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네!”소영금은 차설아의 말을 끊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들도 알다시피 KCL은 하이 테크 기술 분야에서 엄청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요 몇 년 동안 성대 그룹만 비즈니스를 했거든. 천신 그룹 같은 작은 회사가 비즈니스 하려면 비즈니스 할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하는 거야?”“맞아요!”임채원은 소영금의 뒤에 숨어 따라서 건방을 떨었다.“천신 그룹 같은 규모를 가진 회사는 KCL에서 비즈니스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겠죠. 당신들도 그래서 비겁한 수단을 쓴 거 아니에요? 도윤이를 해치면 성대 그룹과 KCL의 계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그 말을 들은 배경수는 화가 나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그 말은 동의하지 않아요, KCL이 막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리가 선뜻 나설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 심지어 KCL 사장과도 사이가 좋다고요!”임채원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허풍을 떨긴, KCL 사장은 당신은커녕 도윤이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어떻게 KCL 사장과 사이가 좋을 수 있죠?”“허풍 아닌데요, 나 진짜 KCL 사장과 각별한 사이인데, 보스가 증명할 수 있어요... 그렇지, 보스?”배경수가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차설아가 덤덤하게 말했다.“장난은 그만해. 빨리 병원 사람들에게 물어봐, 성도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걱정돼.”“아직도 연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설아 씨처럼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네요!”임채원은 흥분된 목소리로 소영금을 부추기며 말했다.“어머님, 저 사람들과 더 말하는 것도 시간 낭비예요. 얼른 경찰에 신고해서 취조를 받게 해야 해요.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면 도윤이를 찾는 시간만 더 지체된다고요!”소영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이 맞아. 어차피 저 사람들과는 말이 안 통하니까 차라리 경찰에 맡기는 게 낫겠어.”“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배경수가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감히 경찰에 신고한다
“어머님, 왜 그러세요? 도윤이에게서 소식이 온 거 아니에요?”임채원이 다급하게 물었다.“응.”소영금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다.“정말 다행이네요. 도윤이 지금 어떤 상황이래요? 어디에 있고요? 혹시 설아 씨가 자기 해쳤다고 말했어요?”임채원이 다급하게 캐물었다.그녀는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로 단정 지었다. 아니면 배경수는 그렇게 허술한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성도윤에게 소식이 온 이상 분명 차설아와 배경수를 가만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소영금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도윤이... 잘 있대. 우리가 설아를 괜히 탓한 모양이야.”“네?”임채원과 배경수가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차설아는 한시름을 놓았다.배경수라면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데 성도윤에게 정말 무슨 사고라도 생겼다면 소영금처럼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은 진작 그녀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차설아는 소영금이 자기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성도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회복했을 것이다.“도윤이 괜찮대, 그리고 너도 잘 요양해서 빨리 회복하고 퇴원하길 바란대...”소영금이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분명 따뜻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차설아를 당장 죽여버릴 듯이 차갑고 매서웠다.“그럴 리가 없어요. 어머님, 방금 그 간호사도 말했었잖아요, 도윤이 상황이 심각하다고요. 어떻게 갑자기 괜찮아질 수가 있죠? 게다가 일부러 설아 씨와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도 수상하고요...”임채원은 차설아를 모함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부추겼다.“누가 전화를 걸어온 거예요? 설마 속으신 건 아니죠? 빨리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소영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고는 말했다.“도윤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아니요, 그
하지만 차설아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우리 갈 길 가야지. 천신 그룹은 전부터 성대 그룹의 영향을 받지 않았어. 지금도 똑같이 영향을 받지 않을 거야. 성대 그룹이 오랫동안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니 이제 한 번쯤 내려올 때도 되지 않겠어?”배경수는 자신 있는 차설아를 두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 마치 추앙하는 여신을 보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걱정하지 마, 보스. 기자회견은 이미 잘 준비했어. 참석하는 언론이든 같은 업계 사람들이든 모두 쉬운 사람들 아니야. 이제 한때 무한의 영광을 누렸던 성대 그룹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사람들은 생방송으로 똑똑히 지켜보겠지.”배경수는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그와 차설아는 이날만을 위해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고, 너무나도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실패가 아닌 성공해야만 했다.게다가 성도윤의 ‘사고’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성대 그룹은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그래서 천신 그룹이 그 뒤를 잇는 업계 1위 회사로 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다만 차설아가 만약 성도윤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여전히 마음을 굳힐 수 있을지 배경수는 걱정이었다.“보스, 이번에 성도윤이 보스를 구해줬잖아, 의리가 있어. 그럼 보스는... 마음이 약해질 거야?”배경수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무슨 그런 타당치 않은 말을 해. 내가 이렇게 준비를 오랫동안 했는데 난 그저 두 아이 분윳값 벌려고 하는 거야. 무슨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왜 마음이 약해져야 해?”“그게...”배경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곧이어 농담하며 말했다.“보스, 이번에 분윳값 제대로 벌려는 생각인가 본데?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풀리면 앞으로 차씨 가문 수십 대가 분윳값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그러길 바라야지.”차설아가 눈썹을 들썩이고는 고민에 잠겼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
