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창문 뒤에 숨어서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그 차를 지켜보았다.“자기야,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는 거야?”심심해서 잡지를 뒤적거리던 서은아는 성도윤이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새 한 마리.”성도윤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새 한 마리?”서은아는 그 대답에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날아가는 새 한 마리였어, 하지만 아직 날개가 뻣뻣하지 않아 멀리 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성도윤은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은아의 좋지 않은 예감은 더욱 강렬해졌다.아마 남자가 말하는 '새는 단순한 새가 아닐 것이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홀가분한 척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자기야, 요 며칠 설아 씨를 다시 보러 간 적이 있어?”“내가 다시는 안 만날 거라고 약속했잖아.”성도윤의 표정은 약간 엄숙했다. “며칠 동안 나는 당신이랑 거의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당신이 이런 말을 묻는다면 나를 너무 믿지 않는 거 아니야?”“미안해,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칫 잘못하면 당신을 잃을까 봐 그러는 거야.”“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우리 사이에 자신이 없어? 아니면... 우리 사이의 사랑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은 건가?”성도윤의 눈빛은 탐구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럴 리가!”서은아는 찔린 듯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차설아한테서 성도윤을 훔친 도둑과 같다.성도윤이 지금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바로 그가 차설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어느 날, 그가 갑자기 기억을 되찾으면 서은아는 단 1초 만에 지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당신한테 물어봐도 된다고 말했잖아...”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많은 일이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서은아는 담담한 어조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긁어모아 성도윤에게 완전히 다른 사실을 말했다.“정, 정말이야?”성도윤의 그윽한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약간의 의심으로 반짝였다.분명히 이것은 그가 예상한 진실과 너무 달랐기에 그는 잠시 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를 믿는다면 이게 다야. 만약 나를 못 믿는다면 차설아를 찾아가서 물어봐.”서은아는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성도윤은커녕 그녀 자신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말은 흠잡을 데 없었다.더구나 소영금 같은 확실한 증인들도 있으니 말이다.“그럴 필요 없어...”성도윤은 주먹을 살짝 쥐며 말을 이었다.“사실 그 여자가 진작에 인정했어. 단지 내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그는 그사이에 분명 무슨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나쁜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피를 자신의 약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지금 보니 단순히 그녀가 그를 다치게 하고 양심에 찔려 속죄하러 온 것뿐인데 말이다.아니, 차설아, 나 성도윤은 이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 감히 나를 건드려놓고 그렇게 쉽게 떠날 생각 하지 마.차는 넓은 길을 따라 유유히 작은 마을로 향했다.차설아는 창가에 기대어 푸른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성진은 일찌감치 차설아의 울적함을 눈치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그렇게 아쉬우면 퇴원 연기를 신청해도 돼.”남자는 눈을 감고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평온한 얼굴을 한 남자를 보면서 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무슨 소리야, 나... 내가 아쉬워 할 게 뭐 있어.”이 말은 그녀 자신도 말하고 자신이 없었다.뼛속 깊이 새겨진 그리움은 이성으로 자제할 수 있지만 지울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에 확실히 성도윤이 있고 그 어느 순간에도 그를 놓아준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리움이 덜할 거다. 하지만 일단 만나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숨길 필요
