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후, 차설아는 다리가 거의 회복되어 오늘 깁스를 풀고 퇴원할 수 있었다.배경수, 배경윤과 강우혁은 함께 그녀를 보러왔다.“오늘은 보스가 봉인을 풀고 자유와 활기를 되찾은 날이니 반드시 축하해야 해!”배경수는 기쁜 표정이 역력했고, 차설아를 위해 휠체어까지 준비했다.“당연히 축하해야지! 이미 식당도 예약해 놓았고 서프라이즈까지 준비했어. 언니 분명 좋아할 거야!”배경윤은 활짝 웃으며 신비롭게 말했다.그들은 차를 타고 배경윤이 예약한 중식당에 도착했다.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한 맛있는 음식을 보고 차설아는 입맛이 돋아 허겁지겁 먹었다.“보스,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배경수는 세심하게 갈빗살을 발라낸 뒤 차설아의 그릇에 놓았다. 마치 아이를 돌보듯 살뜰히 챙겼다.배경수는 더 이상 차설아에게 조금의 상처가 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어, 작은 일도 세심하게 돌봐야 했다.차설아는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경수야, 난 다리를 다쳤을 뿐이지 장애인이 아니야. 날 장애인 취급하지 마...”요즘 병원에서 음식을 너무 담백하게 먹어, 차설아는 거의 스님이 될 것 같았다.오늘 모처럼 즐겁게 밥을 먹는데 천천히 먹으라는 잔소리까지 들으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나 절대 천천히 못 먹어! 더 빨리 먹을 거야! 배 터져 죽어도 돼!”차설아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배경수와 입씨름을 벌였다.애석하게도, 배경수의 예상대로 차설아는 목이 메어 기침하기 시작했다.“콜록”!“휴, 내가 말했지? 얼른 물 마셔.”배경수는 가슴이 아파 얼른 미지근한 물을 건네고, 손바닥으로 차설아의 등을 두드렸다.고양이를 달래는 것보다 더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모습이었다.“오빠, 너무 닭살 돋아. 차라리 언니를 갓난아이 취급하는 건 어때?”배경윤은 옆에서 지켜보다가 소름이 돋았다.해안을 주름잡던 바람둥이 배경수가 차설아를 만난 이후로 그야말로 설아 바라기로 되었다. 체면 따위는 버리고 오로지 차설아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강우혁은 감탄했다.“연상연하
배경윤은 작정하고 부추겼다.강우혁도 말을 보탰다.“설아 씨, 경수 씨한테 애교 한번 보여주세요. 설아 씨 애교에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을 거예요.”“그래, 그래! 어서!”배경윤은 박수를 치며 재촉했다.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차마 애교를 부리지 못했다.애교는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고,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그 상대가 배경수라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배경수는 차설아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약간 상처 입은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감추고 말했다.“그만해. 너희 둘 어른한테 장난을 치고 그래? 월말에 결혼식을 치르고 싶지 않은 거야?”그는 정색하고 배경윤과 강우혁을 혼냈다.“너 보스한테 서프라이즈 준비했다며, 왜 아직도 안 줘?”“급해 하지 마! 몇 분만 더 기다려!”배경윤은 시계를 보며 카운트다운을 했다.“10, 9, 8, 7...”그녀가 1을 셀 때 갑자기 식당에서 역동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 무리의 미남들이 무대 위에서 멋진 춤을 추기 시작했다.“언니, 이 잘생긴 남자들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아이돌 skh1이야. 국내 방송사에서 서로 섭외하려고 난리야. 내가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오늘 모셨어... 어때? 너무 멋있지!”배경윤은 자신만만해서 물었다.같은 여자로서, 차설아의 절친으로서, 배경윤은 차설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남자들이 여자를 끼고 술 먹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듯이 여자도 똑같았다.무대 위의 보이그룹 멤버들은 하나같이 키가 크고 잘생기고 춤도 일품이었다. 차설아는 단박에 시선이 끌려 심지어 일어서서 힘껏 박수를 쳤다.“와, 춤 잘 춘다. 애들이 하나 같이 잘 생겼어.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았어!”“맞지? 멋있지? 역시 내가 언니 취향을 안다니까. 한국 최고의 보이그룹이야. 난 저 은발 머리가 제일 좋아. 매화꽃 같은 저 입술을 봐봐. 키스하고 싶게 생겼어!”“맞아, 나도 저 은발 머리가 제일 좋아. 아주 맛있게 생겼잖아. 하하하!”두 여자는 함께 기대어 흥분된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이모, 무슨 일이에요? 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말씀하세요.”“방금 너무 이상해서 원이 도련님 실험실에 강제로 들어갔더니... 글쎄 도련님이 안에 안 계시더라고요. 섬 전체를 찾아봤는데도 없었어요. 아직 그렇게 어린데 나쁜 사람에게 잡혀간 건 아니겠죠? 어떡해요, 아가씨.”민이 이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차설아가 자신에게 두 아이를 믿고 맡겼는데, 자신의 소홀로 인해 원이가 없어졌다. 