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금은 자세를 바로잡더니 차설아에게 이 일을 잘 설명하려던 그때, 어두운 얼굴색의 임채원이 그녀의 말을 끊고는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저랑 어머님이 설아 씨 찾으러 온 건 설아 씨에게 도윤이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야. 하루 종일 찾았는데 도윤이가 연락이 안 돼. 전화도 안 받고, 혹시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이 돼...”“연락이 안 된다고?”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더니 의문의 얼굴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을 텐데. 지금 수술을 마쳤으니 가장 먼저 안부 전화를 했을 텐데.”“뭐? 수술?”소영금은 그 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다급한 표정으로 차설아에게 물었다.“무슨 수술? 어디서 수술했어? 도윤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게...”소영금을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는 아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솔직하게 말했다.“제가 절벽에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어요. 저를 구하려다가 도윤 씨도 다쳤고요. 저보다 더 심하게 다쳐서 수술했다던데. 아마 지금 저처럼 병실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아니면... 병원 쪽에 물어보시는 건 어때요?”“그런 일이 있었어?”소영금의 얼굴색이 확 변하더니 곧이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겁에 질린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안 돼, 도윤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돼. 절대 안 돼!”성도윤은 그녀의 유일한 자식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키웠기에 ‘다쳤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성도윤의 손가락이 까졌다고 해도 그녀는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마침 이때, 어떤 간호사가 차설아의 다리에 약을 바꿔주러 들어왔다.소영금은 미친 듯이 간호사의 팔을 확 잡고는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내 아들 어디 있어요? 지금 좀 어때요? 많이 다쳤어요?”간호사는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는 소영금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죄송합니다. 누, 누구시죠? 아드님은 또 누구신데요?”“눈치 없는 것. 나 소영금이잖아. 내 아들은 그 유명한 성대 그룹 대
차설아는 착한 척하는 임채원의 말에 분노가 끓어올라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일어서고 싶었다.‘정말 대단한 여자네. 나를 위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아도 계속 나를 비하하고 있잖아. 내가 정말 말을 하지 말라고 시켰다는 듯이 말이야. 억울해서 미치겠네!’“임채원 씨, 그 말은 내가 일부러 간호사님을 협박했다는 거야? 도윤 씨 상황을 알리지 말라고?”“그런 뜻은 없었는데, 설아 씨는 왜 그렇게 생각해? 설마 정말 찔리는 게 있어?”“내가 뭐 찔릴 게 있어? 나도 도윤 씨 상황을 알고 싶다고. 나를 구하기 위해서 다쳤으니.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설아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알아. 만약 도윤이가 지금 위독한 상황이고, 설아 씨가 그 책임을 지기 싫어서...”두 사람은 갑자기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을 했다.“그만해!”소영금이 엄숙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자 병실은 삽시에 조용해졌다.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간호사를 강하게 밀어붙이며 물었다.“누구 협박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알고 있는 것 당장 말해. 아니면... 나 소영금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제대로 알게 될 거야!”“말... 말할게요!”간호사는 배경수의 보복이 두렵긴 했지만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소영금에게 잡혀 목숨이 위태로워질까 봐 걱정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성... 성도윤 님이 지금 어떤 상태이신지, 어디에 계시는지 배경수 님과 차설아 님빼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제가 들은 소식은...”간호가 말하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차설아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다급하게 말했다.“왜 계속 나를 보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솔직하게 말해봐요!”임채원도 거들었다.“그래요, 솔직하게 말해요. 우리가 뒤를 봐주고 있는데 누가 감히 당신을 건드리겠어요?”간호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에 의하면 성도윤 님은 심하게 다쳐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고,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사지를 절단할 수 있다고 했어
“여사님, 진정하세요!”차설아는 다리에 깁스하고 손에 링거를 맞고 있었기에 거동이 불편했다.소영금은 원래 성격이 불같은 여자이고, 지금은 충격적인 소식에 정신을 놓았다.조금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당장 차설아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솔직하게 도윤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도윤이가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다른 건 다 용서할 수 있어. 다만 도윤이가 무사한지만 알려줘, 제발 부탁할게!”소영금은 눈물을 머금은 채 두 손으로 차설아의 어깨를 잡고는 절망의 얼굴로 말했다.어머니로서 그녀는 아이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아이를 위해 체면이나 존엄 따위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제가 말했잖아요, 도윤 씨가 어디 있는지 저도 모른다고요. 도윤 씨가 저를 구하러 온 것도 저는 너무 의외였어요. 도윤 씨를 해칠 이유도 없고, 숨길 이유는 더더욱 없어요. 아니에요?”차설아도 아이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소영금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을 매섭게 대하는 소영금을 탓하지도 않았다.