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데 또 마음 한쪽에는 조금의 기대가 있었다.“내가 뭐 때문에 당신한테 그렇게 잘해준 것 같은데요?”그녀는 그가 이미 기억을 회복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의심했다.만약 그렇다면 그의 연기는 정말 칸 영화제에 갔어야 했다. 너무나 완벽했다.“한 여자가 남자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베풀 수 있다는 건 그 여자가 이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죠.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잘해준 건 어쩌면 당신이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도 될까요?”성도윤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반년 가까이 그를 괴롭혔던 질문을 던졌다.신지 요양병원에서의 경험은 너무 특별했기 때문에 아무리 감정에 무딘 사람일지라도 차설아가 얼마나 그를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이런 의문을 품고 그는 나중에 요양병원으로 돌아갔고 그제야 여자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알게 되었고 뜻밖에도 자신의 피를 그의 약으로 사용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여자가 그를 이렇게 신경 쓰는데 왜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까?“너무 사랑한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 “내가 너무 착한가 보죠. 남을 기꺼이 도울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하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내 인품이 좋아서예요.”“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요. 남에게 잘해주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죠. 하지만 목숨을 걸고 남에게 잘해주는 건 사랑해서가 아니면 뭐 때문이란 말이죠?”“하하하, 성도윤 씨, 요즘 사랑이 많이 부족했나 봐요? 여자가 대가를 무릅쓰고 남자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건 사랑뿐만 아니라 속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차설아의 눈빛은 처음보다 날카로워졌다.만약 남자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그녀는 그의 흉터를 다시 들춰낼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표정이 살짝 바뀌며 되물었다.:속죄라니요?”“당신 눈이 어떻게 실명했는지 어
그가 이렇게 귀찮게 굴 줄 알았으면 그녀는 한사코 그와 대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장면은 한동안 어색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어요. 천천히 생각해봐요.”차설아는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일어나 떠나려 했다.“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못 가게 할 거예요.”성도윤은 여자의 손목을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의혹은 날 반 년 동안 괴롭혔어요. 얼마 후면 내 약혼녀와 결혼을 할 텐데 만약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난 은아한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요.”“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내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요, 우리 사이... 도대체 어떤 과거가 있는 거죠?”성도윤은 엄청나게 똑똑했고 감지 능력도 최고였다.뇌수술을 받고 깨어나 처음 그녀와 접촉했을 때 그는 그들 사이에 기묘한 이끌림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게다가 많은 사람이 우물쭈물하고 그녀에 대해서는 말을 회피하는 반응은 이 여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서은아와 결혼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공평한 일이니까!“그 말인즉슨 무조건 모든 것을 알고서야 마음 편히 서은아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차설아는 말다툼을 포기하고 물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인정했다.결혼이 임박할수록 이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다만 은아가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 그는 이런 감정들을 잘 숨겼을 뿐이다.“그럼 당신이 만약 내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서은아를 포기하는 거 아녜요?”차설아는 조심스레 떠보았다.“...”성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그는 몰랐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서은아는 현재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는 은아를 포기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만약 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고 단지 실수로 그녀를 잃어버렸다면 새로운 사랑과 옛사랑, 그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다.“그 봐요, 당신도 어떻게 해야
여자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연약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도윤아,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네.”서은아는 환자복을 입은 허약한 얼굴에 파이프까지 꽂은 채 옥상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여긴 어떻게 왔어?”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앞으로 나가 부축했고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제야 몸이 좀 나아졌는데 왜 이렇게 제멋대로 하는 거야?”“아니거든, 당신이 사라지면 내 몸이 어떻게 멀쩡해도 소용없어.”서은아는 두 번 기침하며 가냘프게 성도윤의 품에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 “아까 악몽을 꿨는데 너를 빼앗기는 꿈이었어. 갑자기 깨어나 사방을 둘러보는데 네가 없는 거야. 어쩐지 당신이 옥상에 있을 것 같아서 옥상으로 찾으러 달려왔어. 너무 힘들어. 상처가 덧나서 아픈 거 같아.”“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건 꿈일 뿐이야.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성도윤은 가슴이 아파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서은아는 줄곧 자신 곁에 있었고 그가 가장 힘들 때 그를 버린 적도 없었고 그로 인해 원수에게 복수를 당했기에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되었다.그녀가 아프니 그도 같이 아팠다. 그녀가 미간을 조금 찌푸려도 그는 그녀를 위해 온 세상을 등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정말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한 거야?”서은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남자를 바라보며 차설아를 가리켰다. “그럼 왜 늦은 밤중에 이 여자랑 옥상 커피숍에 단둘이 있는 거야? 이렇게 야릇한 분위기에 두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엉뚱한 생각을 않게 생겼어?”성도윤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궁금한 게 많아서 찾아가서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야.”“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지. 한밤중에 나 몰래 이 여자와 밀담할 필요는 없잖아? ”원래 안정감이 없던 서은아는 차설아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차설아 씨는 세계여행을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요? 갈 곳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여기서 우리랑 우연히 만나길 바란
