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후, 차설아는 다리가 거의 회복되어 오늘 깁스를 풀고 퇴원할 수 있었다.배경수, 배경윤과 강우혁은 함께 그녀를 보러왔다.“오늘은 보스가 봉인을 풀고 자유와 활기를 되찾은 날이니 반드시 축하해야 해!”배경수는 기쁜 표정이 역력했고, 차설아를 위해 휠체어까지 준비했다.“당연히 축하해야지! 이미 식당도 예약해 놓았고 서프라이즈까지 준비했어. 언니 분명 좋아할 거야!”배경윤은 활짝 웃으며 신비롭게 말했다.그들은 차를 타고 배경윤이 예약한 중식당에 도착했다.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한 맛있는 음식을 보고 차설아는 입맛이 돋아 허겁지겁 먹었다.“보스,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배경수는 세심하게 갈빗살을 발라낸 뒤 차설아의 그릇에 놓았다. 마치 아이를 돌보듯 살뜰히 챙겼다.배경수는 더 이상 차설아에게 조금의 상처가 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어, 작은 일도 세심하게 돌봐야 했다.차설아는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경수야, 난 다리를 다쳤을 뿐이지 장애인이 아니야. 날 장애인 취급하지 마...”요즘 병원에서 음식을 너무 담백하게 먹어, 차설아는 거의 스님이 될 것 같았다.오늘 모처럼 즐겁게 밥을 먹는데 천천히 먹으라는 잔소리까지 들으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나 절대 천천히 못 먹어! 더 빨리 먹을 거야! 배 터져 죽어도 돼!”차설아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배경수와 입씨름을 벌였다.애석하게도, 배경수의 예상대로 차설아는 목이 메어 기침하기 시작했다.“콜록”!“휴, 내가 말했지? 얼른 물 마셔.”배경수는 가슴이 아파 얼른 미지근한 물을 건네고, 손바닥으로 차설아의 등을 두드렸다.고양이를 달래는 것보다 더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모습이었다.“오빠, 너무 닭살 돋아. 차라리 언니를 갓난아이 취급하는 건 어때?”배경윤은 옆에서 지켜보다가 소름이 돋았다.해안을 주름잡던 바람둥이 배경수가 차설아를 만난 이후로 그야말로 설아 바라기로 되었다. 체면 따위는 버리고 오로지 차설아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강우혁은 감탄했다.“연상연하
배경윤은 작정하고 부추겼다.강우혁도 말을 보탰다.“설아 씨, 경수 씨한테 애교 한번 보여주세요. 설아 씨 애교에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을 거예요.”“그래, 그래! 어서!”배경윤은 박수를 치며 재촉했다.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차마 애교를 부리지 못했다.애교는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고,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그 상대가 배경수라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배경수는 차설아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약간 상처 입은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감추고 말했다.“그만해. 너희 둘 어른한테 장난을 치고 그래? 월말에 결혼식을 치르고 싶지 않은 거야?”그는 정색하고 배경윤과 강우혁을 혼냈다.“너 보스한테 서프라이즈 준비했다며, 왜 아직도 안 줘?”“급해 하지 마! 몇 분만 더 기다려!”배경윤은 시계를 보며 카운트다운을 했다.“10, 9, 8, 7...”그녀가 1을 셀 때 갑자기 식당에서 역동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 무리의 미남들이 무대 위에서 멋진 춤을 추기 시작했다.“언니, 이 잘생긴 남자들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아이돌 skh1이야. 국내 방송사에서 서로 섭외하려고 난리야. 내가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오늘 모셨어... 어때? 너무 멋있지!”배경윤은 자신만만해서 물었다.같은 여자로서, 차설아의 절친으로서, 배경윤은 차설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남자들이 여자를 끼고 술 먹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듯이 여자도 똑같았다.무대 위의 보이그룹 멤버들은 하나같이 키가 크고 잘생기고 춤도 일품이었다. 차설아는 단박에 시선이 끌려 심지어 일어서서 힘껏 박수를 쳤다.“와, 춤 잘 춘다. 애들이 하나 같이 잘 생겼어.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았어!”“맞지? 멋있지? 역시 내가 언니 취향을 안다니까. 한국 최고의 보이그룹이야. 난 저 은발 머리가 제일 좋아. 매화꽃 같은 저 입술을 봐봐. 키스하고 싶게 생겼어!”“맞아, 나도 저 은발 머리가 제일 좋아. 아주 맛있게 생겼잖아. 하하하!”두 여자는 함께 기대어 흥분된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이모, 무슨 일이에요? 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말씀하세요.”“방금 너무 이상해서 원이 도련님 실험실에 강제로 들어갔더니... 글쎄 도련님이 안에 안 계시더라고요. 섬 전체를 찾아봤는데도 없었어요. 아직 그렇게 어린데 나쁜 사람에게 잡혀간 건 아니겠죠? 어떡해요, 아가씨.”민이 이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차설아가 자신에게 두 아이를 믿고 맡겼는데, 자신의 소홀로 인해 원이가 없어졌다. 