만약 차설아가 이런 일을 당했으면 아마 진작 상대방과 같이 죽을 각오를 하며 소영금보다도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차설아는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지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성도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정말 사람 걱정하게 만드네!’“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당장 경수한테 전화할게요. 경수라면 최신 상황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차설아가 알고 있는 소식도 모두 배경수에게서 들은 것이었다.그래서 그녀는 배경수가 성도윤의 모든 상황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차설아가 배경수에게 전화하려던 그때, 배경수는 마침 일을 마치고 병실로 오고 있었다.“그 사람 놔요!”배경수가 병실의 문을 열자마자 차설아의 어깨를 잡은 소영금을 보고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영금을 멀리 밀어냈다.“경수야, 그러지 마!”차설아가 배경수를 말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마침 잘 왔어. 얼른 저 사람들에게 말해봐, 도윤 씨 지금
“당신한테 덤비라고? 알겠어, 이제 후회하지 마.”배경수는 8대 명문가에서도 피하기 급급해하는 ‘대마왕’이었다. 임채원같이 연약한 척하는 여자를 상대하는 걸 제일 쉽게 생각했다.그는 긴 손가락을 맞잡고 손가락 마디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머금고 있었다.“주먹을 휘둘러본 지도 오래되어서 손이 간질간질했는데 말이야. 나 예전에 권투할 때도 나쁜 여자를 모래주머니로 삼는 것을 가장 좋아했어요. 주먹으로 한 방 날리면 속이 후련하거든요. 임채원 씨가 자진해서 맞겠다고 하니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요...”“다, 다가오지 마요. 나 성씨 가문 사람이라고요. 감히 나 건드리면 성씨 가문은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임채원은 일찍이 배경수의 ‘끔찍한’ 사건들에 대해 들었었다.배경수는 배씨 가문의 예쁨을 듬뿍 받고 자라 두려운 게 전혀 없다고 한다. 워낙 독한 수단을 썼기에 사람들은 웬만하면 멀리 숨어 있으면서 아무도 그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그런 바람둥이 배경수가 이렇게 차설아를 따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처음 스캔들이 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지만 배경수는 여전히 차설아 곁에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센척해서 소영금 앞에 막아서는 거 아니었는데. 만약 배경수가 정말 내 얼굴을 모래주머니로 생각해 펀치를 날리면 어떻게 해? 그럼 나만 손해잖아!’“내가 말을 똑똑히 안 했나 보죠? 당신이 성씨 가문 사람이든 임씨 가문 사람이든 감히 보스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똑같이 모래주머니로 때릴 거라고요!”배경수가 말하고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테이블에는 바로 구멍이 하나 생겼다.“악, 어머님, 살려주세요!”임채원이 소리를 지르면서 바로 소영금 뒤에 숨었다.“여사님도 모래주머니 신세가 되고 싶으세요?”배경수가 주먹을 꽉 쥐고를 씩 웃으며 물었다.차설아의 기분을 더 상하지 않기 위해 소영금과 임채원이 알아서 물러가도록 협박한 것이었다.만약 차설아가 성도윤이 이미 죽은 걸
“주제넘네!”소영금은 차설아의 말을 끊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들도 알다시피 KCL은 하이 테크 기술 분야에서 엄청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요 몇 년 동안 성대 그룹만 비즈니스를 했거든. 천신 그룹 같은 작은 회사가 비즈니스 하려면 비즈니스 할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하는 거야?”“맞아요!”임채원은 소영금의 뒤에 숨어 따라서 건방을 떨었다.“천신 그룹 같은 규모를 가진 회사는 KCL에서 비즈니스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겠죠. 당신들도 그래서 비겁한 수단을 쓴 거 아니에요? 도윤이를 해치면 성대 그룹과 KCL의 계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그 말을 들은 배경수는 화가 나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그 말은 동의하지 않아요, KCL이 막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리가 선뜻 나설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 심지어 KCL 사장과도 사이가 좋다고요!”임채원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허풍을 떨긴, KCL 사장은 당신은커녕 도윤이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어떻게 KCL 사장과 사이가 좋을 수 있죠?”“허풍 아닌데요, 나 진짜 KCL 사장과 각별한 사이인데, 보스가 증명할 수 있어요... 그렇지, 보스?”배경수가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차설아가 덤덤하게 말했다.“장난은 그만해. 빨리 병원 사람들에게 물어봐, 성도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걱정돼.”“아직도 연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설아 씨처럼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네요!”임채원은 흥분된 목소리로 소영금을 부추기며 말했다.“어머님, 저 사람들과 더 말하는 것도 시간 낭비예요. 얼른 경찰에 신고해서 취조를 받게 해야 해요.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면 도윤이를 찾는 시간만 더 지체된다고요!”소영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이 맞아. 어차피 저 사람들과는 말이 안 통하니까 차라리 경찰에 맡기는 게 낫겠어.”“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배경수가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감히 경찰에 신고한다