차는 한 골동품 가게 앞에 세워졌다.차설아가 성진이 앉은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차 안에서 기다려.”그는 자신의 서프라이즈가 미리 누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헛수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래, 무슨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지 한 번 두고 보자.”차설아는 짙은 호기심을 가지고 운전기사가 성진을 밀고 골동품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가 차 뒷좌석에 누워 시간을 보니 마침 해안 시의 오후였고 두 꼬마가 하교할 시간인 것 같아 차성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이상하게 평소에는 바로 전화를 받던 차성철이 오늘 몇 번을 반복해서 시도했는데도 계속 연결이 안 됐다.“어떻게 된 거지?”차설아는 금세 눈살을 찌푸리며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그녀는 또 바로 민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민이 이모는 오히려 빨리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공교롭게도 제가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어요.”전화기 너머의 민이 이모도 마찬가지로 눈살을 찌푸리고 초조한 상태였다.“보아하니... 무슨 일 있는 거죠?”“네, 아가씨. 이 일을 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장재혁 씨와 경윤 아가씨께서 걱정하실까 봐 먼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무슨 일이에요, 빨리 말해요.”“성철 도련님이 일주일 전에 남부로 출장을 가셨어요. 원래 이틀 전에 돌아오셔야 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두 아이도 외삼촌이 보고 싶어 자주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계속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장재혁 씨는 이것이 정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이 사업을 할 때 어떤 곳에서는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으니 며칠만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저는 왠지 불안해서요.”민이 이모가 말하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차성철은 차가의 후손이니 차설아처럼 그녀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는 도련님이다. 만약 차성철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그녀도 저세상에 있는 회장님과 사모님을 뵈러 갈 면목이 없었다.“오빠가 이틀째 연락이 안 된다는 거예요?”“맞아요, 장재혁 씨의 말에 의하면
성진은 그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만약 그녀가 이렇게 떠난다면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다.“하느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그녀는 눈을 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을 느꼈다.바로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골동품 가게가 굉음을 내며 가게 전체가 무너지고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아, 불이야, 사람 살려!”을지로는 마을 전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데 이 골동품 가게는 평소에도 손님이 많아 폭발이 일어났을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안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번지는 불이 자신을 위협할까 봐 머리를 싸안고 도망치는 상황이 펼쳐졌다.“...”차설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불길이 치솟는 골동품 가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성진... 성진!”그녀는 빠르게 차에서 뛰어내려 미친 듯이 화재 현장을 향해 돌진했다.“너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마세요.”신고를 받고 달려온 소방관이 차설아를 막았다.“이거 놔요. 내 친구가 안에 있어요. 그는 볼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고요. 내가 그를 구하러 가야 해요. 날 놔줘요!”“사람은 저희가 구할 겁니다.”소방관은 시종일관 차설아를 막고 화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불길이 곧 잡혔고 부상자들이 하나둘 실려 나왔지만 시종 성진은 보이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실려 나온 사람은 성진을 밀고 들어간 운전기사였다.운전기사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한쪽 발이 부러져 있었는데 보기에 매우 흉악하고 가련해 보였다.차설아는 있는 힘을 다해 소방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운전기사가 있는 들것 앞으로 달려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성, 성진은요? 그 사람 어디에 있어요? 그 사람 어떻게 되었어요?”“다른 사람에게 납치되었어요, 빨리 가서 그를 구하세요!”기사는 이 말을 하고 기절했다.“납치되었다고?”차설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 몇 글자를 곰곰이 생각했다.소방관도 다시 현장을 수색했지만 여전히 성진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확실하지 않
성씨 성을 가진 분이 안부를 여쭙는다고?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운전 기사에게 다시 한번 되물었다.“정말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게 맞아요? 잘못 들은 게 아닐까요?”그녀는 반복해서 확인했고 표정이 심각해졌다.“제인, 나는 다쳤을 뿐이지 바보가 아니에요.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거짓말할 필요는 없잖아요.”운전기사는 기침을 두 번이나 했고 말투는 매우 확신에 차 있었다.그는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중국어를 매우 잘했고 잘못 듣는 것은 불가능했다.다만 상황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시간도 없이 진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알았어요, 고마워요. 몸조심하세요, 시간이 되면 다시 올게요.”차설아는 한참 동안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운전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떠났다.