달이가 흥분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그녀는 원이의 1호 팬으로 어려서부터 원이를 못 할 것이 없는 슈퍼 히어로라고 생각했다.달이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은 바로 원이 오빠이고, 두 번째로 대단한 사람은 바로 아름답고 마음씨가 착한 엄마이다!세 번째로 대단한 사람은... 달이는 엄마를 속상하게 한 나쁜 놈 아빠라고 생각했다. 씩씩한 엄마를 울릴 수 있는 사람은 나쁜 놈 아빠밖에 없었으니 말이다.“오빠, 혹시 엄마 다치게 한 나쁜 놈 말이야, 아빠 아닐까? 엄마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쁜 놈 아빠 말고는 엄마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 없잖아.”달이가 동그란 큰 눈을 끔뻑하며 추측했다.“응, 그럴 수 있어.”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겨우 네 살밖에 안 되었지만 원이는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나 곧 나쁜 놈 아빠를 만날 거야. 그때면 엄마를 다치게 한 사람이 아빠가 맞는지 알 수 있겠지. 만약 정말 나쁜 놈 아빠 때문에 엄마가 다치게 되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지만 오빠, 엄마가 그랬어. 나쁜 놈 아빠가 엄청 대단하다고. 오빠 혼자로 혼내줄 수 있겠어?”“당연하지.”원이는 자기 서류 가방을 툭툭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이 안에 엄청 대단한 무기가 들어있어. 무기의 도움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야.”“오빠, 화이팅. 좋은 소식 기다릴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랑 민이 이모를 잘 속일 테니까.”서류 가방을 본 달이도 원이를 굳게 믿었다.두 녀석은 마침내 영상통화를 끝냈다.지금 원이는 성대 그룹 빌딩 밖에 서 있었다.그는 며칠 전에 항공사의 오류를 발견해 성공적으로 해바라기 섬을 떠나고 해안에 도착했다.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성대 그룹에 들어가고, 또 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다.“엄마가 말했어, 나쁜 놈 아빠는 성대 그룹 대표라고. 분명 그 사무실에는 성대 그룹의 생사가 결정될 어마어마한 기밀문서가 숨겨져 있을 거야. 그 기밀문서를 얻을 수
원이는 당황하지 않고 미니 노트북을 자신의 서류 가방에 넣고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둥글고 반짝이는 큰 눈으로 말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그래, 아주 착한 꼬마구나.”사납던 경비원은 하얗고 귀엽게 생긴 원이의 얼굴을 보고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아 부드럽게 말했다.“꼬마야, 이름이 뭐야? 여긴 왜 왔어? 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원이는 자신의 귀여운 얼굴이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전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미모였다.원이는 일부러 눈을 껌벅이며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아저씨, 전 아빠가 퇴근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심심해서 혼자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불쌍하죠?”“이런!”원이의 작은 얼굴이 찡그려지자 경비원은 마음이 아파 의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네 아버지가 누구야? 너무 무책임하구나. 어린아이를 혼자 밖에 내버려 두다니. 만약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어쩔 수 없죠. 아빠가 너무 바쁜걸요. 만약 아저씨가 절 아빠에게 데려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원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아니에요. 아무래도 귀찮게 해드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성대 그룹이 이렇게 크고, 안에 모두 대단한 아저씨와 이모들이 있는데 어떻게 저 같은 어린아이가 들어가겠어요. 만약 진짜 나쁜 사람을 만난다면 제가 도망가면 되죠. 제 걱정 마시고 아저씨 일 보세요.”“그건...”경비원은 좀 망설였다. 성대 그룹은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했으니,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예의 바르고 불쌍한 원이의 모습을 보고 순간 마음이 약해져 말했다.“너처럼 귀여운 아이가 혼자 밖에 있는데 어떻게 이 아저씨가 마음이 놓일 수 있겠어. 이렇게 하자꾸나. 아저씨가 널 라운지로 데려갈 테니, 아빠가 퇴근하시면 가서 찾도록 해. 알겠지?”“너무 좋아요. 아저씨 너무 착하시네요. 기회가 되면 제가 아빠한테 아저씨 월급 올려달라고 할게요.”원이는 진지하게 약속했다.그냥
경비원은 원이를 라운지에 두고 간식을 가지러 뛰어갔다.하지만, 경비원이 작은 케이크와 과일을 들고 라운지로 돌아왔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원이는 모든 카메라를 완벽하게 피해 성대 그룹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바로 성도윤 혼자만 있는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넓고 쓸쓸한 층은 평소 대표 비서나 주주 임원 외에 일반 직원이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요 며칠 성도윤은 연락 두절 되고, 비서와 주주 임원들도 중요한 일 때문에 이 층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듯했다.원이가 대표 사무실 입구에 도착하여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누르자, 문은 쉽게 열렸다.“역시, 성대 그룹 시스템은 엄마가 말한 것처럼 허접하기 짝이 없어. 너무 쉽잖아? 재미없어!”원이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이를 꽉 깨물고는 힘껏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성도윤의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고급스러웠다. 원이가 안에 서 있으니 유난히 작아 보였다.“못된 아빠가 마침 안에 없으니, 엄마가 원하는 서류를 가져가면 되겠네.”원이는 철저한 행동파라,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사무용 의자에 올라가 성도윤의 서류를 열심히 뒤졌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대표로, 지위가 높아 그의 사무실도 당연히 보안이 철저하여 허락 없이는 누구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그의 사무실에는 너무 많은 중요한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지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원이는 한참을 뒤졌지만 특별한 서류를 찾지 못해 포기하려 할 때, ‘비밀유지계약서’가 적힌 서류 봉투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설마 이게 엄마가 말한 중요한 서류인가?”원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 봉투를 열어 확인하려 했다.이때, 성도윤을 찾아 헤매던 임채원은 사무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흥분하여 뛰어 들어왔다.“도윤아, 드디어 왔구나. 그동안 대체...”책상 앞에 있는 작은 원이를 보는 순간, 임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표정은 충격적이고, 또 복잡했다.“너... 너는...”
