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 님, 여기 완탕이요. 뜨거울 때 드세요.”간호사가 뜨끈뜨끈한 완탕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입에는 이미 군침이 돌았다.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인 것 같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 완탕이 기다려지니 말이다.서은아는 간호사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위기감이 몰려왔다.“어디서 난 완탕이죠? 이건 동양인들이 즐겨 먹는 거잖아요? 저도 한 그릇 주시면 안 돼요?”“그건 안 됩니다.”간호사가 단칼에 거절했다.이 완탕은 제인이 특별히 성도윤한테 사다준 것인데 한 그릇 더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왜 안 되죠? 혹시 제 약혼자를 위해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정말 오지랖도 넓으신 거 아닌가요?”“그... 저...”간호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성도윤이 입을 열었다.“당신이 아직 회복기라 해산물 못 먹는대.”“네, 맞아요.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 해산물을 드시면 염증이 심해질 수 있어요.”간호사는 한숨 돌렸다.“안 먹어도 되는데... 이 완탕이 어디서 났는지는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서은아는 여전히 포기를 몰랐다.지금 성도윤의 곁에 나타난 모든 여자는 다 그녀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했다.“저희 구내식당에서 만든 거예요. 동양인들을 위해 만든 거죠.”간호사는 어색하게 대답했는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보였다.“진짜요?”“그럼요.”“그럼 지금 해물 완탕 하나만 해줘요. 먹지 않고 냄새만 맡으면 되잖아요.”“그, 그게...”성도윤은 서은아가 간호사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농담 그만해. 요즘 당신 보살피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그러고는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여긴 내가 있으니까.”간호사가 병실을 나간 후 서은아는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성도윤이 침착하게 그녀를 달랬다.“내가 완탕 한번 먹었다고 화낼 거야? 당신이 내가
그런 의심을 품고 저녁 식사 때 성도윤은 병원 식당을 찾았다.“해물 완탕 하나 주세요.”그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직원들은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해물 완탕 없나요?”성도윤은 영어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네, 없어요.”직원들은 바보를 보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모든 음식은 다 여기 있어요.”성도윤은 재빨리 메뉴를 훑어보았고 역시 완탕은커녕 동양 음식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그럼 그 어린 간호사가 거짓말을 하는 건가?성도윤은 병실로 돌아와 매일 완탕을 가져다주는 간호사를 찾았다.“저희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간호사는 약간 긴장했는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얘기요?”“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잖아요.”“몰라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어린 간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는 척을 계속했다.그녀는 당연히 성도윤이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고 남자는 분명 그녀에게 완탕을 누가 보냈는지 묻고 싶어 할 것이다.다만 그녀는 일찍이 제인에게 이 비밀을 꼭 지키겠다고 했고 또 하느님에게 맹세했기에 고백할 수 없었다.“이 완탕이 어디서 났는지 솔직히 말해요. 그럼 내가 섭섭하지 않게 줄게요.”성도윤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사꾼처럼 여유를 부렸다.“안 돼요!”어린 간호사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전 당신에게 말할 수 없다고 하느님께 맹세했어요.”“괜찮아요. 하느님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죄송합니다, 더 묻지 마세요. 저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어린 간호사는 가슴에 십자를 그은 후 쏜살같이 달아났다.그녀는 복도에서 연기를 삼키고 있는 차설아를 찾았고 다급하게 말했다. “드디어 찾았네요. 죄송하지만 제인 당신이 부탁했던 일 더는 도울 수 없을 것 같아요.”“왜요?”차설아는 침착하게 담배 연기를 곱게 내뿜었다.“성도윤 님과 서은아 님이 이미 당신이 준 해물 완탕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있어요. 특히 서은아 님은 제가 성도윤 님에게 따로 만들어 그분을 꼬시려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담배꽁초를 눌러 불을 껐다. 곧이어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성도윤은 종일 기다렸지만 그가 고대하던 해산물 만두를 기다리지 못했다.점심때가 아니었기에 그도 꾹 참았다.그렇게 저녁이 되고 야식 시간이 되었는데도 만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무슨 일이에요? 