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자, 사도현은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그만, 그만. 내가 깔끔하게 정리할게. 나랑 설아는 순수한 우정일 뿐 다른 지저분한 관계는 없어. 도윤이 형과 은아 누나는 샘물보다 더 순수한 사이이고, 나랑 윤설도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 않아. 다들 싱글이니 아무나 좋아해도 돼!”“오늘 모처럼 모였으니 제발 재밌게 놀자. 초딩처럼 말싸움하지 말고. 내 말에 동의한다면 주먹이라도 부딪쳐서 화해하자고!”사도현은 말을 마치고 주먹을 내밀었다.서은아가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응답했다.만약 지금 상황에서 계속 차설아를 겨냥한다면 너무 소심해 보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설아 씨, 오해였다면 제가 사과할게요. 방금 제가 무모했어요. 미안해요...”“전 쿨하고 친구 사귀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도현이와 친한 사이라면 저 서은아의 친구이기도 해요.”서은아는 상냥한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러브콜을 보내며 쿨한 모습을 보였다.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손을 내밀어 그들의 주먹과 부딪쳤다.“좋아요. 친구가 많으면 길이 많은 법이죠. 친구 하죠!”성도윤의 차례가 되자, 그는 차갑게 재미없다는 한마디만 던지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남은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사도현이 입을 열었다.“도윤이 형이 생리를 하나 봐. 조금 예민해. 다들 이해해 줘.”서은아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이 자식 버르장머리하고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차설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뭐 한 두 번도 아니고.”서은아는 사도현을 보며 말했다.“나랑 설아 씨가 남아서 꼬치를 구울 테니 넌 가서 얘기 나누고 있어. 첫 만남에 싸웠으니 오늘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그래. 나도 두 사람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앞으로 우리 거친 남자들의 모임이 더 부드러워지겠네?”사도현은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안심해. 우리 누나 별명만 끔찍할 뿐 사실 좋은 사람이야. 두 사람 터놓고 얘기
“악, 아파!”뜨거운 숯이 서은아의 발등에 떨어졌고, 그녀는 아파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천막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들은 소리를 듣고 달려왔고, 모두 서은아를 빙 둘러쌌다.“무슨 일이야? 그릴이 왜 엎어졌어? 고기를 구우라고 했더니 왜 자기 살을 굽고 있어!”사도현은 혼란스러운 현장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나 발 데인 거 안 보여? 빨리 처리해 줘. 흉터라도 남으면 어떡해!”서은아는 발을 껴안고 아파서 이를 악물고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추이준은 두들겨 맞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했다.“은아 누나에게도 이렇게 연약한 모습이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 숯불이 참 우리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했군!”서은아는 주먹을 휘두르며 이를 갈았다.“너, 그게 지금 사람이 할 소리야? 딱 기다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모두들 상황을 보고 서둘러 말렸고, 모두들 하나같이 긴장해서 서은아의 화상 상태를 확인했다.강진우는 묵묵히 관찰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은아야, 상처가 심각해 보여.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그러니까요, 오빠. 제 발등 좀 봐요. 다 타버렸어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걸을 수 있겠어?”“아니요. 움직이기만 해도 아픈데 어떻게 걸어요? 누가 나 좀 업어줘!”말을 마친 서은아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성도윤을 가리키며 말했다.“도윤아, 이 녀석들 중에 너랑 진우 오빠가 가장 믿음직스러워. 진우 오빠를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네가 나 좀 업어줘!”성도윤의 시선은 줄곧 차설아에게 향했고, 그의 차가운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서은아가 부르자 그는 마치 부정행위를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거두더니 허리를 굽혀 서은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덤덤하게 말했다.“가서 약 발라 줄게.”나머지 사람들도 긴장한 상태로 그 뒤를 따라갔다.처음부터 끝까지 사도현 말고 그 누구도 차설아를 관심하지 않았다.“설아 쨩, 진짜 안 다쳤어?