이른 아침 온도는 낮고 공기도 습했는데 마치 지금, 이 순간의 기분처럼 춥고 우울하여 그녀는 갑갑한 거리를 혼자 걸었다.운전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납치 계획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이미 확실한 사실이다.“젠장!”차설아는 자신을 원망했다.그날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성도윤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성도윤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특히 성진은 그한테 자신의 자리를 뺏은 사람이었고 성진이 전에 그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었다가 이제 그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으니 분명 성진에게 매운맛을 보여줄 거다. 따라서 지금 성진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성도윤뿐이다.여자는 심호흡하고 남자를 찾아가 해명을 요구할 준비를 했다.마음속으로는 이 만남이 너무 싫었지만 그녀는 그의 치밀하고 은밀한 계획을 피할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만나지 않아도 그녀는 그를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성도윤은 정말 수준 높은 헌터라고 할 수 있었다.차설아는 바로 그 남자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그녀는 간호사로부터 서은아가 퇴원하기까지 아직 일주일의 치료가 필
이 순간 차설아는 절망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꼭두각시처럼 느껴졌는데 말 한마디, 행동 한번이 그 빌어먹을 놈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기분에 분노와 무력감을 느꼈다.보아하니 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처참하게 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차설아는 간단히 정리하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해안으로 돌아왔다.떠난 지 반년이 지났고 모든 것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그녀의 마음가짐은 천차만별이었다.장재혁과 민이 이모는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의 큰 돌이 마침내 땅에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잇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차설아는 차성철이 마음에 걸려 제일 먼저 전당포로 향했다.두 아이는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진작에 대문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엄마! 엄마!”달이는 멀리서 달려오는 차설아가 탄 차를 보고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다.원이도 옆에 서서 차설아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지만 감정은 훨씬 복잡했다.“원이, 달이! 키가 또 컸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어~”차에서 내린 차설아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시며 한 손에 한 명씩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아가씨, 고생이 많으셨어요.”민이 이모도 얼굴을 붉히며 차설아가 들고 있던 짐을 받아들었다.반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국땅에서 생활할 능력도 없는 사람을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아뇨, 전 고생 안 했어요. 이모가 고생하셨죠. 두 아이 모두 이모님이 돌봐준 덕분이에요, 저는 엄마로서 정말 불합격인 것 같아요.”차설아는 그리움의 표시로 두 아이에게 입을 맞췄다.이국에서 지낸 반년 동안 가장 힘든 것은 낯선 땅이 준 무기력함도 아니고 성진을 돌보는 것도 아닌 아이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아이가 너무 그리웠다.“엄마 울지 말아요. 나랑 오빠는 이제 다 컸으니까 알아서 잘할 수 있어요. 우리 살도 많이 쪘는걸요.”달이는 차설아가 자책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얼른 배를 두드리며
원이는 화가 나서 뒷짐을 지고 강가로 달려가 세차게 흐르는 강을 마주 보고 있었다.차설아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는데 꼬마의 뒷모습을 보고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녀는 유전자라는 것이 정말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눈앞의 우울한 아이의 모습은 마치 어린 성도윤 같았는데 나중에 크면 성도윤보다 더 시크하고 멋질 것 같았다.삼국의 경계에 있는 전당포는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법도 없는 혼란스러운 곳이지만 유독 이 지역은 아늑하고 평화로워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외부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고 복잡해도 감히 원이를 해칠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이곳에서의 원이는 자정 살인마의 뒤를 이을 미래의 왕이기 때문에 꼬마는 다리 옆에 서서 경치를 보는 것은 물론 무엇을 하든 절대 안전했다.차설아는 원이의 뒤에 서서 두 팔을 두른 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흥!”원이는 풍경을 볼수록 더욱 화가 나서 돌멩이 몇 개를 주워 강물에 던졌는데 뜻밖에도 아름다운 물수제비 몇 개를 띄웠다.“와, 우리 원이 정말 대단한데? 언제 물수제비 뜨는 법을 배웠어?”차설아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오랫동안 배웠지만 줄곧 배워내지 못했기 때문에 예쁜 물수제비를 뜰 수 있는 사람을 특히 존경했다.원이는 차설아를 돌아보며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나랑 달이 버린 거 아니었어요? 그 나쁜 아저씨한테 가지, 왜 다시 돌아왔어요?”“아이고, 우리 아들, 아직도 화났어? 엄마가 말했잖아, 엄마가 너랑 동생을 버리려고 한 게 아니야. 엄마는 엄마만의 고충이 있었어.”“고충이라뇨? 엄마 마음이 변해서 아빠를 배신하고 아빠의 동생과 도망쳤잖아요. 정말 큰 고충이네요!”“어...”차설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멈칫했다.반년 만에 원이가 이 정도로 성숙해졌더니...“누구한테 들은 거야? 완전 헛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엄마의 배신 때문에 아빠가 너무 슬퍼서 다른 여자를 선택했다고 해요. 그리고 다른 여자와
