 물어보니 돈을 받지 않고 택이를 팔아도 되지만, 설아 씨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하더군요.”“돈을 안 받는다고요?”차설아는 좀 뜻밖이었다.‘이 술집 사장 의외인데? 돈 벌 수 있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한다고?’“말씀해보세요. 제가 어떤 약속을 지켜야 하죠?”차설아는 궁금해서 물었다.“첫째, 택이는 우리 보이 바의 기둥으로 술집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니, 저희도 택이에게 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택이를 데려가시면 잘 보살펴주세요. 절대 힘든 생활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거야 당연하죠.”“둘째, 택이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아이입니다. 설아 씨가 아무리 택이를 키운다고 하셔도, 택이가 싫어하는 일을 절대 강요하시면 안 됩니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안심하세요. 저는 그저 택이가 젊은 나이에 술집에 발목을 잡히는 것이 아까울 뿐 그 몸을 탐내
차설아는 택이의 집 주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술집 근처에 있는 아파트였다.그녀는 오늘 기분이 나빴지만, 젊은 청년의 인생을 구해줬다는 생각에 강한 성취감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졌다.차설아는 자신의 기억대로 택이가 있는 층에 도착해 벨을 눌렀다.잠시 후, 문이 열렸다.택이는 심플한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잘생긴 얼굴에는 그가 공연에 자주 쓰는 하얀 깃털 가면을 쓴 채로 차설아를 오래 기다린 모습이었다.“오랜만이네요. 나의 여신님. 절 잊은 줄 알았어요.”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차설아는 순간 봄바람에 마음이 흔들린 듯, 참지 못하고 남자의 턱을 치켜들며 웃었다.“지난번 너의 최면술 덕분에 편안하게 잠을 잤어. 한 번 더 최면술을 부탁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널 잊겠어?”“영광이네요. 안심하세요 여신님. 이번에는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역시 인기가 많은데는 이유가 있다니까!”차설아는 택이가 볼수록 더 마음에 들었다.‘쯧쯧, 역시 잘생기고 부드러운 남자가 힐링이야. 얼음처럼 차가운 성도윤에 비하면 택이는 그야말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네!’애석하게도, 차설아는 자기가 천사라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죽도록 미워했던 전남편 성도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성도윤은 술집 사장의 보고를 받고 즉시 택이의 집에 도착했다.“택아, 오늘 우연히 너의 비참한 상황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그래서 널 반드시 불구덩이에서 구하기로 마음먹었지...”차설아는 말하면서 계약서를 꺼냈다.“이것 봐봐. 맘에 들어?”“이... 이건?”성도윤은 계약서를 받아들어 능청스럽게 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어깨를 살짝 떨며 슬픈 척 연기했다.“왜 그래? 감동 받아서 우는 거야?”차설아는 남자의 등을 토닥이며 호기롭게 말했다.“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돈도 쓰지 않았고, 기껏해야 앞으로 네 생활비만 주는 정도야.”“생활비요?”남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차설아를 보며 물었다.“그 말은 앞으로 저를 스폰하시겠다는 건가요?
“그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차설아는 원래 그렇게 화나지 않았지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왜 갑자기 그 인간을 들먹여? 재수 없게!”성도윤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지더니 참을성 있게 물었다.“왜 그래요? 그렇게 성도윤이 싫어요?”“완전 제멋대로인 인간이야!”차설아는 이를 갈며 말했다.“내가 지난밤 자기를 덮쳤다는 걸 빌미로 날 협박하면서 자기 친구들에게 꼬치를 구워주라고 했어. 세상에 어디 이런 인간이 다 있어?”“단지 그 이유 때문에요?”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때때로 차설아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서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또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것 같았다.바로 이런 모순덩어리 때문에, 성도윤의 마음도 모순되게 만들었다. 머리는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계속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그래서 황당하게도 술집 댄서의 신분을 빌려 그녀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마치 가면을 써야 그의 모든 행동이 부끄럽지 않은 것 같았다.“당연히 그것뿐만이 아니지!”차설아는 갑자기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성도윤의 악랄함을 마음껏 고발하려 했다.“팔이...”성도윤은 그녀의 팔뚝에 난 화상을 단번에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역시, 설아도 숯에 화상을 입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데이고도 찍소리 한번 내지 않은 거야? 이 여자 참 독해.”“맞아. 화상 입었어. 아파 죽겠단 말이야.”차설아는 아픈 것을 티 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택이 앞에서 그녀는 아이처럼 불쌍하게 말했다.아마, 택이는 이미 그녀의 사람이고, 그녀의 해어화이고, 무조건 그녀를 지지하고 옆에서 힐링할 수 있는 존재라 강한 척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이리 와서 앉아요!”성도윤은 차설아를 끌고 소파에 눌러앉았다.“왜 그래?”“움직이지 말아요. 약 발라 줄게요!”택이는 약상자에서 연고를 하나 꺼내더니 약간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괜찮아. 이미 발랐어...”“말 들어요. 손 내밀어요!”성도윤의 목소리는 다소