“어머님, 왜 그러세요? 도윤이에게서 소식이 온 거 아니에요?”임채원이 다급하게 물었다.“응.”소영금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다.“정말 다행이네요. 도윤이 지금 어떤 상황이래요? 어디에 있고요? 혹시 설아 씨가 자기 해쳤다고 말했어요?”임채원이 다급하게 캐물었다.그녀는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로 단정 지었다. 아니면 배경수는 그렇게 허술한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성도윤에게 소식이 온 이상 분명 차설아와 배경수를 가만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소영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도윤이... 잘 있대. 우리가 설아를 괜히 탓한 모양이야.”“네?”임채원과 배경수가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차설아는 한시름을 놓았다.배경수라면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데 성도윤에게 정말 무슨 사고라도 생겼다면 소영금처럼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은 진작 그녀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차설아는 소영금이 자기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성도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회복했을 것이다.“도윤이 괜찮대, 그리고 너도 잘 요양해서 빨리 회복하고 퇴원하길 바란대...”소영금이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분명 따뜻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차설아를 당장 죽여버릴 듯이 차갑고 매서웠다.“그럴 리가 없어요. 어머님, 방금 그 간호사도 말했었잖아요, 도윤이 상황이 심각하다고요. 어떻게 갑자기 괜찮아질 수가 있죠? 게다가 일부러 설아 씨와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도 수상하고요...”임채원은 차설아를 모함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부추겼다.“누가 전화를 걸어온 거예요? 설마 속으신 건 아니죠? 빨리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소영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고는 말했다.“도윤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아니요, 그
하지만 차설아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우리 갈 길 가야지. 천신 그룹은 전부터 성대 그룹의 영향을 받지 않았어. 지금도 똑같이 영향을 받지 않을 거야. 성대 그룹이 오랫동안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니 이제 한 번쯤 내려올 때도 되지 않겠어?”배경수는 자신 있는 차설아를 두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 마치 추앙하는 여신을 보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걱정하지 마, 보스. 기자회견은 이미 잘 준비했어. 참석하는 언론이든 같은 업계 사람들이든 모두 쉬운 사람들 아니야. 이제 한때 무한의 영광을 누렸던 성대 그룹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사람들은 생방송으로 똑똑히 지켜보겠지.”배경수는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그와 차설아는 이날만을 위해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고, 너무나도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실패가 아닌 성공해야만 했다.게다가 성도윤의 ‘사고’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성대 그룹은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그래서 천신 그룹이 그 뒤를 잇는 업계 1위 회사로 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다만 차설아가 만약 성도윤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여전히 마음을 굳힐 수 있을지 배경수는 걱정이었다.“보스, 이번에 성도윤이 보스를 구해줬잖아, 의리가 있어. 그럼 보스는... 마음이 약해질 거야?”배경수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무슨 그런 타당치 않은 말을 해. 내가 이렇게 준비를 오랫동안 했는데 난 그저 두 아이 분윳값 벌려고 하는 거야. 무슨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왜 마음이 약해져야 해?”“그게...”배경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곧이어 농담하며 말했다.“보스, 이번에 분윳값 제대로 벌려는 생각인가 본데?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풀리면 앞으로 차씨 가문 수십 대가 분윳값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그러길 바라야지.”차설아가 눈썹을 들썩이고는 고민에 잠겼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
달이가 흥분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그녀는 원이의 1호 팬으로 어려서부터 원이를 못 할 것이 없는 슈퍼 히어로라고 생각했다.달이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은 바로 원이 오빠이고, 두 번째로 대단한 사람은 바로 아름답고 마음씨가 착한 엄마이다!세 번째로 대단한 사람은... 달이는 엄마를 속상하게 한 나쁜 놈 아빠라고 생각했다. 씩씩한 엄마를 울릴 수 있는 사람은 나쁜 놈 아빠밖에 없었으니 말이다.“오빠, 혹시 엄마 다치게 한 나쁜 놈 말이야, 아빠 아닐까? 엄마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쁜 놈 아빠 말고는 엄마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 없잖아.”달이가 동그란 큰 눈을 끔뻑하며 추측했다.“응, 그럴 수 있어.”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겨우 네 살밖에 안 되었지만 원이는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나 곧 나쁜 놈 아빠를 만날 거야. 그때면 엄마를 다치게 한 사람이 아빠가 맞는지 알 수 있겠지. 만약 정말 나쁜 놈 아빠 때문에 엄마가 다치게 되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지만 오빠, 엄마가 그랬어. 나쁜 놈 아빠가 엄청 대단하다고. 오빠 혼자로 혼내줄 수 있겠어?”“당연하지.”원이는 자기 서류 가방을 툭툭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이 안에 엄청 대단한 무기가 들어있어. 무기의 도움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야.”“오빠, 화이팅. 좋은 소식 기다릴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랑 민이 이모를 잘 속일 테니까.”서류 가방을 본 달이도 원이를 굳게 믿었다.두 녀석은 마침내 영상통화를 끝냈다.지금 원이는 성대 그룹 빌딩 밖에 서 있었다.그는 며칠 전에 항공사의 오류를 발견해 성공적으로 해바라기 섬을 떠나고 해안에 도착했다.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성대 그룹에 들어가고, 또 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다.“엄마가 말했어, 나쁜 놈 아빠는 성대 그룹 대표라고. 분명 그 사무실에는 성대 그룹의 생사가 결정될 어마어마한 기밀문서가 숨겨져 있을 거야. 그 기밀문서를 얻을 수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