차설아가 잘못을 물을 건 고사하고, 민이 이모 자신조차 죽음으로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네?”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머리가 하얘졌다.원이와 달이는 차설아의 목숨이고, 그녀가 이 악물고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원이가 지금 사라져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아무리 차설아가 냉정하고 강하다고 해도, 지금은 그저 연약한 어머니에 불과했다.배경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차설아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이미 멘탈이 무너진 민이 이모를 냉정한 눈빛으로 보며 물었다.“이모님, 일단 섬의 CCTV부터 확인해서 원이의 행방을 찾아보고, 원이가 쪽지 같은 걸 남겼는지 찾아보세요. 웬만한 어른보다 똑똑한 아이라 별일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 알겠어요. 바로 확인할게요!”민이 이모는 벌떡 일어서서 CCTV를 찾기 위해 공구실로 달려갔다.배경수는 안전을 위해 일찍이 섬에 감시 카메라와 경보 시스템을 설치했다. 만약 나쁜 사람이 접근하면, 시스템은 즉시 가동되고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경호원들이 가장 먼저 출동할 수 있었다.그 경호원들은 모두 차설아와 배경수가 엄선하여 고르고 키운 고수들이라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잠깐만요!”차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아직 창백했지만, 표정은 냉철했다.“이모님, 휴대폰을 달이에게 주세요. 달이는 아마 원이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차설아는 그제야 요즘 달이가 이상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원이
민이 이모는 달이의 침실에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달이를 불렀다.“음, 다음에 해요. 달이 잘 거예요.”달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달이는 차설아가 ‘엄한 고문’을 해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의 행방을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달이는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살 수 없어 일단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다.“아가씨, 말 들으세요. 엄마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물어봐야 한대요. 빨리 나와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있는 ‘덩어리’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싫어요, 졸려요. 잘 거란 말이에요. 엄마한테 다음에 다시 영상통화 하자고 말하세요.”달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코를 골며 말했다.“난 이미 잠들었어요.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안 들려요.”민이 이모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달이가 뒤집어쓴 이불을 벗기려 했지만, 달이가 꽉 잡고 있어 전혀 잡아당길 수 없었다.한참의 사투 끝에 이미 땀범벅이 된 민이 이모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아가씨,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차설아는 차가운 얼굴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달이에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차설아는 심호흡을 하고 허리에 양손을 얹고 소리쳤다.“차원영!”말이 끝나자 달이는 이불속에서 벌떡 나왔다. 작고 하얀 얼굴은 사과처럼 불그스름하고 한입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엄마, 엄마, 화내지 말아요. 달이가 다 말할게요.”달이는 큰 눈망울을 글썽이며 바로 항복했다.차설아가 두 아이의 본명을 부른다는 것은 몹시 화가 났다는 표현이었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미안해 오빠, 엄마 화나면 진짜 무서우니까, 오빠를 배신할 수밖에 없어.’차설아의 엄숙한 얼굴은 그제서야 부드러워졌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역시 우리 달이는 착해. 말해봐. 오빠 대체 어디 갔어?”“엄마, 절대 달이한테 화내지 않겠다고 먼저 약속해요. 그리고 오빠한테도 화내지 마세요.”달이는 똑똑한 아이라 먼저 차설아와 조건을 내걸
