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는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 배경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성대 그룹의 직원이에요. 왜 당신 같은 외부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죠?”리사뿐만 아니라 성대 그룹의 모든 직원들은 배경수가 눈에 거슬렸다. 배경수가 차성커플을 갈라놓은 가장 큰 원흉이라고 여겨, 당장이라도 그를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차설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리사에게 말했다.“실례지만, 이 경비원 좀 불러주세요.”리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 당장 부르겠습니다.”성대 그룹에서 차설아의 말은 때로 성도윤의 말보다 더 잘 통할 때가 있었다. 모두들 차설아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곧 경비원이 전전긍긍하며 회사 로비에 도착했다.그는 차설아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사모님, 몰랐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좋은 마음에서 아이를 라운지에 데려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후에 어디로 갔는지, 누가 데려갔는지 저는 정말 몰라요.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저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잘못을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이가 대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가능한 빨리 찾고 싶을 뿐이에요.”“그... 그건...”경비원은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며 차설아의 눈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어제 어린 남자아이가 성대 그룹 밖에 혼자 있는 걸 보고 다가가서 부모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성대 그룹의 직원이라며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아이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걱정되어 데리고 회사 라운지로 와서 아버지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게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에 아이는 사라졌어요... 정말 사실이에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사모님, 제발 믿어주세요.”경비원은 이 어린아이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추측하고 자신이 연루될까 봐 두려웠다.어쨌든, 아이는 자신이 데리고 들어온 것이고, 만약 무
“성진?”차설아는 차가운 눈으로 들어온 남자를 보더니 이내 눈썹을 찡그리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차설아가 성가의 며느리로 있을 때, 제일 먼저 나서서 반대하며, 암암리에 차설아를 괴롭혔던 인간이다.그는 성주혁 형제의 손자로서, 엄격히 말하면 성도윤의 사촌 동생이었다. 줄곧 성대 그룹의 해외 업무를 맡아왔는데, 왜 갑자기 해안으로 돌아온 것일까?“성, 성 부대표님!”리사와 나머지 직원들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마치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인자인 성진이 성대 그룹에서 여전히 큰 지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둘째 형수,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네요?”성진은 고급스럽게 맞춤 제작된 짙은 색 슈트를 입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뜨거운 시선으로 차설아를 훑어보았다.“역시 나이 든 여자가 어린 여자보다 더 느낌 있고 설렌다니까.”배경수는 순간 화가 나서 큰 몸으로 차설아 앞을 가로막고, 서늘한 얼굴로 경고했다.“부대표님, 언행을 주의해 주세요. 누가 그쪽 둘째 형수죠? 계속 호칭을 함부로 한다면 제 변호사에게 고소장을 받게 될 거예요.”성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죄송해요. 설아 씨가 저희 형이랑 이혼한 지 4년 됐다는 걸 제가 깜빡했네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 한 번 형수는 영원한 형수예요. 비록 지금은 도윤 형과 이혼했다고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영원히 제 둘째 형수예요. 형수랑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강진은 말을 마치고 시선을 배경수를 넘어 차설아에게 향했다.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뜨거운 눈빛이었다.“계속 본다고?”배경수는 참다못해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잘 모르나 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내가 그 눈을 깨끗하게 씻어줄까?”성진은 예전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자신이 성도윤 다음으로 성가에서 지위가 있다는 것을 믿고, 해안에서 날
하지만 성진이 먼저 말을 꺼낸 이상, 차설아도 번거로움을 덜었다.게다가, 성도윤은 늘 신중한 사람이라 성대 그룹의 권력을 손에 틀어쥐고, 이 사촌 동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모든 권리를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에게 넘겼다? 성도윤, 간이 큰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 거야?’차설아는 성대 그룹이 천신 그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려해, 이 기회를 빌려 성진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바보 같은 성진, 내가 조금만 손을 쓰면 바로 넘어오겠는데?’“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만, 작은 요구가 있어요.”성진은 복잡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차설아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말해보세요.”“저랑 하룻밤을 같이 보내줘요.”성진의 말이 끝나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성도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발언이었다.