성도윤이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는데, 차설아는 다른 손으로 갑자기 강아지를 만지듯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택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차설아는 부드럽게 성도윤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신비롭게 물었다.남자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있는 이상한 표정의 여자를 보며 경각심을 세웠다.“어쩌시려고요?”“참,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안 잡아먹어.”차설아는 약간 얼굴이 붉어지더니, 잠시 감정을 추스른 후,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너처럼 인기가 많은 사람들은 연애 경험도 풍부할 것 아니야? 그러면... 그 방면도 대단해?”“어떤 방면이요?”“다 큰 성인들끼리 모르는 척하지 마. 당연히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경험이지!”차설아는 빙빙 돌리기 귀찮아 노골적으로 말했다.택이 앞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든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요?”성도윤의 짙은 눈썹은 찡그려지더니,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다소 불쾌한 듯 보였다.‘이 여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야. 천한 신분의 술집 댄서에게 이런 사적인 질문을 하다니. 설마 약효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 전문가를 통해 욕망을 표출하려는 거야?’“아, 오해하지 마. 그냥 내가 이쪽 경험이 적어서 약간 혼란스럽거든. 그래서 너처럼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상담 받고 싶어.”차설아는 솔직하게 설명했다.그녀는 지금 27살로, 거의 서른이 되어가지만 연애 경험은 성도윤을 제외하고 거의 0에 가까웠다.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경험은 오직 성도윤과만 있었으니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그래서 계속 성도윤을 잊지 못하고, 그 사람으로 인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이유가 연애 경험이 너무 적어서인지, 아니면 사랑을 나눈 경험이 적어서인지 궁금했다.“그렇군요...”성도윤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지더니 흥미를 느낀 듯 물었다.“뭐가 혼란스러운지 구체적으로 말해봐요.”“그건... 말하자면 좀 민망하고 부끄러워.”차설아는 조
그는 면봉과 연고를 한쪽에 놓고 긴 다리를 구부린 채 소파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 차설아를 자신과 소파 등받이 사이에 가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다면, 한번 시도해볼래요?”차설아는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바짝 긴장하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뭘... 시도해?”“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느낌이 다를지 궁금하다면서요? 제가 경험이 많으니 어쩌면 그 해답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성도윤은 한쪽 팔로 소파 등받이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여자의 턱을 치켜들며 느릿느릿 말했다.“그렇긴 한데... 이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그녀는 이 방면의 경험이 정말 적었기에 선수를 만나니 더없이 둔해 보였다.“절 키워주시는데, 설아 씨를 위해 이 몸을 바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성도윤의 깊은 눈동자는 가면을 통해 차설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여자는 그의 붉은 입술을 보니 마음이 더욱 뜨거워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고 매혹적인 입술이 있을 수 있을까?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기 위해 먹은 빨간 사과처럼, 범죄를 부르는 입술이었다.“천만에. 내가 널 키우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야!”차설아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더니 더듬거리며 설명했다.“아직 어린 나이에 술집에서 몸을 팔며 돈을 버는 게 안타까워서야. 난...”“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성도윤은 긴 손가락을 여자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지금 중요한 건, 우리 사이에 전남편과는 다른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있을지예요.”“네 말이 맞아. 늘 그 답을 알고 싶었지만 마땅한 실험상대가 없었어...”차설아는 눈앞의 택이를 보며 감탄했다.‘그래, 아주 완벽한 실험상대야!’그녀는 늘 남자들과 거리를 두었고, 가까이 오는 모든 남자들에게 철벽을 치는 습관이 있었다.유독 택이와 있을 때, 매우 편안하고 저도 모르게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거부감이 들지 않고 심지어 마음을 빼앗길 정도였다.이것은 성도윤에게서만 느꼈던 기운이다.“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