오늘은 왜 만두가 없는 거죠?”성도윤은 서은아가 쉬고 있는 틈을 타 복도에서 회진을 돌고 있던 간호사를 가로막으며 신문이라도 할 태세였다.“그, 글쎄요...”간호사는 난처한 듯 목을 매만졌다.“식당은 더 이상 음식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성도윤 씨, 다른 음식을 드시는 건 어떤가요? 햄버거, 스테이크, 파스타 같은 음식이요.”“아뇨. 만두가 아니라면 저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습니다.”성도윤은 그룹 회장의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만두를 먹지 않으면 절대 그만두지 않을 태세였다.그의 말을 듣던 간호사는 어이가 없어졌다.“설마 종일 아무것도 안 드신 거예요?”“맞아요. 종일 만두만 기다리는 탓에 지금 배가 고파 가슴이 등에 닿을 기세예요.”성도윤이 대범하게 인정해버렸다.만약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다른 음식은 그저 적당히 배를 채울 용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끼니를 대충 때우고 싶지 않았다.“알겠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식당에 가서 물어볼게요.”간호사는 혹여나 이 고집 센 남자가 배가 고파 무슨 난동이라도 피울까 봐 잠시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이제 제 생사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성도윤은 농담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엄숙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그렇게 남자가 다시 서은아가 쉬고 있는 병실로 돌아간 후에야 간호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두 발짝 뛰어 같은 층에 있는 성진의 병실로 달려갔다.“제인, 나와 봐요. 상의할 게 있
“마감해도 한 그릇 정도는 더 만들 수 있잖아요. 사장님, 제발요. 한 번만 봐주세요.”차설아는 두 손을 모아 진심으로 사장님께 빌었다.“안 돼. 내일 오렴. 만둣국 한 그릇 안 먹는다고 죽진 않잖아?”“아니, 아니, 사장님, 이번에 안 먹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만둣국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사장님, 저 그래도 단골손님인데 사장님도 분명 저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잖아요.”“아이고, 내가 못 살아 정말.”사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설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냄비를 꺼내 요리를 시작해야만 했다.사실 중국집 사장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차설아를 끔찍이 잘 챙기고 있다. 심지어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첫 번째는 연약한 여자가 사지가 불편하고 눈이 먼 남자를 돌봐야 한다는 사연에 동정심을 느낀 것이다.둘째는 차설아가 성실하고 귀엽고 유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종종 마을의 독거노인을 도와 컴퓨터 수리, 인터넷 쇼핑, 가전제품 설치 등을 해주기도 했다.중국집 사장은 밀가루 반죽을 하며 차설아와 잡담을 나누었다.“만둣국을 먹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 과연 누굴까? 설마 성진은 아니겠지? 그 아이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성진이는 아니에요.”차설아도 덩달아 중국집 사장 아주머니의 옆에 서서 만두피를 만들며 부추, 파, 꽃, 새우를 섞은 고기 속을 능숙하게 만두피에 넣어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작은 만두 하나가 만들어진다.“그 사람이 아니라고?!”아주머니의 동작이 멈추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혼이 활활 타올랐다.“어머. 내가 지금 무슨 큰 비밀을 들은 거야? 만둣국을 먹는 사람이 성진이가 아니다니. 그럼 누군데?”“어... 제 고향 친구예요.”차설아의 대답이 모호했다.“그럼 그 친구, 네 마음속 지위가 남다른데? 요 며칠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매일 그에게 만둣국을 사주었단 말이잖아. 게다가 오늘은 이렇게 늦었는데 그
차설아는 만둣국을 들고 중국집을 나섰는데 도중에 고개를 숙여 만둣국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향을 맡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고개를 들었을 때, 일찍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키 큰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당신...”차설아는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그 우렁각시가 당신이었어요?”1m 떨어진 곳에 서서 착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응시하는 성도윤의 표정은 놀라움과 당혹감 그 자체였다.“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차설아는 당황하여 말을 좀 더듬거렸지만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부정하지 마세요. 간호사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줬으니까...”성도윤은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서며 우뚝 선 자세로 여인에게 캐물었다.“말해요.