‘장난꾸러기 애들이 제대로 사고를 쳤네!’“차원영, 너... 기다려. 엄마가 오빠를 잡아가고, 너희 둘 제대로 매운맛을 보게 될 거야. 엄마한테 너무 오래 안 맞았지? 그래서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야.”차설아는 이미 화가 나서 카메라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꾸두둑 소리가 났다.달이는 동그란 큰 눈을 끔벅이며 순진하고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고 얼굴도 늙어져요. 꼭 때려야 하겠다면 오빠를 때려요.”“알면서도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큰 잘못이야! 너도 맞아야 해!”차설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 화면에 들어가 자신을 속인 달이를 마구 때리고 싶었다.차설아의 두 아이는 모두 지나치게 영리해서 전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원이는 지능이 뛰어나고, 달이는 잔머리가 많아, 두 아이가 합세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으로 차설아를 자주 놀리곤 했었다.달이는 원이의 1호 팬으로, 어릴 때부터 오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다. 만약 원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틀림없이 달이는 칼을 건네준 사람일 것이다.“차원영, 엄마 진짜 화났어. 당장 무릎 꿇어!”차설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휴대폰 너머의 달이에게 명령했다.화기애애한 모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찾아볼 수 없었다.달이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털썩 무릎을 꿇고, 가엾은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잘못했어요. 화내지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속이지 않을게요...”달이의 귀엽고 불쌍한 표정은 냉혈인간의 마음을 녹이기에도 충분했다.배경수는 마음이 아파서 얼른 차설아를 설득했다.“보스, 달이도 잘못을 깨달은 것 같으니 더 이상 벌하지 말고 일어나게 해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원이를 찾는 일이잖아.”차설아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달이를 보며 물었다.“잘못을 알았다면, 엄마가 속죄할 기회를 줄게. 언제 오빠와 마지막으로 연락했어? 오빠는 지금 어디 있어?”달이는 작은 얼굴을 쳐들고 잠시 생각하더니 순순히 대답했다.“마지막으로 오빠
“그런 것 같아.”배경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혁에 비해 그녀는 훨씬 담담했고, 심지어 이상하게 평온하기까지 했다.“진짜 네 살짜리 아이가 혼자 해안에 왔다고?”“엄격하게 말하면 네 살에 석 달이 조금 넘었지.”“그래도... 어떻게 가능해? 네 살짜리 아이가 이런 일을 했는데 자기는 왜 이렇게 덤덤해? 나쁜 사람을 만날까 봐 걱정도 안 돼?”“이 일이 네 살짜리 아이한테 일어난 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지. 하지만 그 네 살짜리 아이가 우리 원이라면 지극히 정상이야.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거든.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망쳐서 언니한테 잡혀 올 때마다 얻어터졌지... 그런데 맞으면 맞을수록 ‘탈옥’ 기교만 늘 뿐, 전혀 막을 수 없었어. 우리 언니도 원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배경윤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천재적인 수양아들에 대해 말했고, 더없이 자신만만했다.“게다가, 나쁜 사람한테 잡혀가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어린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데? 원이가 나쁜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지.”그래서 배경윤은 원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씨 가문을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원이가 어려서부터 항상 눈엣가시로 여기며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다짐한 성도윤을 걱정하고 있었다.“정말? 그럼 아주 똑똑한 아이네. 설마... 성 대표 아들이야?”강우혁은 놀란 나머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배경윤은 항상 털털한 성격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경각심을 가지고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주시했다.“자기 왜 설아 언니한테 관심이 이렇게 많아? 자꾸 이것저것 캐묻잖아. 아이가 어디 있냐, 아이 아빠가 누구냐, 호구 조사 나왔어?”강우혁은 조금 켕기는 듯 마른기침을 하고 말했다.“자기 질투하는 거야? 설아 씨는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라서 관심을 두고 있는 거야. 내가 설아 씨를 관심하는 건, 결국 우리 자기에 대한 관심이잖아.”“질투가 아니라, 경고하려는 거야. 허튼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우리 언니에게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차설아와 배경수가 성대 그룹 본사에 도착했을 때, 우울해 있던 직원들은 순식간에 들끓었다.성대 그룹에서 4년 넘게 일한 고참 직원이라면 누구나 차설아와 성도윤의 러브스토리를 알고 있었고, 대부분 차성커플 팬들이었다.“왔어, 드디어 왔어. 내가 4년을 기다린 대표님의 부인이 돌아왔다고! 