차설아가 잘못을 물을 건 고사하고, 민이 이모 자신조차 죽음으로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네?”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머리가 하얘졌다.원이와 달이는 차설아의 목숨이고, 그녀가 이 악물고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원이가 지금 사라져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아무리 차설아가 냉정하고 강하다고 해도, 지금은 그저 연약한 어머니에 불과했다.배경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차설아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이미 멘탈이 무너진 민이 이모를 냉정한 눈빛으로 보며 물었다.“이모님, 일단 섬의 CCTV부터 확인해서 원이의 행방을 찾아보고, 원이가 쪽지 같은 걸 남겼는지 찾아보세요. 웬만한 어른보다 똑똑한 아이라 별일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 알겠어요. 바로 확인할게요!”민이 이모는 벌떡 일어서서 CCTV를 찾기 위해 공구실로 달려갔다.배경수는 안전을 위해 일찍이 섬에 감시 카메라와 경보 시스템을 설치했다. 만약 나쁜 사람이 접근하면, 시스템은 즉시 가동되고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경호원들이 가장 먼저 출동할 수 있었다.그 경호원들은 모두 차설아와 배경수가 엄선하여 고르고 키운 고수들이라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잠깐만요!”차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아직 창백했지만, 표정은 냉철했다.“이모님, 휴대폰을 달이에게 주세요. 달이는 아마 원이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차설아는 그제야 요즘 달이가 이상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원이
민이 이모는 달이의 침실에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달이를 불렀다.“음, 다음에 해요. 달이 잘 거예요.”달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달이는 차설아가 ‘엄한 고문’을 해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의 행방을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달이는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살 수 없어 일단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다.“아가씨, 말 들으세요. 엄마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물어봐야 한대요. 빨리 나와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있는 ‘덩어리’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싫어요, 졸려요. 잘 거란 말이에요. 엄마한테 다음에 다시 영상통화 하자고 말하세요.”달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코를 골며 말했다.“난 이미 잠들었어요.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안 들려요.”민이 이모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달이가 뒤집어쓴 이불을 벗기려 했지만, 달이가 꽉 잡고 있어 전혀 잡아당길 수 없었다.한참의 사투 끝에 이미 땀범벅이 된 민이 이모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아가씨,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차설아는 차가운 얼굴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달이에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차설아는 심호흡을 하고 허리에 양손을 얹고 소리쳤다.“차원영!”말이 끝나자 달이는 이불속에서 벌떡 나왔다. 작고 하얀 얼굴은 사과처럼 불그스름하고 한입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엄마, 엄마, 화내지 말아요. 달이가 다 말할게요.”달이는 큰 눈망울을 글썽이며 바로 항복했다.차설아가 두 아이의 본명을 부른다는 것은 몹시 화가 났다는 표현이었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미안해 오빠, 엄마 화나면 진짜 무서우니까, 오빠를 배신할 수밖에 없어.’차설아의 엄숙한 얼굴은 그제서야 부드러워졌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역시 우리 달이는 착해. 말해봐. 오빠 대체 어디 갔어?”“엄마, 절대 달이한테 화내지 않겠다고 먼저 약속해요. 그리고 오빠한테도 화내지 마세요.”달이는 똑똑한 아이라 먼저 차설아와 조건을 내걸
