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차설아는 차가운 눈으로 들어온 남자를 보더니 이내 눈썹을 찡그리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차설아가 성가의 며느리로 있을 때, 제일 먼저 나서서 반대하며, 암암리에 차설아를 괴롭혔던 인간이다.그는 성주혁 형제의 손자로서, 엄격히 말하면 성도윤의 사촌 동생이었다. 줄곧 성대 그룹의 해외 업무를 맡아왔는데, 왜 갑자기 해안으로 돌아온 것일까?“성, 성 부대표님!”리사와 나머지 직원들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마치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인자인 성진이 성대 그룹에서 여전히 큰 지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둘째 형수,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네요?”성진은 고급스럽게 맞춤 제작된 짙은 색 슈트를 입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뜨거운 시선으로 차설아를 훑어보았다.“역시 나이 든 여자가 어린 여자보다 더 느낌 있고 설렌다니까.”배경수는 순간 화가 나서 큰 몸으로 차설아 앞을 가로막고, 서늘한 얼굴로 경고했다.“부대표님, 언행을 주의해 주세요. 누가 그쪽 둘째 형수죠? 계속 호칭을 함부로 한다면 제 변호사에게 고소장을 받게 될 거예요.”성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죄송해요. 설아 씨가 저희 형이랑 이혼한 지 4년 됐다는 걸 제가 깜빡했네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 한 번 형수는 영원한 형수예요. 비록 지금은 도윤 형과 이혼했다고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영원히 제 둘째 형수예요. 형수랑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강진은 말을 마치고 시선을 배경수를 넘어 차설아에게 향했다.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뜨거운 눈빛이었다.“계속 본다고?”배경수는 참다못해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잘 모르나 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내가 그 눈을 깨끗하게 씻어줄까?”성진은 예전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자신이 성도윤 다음으로 성가에서 지위가 있다는 것을 믿고, 해안에서 날
하지만 성진이 먼저 말을 꺼낸 이상, 차설아도 번거로움을 덜었다.게다가, 성도윤은 늘 신중한 사람이라 성대 그룹의 권력을 손에 틀어쥐고, 이 사촌 동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모든 권리를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에게 넘겼다? 성도윤, 간이 큰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 거야?’차설아는 성대 그룹이 천신 그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려해, 이 기회를 빌려 성진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바보 같은 성진, 내가 조금만 손을 쓰면 바로 넘어오겠는데?’“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만, 작은 요구가 있어요.”성진은 복잡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차설아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말해보세요.”“저랑 하룻밤을 같이 보내줘요.”성진의 말이 끝나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성도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발언이었다.배경수는 더욱 화가 나서 성진의 멱살을 잡고, 격분하여 주먹을 치켜들었다.“너 이 자식 죽고 싶어 환장했어? 감히 우리 보스를 넘봐?”사실, 성진이 차설아에게 무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차설아가 성진의 형수였을 때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여러 번 말했었다.그때는 차설아에게 흑심을 품어 불순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차설아는 장난감에 불과해 성도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굴욕감을 줬다.하지만 이번에는, 차설아에게 정말 관심이 생겼다.“경수야, 그만해.”차설아는 다시 한번 배경수를 제지하고 성진을 향해 말했다.“진짜 나랑 하룻밤을 보낼 용기가 있는 거예요?”“하하, 말을 재밌게 하네요. 다들 얻지 못해 안달인 이 영광을 제가 왜 용기가 없어 마다하겠어요?”“영광이라고요?”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부대표님이 그 영광을 담을 그릇이 되는지 모르겠네요.”“하하, 아주 기대되는걸요?”성진은 지금의 차설아가 점점 재미있다고 느꼈다.단지 몇 마디 농담으로 예전의 풋풋하고 수줍은 차설아의 모습을 되새기려 했을 뿐인데,
원이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화면에서는 뽀로로가 방송되더니, 한 시간 넘게 재생되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정상적인 화면에는 원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잘라낸 것이 분명했다.“어떻게 된 거죠? 이 구역의 감시 시스템이 해킹된 거예요?”“철벽과도 같은 성대 그룹의 안보 시스템이 뚫린 것도 모자라, 이런 수모까지 당했으니, 상대는 분명 의도가 불순해요. 이렇게 되면 꼬마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요?”“안 되겠어요. 당장 비상팀을 구성하고, 사이버 경찰에 수사 지원을 요청해야 해요!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아요.”IT팀 직원들은 화면 속의 뽀로로를 보며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차설아는 걱정하기는커녕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는 표정이었다.뽀로로는 딱 봐도 원이의 작품이었다. 추적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손을 쓴 것이다.‘차진원! 네 놈 담이 점점 커지네. 몰래 해안으로 온 것도 모자라, 역추적 놀이까지 하고... 기다려, 만나게 되면 제대로 손봐줄 테니까!’차설아는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묵묵히 속으로 계획했다.배경수도 이것이 원이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에게 물었다.“보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해?”“신고는 안 돼!”차설아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해.”만약 경찰이 개입한다면 원이의 정체도 분명 드러날 것이니, 많은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다.차설아는 아직 달이와 원이를 세상에 공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배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보스 말이 맞아, 당장 사람을 풀어서 원이를 찾도록 할게.”배가는 해안에서 여전히 세력이 있었다. 특히 지하세력은 아주 강력해 어린아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차설아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원이 이 자식, 우리가 자기를 찾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원이는 요 몇 년 동안 계속 나와 머