차설아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실망스럽기도 하고 약간 의외였다.“진우 씨?”강진우는 마치 소설 속 백마 탄 왕자처럼 빛을 거슬러 자상하게 말했다.“이 연고 효과 좋아요. 얼른 처리하세요.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제가 다친 걸 어떻게 아셨어요...”차설아는 약간 난처하고 낭패한 표정이었다.방금 그녀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자신이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긴 것은 심리소질이 좋아서도 아니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도 아니었다.다만, 모두가 서은아 옆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방금 표정이 어색해서 설아 씨도 화상을 입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티를 내지 않으니 설아 씨만의 생각이 있겠구나 했죠.”강진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다정한 오빠처럼 큰 안정감을 주었다.차설아는 한숨을 쉬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어느새 남자에게 마음을 열고 말했다.“다들 은아 씨 챙기느라 바쁘니 저까지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엄살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몇 년 전,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살 때, 그녀도 자신의 ‘연약함’을 표현하기 좋아했다.하지만 요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그녀는 이미 강인함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었다.“참 바보네요. 울 줄 아는 아기가 젖을 먹는 법인데. 여자는 너무 강하면 삶이 힘들어요...”강진우는 차설아 옆에 앉아 따스한 봄바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은아 봐봐요. 겉으로는 남자처럼 왈과닥해도, 똑똑해서 연약함을 표현할 줄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것도 잘 표현하기 때문에 애들도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공주님처럼 떠받들고 있는 거예요.”“진짜 공주님 대접을 받고 있던데요? 전 그런 성격이 참 부러워요. 어딜 가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잖아요. 저한테는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이에요.”“맞아요, 설아 씨는 아주 착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져요. 도윤이와 부부로 지냈던 몇 년 동안 우리 무리들은 자주 만났
차설아는 성씨 저택을 떠난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어젯밤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 그리고 팔에 입은 화상 때문에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두 아이와 민이 이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컨디션을 조절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이모, 요 며칠 일이 너무 바빠서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일 끝나는 대로 돌아갈게요.”차설아는 민이 이모에게 안부를 전한 후, 주소록을 열어 누군가와 마음속의 우울함을 털어놓고 싶었다.하지만 주소록을 다 뒤져보았지만 배경윤 외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그리고 공주 대접을 받던 서은아를 떠올리니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배경윤은 실연당한 상처로 타히티로 휴가를 떠나, 적어도 보름은 지나야 돌아올 것이다.주소록을 뒤적거리다가 차설아는 머릿속에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참, 그 친구가 있었지! 이 방면으로는 전문가잖아!”저녁 8시, 화려한 등불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밤 생활이 시작되었다.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시크한 자태를 뽐내며 여자들을 위한 ‘보이 바’로 향했다.술집 내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활기가 넘쳤다.무대에서 섹시한 춤을 추는 미남들을 둘러싸고 여자들은 열광적인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차설아는 술집 구석구석을 보았지만, 에이스 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앞에서 가장 신나게 뛰는 한 소녀를 툭툭 치며 물었다.“오늘 택이 공연 있어요?”“당연하죠. 택이는 보이 바의 기둥인걸요. 택이가 공연을 안 하면 보이 바가 어떻게 돈을 벌겠어요? 저희 모두 택이 보러 왔어요. 이 잘생긴 남자들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해 전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어요!”차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매일 밤 공연하나요?”“맞아요. 매일 공연하기도 힘들겠네요.”다른 여자들도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시작했다.“들어보니 택이 가정 형편이 별로 안 좋대. 원래는 모범생이었는데 부모님
술집 사장은 아마 차설아의 요구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웃고 떠들게 하는 건 결국 돈 벌기 위함이잖아요. 그 돈을 제가 지금 한꺼번에 드리겠다는건데, 뭘 고민하는 거죠?”차설아는 돈이 만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돈에 눈이 먼 이런 인간들에게 돈은 특히 효과가 좋았다.“설아 씨 말씀이 맞지만, 택이를 파는 건 저희가 잘 상의해봐야겠어요. 제가 동업자와 상의한 후에 대답을 드려도 될까요?”술집 사장은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갔다.동업자와 상의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성도윤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택이를 산다고요?”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흥미를 느꼈다.잠시 고민하더니 술집 사장에게 명령했다.“팔 수는 있지만 조건이 있다고 하세요...”“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성도윤의 지령을 받은 술집 사장은 재빨리 휴게실로 돌아갔다.차설아는 이미 기다리다 지쳐서 재촉했다.“어떻게 됐어요? 되는지 안 되는지 한마디만 하세요.”“동업자에게 물어보니 돈을 받지 않고 택이를 팔아도 되지만, 설아 씨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하더군요.”“돈을 안 받는다고요?”차설아는 좀 뜻밖이었다.‘이 술집 사장 의외인데? 돈 벌 수 있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한다고?’“말씀해보세요. 제가 어떤 약속을 지켜야 하죠?”차설아는 궁금해서 물었다.“첫째, 택이는 우리 보이 바의 기둥으로 술집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니, 저희도 택이에게 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택이를 데려가시면 잘 보살펴주세요. 절대 힘든 생활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거야 당연하죠.”“둘째, 택이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아이입니다. 설아 씨가 아무리 택이를 키운다고 하셔도, 택이가 싫어하는 일을 절대 강요하시면 안 됩니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안심하세요. 저는 그저 택이가 젊은 나이에 술집에 발목을 잡히는 것이 아까울 뿐 그 몸을 탐내
차설아는 택이의 집 주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술집 근처에 있는 아파트였다.그녀는 오늘 기분이 나빴지만, 젊은 청년의 인생을 구해줬다는 생각에 강한 성취감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졌다.차설아는 자신의 기억대로 택이가 있는 층에 도착해 벨을 눌렀다.잠시 후, 문이 열렸다.택이는 심플한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잘생긴 얼굴에는 그가 공연에 자주 쓰는 하얀 깃털 가면을 쓴 채로 차설아를 오래 기다린 모습이었다.“오랜만이네요. 나의 여신님. 절 잊은 줄 알았어요.”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차설아는 순간 봄바람에 마음이 흔들린 듯, 참지 못하고 남자의 턱을 치켜들며 웃었다.“지난번 너의 최면술 덕분에 편안하게 잠을 잤어. 한 번 더 최면술을 부탁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널 잊겠어?”“영광이네요. 안심하세요 여신님. 이번에는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역시 인기가 많은데는 이유가 있다니까!”차설아는 택이가 볼수록 더 마음에 들었다.‘쯧쯧, 역시 잘생기고 부드러운 남자가 힐링이야. 얼음처럼 차가운 성도윤에 비하면 택이는 그야말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네!’애석하게도, 차설아는 자기가 천사라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죽도록 미워했던 전남편 성도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성도윤은 술집 사장의 보고를 받고 즉시 택이의 집에 도착했다.“택아, 오늘 우연히 너의 비참한 상황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그래서 널 반드시 불구덩이에서 구하기로 마음먹었지...”차설아는 말하면서 계약서를 꺼냈다.“이것 봐봐. 맘에 들어?”“이... 이건?”성도윤은 계약서를 받아들어 능청스럽게 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어깨를 살짝 떨며 슬픈 척 연기했다.“왜 그래? 감동 받아서 우는 거야?”차설아는 남자의 등을 토닥이며 호기롭게 말했다.“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돈도 쓰지 않았고, 기껏해야 앞으로 네 생활비만 주는 정도야.”“생활비요?”남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차설아를 보며 물었다.“그 말은 앞으로 저를 스폰하시겠다는 건가요?