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더 이상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차설아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무슨 목적이 더 있겠어요? 단지 당신이 굶어 죽을까 봐 그랬죠.”“내가 굶어 죽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리 아는 사이였나요?”성도윤의 그윽한 눈망울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아니면, 내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이런 식으로 내 주의를 끌려고 하는 겁니까?”“? ? ?”차설아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이 녀석, 성진의 뼈와 피, 그리고 눈을 사용하더니 성격도 성진처럼 나르시시즘이 되고 뻔뻔해진 것인가?“그래요. 제가 당신을 꼬시려고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저에게 넘어온 건가요?”차설아는 가늘고 고운 눈을 들어 여우처럼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그녀를 불순한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도 그에게 불순한 목적을 보여주면 된다. 그래야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녀와 너무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그래요, 그럼 다시 꼬셔 보세요.”성도윤이 무뚝뚝한 얼굴로 여자에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 차설아는 그의 감정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그날 이후,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그들은 마치 갑자기 방향을 잘못 잡은 두 개의 평행선처럼 잠시 교차했다가 다시 각자의 궤도로 돌아갔다.성도윤은 서은아의 곁을 지켜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룹의 일을 처리했다.지난 반년 동안, 성대 그룹은 성도윤의 강력한 지원 아래 마침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칩 협력사를 찾았다. 그렇게 출시된 전자 제품의 판매량도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그룹의 분기 보고서도 수치가 매우 이상적이었다.그와 동시에, 성대 그룹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며 차설아가 설립한 천신 그룹도 KCL 그룹의 도움을 받아 활발하게 발전했으며 그룹 이익도 빠르게 업계 3위 안에 들어섰고 심지어 성대 그룹의 추세를 크게 앞질렀다.두 집안은 비록 적수이긴 하지만 지난 반년 동안 서로에 대해 어떠한 정면충돌도 하지 않은 채, 선을 분명하게 지키며 그 누구도 서로의 사업에 발을 뻗지 않았다.사실 이것도 반년 전, 차설아와 성씨 가문, 그리고 서씨 가문이 미리 합의한 결과이다. 그녀는 성도윤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성씨 가문도 그녀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날 성도윤은 컴퓨터를 켜고 계약서 처리에 열중했는데 그때, 비서 진무열은 영상통화를 요청했다.“무슨 일이야?”남자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보스, 일이 생겼습니다.”진무열은 예전과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화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심각할 필요는 없지.”성도윤이 차분하게 농담을 던졌다.그는 많은 변고를 겪으면서 원래도 잘 놀라지 않던 성격이 더욱 차분해졌다.“허허, 보스, 몸이 좋아지고 나서 정말 유머가 많아졌네요.”진무열이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지만 그는 정말 웃을 수가 없었다.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목숨을 얻게 된 성도윤의 성격은 정말 크게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얼음처럼 차갑게만 굴었지만 지금은 입만 열면 건들건들한 느낌이 가득했다. 오히
그러자 성도윤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화를 냈다.“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부도덕한 짓을 한단 말이야?”“여러 증거로 볼 때 이런 비열한 수법은 우리의 오랜 원수, ‘성심 전당포'가 한 짓인 것 같습니다. 보스... 이번에는 반드시 강펀치를 날려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괘씸한 것. 또 그 자식들이야?”성도윤은 냉담한 얼굴로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화가 났다.“그들이 굳이 지옥을 찾아왔다면. 우리가 무례하다고 비난하면 안 되지.”성도윤 쪽은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차설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여자는 병원의 인공 호수 옆에서 휴대폰으로 오빠 차성철, 그리고 원이와 달이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오빠, 솔직히 말해. 오빠 주업은 전당포 장사이고 부업은 돼지 기르는 거지. 난 왜 원이와 달이가 살이 찐 것 같지?”사실 차설아의 말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 영상 속의 원이와 달이는 확실히 전보다 살이 많이 쪄있었다. 분명 예전에 잘생긴 도련님과 예쁜 공주님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동글동글한 공처럼 귀엽기 그지없었다.