그는 오늘 밤 자신이 약간 통제 불능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불장난을 하는 사람처럼 조심하지 않으면 분명 불에 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말이지? 이건 당신이 나에게 약속한 거야, 만약 당신이 나중에 이 여자를 따로 만난다면 나는... 여기서 뛰어내려 죽을 거야, 당신 평생 후회하게 할 거야.”서은아는 캄캄한 아래층을 가리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자, 화내지 말고 일단 내려가자. 여긴 너무 추우니까 감기 조심해야지.”성도윤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서은아를 안고 자리를 떴다.도중 두 사람은 차설아와는 말 한마디 없었는데 기본적 예의인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차설아는 두 사람이 떠난 방향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고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하하, 하하하! ”그러고 나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웃겨, 성도윤도 웃기고 서은아도 웃겼다. 하지만 가장 웃긴 건 역시 그녀 자신이었다.성도윤의 원래 짝이면서도 얼굴을 못 드는 내연녀 형편이 되어 치욕을 당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꽁냥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차설아, 정말 대단해. 그의 완벽한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이 정도까지 비굴하게 만들고 묵묵히 혼자 모든 걸 감수하다니... 이보다 더 미련한 사랑꾼이 어디 있겠는가!일주일 후차설아는 주치의의 원래 계획에 따라 성진의 퇴원 절차를 밟았다.이번 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또 짧았는데 성도윤과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만날 수 있는 어떤 장소도 피했다.모든 것이 평소와 같이 진행되었다. 만약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꿈만 같았다. 진실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꿈 말이다.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성진도 있었다.차설아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그도 절대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항상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차설아는 차를 불러 입원실 아래층에서 기다리게 했고 가방을 메고 성진을 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성도윤은 창문 뒤에 숨어서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그 차를 지켜보았다.“자기야,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는 거야?”심심해서 잡지를 뒤적거리던 서은아는 성도윤이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새 한 마리.”성도윤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새 한 마리?”서은아는 그 대답에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날아가는 새 한 마리였어, 하지만 아직 날개가 뻣뻣하지 않아 멀리 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성도윤은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은아의 좋지 않은 예감은 더욱 강렬해졌다.아마 남자가 말하는 '새는 단순한 새가 아닐 것이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홀가분한 척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자기야, 요 며칠 설아 씨를 다시 보러 간 적이 있어?”“내가 다시는 안 만날 거라고 약속했잖아.”성도윤의 표정은 약간 엄숙했다. “며칠 동안 나는 당신이랑 거의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당신이 이런 말을 묻는다면 나를 너무 믿지 않는 거 아니야?”“미안해,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칫 잘못하면 당신을 잃을까 봐 그러는 거야.”“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우리 사이에 자신이 없어? 아니면... 우리 사이의 사랑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은 건가?”성도윤의 눈빛은 탐구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럴 리가!”서은아는 찔린 듯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차설아한테서 성도윤을 훔친 도둑과 같다.성도윤이 지금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바로 그가 차설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어느 날, 그가 갑자기 기억을 되찾으면 서은아는 단 1초 만에 지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당신한테 물어봐도 된다고 말했잖아...”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많은 일이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서은아는 담담한 어조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긁어모아 성도윤에게 완전히 다른 사실을 말했다.“정, 정말이야?”성도윤의 그윽한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약간의 의심으로 반짝였다.분명히 이것은 그가 예상한 진실과 너무 달랐기에 그는 잠시 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를 믿는다면 이게 다야. 만약 나를 못 믿는다면 차설아를 찾아가서 물어봐.”서은아는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성도윤은커녕 그녀 자신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말은 흠잡을 데 없었다.더구나 소영금 같은 확실한 증인들도 있으니 말이다.“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은 주먹을 살짝 쥐며 말을 이었다.“사실 그 여자가 진작에 인정했어. 