“그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차설아는 원래 그렇게 화나지 않았지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왜 갑자기 그 인간을 들먹여? 재수 없게!”성도윤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지더니 참을성 있게 물었다.“왜 그래요? 그렇게 성도윤이 싫어요?”“완전 제멋대로인 인간이야!”차설아는 이를 갈며 말했다.“내가 지난밤 자기를 덮쳤다는 걸 빌미로 날 협박하면서 자기 친구들에게 꼬치를 구워주라고 했어. 세상에 어디 이런 인간이 다 있어?”“단지 그 이유 때문에요?”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때때로 차설아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서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또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것 같았다.바로 이런 모순덩어리 때문에, 성도윤의 마음도 모순되게 만들었다. 머리는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계속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그래서 황당하게도 술집 댄서의 신분을 빌려 그녀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마치 가면을 써야 그의 모든 행동이 부끄럽지 않은 것 같았다.“당연히 그것뿐만이 아니지!”차설아는 갑자기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성도윤의 악랄함을 마음껏 고발하려 했다.“팔이...”성도윤은 그녀의 팔뚝에 난 화상을 단번에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역시, 설아도 숯에 화상을 입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데이고도 찍소리 한번 내지 않은 거야? 이 여자 참 독해.”“맞아. 화상 입었어. 아파 죽겠단 말이야.”차설아는 아픈 것을 티 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택이 앞에서 그녀는 아이처럼 불쌍하게 말했다.아마, 택이는 이미 그녀의 사람이고, 그녀의 해어화이고, 무조건 그녀를 지지하고 옆에서 힐링할 수 있는 존재라 강한 척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이리 와서 앉아요!”성도윤은 차설아를 끌고 소파에 눌러앉았다.“왜 그래?”“움직이지 말아요. 약 발라 줄게요!”택이는 약상자에서 연고를 하나 꺼내더니 약간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괜찮아. 이미 발랐어...”“말 들어요. 손 내밀어요!”성도윤의 목소리는 다소
성도윤이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는데, 차설아는 다른 손으로 갑자기 강아지를 만지듯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택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차설아는 부드럽게 성도윤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신비롭게 물었다.남자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소파에 앉아 있는 이상한 표정의 여자를 보며 경각심을 세웠다.“어쩌시려고요?”“참,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안 잡아먹어.”차설아는 약간 얼굴이 붉어지더니, 잠시 감정을 추스른 후,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너처럼 인기가 많은 사람들은 연애 경험도 풍부할 것 아니야? 그러면... 그 방면도 대단해?”“어떤 방면이요?”“다 큰 성인들끼리 모르는 척하지 마. 당연히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경험이지!”차설아는 빙빙 돌리기 귀찮아 노골적으로 말했다.택이 앞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든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요?”성도윤의 짙은 눈썹은 찡그려지더니,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다소 불쾌한 듯 보였다.‘이 여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야. 천한 신분의 술집 댄서에게 이런 사적인 질문을 하다니. 설마 약효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 전문가를 통해 욕망을 표출하려는 거야?’“아, 오해하지 마. 그냥 내가 이쪽 경험이 적어서 약간 혼란스럽거든. 그래서 너처럼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상담 받고 싶어.”차설아는 솔직하게 설명했다.그녀는 지금 27살로, 거의 서른이 되어가지만 연애 경험은 성도윤을 제외하고 거의 0에 가까웠다.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경험은 오직 성도윤과만 있었으니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그래서 계속 성도윤을 잊지 못하고, 그 사람으로 인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이유가 연애 경험이 너무 적어서인지, 아니면 사랑을 나눈 경험이 적어서인지 궁금했다.“그렇군요...”성도윤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지더니 흥미를 느낀 듯 물었다.“뭐가 혼란스러운지 구체적으로 말해봐요.”“그건... 말하자면 좀 민망하고 부끄러워.”차설아는 조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