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아한 모습을 한 여인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능숙하게 아기의 옷을 벗겨내고 가슴을 누른 다음 입을 맞대고 아기에게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한 번, 한 번, 또 한 번,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아이는 마침내 물을 토해냈고 하얗게 질린 얼굴에도 점차 혈색이 돌아왔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으니 빨리 병원으로 보내 정밀 검사를 받도록 하세요.”그제야 여자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젊은 엄마에게 영어로 말해주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들 덕분에 저와 아이가 살 수 있었어요!”젊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서둘러 의사를 찾아갔다.성도윤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고 여전히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완벽한 이목구비를 타고 흘러내렸다.이어 긴 손가락으로 무성한 머리카락을 넘겨버리자 몸은 피곤했지만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역시 좋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나 보다.“어, 잠깐만요!”그 청아한 모습을 한 여자도 막 자리를 뜨려는데 성도윤은 귀신이라도 쓰인 듯 무의식 간에 여자를 불러세웠다.“네? 저요?”여자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한 두 사람은 개똥을 밟기라도 한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졌다.“당신이라니.”성도윤은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시큰둥한 눈빛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돈 때문에 나를 꼬시려고 하는 된장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용감하게 뛰어들 줄 몰랐네요. 오늘 다시 보게 됐어요.”“허허, 정말 건방진 남자가 따로 없군요. 눈이 나쁘면 스스로 도려내어 더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게 어떨까요?”차설아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강산은 바꾸기 쉬워도 본성은 바꾸기 어렵다고 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녀를 폭발시킬 만큼 화나게 할 방법을 갖고 있었다.닥치는 대로 사람을 구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 거지?!“나를 꼬시려는 계획이 실패했다고 벌써 화가
“콜록콜록!”차설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색하게 왜 이래요?”“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요. 있어요, 없어요.”성도윤은 경험이 풍부한 사냥꾼처럼 차설아에게 말을 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살피려 했다.“네, 있어요.”차설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진지하게 허튼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에 대한 감정은 흐르는 강물처럼 걷잡을 수 없어요. 정말 매력적이시네요. 제 유일한 신이에요.”“...”“어때요, 만족하세요? 카리스마 넘치는 척 안 하면 안 돼요? 정말 어색해요.”“?”“아직도 마음에 안 들면 계속할 수 있어요, 나 이런 헛소리 엄청나게 잘해요. 더 듣고 싶다면 더 할 수도 있어요.”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됐네요.”이 여자... 정말 평범한 여자가 아니군.그는 그녀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려고 할수록 더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다른 일 더 있어요? 없으면 난 가봐야 해요”그녀는 자제력이 매우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오래 있을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는데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지금 온몸이 흠뻑 젖었고 날도 어두워져 정말 추웠다.“없어요, 가봐요.”성도윤도 차설아와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그가 보기에 여자는 좀 지나치게 미친 것 같았는데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차설아가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요.”“또 왜 그래요?”“추우니까 이거 입고 가요.”성도윤은 자신이 아까 물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놓은 마른 외투를 여자에게 살짝 걸쳐주며 말했다.“몸조심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유혹할 힘이 어디 있겠어요.”“정말 고맙네요.”차설아는 말없이 주먹을 조이며 일부러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왜 병원에 있는 거죠? 여기서 일해요? 아니면 가족이 아파서?”“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가요.”차설아는 차갑게 가버렸지만
성진이 볼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일을 그녀는 비교적 편하게 할 수 있었다.“갑자기 옷은 왜 갈아입어?”성진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옷이 더러워져서.”차설아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남자에게 성도윤을 만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분명 또 끝도 없이 헛된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거짓말.”성진은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영원히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지금 나를 바보처럼 속이고 있잖아.”남자가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차설아가 깨달았다. 병원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그는 이곳에 자주 오기 때문에 누가 그에게 정보를 알려줬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내가 당신을 속였다니, 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 말해봐.”여자가 조심스럽게 탐색하듯 말했다.“닥터 데이비드가 입원 구역의 작은 호수에서 익사 사건이 발생했고 당신이 뛰어내려 사람을 구했다고 하던데. 당신이 옷을 갈아입은 것은 당신의 옷이 젖어서지 옷이 더러워져서가 아니란 말이지.”성진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맞아, 거짓말이야. 난 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랬지. 