원이는 서류 봉투를 내려놓고 담담한 표정으로 임채원을 바라보았다.“누구세요? 왜 대표님 사무실에 왔어요?”원이의 물음에 임채원은 조금 당황했다.“난...”임채원은 이 꼬마가 성도윤의 핏줄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성도윤의 어린 시절과 똑같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까지 성도윤 판박이였다.“원이야, 난 네 엄마의 좋은 친구야. 날 채원 이모라고 불러.”임채원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원이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이 꼬마가 성도윤의 핏줄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지만, 꼬마의 어머니가 차설아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성도윤 같은 남자의 아이를 낳으려고 갖은 수단을 쓰는 여자는 차설아 말고도 부지기수였다.“우리 엄마 친구예요?”원이는 순수한 얼굴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요 몇 년 동안 차설아가 언급한 친한 친구는 배경윤뿐이었다. 채원이라는 친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배경윤과 차설아가 임채원이라는 여자를 욕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은 들은 적이 있었다. ‘임채원이라는 여자 때문에 엄마가 아빠랑 헤어졌다고 했는데, 설마 이 사람일까?’“맞아, 네 엄마 차설아 맞지? 네 이름은 원이고. 이모가 예전에 너희 엄마랑 얼마나 친했었는 줄 알아?”임채원은 서너 살 된 꼬마는 대충 달래면 된다고 생각해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면서 원이의 신뢰를 얻으려고 했다.원이는 포도알처럼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떠보듯 물었다.“와, 진짜 우리 엄마 친구예요? 혹시 이모 이름이 임채원이에요?”임채원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급 당황했다.“너희 엄마가 나에 대해 말한 적이 있어?”“당연하죠. 엄마가 채원 이모는 아주 예쁘고 착하다고 했어요. 엄마보다 더 예쁘다고 하더니, 오늘 보니 사실이네요. 채원 이모 너무 예뻐요.”원이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의자에서 뛰어내린 다음, 팔을 벌리고 임채원의 품에 안겼다.“원이는 이모가 너무 좋아요. 우리 엄마를 제외하고 본 사람 중에 제일 예쁘고 착한 것 같아요.”“아...”원
“이모는 원이 싫어요?”원이는 눈을 껌벅이며 평소 달이의 모습을 따라 했다. 최선을 다해 애교를 부리며 임채원의 신뢰를 얻으려 했다.임채원은 성도윤과 짜고 차설아를 괴롭힌 나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이는 방법을 강구해서 이 여자를 혼내고 싶었다.“난...”임채원은 꼬마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도저히 싫어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이모, 원이 좀 안아줘요. 이모 우리 엄마 같아요. 너무 좋단 말이에요!”원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작은 손으로 임채원의 손을 잡았다.이 순간, 임채원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주체하지 못하고 원이의 희고 부드러운 볼을 만지며 말했다.“이렇게 귀여운 원이를 이모가 왜 싫어하겠어? 안심해. 이모가 잘 보살펴줄게. 이따가 이모랑 나가서 놀까?”“좋아요! 이모 짱!”원이는 계속 임채원을 껴안고 속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다.임채원은 순두부처럼 부드러운 원이의 흰 볼을 만지며 손을 떼지 못했다.‘만약 내 아이도 죽지 않고 정상적으로 태어났다면, 아마 원이만큼 컸을 텐데. 내 아이도 원이 만큼 귀여웠을까? 이렇게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을까? 원이가 내 아이면 좋겠다...”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이 아이는 차설아의 핏줄이야. 아무리 귀여워도 결국 천한 것의 핏줄이라고!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임채원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원이에 대한 애정을 억제하며 물었다.“원이야, 엄마랑 함께 해안으로 돌아온 거야? 누가 널 사무실로 데리고 왔어? 아빠를 만나고 싶었어?”“맞아요, 아직 아빠를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요?”원이는 능청스럽게 말했다.“네 아빠는 이모의 친한 친구이기도 해. 요즘 성대 그룹으로 오지 않아서 못 만날지도 몰라...”“그럼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당연히 알고 있지! 난 네 아빠랑 친하니까!”“잘됐어요. 이모, 저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원이는 임채원이 분명 자신을 유괴하고 싶어 할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