배경수는 더욱 화가 나서 성진의 멱살을 잡고, 격분하여 주먹을 치켜들었다.“너 이 자식 죽고 싶어 환장했어? 감히 우리 보스를 넘봐?”사실, 성진이 차설아에게 무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차설아가 성진의 형수였을 때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여러 번 말했었다.그때는 차설아에게 흑심을 품어 불순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차설아는 장난감에 불과해 성도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굴욕감을 줬다.하지만 이번에는, 차설아에게 정말 관심이 생겼다.“경수야, 그만해.”차설아는 다시 한번 배경수를 제지하고 성진을 향해 말했다.“진짜 나랑 하룻밤을 보낼 용기가 있는 거예요?”“하하, 말을 재밌게 하네요. 다들 얻지 못해 안달인 이 영광을 제가 왜 용기가 없어 마다하겠어요?”“영광이라고요?”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부대표님이 그 영광을 담을 그릇이 되는지 모르겠네요.”“하하, 아주 기대되는걸요?”성진은 지금의 차설아가 점점 재미있다고 느꼈다.단지 몇 마디 농담으로 예전의 풋풋하고 수줍은 차설아의 모습을 되새기려 했을 뿐인데,
원이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화면에서는 뽀로로가 방송되더니, 한 시간 넘게 재생되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정상적인 화면에는 원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잘라낸 것이 분명했다.“어떻게 된 거죠? 이 구역의 감시 시스템이 해킹된 거예요?”“철벽과도 같은 성대 그룹의 안보 시스템이 뚫린 것도 모자라, 이런 수모까지 당했으니, 상대는 분명 의도가 불순해요. 이렇게 되면 꼬마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요?”“안 되겠어요. 당장 비상팀을 구성하고, 사이버 경찰에 수사 지원을 요청해야 해요!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아요.”IT팀 직원들은 화면 속의 뽀로로를 보며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차설아는 걱정하기는커녕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는 표정이었다.뽀로로는 딱 봐도 원이의 작품이었다. 추적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손을 쓴 것이다.‘차진원! 네 놈 담이 점점 커지네. 몰래 해안으로 온 것도 모자라, 역추적 놀이까지 하고... 기다려, 만나게 되면 제대로 손봐줄 테니까!’차설아는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묵묵히 속으로 계획했다.배경수도 이것이 원이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에게 물었다.“보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해?”“신고는 안 돼!”차설아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해.”만약 경찰이 개입한다면 원이의 정체도 분명 드러날 것이니, 많은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다.차설아는 아직 달이와 원이를 세상에 공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배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보스 말이 맞아, 당장 사람을 풀어서 원이를 찾도록 할게.”배가는 해안에서 여전히 세력이 있었다. 특히 지하세력은 아주 강력해 어린아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차설아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원이 이 자식, 우리가 자기를 찾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원이는 요 몇 년 동안 계속 나와 머
성진이 그 말을 듣더니 오랫동안 기다렸던 게임을 시작하는 듯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흥분의 감정이 내비쳤다.“걱정할 것 없어요, 저는 변태도 아니고 여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이상한 짓을 강요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랑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잠깐만 가 있으면 돼요.”“네가 변태가 아니라면 세상에 변태가 어디 더 있겠어?”배경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성진의 멱살을 잡더니 그를 벽에 세게 밀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진, 너는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잖아. 보스를 엄청 오랫동안 눈여겨봤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경고하는데, 만약 보스 머리카락이라도 건드린다면 너 죽여버릴 거야!”“경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데? 배짱이 있으면 날 어디 한 번 죽여봐.”성진은 배경수의 밀치기를 당하면서도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조롱했다.“하지만 설아 씨 동의 없이 날 죽이기는커녕 내 머리카락도 못 건드릴 거잖아. 소문에 의하면 두 사람 엄청 각별한 사이라고 하던데, 지금 보니 당신은 결국 설아 씨의 한 마리 개일 뿐이었군. 그런데 뭐가 그렇게 잘났어?”“닥쳐!”배경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 긴 손가락으로 성진의 목을 꽉 조였다.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모두 놀라 멍해졌고, 경비원들이 얼른 다가가 말렸다.하지만 상대는 해안의 악동, 배경수였다.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결국 차설아가 나서고서야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배경수를 보며 말했다.“경수야, 나도 결정을 내릴 때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거야. 요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앞으로 이런 상황은 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배경수는 이번에 정말 화가 났다. 더는 전처럼 상냥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차가운 얼굴을 하며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그럼 저 남자랑 정말 하룻밤을 보낼 생각인 거야?”“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부대표님과 약속했던 일도 절대 번복하지 않을 거야. 부대표님도 다른 나쁜 마음이 없으리라 믿고 있어.”