“너... 그 사람 찾아갔었어?”“네, 외삼촌이 바쁜 틈을 타서 아빠 회사에 들렀는데 나를 모르는 것 같았어요.”원이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가장 슬플 때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원이는 더는 슬프지 않았고 단지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원이, 우리 원이, 많이 속상했지?”차설아는 얼굴을 붉혔고 원이를 품에 안으며 울먹였다.“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너와 달이가 너무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너희의 느낌을 무시했어.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너와 달이를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절대!”그녀는 원이가 성도윤을 찾아갔다가 외면당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원이의 처지에서 보면 엄마는 보이지 않고 아빠는 그를 무시하는 모습이 마치 전 세계에서 버림받는 것 같지 않았을까?“하지만 아빠의 동생은 어떡해요? 민이 이모가 엄마가 그 사람을 돌보고 있으니 언젠가는 떠날 거라고 했어요, 맞죠?”원이는 차설아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탐색하듯 말했다.“그건 엄마가 방법을 찾아낼 거야. 앞으로 어딜 가든 엄마는 항상 너와 달이를 곁에 둘 거야. 엄마는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약속했다.“엄마, 난 엄마 믿어요. 엄마는 나랑 달이를 가장 사랑하잖아요. 엄마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는... 이미 나와 달이를 잊은 것 같아요.”“만약 엄마랑 아빠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우리도 다시 해바라기 섬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그 사람은 잊어버려,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차설아는 눈을 감았고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마치 자신을 위로하듯 원이를 위로했다.“그래요.”원이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원이의 마음속 응어리가 마침내 풀렸고 차설아의 말은 그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었다.이 안정감은 아빠가 없는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전당포에 돌아왔고 차설아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는 다시 바빠졌다.차성철은 연락이 끊겼고 배경윤은
성진은 계약서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었다.넓은 침실은 갑자기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고 오직 의료 기기의 삐, 삐 소리만이 유난히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한참 후, 그는 계약서 가장자리를 쥐고 있던 손을 툭 하고 힘없이 떨어뜨렸다.“너무 우습네요. 정말이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성진은 손에 들고 있던 계약서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배를 감싸 쥔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예상치 못한 그 모습에 성주혁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자신이 알기로,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계약서를 성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그 웃음소리에 성주혁은 마치 자신이 뭔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도대체 뭐가 그렇게 웃기냐?”성주혁이 얼굴을 굳힌 채 언짢게 물었다.“큰할아버지도 웃기고, 나 자신도 우스워서요.”한바탕 웃음을 마친 성진은 감정을 추스르고 난 후, 차갑고 위험한 기색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큰할아버지가 내거신 조건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어쩌면 큰할아버지 눈엔, 아니 모든 사람들의 눈엔 제가 단순히 돈을 쫓는 간사하고 교활한 인간으로 보이겠죠. 그러니 오직 회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 생각했겠죠. 맞나요?”“그게 사실 아니더냐?”노인의 시선 또한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손자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네가 이 계약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어차피 내 유언장에 회사 80% 지분을 명확히 명시해 두면 넌 영원히 회사를 손에 넣을 수 없을 테니까.”그가 이렇게까지 양보하며 성진에게 회사를 넘겨주려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자신의 손자인 성도윤보다 성진은 더 강하고 냉철한 인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진은 회사를 더 신경 쓰고 개인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두 형제가 각자 원하는 것을 손에