“네가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있어?”그러자 차성철은 정색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넌 부업이 가정부야?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성진 그 녀석을 돌보고 있어? 네 아이도 버리고 그 녀석을 돌보는 이유가 뭐야? 그 녀석이 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봤어, 아니면 네 목숨을 구해줬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성진한테 매달리는 거야?”남자는 사업을 버리고 성씨 가문 남자를 돌보기 위해 달려간 차설아에게 항상 불만이 많았지만 차설아가 워낙 애교를 잘 부리는 탓에 몇 마디 좋은 말로 달래기만 해도 너무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화가 나 매우 불쾌할 뿐이다.“진짜 미안해. 오빠가 나 대신 아이를 돌보고 천신 그룹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거 다 알아.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곧 돌아갈게. 오빠와 원이 달이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현장에서 노래 세 곡
진무열과의 대화를 마친 성도윤은 초조해하며 컴퓨터를 덮은 뒤, 기분 전환을 위해 근처 산책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요즘 그룹의 일에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현재 성씨 가문 전체를 둘러봐도 그룹 전체를 관리하는 중책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성진 두 사람뿐이다.그러나 성진은 지금 그 사기꾼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만약 그가 이대로 계속하여 게으름을 피운다면 성대 그룹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어쩔 수 없다. 현실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부단히 전진하지 않으면 결국은 잡아먹히기 마련이다.해안시의 8대 가문의 수장으로서 성씨 가문은 권력과 영광을 누린 만큼 수없이 많은 위험과 책임을 져야 했다.그렇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잠시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게다가 아직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는데 ‘성심 전당포'와 같은 원수들이 참지 못하고 도발하기 시작했다. 만약 어느 날 그가 정말 멈추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성심 전당포...”넓고 잔잔한 호숫가에 우뚝 선 남자의 얇은 입술이 차갑고 잔혹한 글귀를 내뱉었다.“이번에는 당신들이 스스로 총부리를 들이받았으니 어떤 결과가 따라도 싸.”멀리서 바라보면 성도윤의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은 고귀한 기질을 뿜어내고 있었고 마침 붉은 석양이 서쪽으로 질 무렵, 황금빛 햇볕이 호수에 스쳐 가며 호수면은 영롱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어 그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 장면은 정말 한 폭의 유화와도 같이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그런데 지금 남자는 머릿속으로 잔인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북유럽의 호수는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고 호수의 표면에는 때때로 새가 멈춰서며 신기한 광경을 그려냈다. 게다가 시원한 산들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대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자니 저절로 몸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도윤이가 이미 결정을 내린 거지. 어차피 쟤 인생인데 나도 쟤 뜻 존중해주기로 했어.”소영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사실 예전의 소영금은 사사건건 아들을 속박하려 들며 성도윤의 결혼까지 간섭했었다.그래서 차설아와 함께 살 때도 둘 사이에 자꾸 끼어들며 둘의 감정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제 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냥 내버려 뒀으면 임채원 같은 여자가 꼬일 일도 없을 것 같아 소영금은 그 일이 늘 후회스러웠다.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기로 한 것이다.“그럼 제 생각은 안 하시는 거예요? 도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기억을 회복하든 저는 어차피 다 상처받는 거잖아요.”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들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서은아는 허무한 마음에 소영금을 보며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도윤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도윤이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다 아시면서 어떻게 이래요? 쟤가 실명해서 성대 그룹 이사들한테 공격받을 때도 모든 자원, 인맥 동원해서 도윤이 일으켜 세운 것도 저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더러 모든 걸 포기하라고요?”