내가 차성커플은 반드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고 했잖아!”“대박, 사모님 더 아름다워지셨어. 몸매도 더 섹시해지고 분위기는 더 쩔어. 사모님이 더 아까운 것 같아.”“대표님이 오랫동안 실종돼서 회사가 혼란에 빠진 지금, 갑자기 사모님이 나타나 성대 그룹을 맡으려는 걸까?”직원들은 차설아의 매혹적인 매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갑자기 성대 그룹을 방문한 목적을 추측했다.차설아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곧장 프런트로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리사 씨, 성도윤을 만나러 왔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온했지만, 차갑고 강한 힘을 갖고 있어 상대방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었다. 이전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사모님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리사는 차설아와 잘 아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 사모님, 오랜만이네요. 대표님은 요 며칠 계속 회사에 오지 않으셨어요. 당분간 뵙기는 어려울 듯하네요.”“며칠이나 안 나왔다고요?”차설아는 눈을 번뜩이며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했다.“네, 지금 저희도 대표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요. 어디에 계신지, 무슨 일이 있으신지 저희는 몰라요. 사모님께서 갑자기 방문하셔서, 저희는 대표님의 소식을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리사는 차설아와 말을 나눈 후에는 전처럼 긴장하지 않고 알고 있는 상황을 모두 알려주었다.차설아가 성도윤의 부인이었을 때, 그녀는 직원들과 사이가 좋았다. 직원들에게 자주 음식을 주고, 선물도 주어서 회사 전체에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차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리사의 말을 믿었다.성도윤도 자신
리사는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 배경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성대 그룹의 직원이에요. 왜 당신 같은 외부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죠?”리사뿐만 아니라 성대 그룹의 모든 직원들은 배경수가 눈에 거슬렸다. 배경수가 차성커플을 갈라놓은 가장 큰 원흉이라고 여겨, 당장이라도 그를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차설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리사에게 말했다.“실례지만, 이 경비원 좀 불러주세요.”리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 당장 부르겠습니다.”성대 그룹에서 차설아의 말은 때로 성도윤의 말보다 더 잘 통할 때가 있었다. 모두들 차설아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곧 경비원이 전전긍긍하며 회사 로비에 도착했다.그는 차설아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사모님, 몰랐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좋은 마음에서 아이를 라운지에 데려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후에 어디로 갔는지, 누가 데려갔는지 저는 정말 몰라요.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저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잘못을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이가 대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가능한 빨리 찾고 싶을 뿐이에요.”“그... 그건...”경비원은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며 차설아의 눈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어제 어린 남자아이가 성대 그룹 밖에 혼자 있는 걸 보고 다가가서 부모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성대 그룹의 직원이라며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아이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걱정되어 데리고 회사 라운지로 와서 아버지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게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에 아이는 사라졌어요... 정말 사실이에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사모님, 제발 믿어주세요.”경비원은 이 어린아이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추측하고 자신이 연루될까 봐 두려웠다.어쨌든, 아이는 자신이 데리고 들어온 것이고, 만약 무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