‘장난꾸러기 애들이 제대로 사고를 쳤네!’“차원영, 너... 기다려. 엄마가 오빠를 잡아가고, 너희 둘 제대로 매운맛을 보게 될 거야. 엄마한테 너무 오래 안 맞았지? 그래서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야.”차설아는 이미 화가 나서 카메라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꾸두둑 소리가 났다.달이는 동그란 큰 눈을 끔벅이며 순진하고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고 얼굴도 늙어져요. 꼭 때려야 하겠다면 오빠를 때려요.”“알면서도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큰 잘못이야! 너도 맞아야 해!”차설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 화면에 들어가 자신을 속인 달이를 마구 때리고 싶었다.차설아의 두 아이는 모두 지나치게 영리해서 전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원이는 지능이 뛰어나고, 달이는 잔머리가 많아, 두 아이가 합세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으로 차설아를 자주 놀리곤 했었다.달이는 원이의 1호 팬으로, 어릴 때부터 오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다. 만약 원이가 사람을 죽였다면, 틀림없이 달이는 칼을 건네준 사람일 것이다.“차원영, 엄마 진짜 화났어. 당장 무릎 꿇어!”차설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휴대폰 너머의 달이에게 명령했다.화기애애한 모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찾아볼 수 없었다.달이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털썩 무릎을 꿇고, 가엾은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잘못했어요. 화내지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속이지 않을게요...”달이의 귀엽고 불쌍한 표정은 냉혈인간의 마음을 녹이기에도 충분했다.배경수는 마음이 아파서 얼른 차설아를 설득했다.“보스, 달이도 잘못을 깨달은 것 같으니 더 이상 벌하지 말고 일어나게 해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원이를 찾는 일이잖아.”차설아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달이를 보며 물었다.“잘못을 알았다면, 엄마가 속죄할 기회를 줄게. 언제 오빠와 마지막으로 연락했어? 오빠는 지금 어디 있어?”달이는 작은 얼굴을 쳐들고 잠시 생각하더니 순순히 대답했다.“마지막으로 오빠
“그런 것 같아.”배경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혁에 비해 그녀는 훨씬 담담했고, 심지어 이상하게 평온하기까지 했다.“진짜 네 살짜리 아이가 혼자 해안에 왔다고?”“엄격하게 말하면 네 살에 석 달이 조금 넘었지.”“그래도... 어떻게 가능해? 네 살짜리 아이가 이런 일을 했는데 자기는 왜 이렇게 덤덤해? 나쁜 사람을 만날까 봐 걱정도 안 돼?”“이 일이 네 살짜리 아이한테 일어난 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지. 하지만 그 네 살짜리 아이가 우리 원이라면 지극히 정상이야.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거든.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망쳐서 언니한테 잡혀 올 때마다 얻어터졌지... 그런데 맞으면 맞을수록 ‘탈옥’ 기교만 늘 뿐, 전혀 막을 수 없었어. 우리 언니도 원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배경윤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천재적인 수양아들에 대해 말했고, 더없이 자신만만했다.“게다가, 나쁜 사람한테 잡혀가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어린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데? 원이가 나쁜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지.”그래서 배경윤은 원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씨 가문을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원이가 어려서부터 항상 눈엣가시로 여기며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다짐한 성도윤을 걱정하고 있었다.“정말? 그럼 아주 똑똑한 아이네. 설마... 성 대표 아들이야?”강우혁은 놀란 나머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배경윤은 항상 털털한 성격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경각심을 가지고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주시했다.“자기 왜 설아 언니한테 관심이 이렇게 많아? 자꾸 이것저것 캐묻잖아. 아이가 어디 있냐, 아이 아빠가 누구냐, 호구 조사 나왔어?”강우혁은 조금 켕기는 듯 마른기침을 하고 말했다.“자기 질투하는 거야? 설아 씨는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라서 관심을 두고 있는 거야. 내가 설아 씨를 관심하는 건, 결국 우리 자기에 대한 관심이잖아.”“질투가 아니라, 경고하려는 거야. 허튼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우리 언니에게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차설아와 배경수가 성대 그룹 본사에 도착했을 때, 우울해 있던 직원들은 순식간에 들끓었다.성대 그룹에서 4년 넘게 일한 고참 직원이라면 누구나 차설아와 성도윤의 러브스토리를 알고 있었고, 대부분 차성커플 팬들이었다.“왔어, 드디어 왔어. 내가 4년을 기다린 대표님의 부인이 돌아왔다고! 