“은아야, 일단 흥분하지 말고 진정 좀 해.”소영금은 그런 서은아를 달래며 말했다.“그냥 뇌수술하는 것뿐이지 죽는 것도 아니고 너랑 있었던 일을 다 잊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한 희생 도윤이도 알고 나도 알아, 쟤가 배은망덕한 사람도 아니잖니.”“저는 안 잊겠지만 바로 차설아를 찾아가겠죠. 그러면 저는 바로 버려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그럴 리가 없잖아. 도윤이랑 설아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야.”“누가 그래요! 도윤이는 그냥 차설아를 잠시 잊어서 저를 그 여자로 생각하고 곁에 두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다정했던 만큼 기억만 돌아오면 바로 매정해질 거라고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또 차설아한테 퍼주겠죠.”“그럴 수도 있지만...”엉엉 우는 서은아를 보며 측은지심이 생겨난 소영금은 그녀를 다독이
“유감일 것도 없어요. 내어준 게 아니라 갚은 거니까.”차설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나 위해서 말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손해 볼 건 없는 거래에요.”“알겠어요... 설아 씨가 비밀로 해주길 원하신다면 저희도 당연히 말은 안 하죠. 떠나고 싶으실 때 저한테 알려주시면 제가 서영 언니한테 물어볼게요. 하지만 언니도 별말 없이 보내줄 거에요.”“아직은 급하지 않아요.”차설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진이 아직 안 깨어났다면서요, 일어나서 눈은 제대로 보이는지 확인한 뒤에 기회 봐서 나갈게요. 만약 수술이 성공적이지 않아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잖아요.”“설아 씨는 어쩜 이렇게 착해요? 우리 도련님을 이렇게 다 생각해주시고, 설아 씨는 우리 도련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차설아의 말에 제대로 감동받은 현이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도련님도 설아 씨한테만큼은 진심이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회복 마치고 나면 성대 그룹 주권도 성도윤 손에서 빼앗아 오실 거에요. 그때는 도련님이 성도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을 테니 설아 씨한테도 꼭 제대로 보상해주실 거예요.”“그런 생각까진 안 해봤는데...”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성대 그룹의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눈이 보이지 않아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긴 했지만 성진은 그리 쉽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동안 필시 성도윤에 대응할 방도를 마련했을 것이다.그런 성진과 맞서려면 성도윤도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았다.하지만 차설아는 그래도 멀어버린 눈 덕분에 그 꼴사나운 모습들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렇게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리는 게 바로 차설아였다.---그 시각, 성도윤의 뇌수술도 한창 준비 중이었다.이미 수술복으로 환복을 마친 성도윤은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고 문밖에는 소영금, 서은아, 진무열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아직 시간
“아, 아니야!”똑똑한 원이가 눈치라도 채면 집요하게 캐물을 걸 알기에 차설아는 당황하며 다급히 부인했다.“엄마 아무 일도 없이 잘 있어. 엄마한테 언제 무슨 일 생기는 거 봤어? 걱정 말고 동생 잘 챙기고 민이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말을 마친 차설아는 바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원이는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엄마한테 생긴 일이 적진 않죠.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요,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니까 영상통화 못 하는 거잖아요. 1초만 켜요, 아무 일 없다는 거 내 눈으로 확인하면 믿어줄게요.”“그게...”원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차설아는 핸드폰을 멀리 놓고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원아, 뭐라는지 잘 안 들리네? 엄마 지금 친구랑 등산 하고 있어서 신호가 안 좋아. 나중에 통화하자!”말을 마친 차설아가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보고 있던 현이가 감탄하며 말했다.“설아 씨는 정말 행복하겠어요. 아들딸 다 저렇게 귀엽고 똑똑한데 엄마도 엄청 사랑하는 게 눈에 보여요!”“나는 행복한데 애들은 행복하지 않아요...”“나 따라다니면서 겁도 많아졌고 힘든 일도 많이 겪었어요.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에요.”“그런 말씀 마세요. 애들한테 설아 씨처럼 착하고 대단한 엄마가 있어서 행복할 거예요. 설아 씨는 애들이 설아 씨랑 살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해도 애들은 엄마랑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을 거예요.”아직 어리지만 아이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현이는 아들딸을 모두 둔 차설아가 부러웠다.그렇게 아름다운 가정인데 엄마가 시각장애인이 돼버렸으니 아이들이 얼마나 가슴 아플지 눈에 선해 현이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집에... 모셔다드릴까요?”동정심이 차오른 현이는 차설아에게 앞으로의 생각을 물었다.“나 나갈 수 있어요?”그에 차설아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하죠, 설아 씨는 도련님한테 빛을 보게 해준 은인인데 하늘의 별을 따달라 해도 다 드려야죠. 자유를 원하시면 두말없이 보내드릴
