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님, 진정하세요!”차설아는 다리에 깁스하고 손에 링거를 맞고 있었기에 거동이 불편했다.소영금은 원래 성격이 불같은 여자이고, 지금은 충격적인 소식에 정신을 놓았다.조금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당장 차설아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솔직하게 도윤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도윤이가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다른 건 다 용서할 수 있어. 다만 도윤이가 무사한지만 알려줘, 제발 부탁할게!”소영금은 눈물을 머금은 채 두 손으로 차설아의 어깨를 잡고는 절망의 얼굴로 말했다.어머니로서 그녀는 아이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아이를 위해 체면이나 존엄 따위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제가 말했잖아요, 도윤 씨가 어디 있는지 저도 모른다고요. 도윤 씨가 저를 구하러 온 것도 저는 너무 의외였어요. 도윤 씨를 해칠 이유도 없고, 숨길 이유는 더더욱 없어요. 아니에요?”차설아도 아이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소영금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을 매섭게 대하는 소영금을 탓하지도 않았다.만약 차설아가 이런 일을 당했으면 아마 진작 상대방과 같이 죽을 각오를 하며 소영금보다도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차설아는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지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성도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정말 사람 걱정하게 만드네!’“잠시만 기다리세요, 지금 당장 경수한테 전화할게요. 경수라면 최신 상황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차설아가 알고 있는 소식도 모두 배경수에게서 들은 것이었다.그래서 그녀는 배경수가 성도윤의 모든 상황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차설아가 배경수에게 전화하려던 그때, 배경수는 마침 일을 마치고 병실로 오고 있었다.“그 사람 놔요!”배경수가 병실의 문을 열자마자 차설아의 어깨를 잡은 소영금을 보고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영금을 멀리 밀어냈다.“경수야, 그러지 마!”차설아가 배경수를 말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마침 잘 왔어. 얼른 저 사람들에게 말해봐, 도윤 씨 지금
“당신한테 덤비라고? 알겠어, 이제 후회하지 마.”배경수는 8대 명문가에서도 피하기 급급해하는 ‘대마왕’이었다. 임채원같이 연약한 척하는 여자를 상대하는 걸 제일 쉽게 생각했다.그는 긴 손가락을 맞잡고 손가락 마디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머금고 있었다.“주먹을 휘둘러본 지도 오래되어서 손이 간질간질했는데 말이야. 나 예전에 권투할 때도 나쁜 여자를 모래주머니로 삼는 것을 가장 좋아했어요. 주먹으로 한 방 날리면 속이 후련하거든요. 임채원 씨가 자진해서 맞겠다고 하니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요...”“다, 다가오지 마요. 나 성씨 가문 사람이라고요. 감히 나 건드리면 성씨 가문은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임채원은 일찍이 배경수의 ‘끔찍한’ 사건들에 대해 들었었다.배경수는 배씨 가문의 예쁨을 듬뿍 받고 자라 두려운 게 전혀 없다고 한다. 워낙 독한 수단을 썼기에 사람들은 웬만하면 멀리 숨어 있으면서 아무도 그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그런 바람둥이 배경수가 이렇게 차설아를 따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처음 스캔들이 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지만 배경수는 여전히 차설아 곁에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센척해서 소영금 앞에 막아서는 거 아니었는데. 만약 배경수가 정말 내 얼굴을 모래주머니로 생각해 펀치를 날리면 어떻게 해? 그럼 나만 손해잖아!’“내가 말을 똑똑히 안 했나 보죠? 당신이 성씨 가문 사람이든 임씨 가문 사람이든 감히 보스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똑같이 모래주머니로 때릴 거라고요!”배경수가 말하고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테이블에는 바로 구멍이 하나 생겼다.“악, 어머님, 살려주세요!”임채원이 소리를 지르면서 바로 소영금 뒤에 숨었다.“여사님도 모래주머니 신세가 되고 싶으세요?”배경수가 주먹을 꽉 쥐고를 씩 웃으며 물었다.차설아의 기분을 더 상하지 않기 위해 소영금과 임채원이 알아서 물러가도록 협박한 것이었다.만약 차설아가 성도윤이 이미 죽은 걸
“주제넘네!”소영금은 차설아의 말을 끊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들도 알다시피 KCL은 하이 테크 기술 분야에서 엄청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요 몇 년 동안 성대 그룹만 비즈니스를 했거든. 천신 그룹 같은 작은 회사가 비즈니스 하려면 비즈니스 할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하는 거야?”“맞아요!”임채원은 소영금의 뒤에 숨어 따라서 건방을 떨었다.“천신 그룹 같은 규모를 가진 회사는 KCL에서 비즈니스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겠죠. 당신들도 그래서 비겁한 수단을 쓴 거 아니에요? 도윤이를 해치면 성대 그룹과 KCL의 계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그 말을 들은 배경수는 화가 나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그 말은 동의하지 않아요, KCL이 막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리가 선뜻 나설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 심지어 KCL 사장과도 사이가 좋다고요!”임채원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허풍을 떨긴, KCL 사장은 당신은커녕 도윤이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어떻게 KCL 사장과 사이가 좋을 수 있죠?”“허풍 아닌데요, 나 진짜 KCL 사장과 각별한 사이인데, 보스가 증명할 수 있어요... 그렇지, 보스?”배경수가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차설아가 덤덤하게 말했다.“장난은 그만해. 빨리 병원 사람들에게 물어봐, 성도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걱정돼.”“아직도 연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설아 씨처럼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네요!”임채원은 흥분된 목소리로 소영금을 부추기며 말했다.“어머님, 저 사람들과 더 말하는 것도 시간 낭비예요. 얼른 경찰에 신고해서 취조를 받게 해야 해요.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면 도윤이를 찾는 시간만 더 지체된다고요!”소영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이 맞아. 어차피 저 사람들과는 말이 안 통하니까 차라리 경찰에 맡기는 게 낫겠어.”“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배경수가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감히 경찰에 신고한다