내가 차성커플은 반드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고 했잖아!”“대박, 사모님 더 아름다워지셨어. 몸매도 더 섹시해지고 분위기는 더 쩔어. 사모님이 더 아까운 것 같아.”“대표님이 오랫동안 실종돼서 회사가 혼란에 빠진 지금, 갑자기 사모님이 나타나 성대 그룹을 맡으려는 걸까?”직원들은 차설아의 매혹적인 매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갑자기 성대 그룹을 방문한 목적을 추측했다.차설아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곧장 프런트로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리사 씨, 성도윤을 만나러 왔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온했지만, 차갑고 강한 힘을 갖고 있어 상대방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었다. 이전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사모님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리사는 차설아와 잘 아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 사모님, 오랜만이네요. 대표님은 요 며칠 계속 회사에 오지 않으셨어요. 당분간 뵙기는 어려울 듯하네요.”“며칠이나 안 나왔다고요?”차설아는 눈을 번뜩이며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했다.“네, 지금 저희도 대표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요. 어디에 계신지, 무슨 일이 있으신지 저희는 몰라요. 사모님께서 갑자기 방문하셔서, 저희는 대표님의 소식을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리사는 차설아와 말을 나눈 후에는 전처럼 긴장하지 않고 알고 있는 상황을 모두 알려주었다.차설아가 성도윤의 부인이었을 때, 그녀는 직원들과 사이가 좋았다. 직원들에게 자주 음식을 주고, 선물도 주어서 회사 전체에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차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리사의 말을 믿었다.성도윤도 자신
리사는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 배경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성대 그룹의 직원이에요. 왜 당신 같은 외부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죠?”리사뿐만 아니라 성대 그룹의 모든 직원들은 배경수가 눈에 거슬렸다. 배경수가 차성커플을 갈라놓은 가장 큰 원흉이라고 여겨, 당장이라도 그를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차설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리사에게 말했다.“실례지만, 이 경비원 좀 불러주세요.”리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 당장 부르겠습니다.”성대 그룹에서 차설아의 말은 때로 성도윤의 말보다 더 잘 통할 때가 있었다. 모두들 차설아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곧 경비원이 전전긍긍하며 회사 로비에 도착했다.그는 차설아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사모님, 몰랐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좋은 마음에서 아이를 라운지에 데려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후에 어디로 갔는지, 누가 데려갔는지 저는 정말 몰라요.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저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잘못을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이가 대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가능한 빨리 찾고 싶을 뿐이에요.”“그... 그건...”경비원은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며 차설아의 눈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어제 어린 남자아이가 성대 그룹 밖에 혼자 있는 걸 보고 다가가서 부모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성대 그룹의 직원이라며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아이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걱정되어 데리고 회사 라운지로 와서 아버지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게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에 아이는 사라졌어요... 정말 사실이에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사모님, 제발 믿어주세요.”경비원은 이 어린아이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추측하고 자신이 연루될까 봐 두려웠다.어쨌든, 아이는 자신이 데리고 들어온 것이고, 만약 무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