성진이 그 말을 듣더니 오랫동안 기다렸던 게임을 시작하는 듯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흥분의 감정이 내비쳤다.“걱정할 것 없어요, 저는 변태도 아니고 여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이상한 짓을 강요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랑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잠깐만 가 있으면 돼요.”“네가 변태가 아니라면 세상에 변태가 어디 더 있겠어?”배경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성진의 멱살을 잡더니 그를 벽에 세게 밀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진, 너는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잖아. 보스를 엄청 오랫동안 눈여겨봤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경고하는데, 만약 보스 머리카락이라도 건드린다면 너 죽여버릴 거야!”“경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데? 배짱이 있으면 날 어디 한 번 죽여봐.”성진은 배경수의 밀치기를 당하면서도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조롱했다.“하지만 설아 씨 동의 없이 날 죽이기는커녕 내 머리카락도 못 건드릴 거잖아. 소문에 의하면 두 사람 엄청 각별한 사이라고 하던데, 지금 보니 당신은 결국 설아 씨의 한 마리 개일 뿐이었군. 그런데 뭐가 그렇게 잘났어?”“닥쳐!”배경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 긴 손가락으로 성진의 목을 꽉 조였다.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모두 놀라 멍해졌고, 경비원들이 얼른 다가가 말렸다.하지만 상대는 해안의 악동, 배경수였다.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결국 차설아가 나서고서야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배경수를 보며 말했다.“경수야, 나도 결정을 내릴 때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거야. 요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앞으로 이런 상황은 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배경수는 이번에 정말 화가 났다. 더는 전처럼 상냥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차가운 얼굴을 하며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그럼 저 남자랑 정말 하룻밤을 보낼 생각인 거야?”“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부대표님과 약속했던 일도 절대 번복하지 않을 거야. 부대표님도 다른 나쁜 마음이 없으리라 믿고 있어.”
차설아는 마음이 괴로워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어쩔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그건 물어보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았는데.”그녀에게 있어서 배경수는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자, 그녀와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가?수많은 소녀들을 매료시킨 배경수의 깊은 눈망울은 기대에 가득한 반짝이는 눈빛으로부터 점점 실망으로 가득한 채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알겠어, 보스,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미 대답을 알았으니까.”“경수야, 왜 그래? 분명 내 마음 알잖아. 왜 이러는...”“그냥 이러자!”배경수는 애써 섭섭한 마음을 꾹 누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짜내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더는 보스의 약혼자가 아니야. 앞으로 우린 단순한 누나 동생 사이라고. 난 여전히 보스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다만 보스는 내 구속을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도 돼. 보스가 정말 선택하고 싶은 남자를 선택하라고.”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배경수는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그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사랑을 강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차설아는 그와 애써 사랑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이럴 때 배경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었다.“경수야,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나랑 헤어지겠다고? 나 포기하는 거야?”차설아도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팔을 덥석 잡고는 다급하게 말했다.“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어, 네 입장을 생각하지도 않고 말을 내뱉고 말았어. 잘못했어... 나 다른 남자 선택할 것도 없어, 너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화내지 마. 나 포기하지도 말고, 응?”그녀의 말은 비굴하게 들렸지만 모두 차설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차설아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기다릴 게 뭐가 더 있겠어요? 지금 당장 출발해요!”그렇게 두 사람은 성대 그룹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다.직원들은 하나같이 김빠진 듯이 실망의 얼굴을 드러냈다.“4년 만에 사모님이 이렇게나 달라졌다니.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는 전처럼 순진하고 착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이 남자 저 남자 다 건드리는 팜므 파탈이 되었구먼!”