“어머님, 왜 그러세요? 도윤이에게서 소식이 온 거 아니에요?”임채원이 다급하게 물었다.“응.”소영금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다.“정말 다행이네요. 도윤이 지금 어떤 상황이래요? 어디에 있고요? 혹시 설아 씨가 자기 해쳤다고 말했어요?”임채원이 다급하게 캐물었다.그녀는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로 단정 지었다. 아니면 배경수는 그렇게 허술한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성도윤에게 소식이 온 이상 분명 차설아와 배경수를 가만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소영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도윤이... 잘 있대. 우리가 설아를 괜히 탓한 모양이야.”“네?”임채원과 배경수가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차설아는 한시름을 놓았다.배경수라면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데 성도윤에게 정말 무슨 사고라도 생겼다면 소영금처럼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은 진작 그녀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차설아는 소영금이 자기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성도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회복했을 것이다.“도윤이 괜찮대, 그리고 너도 잘 요양해서 빨리 회복하고 퇴원하길 바란대...”소영금이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분명 따뜻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차설아를 당장 죽여버릴 듯이 차갑고 매서웠다.“그럴 리가 없어요. 어머님, 방금 그 간호사도 말했었잖아요, 도윤이 상황이 심각하다고요. 어떻게 갑자기 괜찮아질 수가 있죠? 게다가 일부러 설아 씨와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도 수상하고요...”임채원은 차설아를 모함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부추겼다.“누가 전화를 걸어온 거예요? 설마 속으신 건 아니죠? 빨리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소영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고는 말했다.“도윤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아니요, 그
하지만 차설아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우리 갈 길 가야지. 천신 그룹은 전부터 성대 그룹의 영향을 받지 않았어. 지금도 똑같이 영향을 받지 않을 거야. 성대 그룹이 오랫동안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니 이제 한 번쯤 내려올 때도 되지 않겠어?”배경수는 자신 있는 차설아를 두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 마치 추앙하는 여신을 보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걱정하지 마, 보스. 기자회견은 이미 잘 준비했어. 참석하는 언론이든 같은 업계 사람들이든 모두 쉬운 사람들 아니야. 이제 한때 무한의 영광을 누렸던 성대 그룹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사람들은 생방송으로 똑똑히 지켜보겠지.”배경수는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그와 차설아는 이날만을 위해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고, 너무나도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실패가 아닌 성공해야만 했다.게다가 성도윤의 ‘사고’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성대 그룹은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그래서 천신 그룹이 그 뒤를 잇는 업계 1위 회사로 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다만 차설아가 만약 성도윤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여전히 마음을 굳힐 수 있을지 배경수는 걱정이었다.“보스, 이번에 성도윤이 보스를 구해줬잖아, 의리가 있어. 그럼 보스는... 마음이 약해질 거야?”배경수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무슨 그런 타당치 않은 말을 해. 내가 이렇게 준비를 오랫동안 했는데 난 그저 두 아이 분윳값 벌려고 하는 거야. 무슨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왜 마음이 약해져야 해?”“그게...”배경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곧이어 농담하며 말했다.“보스, 이번에 분윳값 제대로 벌려는 생각인가 본데?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풀리면 앞으로 차씨 가문 수십 대가 분윳값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그러길 바라야지.”차설아가 눈썹을 들썩이고는 고민에 잠겼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