상대방이 악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한숨 돌린 차설아가 말했다.“수술은 다 끝난 거죠? 잘 됐어요? 진이는 어때요? 이제 보인대요?”“언니가 그러는데 수술은 잘 끝났고 일주일 뒤에 실 빼면 도련님은 볼 수 있대요. 그런데 설아 씨는...”현이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은 창백한 얼굴의 차설아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설아 씨는 앞으로 어떡해요...”“난 괜찮아요. 눈만 잃었지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세상에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도 잘살고 있잖아요.”자신의 상황이 더 고통스러울 텐데 차설아는 이 와중에도 현이를 위로해주고 있었다.그래서 현이는 그런 차설아를 보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요 며칠은 제가 잘 보살펴드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릴게요.”착하고 긍정적인 차설아를 보며 현이는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감탄하고 있었다.이런 좋은 사람에게 가혹한 일이 생긴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그럼 나 부탁하나 있는데 좀 도와줄래요?”현이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보아낸 차설아는 사양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내 핸드폰으로 민이 이모한테 전화 좀 해줄래요?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해서 아마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알겠어요.”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찾아낸 현이는 차설아의 말대로 핸드폰 잠금을 풀고 ‘민이 이모’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왜 이제야 전화하세요! 어디 가셨던 거에요 그동안? 갈 만한 데는 다 찾아봐도 없어서 원이랑 달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민이 이모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어제는 경찰서에 신고까지 했다고 말했다.“저 친구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원이랑 달이는 잘 있어요?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방금 일어난 것 같아요. 진짜 하루종일 아가씨 얘기만
이틀 뒤, 차설아는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성진과 함께 별장의 무균 수술실로 들어갔다.“두 분은 수술대에 누워주세요.”안과 교수는 둘을 데리고 간단한 검사를 진행한 뒤 마취 테스트를 마치고는 간호사더러 그들을 수술대에 눕히게 했다.차설아는 검사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모자만 푹 눌러쓰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수술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엄청 큰 수술대 위에는 환한 전등이 아주 많이 달려있었는데 그것들이 하도 눈부셔서 차설아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광환이 감긴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차설아는 그제야 자신이 지옥문 앞에 와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후회돼요?”그때 옆에서 성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가요.”“후회 안 해요.”하지만 차설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눈 하나로 그렇게 많은 돈을 얻는데 제가 왜 후회하겠어요.”“그래요. 절대 손해 본다고 느끼지 않게 내가 달라는 거 다 줄게요.”성진이 확신에 찬 약속을 하자 마취제 배합을 마친 의사가 차설아와 성진을 향해 말했다.“이제 마취 시작할 건데 전신 마취라서 두 분 다 의식을 잃으실 거예요. 깨어나는 시간은 체질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3시간에서 6시간 사이로 의식 차리실 겁니다.”“네.”“시작해주세요.”“시작하시죠.”의사의 말에 차설아와 성진 모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자신의 등을 통해 약물이 주입되는 걸 느끼던 차설아는 빠르게 의식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차설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자신의 세상이 비로소 어두워졌다는 것이다.“거... 거기 누구 있어요?”처음 겪어보는 암흑에 심연에 빠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던 차설아는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보았다.“깨어났어요? 어때요, 눈은 안 아파요? 의사 선생님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상처가 다 낫는다고 하셨어요. 엄청 아프죠...”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박서영이 아님을 알아챈 차설아는 잔