데이비드는 정말 입이 빠르네, 병원을 옮겨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사생활이 하나도 없겠어.”그녀는 확실히 병원을 옮기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병원에서 서은아와 성진은 같은 층에 있으니 조만간 양측이 마주칠 것이 분명했다.성진은 원래 매우 비관적이고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병원을 바꾼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본질을 알지 못했어.”성진은 침대에 앉아 보기 드문 진지한 모습으로 차설아를 낯설게 했다.“본질이 뭔데?”“본질은 당신이 나를 당신의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사람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야”“그 결론은 도대체 어떻게 낸 거야? 우리가 지금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그래도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야?”“내가 지금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성진은 이번에 정
차설아가 자료를 들고 성진의 전원 절차를 밟을 때 주치의 데이비드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제인, 왜 갑자기 병원을 옮기려고 하는 거죠? 그는 지금 회복이 중요한 시기예요. 장기간의 이동은 적합하지 않다고요.”데이비드의 스펙은 인근 도시로 보면 모두 최고로 손꼽히고 상냥하고 겸손하며 책임감도 강했다.처음에 그들이 이 마을에 온 것도 데이비드의 의술 때문이었는데 이 반년 동안 데이비드의 치료를 받으면서 서로 깊은 우정을 쌓았다.“특별한 사정이 있어서요.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거에요.”차설아는 데이비드에게 대충 설명하고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반드시 병원을 옮겨야 한다면 주치의도 바꿔야 하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의사마다 의료 이념이 다릅니다. 내가 보기에 진의 상황은 좋아지고 있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요양하고 기분을 좋게 유지하면 천천히 좋아질 것입니다, 적어도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데이비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일깨워주었다. “만약 병원을 바꾸고 주치의를 바꾼다면 의사가 데이터만 보고 급진적인 치료방식을 취할 수 있어요.”“급진적인 치료방식이라뇨?”“근육재생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든지, 새로운 팔다리를 직접 이식한다든지...”“그건 안 되죠.”차설아는 듣기만 해도 미덥지 않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다.호르몬 주사를 맞든 팔다리를 바꾸든 그건 정상적인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전 병원을 옮기지 않는 것을 추천해요. 어쨌든 이미 잘 적응했고 나의 의료 이념을 진도 잘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이 결정적인 시기에 포기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데이비드는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차근차근 논리정연하게 차설아를 설득했다.“데이비드, 당신 말이 일리가 있어요, 그럼 전원은 안 할게요, 퇴원 절차를 밟고 좀 지나면 다시 입원할게요, 그건 괜찮아요?”차설아는 심사숙고 끝에 절충점을 찾았다.이제 성진의 허리 부상은 거의 회복되었고 병원에 있어도 매일 일상적인 재활 훈련을 하고 손상
그가 차설아에 대한 요해대로라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그녀가 이렇게 허둥지둥거리는 걸 보니 틀림없이 S급 위험 주의보가 내려졌다는 뜻일 거다.“왜냐하면... 집에 더 안 가면 내 해바라기가 다 시들어버릴 거니까. 내가 안 급하게 생겼어?”“허허, 이유도 참... 내가 믿을 거 같아?”“방금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하고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잖아. 벌써 약속을 어기는 거야?”“당신 정말... 이 일은 내가 지금 말하기 어려워.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게.”차설아는 성진을 달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런, 그녀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던 성도윤이 엘리베이터 중앙에 떡하니 서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시간이 마치 이 순간에 멈춘 것 같았다.“당신이 어떻게...”차설아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던 성도윤의 시선이 휠체어를 탄 성진에게로 향했고 잘생긴 얼굴에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의 빛을 띠었다.“성진? 네가 왜 여기 있어?”일부 사소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재편성되기 시작했고 한 단락씩 모두 연결되었다.서은아의 말에 의하면 성진은 그의 여자 친구와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눈앞의 이 여자가 차설아란 말인가?계속 돌봐주고 격려해 주고 시력을 회복하면 그녀의 얼굴을 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던 그 사기꾼?이와 동시에 성진도 차설아의 모든 행위를 이해했다.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뒤의 차설아를 향했다. “당신이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했던 게 그 때문이었구나... 내가 진작에 짐작했었어야 했는데. 당신을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망했다.차설아는 이마를 두드리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했다.휠체어 방향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퇴원할 필요 없으니 돌아가서 푹 자자.”“어차피 난