차설아는 마음이 괴로워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어쩔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그건 물어보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았는데.”그녀에게 있어서 배경수는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자, 그녀와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가?수많은 소녀들을 매료시킨 배경수의 깊은 눈망울은 기대에 가득한 반짝이는 눈빛으로부터 점점 실망으로 가득한 채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알겠어, 보스,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미 대답을 알았으니까.”“경수야, 왜 그래? 분명 내 마음 알잖아. 왜 이러는...”“그냥 이러자!”배경수는 애써 섭섭한 마음을 꾹 누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짜내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더는 보스의 약혼자가 아니야. 앞으로 우린 단순한 누나 동생 사이라고. 난 여전히 보스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다만 보스는 내 구속을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도 돼. 보스가 정말 선택하고 싶은 남자를 선택하라고.”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배경수는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그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사랑을 강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차설아는 그와 애써 사랑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이럴 때 배경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었다.“경수야,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나랑 헤어지겠다고? 나 포기하는 거야?”차설아도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팔을 덥석 잡고는 다급하게 말했다.“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어, 네 입장을 생각하지도 않고 말을 내뱉고 말았어. 잘못했어... 나 다른 남자 선택할 것도 없어, 너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화내지 마. 나 포기하지도 말고, 응?”그녀의 말은 비굴하게 들렸지만 모두 차설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차설아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기다릴 게 뭐가 더 있겠어요? 지금 당장 출발해요!”그렇게 두 사람은 성대 그룹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다.직원들은 하나같이 김빠진 듯이 실망의 얼굴을 드러냈다.“4년 만에 사모님이 이렇게나 달라졌다니.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는 전처럼 순진하고 착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이 남자 저 남자 다 건드리는 팜므 파탈이 되었구먼!”“이제 보니 ‘차성 커플’도 더러워진 것 같아. 나 팜므 파탈 안 좋아한단 말이야. 팜므 파탈인 사람이 어떻게 우리 대표님에게 어울리겠어. 대표님은 그동안 다른 여자 건드린 적도 없는데 성진 부대표님같은 바람둥이도 놓지 않으려고 하네, 우리 대표님만 불쌍하지...”“어디 대표님만 불쌍할 뿐이야? 심지어 배경수 씨도 엄청 불쌍하잖아. 배경수 씨는 뭔 죄야.”벌써 차설아에게 탈덕한 직원들도 있었다.그중 어떤 직원이 한껏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참, 그거 들었어? 이번에 대표님께서 회사로 오지 않은 게 심한 상처를 입어서래. 심지어 사모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거래.”“어디 상처를 입은 것뿐이야.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대표님은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대.”“뭐? 그럼 성진 부대표님이 대표님 자리를 이어받을 건가? 이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대표님이 무섭게 굴었어도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이야. 그런데 성진 부대표님은 사람이 너무 소인배야. 만약 부대표님이 정말 성대 그룹 대표님으로 된다면 난 바로 그만둘 거야!”사람들이 한창 열띤 토론을 펼친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많이 한가해요?”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도윤처럼 오랫동안 성대 그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서실장 진무열이었다.“실, 실장님!”사람들은 바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진무열은 성도윤의 심복으로 성대 그룹에서도 지위가 대단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진무열을 성도윤처럼 무섭게 생각하기도 했다.“방금 뭘 의논하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실버 부가티 베이론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조수석에 앉은 차설아는 덤덤한 얼굴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성진이 좋은 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오늘 밤에 많은 함정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다른 사람을 상대하면 몰라도 성진같이 실속 없는 바보를 상대하는 건 그녀는 누구보다 잘했으니까 말이다.차 안에는 경쾌한 리듬의 록 스타일 노래가 흘렀다.성진은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리듬을 따라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마디가 뚜렷한 길고 가는 그의 손가락은 어둑어둑한 가로등 불빛에 비쳐 유난히 보기 좋았다.“당신이 아직 자지 않았다면, 내가 아직 그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맨정신을 한 것도 죄라면, 제발 함께하기로 한 약속을 무르지 말아요, 제발 떠나지 말아요...”남자는 몸을 흔들며 유쾌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성도윤과 비슷한 옆모습을 가진 그는 완벽한 이목구비와 정교한 윤곽을 자랑했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차설아는 한순간 바보 같은 성진이 혹시 잘생긴 남자의 탈을 썼는지 의심이 갔다. 평소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으니 말이다.“부대표님 노래를 잘할 줄은 몰랐네요. 파이브 밴드의 노래가 잔잔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자칫하면 과하게 들릴 수 있는데 부대표님은 아주 적절하게 부르시네요, 심지어 원곡보다 듣기 좋은데요...”차설아가 진심으로 칭찬했다.바보 같은 성진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설아를 놀라게 했다.“그래요?”성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옆에 앉은 여자를 힐끔 바라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제가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설아 씨가 처음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도 설아 씨보다는 못하죠.”“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럼 제가 노래한 걸 들어본 적이 있는 거예요?”“들어보고 말고요, 심지어 설아 씨 열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