“이제 보니 ‘차성 커플’도 더러워진 것 같아. 나 팜므 파탈 안 좋아한단 말이야. 팜므 파탈인 사람이 어떻게 우리 대표님에게 어울리겠어. 대표님은 그동안 다른 여자 건드린 적도 없는데 성진 부대표님같은 바람둥이도 놓지 않으려고 하네, 우리 대표님만 불쌍하지...”“어디 대표님만 불쌍할 뿐이야? 심지어 배경수 씨도 엄청 불쌍하잖아. 배경수 씨는 뭔 죄야.”벌써 차설아에게 탈덕한 직원들도 있었다.그중 어떤 직원이 한껏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참, 그거 들었어? 이번에 대표님께서 회사로 오지 않은 게 심한 상처를 입어서래. 심지어 사모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거래.”“어디 상처를 입은 것뿐이야.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대표님은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대.”“뭐? 그럼 성진 부대표님이 대표님 자리를 이어받을 건가? 이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대표님이 무섭게 굴었어도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이야. 그런데 성진 부대표님은 사람이 너무 소인배야. 만약 부대표님이 정말 성대 그룹 대표님으로 된다면 난 바로 그만둘 거야!”사람들이 한창 열띤 토론을 펼친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들 많이 한가해요?”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도윤처럼 오랫동안 성대 그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서실장 진무열이었다.“실, 실장님!”사람들은 바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진무열은 성도윤의 심복으로 성대 그룹에서도 지위가 대단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진무열을 성도윤처럼 무섭게 생각하기도 했다.“방금 뭘 의논하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실버 부가티 베이론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조수석에 앉은 차설아는 덤덤한 얼굴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성진이 좋은 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오늘 밤에 많은 함정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다른 사람을 상대하면 몰라도 성진같이 실속 없는 바보를 상대하는 건 그녀는 누구보다 잘했으니까 말이다.차 안에는 경쾌한 리듬의 록 스타일 노래가 흘렀다.성진은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리듬을 따라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마디가 뚜렷한 길고 가는 그의 손가락은 어둑어둑한 가로등 불빛에 비쳐 유난히 보기 좋았다.“당신이 아직 자지 않았다면, 내가 아직 그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맨정신을 한 것도 죄라면, 제발 함께하기로 한 약속을 무르지 말아요, 제발 떠나지 말아요...”남자는 몸을 흔들며 유쾌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성도윤과 비슷한 옆모습을 가진 그는 완벽한 이목구비와 정교한 윤곽을 자랑했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차설아는 한순간 바보 같은 성진이 혹시 잘생긴 남자의 탈을 썼는지 의심이 갔다. 평소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으니 말이다.“부대표님 노래를 잘할 줄은 몰랐네요. 파이브 밴드의 노래가 잔잔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자칫하면 과하게 들릴 수 있는데 부대표님은 아주 적절하게 부르시네요, 심지어 원곡보다 듣기 좋은데요...”차설아가 진심으로 칭찬했다.바보 같은 성진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설아를 놀라게 했다.“그래요?”성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옆에 앉은 여자를 힐끔 바라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제가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설아 씨가 처음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도 설아 씨보다는 못하죠.”“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럼 제가 노래한 걸 들어본 적이 있는 거예요?”“들어보고 말고요, 심지어 설아 씨 열
차설아는 항상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기회만 있으면 그녀에게 온갖 비난을 하고 수모를 안겨줬던 시동생이 그녀의 열혈 팬이었단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했다.‘너무 이상하고도 신기하잖아?’“그러니까 내가 도윤 씨랑 결혼하기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거네요? 게다가 내 팬이었다고요?”차설아는 믿기 어려워 거듭 성진에게 확인했다.‘바다의 소리’ 밴드는 그녀가 대학에 다닐 때 심심해서 실험실 메이트들과 만든 밴드였다.차설아와 친구들은 실험실에서 실험만 하는 괴짜가 아니라, 저마다 악기를 다루고 노래할 줄 아는 다재다능한 친구들이었다.특히 차설아는 작사와 작곡 실력은 물론이고, 듣기 좋은 목소리까지 가지고 있었다.‘바다의 소리’는 처음에 녹음한 싱글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이로 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또 지하 펍에서 공연했는데 공연을 할 때마다 만석을 기록하며 더 많은 팬을 얻게 되었다.‘쯧쯧,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래도 결혼하지 않았을 때 훨씬 재밌게 살았네. 사람들의 응원과 박수를 받는 그 느낌, 너무 짜릿하잖아.’나중에 차씨 가문에는 변고가 생긴 바람에 차설아는 성도윤과 결혼을 했고, ‘바다의 소리’는 그대로 해체되었다. 밴드의 멤버들도 지금은 과학 연구계의 거물급 인물로 거듭났다.그들만의 눈부신 과거는 영원히 역사의 흐름 속에 새겨졌었다...다만, 성진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당연히 설아 씨를 알고 있었죠. 그때 나에게 설아 씨는 더없이 순진하고 성결한 여신이었는데요. 설아 씨 꿈이라도 꾸면 오히려 설아 씨를 더럽힌 것 같아 참회했는데요.”“푸흡!”차설아는 성진의 말을 듣고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부대표님, 농담도 정도껏 하셔야죠. 이런 순애보 스타일은 전혀 부대표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엄청 황당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믿기지 않아요?”성진은 진지한 얼굴을 보이더니 차설아에게 말했다.“잠시만요, 증명할게요.”말을 마친 그는 긴 손가락으로 차의 모니터에서 저장 파일을 누르더니 그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