단지 내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그는 그사이에 분명 무슨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나쁜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피를 자신의 약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지금 보니 단순히 그녀가 그를 다치게 하고 양심에 찔려 속죄하러 온 것뿐인데 말이다.아니, 차설아, 나 성도윤은 이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 감히 나를 건드려놓고 그렇게 쉽게 떠날 생각 하지 마.차는 넓은 길을 따라 유유히 작은 마을로 향했다.차설아는 창가에 기대어 푸른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성진은 일찌감치 차설아의 울적함을 눈치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그렇게 아쉬우면 퇴원 연기를 신청해도 돼.”남자는 눈을 감고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평온한 얼굴을 한 남자를 보면서 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무슨 소리야, 나... 내가 아쉬워 할 게 뭐 있어.”이 말은 그녀 자신도 말하고 자신이 없었다.뼛속 깊이 새겨진 그리움은 이성으로 자제할 수 있지만 지울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에 확실히 성도윤이 있고 그 어느 순간에도 그를 놓아준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리움이 덜할 거다. 하지만 일단 만나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숨길 필요
차는 한 골동품 가게 앞에 세워졌다.차설아가 성진이 앉은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차 안에서 기다려.”그는 자신의 서프라이즈가 미리 누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헛수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래, 무슨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지 한 번 두고 보자.”차설아는 짙은 호기심을 가지고 운전기사가 성진을 밀고 골동품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가 차 뒷좌석에 누워 시간을 보니 마침 해안 시의 오후였고 두 꼬마가 하교할 시간인 것 같아 차성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이상하게 평소에는 바로 전화를 받던 차성철이 오늘 몇 번을 반복해서 시도했는데도 계속 연결이 안 됐다.“어떻게 된 거지?”차설아는 금세 눈살을 찌푸리며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그녀는 또 바로 민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민이 이모는 오히려 빨리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공교롭게도 제가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어요.”전화기 너머의 민이 이모도 마찬가지로 눈살을 찌푸리고 초조한 상태였다.“보아하니... 무슨 일 있는 거죠?”“네, 아가씨. 이 일을 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장재혁 씨와 경윤 아가씨께서 걱정하실까 봐 먼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무슨 일이에요, 빨리 말해요.”“성철 도련님이 일주일 전에 남부로 출장을 가셨어요. 원래 이틀 전에 돌아오셔야 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두 아이도 외삼촌이 보고 싶어 자주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계속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장재혁 씨는 이것이 정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이 사업을 할 때 어떤 곳에서는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으니 며칠만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저는 왠지 불안해서요.”민이 이모가 말하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차성철은 차가의 후손이니 차설아처럼 그녀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는 도련님이다. 만약 차성철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그녀도 저세상에 있는 회장님과 사모님을 뵈러 갈 면목이 없었다.“오빠가 이틀째 연락이 안 된다는 거예요?”“맞아요, 장재혁 씨의 말에 의하면
성진은 그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만약 그녀가 이렇게 떠난다면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다.“하느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그녀는 눈을 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을 느꼈다.바로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골동품 가게가 굉음을 내며 가게 전체가 무너지고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아, 불이야, 사람 살려!”을지로는 마을 전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데 이 골동품 가게는 평소에도 손님이 많아 폭발이 일어났을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안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번지는 불이 자신을 위협할까 봐 머리를 싸안고 도망치는 상황이 펼쳐졌다.“...”차설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불길이 치솟는 골동품 가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성진... 성진!”그녀는 빠르게 차에서 뛰어내려 미친 듯이 화재 현장을 향해 돌진했다.“너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마세요.”신고를 받고 달려온 소방관이 차설아를 막았다.“이거 놔요. 내 친구가 안에 있어요. 그는 볼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고요. 내가 그를 구하러 가야 해요. 날 놔줘요!”“사람은 저희가 구할 겁니다.”소방관은 시종일관 차설아를 막고 화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불길이 곧 잡혔고 부상자들이 하나둘 실려 나왔지만 시종 성진은 보이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실려 나온 사람은 성진을 밀고 들어간 운전기사였다.운전기사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한쪽 발이 부러져 있었는데 보기에 매우 흉악하고 가련해 보였다.차설아는 있는 힘을 다해 소방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운전기사가 있는 들것 앞으로 달려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성, 성진은요? 그 사람 어디에 있어요? 그 사람 어떻게 되었어요?”“다른 사람에게 납치되었어요, 빨리 가서 그를 구하세요!”기사는 이 말을 하고 기절했다.“납치되었다고?”차설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 몇 글자를 곰곰이 생각했다.소방관도 다시 현장을 수색했지만 여전히 성진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확실하지 않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