대단한 집안 아가씨가 평생 숨겨야 할 남자들에게 강간당한 일을 이렇게 수면 위로 꺼낸 건 다 진무열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다.성도윤의 최측근이 진무열이 자신을 믿고 도와준다면 성도윤과의 관계발전도 아주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아가씨가 대표님을 그 정도로 사랑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모든 얘기를 들은 진무열의 마음에는 거센 파동이 일었다.성도윤을 향한 차설아의 사랑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깨끗하기만 하다면 서은아의 사랑은 뜨거운 태양처럼, 영원히 빛을 낼 것처럼 정열적이었다.둘 중에 어떤 사랑이 성도윤한테 더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뜨거운 편이 나은 것 같았다.“서은아 씨랑 대표님 감정은 아직도 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걱정은 마세요. 대표님이 요즘 바빠서 그렇지 서은아 씨 생각은 항상 하고 계세요. 바쁜 일만 다 처리하면 예전처럼 더 좋아질 거예요.”상태가 안 좋은 저를 위로하기 위한 말임을 눈치챈 서은아는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어린 애 달래요?”“도윤이가 누굴 생각하는지는 진 비서님이 더 잘 알잖아요. 그냥 잠깐 나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고 나중에 기억 돌아오면 또 차설아한테 가버릴 건데... 그럼 나는 비서님 말대로 그저 해프닝, 변수가 되어버리겠죠!”“수술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만약 대표님이 기억해낸 게 서은아 씨와 보냈던 행복한 일상이면 서은아 씨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그럴 리가요. 도윤이랑 그 여자가 얼마나 깊이 얽혔는데 기억만 돌아온다면 내 자리는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그럼 서은아 씨는 뭘 원하는 거예요?”진무열은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서은아를 슬쩍 떠보듯 물었다.“도윤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고 뇌가 다친 적도 있으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일단은 그냥 놔두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이 수술 하지 말고 계속 기억 안 나는 채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요. 내가 진짜 잘할게요!”한시가 급했던 서은아는 이 수술을 원하지 않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표정을 굳히며 오만한 태도로 진무열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 지금 도윤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예요?”“아니요,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을 위해서 어떤 희생까지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죠.”이기적이고 강압적인 보스라 할지라도 감정에서는 많은 시련을 겪었었기에 진무열은 서은아가 성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짝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차설아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만약 서은아도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면 성도윤이 또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진무열이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목숨까지도 내어줄 거에요.”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입술을 깨문 채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때 그 여자 오빠가 미친 사람처럼 도윤이 납치해갔을 때 내가 도윤이 구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진 비서님은 모르죠?”이 얘기는 처음 듣는 진무열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무... 무슨 일을 겪었는데요?”“차설아 씨 오빠가 도윤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비서님도 알죠?”“대표님과 자정 살인마가 오랫동안 싸우기는 했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어요.”두 사람의 원한에는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가끔 조언을 해준 게 전부였기에 진무열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둘 다 원한을 내려놓고 화해하는 게 서로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성대 그룹의 고위 간부들은 이 기회에 자정 살인마를 제대로 눌러놔야 한다며 성도윤을 부추겼지만 성도윤은 결국 박성훈을 보내 차성철을 구해주며 그와의 화해를 선택했다.타인에게 장미를 건네면 내 손엔 그 잔향이 남는다고 그 인연으로 성도윤도 이번에 박성훈에게 수술받아 기억을 되찾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이렇게 보니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은 하늘도 굽어살펴 주는 것 같았다.“둘은 화해했지만 나는... 내가 받은 상처는