달이가 흥분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그녀는 원이의 1호 팬으로 어려서부터 원이를 못 할 것이 없는 슈퍼 히어로라고 생각했다.달이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은 바로 원이 오빠이고, 두 번째로 대단한 사람은 바로 아름답고 마음씨가 착한 엄마이다!세 번째로 대단한 사람은... 달이는 엄마를 속상하게 한 나쁜 놈 아빠라고 생각했다. 씩씩한 엄마를 울릴 수 있는 사람은 나쁜 놈 아빠밖에 없었으니 말이다.“오빠, 혹시 엄마 다치게 한 나쁜 놈 말이야, 아빠 아닐까? 엄마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쁜 놈 아빠 말고는 엄마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 없잖아.”달이가 동그란 큰 눈을 끔뻑하며 추측했다.“응, 그럴 수 있어.”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겨우 네 살밖에 안 되었지만 원이는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나 곧 나쁜 놈 아빠를 만날 거야. 그때면 엄마를 다치게 한 사람이 아빠가 맞는지 알 수 있겠지. 만약 정말 나쁜 놈 아빠 때문에 엄마가 다치게 되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지만 오빠, 엄마가 그랬어. 나쁜 놈 아빠가 엄청 대단하다고. 오빠 혼자로 혼내줄 수 있겠어?”“당연하지.”원이는 자기 서류 가방을 툭툭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이 안에 엄청 대단한 무기가 들어있어. 무기의 도움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야.”“오빠, 화이팅. 좋은 소식 기다릴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랑 민이 이모를 잘 속일 테니까.”서류 가방을 본 달이도 원이를 굳게 믿었다.두 녀석은 마침내 영상통화를 끝냈다.지금 원이는 성대 그룹 빌딩 밖에 서 있었다.그는 며칠 전에 항공사의 오류를 발견해 성공적으로 해바라기 섬을 떠나고 해안에 도착했다.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성대 그룹에 들어가고, 또 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다.“엄마가 말했어, 나쁜 놈 아빠는 성대 그룹 대표라고. 분명 그 사무실에는 성대 그룹의 생사가 결정될 어마어마한 기밀문서가 숨겨져 있을 거야. 그 기밀문서를 얻을 수
원이는 당황하지 않고 미니 노트북을 자신의 서류 가방에 넣고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둥글고 반짝이는 큰 눈으로 말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그래, 아주 착한 꼬마구나.”사납던 경비원은 하얗고 귀엽게 생긴 원이의 얼굴을 보고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아 부드럽게 말했다.“꼬마야, 이름이 뭐야? 여긴 왜 왔어? 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원이는 자신의 귀여운 얼굴이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전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미모였다.원이는 일부러 눈을 껌벅이며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아저씨, 전 아빠가 퇴근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심심해서 혼자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불쌍하죠?”“이런!”원이의 작은 얼굴이 찡그려지자 경비원은 마음이 아파 의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네 아버지가 누구야? 너무 무책임하구나. 어린아이를 혼자 밖에 내버려 두다니. 만약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어쩔 수 없죠. 아빠가 너무 바쁜걸요. 만약 아저씨가 절 아빠에게 데려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원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아니에요. 아무래도 귀찮게 해드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성대 그룹이 이렇게 크고, 안에 모두 대단한 아저씨와 이모들이 있는데 어떻게 저 같은 어린아이가 들어가겠어요. 만약 진짜 나쁜 사람을 만난다면 제가 도망가면 되죠. 제 걱정 마시고 아저씨 일 보세요.”“그건...”경비원은 좀 망설였다. 성대 그룹은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했으니,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예의 바르고 불쌍한 원이의 모습을 보고 순간 마음이 약해져 말했다.“너처럼 귀여운 아이가 혼자 밖에 있는데 어떻게 이 아저씨가 마음이 놓일 수 있겠어. 이렇게 하자꾸나. 아저씨가 널 라운지로 데려갈 테니, 아빠가 퇴근하시면 가서 찾도록 해. 알겠지?”“너무 좋아요. 아저씨 너무 착하시네요. 기회가 되면 제가 아빠한테 아저씨 월급 올려달라고 할게요.”원이는 진지하게 약속했다.그냥
경비원은 원이를 라운지에 두고 간식을 가지러 뛰어갔다.하지만, 경비원이 작은 케이크와 과일을 들고 라운지로 돌아왔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원이는 모든 카메라를 완벽하게 피해 성대 그룹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바로 성도윤 혼자만 있는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넓고 쓸쓸한 층은 평소 대표 비서나 주주 임원 외에 일반 직원이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요 며칠 성도윤은 연락 두절 되고, 비서와 주주 임원들도 중요한 일 때문에 이 층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듯했다.원이가 대표 사무실 입구에 도착하여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누르자, 문은 쉽게 열렸다.“역시, 성대 그룹 시스템은 엄마가 말한 것처럼 허접하기 짝이 없어. 너무 쉽잖아? 재미없어!”원이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이를 꽉 깨물고는 힘껏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성도윤의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고급스러웠다. 원이가 안에 서 있으니 유난히 작아 보였다.“못된 아빠가 마침 안에 없으니, 엄마가 원하는 서류를 가져가면 되겠네.”원이는 철저한 행동파라,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사무용 의자에 올라가 성도윤의 서류를 열심히 뒤졌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대표로, 지위가 높아 그의 사무실도 당연히 보안이 철저하여 허락 없이는 누구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그의 사무실에는 너무 많은 중요한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지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원이는 한참을 뒤졌지만 특별한 서류를 찾지 못해 포기하려 할 때, ‘비밀유지계약서’가 적힌 서류 봉투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설마 이게 엄마가 말한 중요한 서류인가?”원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 봉투를 열어 확인하려 했다.이때, 성도윤을 찾아 헤매던 임채원은 사무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흥분하여 뛰어 들어왔다.“도윤아, 드디어 왔구나. 그동안 대체...”책상 앞에 있는 작은 원이를 보는 순간, 임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표정은 충격적이고, 또 복잡했다.“너... 너는...”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