“오늘은 늦었으니 쉬어야겠다, 정말 알고 싶으면 내일 아침 일찍 찾아와. 내가 다 얘기해줄게.”성진은 말을 마친 뒤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나 졸려, 가자.”“그래.”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성도윤은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그들이 그렇게 화목한 모습이 마치 노부부 같았는데 그가 마치 억지를 부리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알려주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그는 어쩌면 자신이 정말 미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차설아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휠체어를 밀어서 원래의 병실로 왔다.여인은 묵묵히 이불을 깔고 성진을 일으켜 침대에 눕혔고 또 묵묵히 이불을 덮어주었는데 한마디도 없었고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였다.그렇게 피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피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 하늘은 늘 간단한 국면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침대 머리맡에 기댄 성진의 잘생긴 얼굴에는 보기 드문 굳은 표정이었고 역시 침묵을 지켰다.고요함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고 분위기는 미묘했다.차설아는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화가 났다는 거 나도 알고 있으니 나를 욕하고 싶으면 마음껏 욕해. 이번에는 내 잘못이야.”그에게 더 이상 어떤 일도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렇게 큰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정상인이라면 분명 화가 나고 실망할 것이다. 하물며 사소한 것까지도 반드시 성도윤과 비교해야 하는 성진은 더더욱!“내가 당신을 욕을 해서 뭐 해, 아니, 어떻게 욕해. 당신한테 기대어 살아가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성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성진,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너에게 말했더라면 너는 아마 진작에 폭발했을 거야.”차설아는 성진의 이상한 말투에 못마땅하여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이것 봐.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이렇게 많이 변명하는데 내가 어떻게 욕해
뜻밖에도 방문을 열자 성도윤이 문밖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복도의 등이 그의 모습을 길게 끌고 있었다.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차갑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얘기 좀 합시다.”남자가 고개를 들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랑 내가 무슨 할 얘기가 있어요?”“정말 우리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이 시간에 문을 열지 않았을 거예요.”“....”남자의 말에 차설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그렇지, 마음에 담은 것이 많아서 뒤척이다 보니까 잠이 안 오는 거고 그걸 정리 안 하면 잠을 더 오랫동안 못 잘 수도 있었다.“좋아요, 얘기 좀 해요.”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옥상의 환경은 나쁘지 않았는데 야외 카페로 가장 밝은 별을 볼 수 있었다.차설아는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성도윤도 곁에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침묵을 깨지 않았다.이상하게도 별로 친하지 않은 두 사람인데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편안했다.성도윤은 이런 느낌이 너무 좋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즐기는 느낌이었다.“나랑 얘기 좀 하자며 왜 말을 안 해요?”한참 후 차설아는 반짝이는 별에서 시선을 거두어 남자의 애틋한 눈동자에 부딪혔다.성도윤은 쑥스러워하며 어설프게 목청을 가다듬었다.“그쪽이 차설아예요?”그는 수준이 매우 떨어지는 쓸데없는 말을 물었다.“그럼 내가 누구예요?”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그녀는 이 녀석이 예전과 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빙산이었는데 지금은 멍청한 것 같기도?“그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너무 불쾌했다는 걸. 언젠가 내가 당신을 만난다면 꼭 욕할 거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욕을 한다고요?”“놀라워요?”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꽉 쥐었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약속을 어기는 거예요. 우리는
차설아는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데 또 마음 한쪽에는 조금의 기대가 있었다.“내가 뭐 때문에 당신한테 그렇게 잘해준 것 같은데요?”그녀는 그가 이미 기억을 회복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의심했다.만약 그렇다면 그의 연기는 정말 칸 영화제에 갔어야 했다. 너무나 완벽했다.“한 여자가 남자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베풀 수 있다는 건 그 여자가 이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죠.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잘해준 건 어쩌면 당신이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도 될까요?”성도윤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반년 가까이 그를 괴롭혔던 질문을 던졌다.신지 요양병원에서의 경험은 너무 특별했기 때문에 아무리 감정에 무딘 사람일지라도 차설아가 얼마나 그를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이런 의문을 품고 그는 나중에 요양병원으로 돌아갔고 그제야 여자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알게 되었고 뜻밖에도 자신의 피를 그의 약으로 사용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여자가 그를 이렇게 신경 쓰는데 왜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까?“너무 사랑한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 “내가 너무 착한가 보죠. 남을 기꺼이 도울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하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내 인품이 좋아서예요.”“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요. 남에게 잘해주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죠. 하지만 목숨을 걸고 남에게 잘해주는 건 사랑해서가 아니면 뭐 때문이란 말이죠?”“하하하, 성도윤 씨, 요즘 사랑이 많이 부족했나 봐요? 여자가 대가를 무릅쓰고 남자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건 사랑뿐만 아니라 속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차설아의 눈빛은 처음보다 날카로워졌다.만약 남자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그녀는 그의 흉터를 다시 들춰낼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표정이 살짝 바뀌며 되물었다.:속죄라니요?”“당신 눈이 어떻게 실명했는지 어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