그 모습을 보던 성도윤은 눈썹은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됐어, 성훈이 형 실력이면 너희들이 아무리 숨겨도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 뭐.”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와 들고 있던 보온 용기까지 떨어트려 버렸다.“아! 아파...”뜨거운 국물에 덴 손이 아픈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성도윤도 빠르게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로 향했다.“괜찮아?”“응, 그냥 살짝 데인 것뿐이야.”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서은아의 표정은 서러움 그 자체였다.“봐봐.”여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성도윤은 빨개진 손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진무열을 향해 말했다.“진무열, 은아 보건실로 데려가.”“괜찮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하지만 서은아는 계속 괜찮다고 하며 바닥에 엎질러진 국물을 보며 말했다.“너 주려고 온 오후 끓인 건데 다 쏟아버려서 어떡해... 그리고 네 러그도 더러워졌네.”“그거야 다시 끓이면 되고 러그도 사람 불러서 청소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네가 여기서 다치면 내가 미안하잖아 괜히. 그러니까 말 들어.”“알, 알겠어.”성도윤의 다정한 모습을 다시 본 서은아는 밀려오는 행복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하지만 만약 수요일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성도윤은 다시는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기억을 되찾은 그라면 전에 자신이 의사를 매수해 뇌에 이상이 생기게 만든 걸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그래서 서은아는 지금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마냥 불안했다.“아가씨, 저 따라오세요.”서은아를 데리고 성대 그룹 보건실로 향한 진무열은 의료진이 처치를 해주는 걸 보며 팔짱을 끼더니 서은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우리 대표님 마음 사로잡기가 쉽지 않죠?”“진 비서님도 내가 너무 달라붙으니까 꼴사나워 보여요?”“아가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전혀 꼴사납지 않죠.”진무열은 또 옛날의 차설아를 떠올리며 말했다.“예전 사모님도 서은아 씨처럼 우리 대표님한테 지
보온 용기를 들고 들어온 서은아는 활짝 웃으며 성도윤에게로 다가섰다.“보신탕 끓여왔는데 이게 위에 좋대, 너 안 그래도 위 안 좋은데 얼른 마셔봐.”그녀가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로운 보신탕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진무열은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와, 냄새 너무 좋은데요. 서씨 집안 아가씨로 살면서 요리는 언제 배우셨어요?”책상을 마주 앉아 계약서를 넘기던 성도윤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가져가서 마시던가.”“...”성도윤에게 보신탕을 덜어주려던 서은아는 매정한 남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는데 진무열도 바보는 아닌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가씨가 대표님 위해서 직접 만들어 오신 건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걸 마셔요, 저는 그냥 뜨거운 물 마실게요.”그 말에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은 서은아가 진무열을 보며 웃었다.“많이 해와서 괜찮아요. 드실 거면 덜어드릴게요.”“말씀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장난이었어요. 대표님 요새 마침 속 안 좋으신데 대표님 다 드리세요. 앞으로 종종 해주시면 좋고요...”말을 하던 진무열은 갑자기 제 아내를 떠올리며 말했다.“대표님 이혼 전에는 사모님도 이런 보신탕 자주 해왔었는데 대표님만 드리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다 나눠줬었어요. 회사 복지라면서 곳곳에 놔두고 왔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우렁각시라는 별명도 얻었죠.”“그... 그래요?”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꾸했다.이렇게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성도윤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서은아는 하루빨리 진무열부터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일에 열중하며 진무열과 서은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성도윤은 갑자기 들리는 ‘이혼’과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며 물었다.“진 비서, 아까 이혼이라고 했어?”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캐묻기 시작했다.“내가 전에 결혼을 했었어?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