성주혁의 눈가에 슬픈 기색이 스쳤고 성진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큰할아버지 말씀은, 제가 반드시 이긴다는 말로 들리는데요?”“그래, 넌 이길 거다. 하지만 내 승인이 없으면 너는 절대 ‘진짜 승자’가 될 수 없다.”노인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비록 그는 이제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은 몸이었지만 여전히 타고난 위엄으로 손자를 압도할 힘이 있었다.성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차갑게 말했다.“어릴 때부터 저는 늘 도윤이 형을 이길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반드시 전력을 다할 거고 온 해안시 사람들이 제가 성도윤보다 강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형의 그늘에서 살지 않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그는 눈앞의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시겠죠. 그때가 되면 도윤이 형도 더 이상 할아버지 뒤에 숨어 권위에 기대지 못할 겁니다.”그러나 성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네가 진짜로 이기고 싶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요즘 오래 고민해 본 끝에 깨달았지. 도윤이는 본래 돈이나 명예에는 큰 뜻이 없는 아이야.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단다. 너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성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결정이라뇨?”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성주혁이 조용히 말했다.“우선 내게 약속해 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윤이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네 형수를 넘보는 마음도 가져선 안 된다. 설령 네가 성대 그룹의 경영권을 손에 넣더라도, 성도윤과 그의 자손들은 그룹의 3분의 1의 지분과 배당금을 보장받아야 한다.”“3분의 1이요?!”성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할아버지, 정말 친손자를 위해 철저히 계획해 두셨네요. 그럼 저는 매일 죽어라 일하면서 회사를 운영해야 하고 도윤이 형은 가만히 앉아서 배당금만 받아 가면 되는 겁니까?”성주혁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이게 바로
성도윤은 할아버지의 말에 기분이 살짝 상했다.“할아버지, 도대체 성진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저랑은 따로 얘기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성진이랑 얘기할 때 오히려 제가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최근 며칠 동안, 성주혁은 유독 성진을 따로 남겨두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성도윤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점점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다.‘나야말로 할아버지의 친손자인데, 어째서 할아버지는 마치 나를 경계하는 듯할까?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닐까?’“할아버지, 다시 봐보세요. 제가 친손자 성도윤이에요. 성진은 할아버지 동생분의 손자일 뿐이에요. 정말 성진이랑 단둘이 이야기해야 하려고 하시는 건가요?”그 순간 성도윤의 모습은 마치 어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성진을 부른 게 맞아.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어서 나가거라.”성주혁은 성도윤을 재촉하며 방을 나가라고 손짓했다.결국, 성도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고 방을 나섰다.성진은 태연하게 노인의 병상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반쯤 웃는 표정으로 초췌해진 노인을 바라보았다.“큰할아버지, 저를 따로 부르신 게... 설마 그 일 때문인가요?”최근 며칠 동안, 성주혁과 성진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 항상 성대 그룹을 에워쌌다.노인은 성대 그룹이 지금 심각한 내부 갈등과 외부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한순간의 실수로 회사는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그리고 그 내부 갈등의 핵심은 바로 성진이었다.성주혁은 성대 그룹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지난 몇 년간 그 권한을 성도윤에게 넘겨주었다.그 때문에 성진은 여전히 성도윤의 아래에 있을 뿐, 실질적인 권력에는 닿지 못했다.하지만 현재 그의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성대 그룹을 장악하려면 결국 할아버지의 승인이 필요했다.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성진아, 너는 똑똑하고 수완도 좋아. 결정도 빠르고
그는 오직 두 사람이 화해했다는 것만 알았을 뿐,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할아버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성진의 그 입에서 좋은 말 나올 리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성도윤은 성주혁이 걱정할까 봐 모호하게 말하며 사실을 숨겼다.성진은 병상 앞까지 걸어가면서 비웃듯 말했다.“할아버지, 솔직히 말해서 형수님을 도윤이 형에게 맡긴 건 할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어요. 예전엔 형수님의 마음만 다쳤지만 지금은 몸까지 상했습니다. 이 사실을 형수님의 할아버지가 알면 분명 눈도 감지 못하겠죠.”“닥쳐!”성도윤이 주먹을 꽉 쥐고 성진에게 명령했다.“그렇게 할 일 없으면 나가. 어르신 앞에서 그런 잔인한 말을 하지 말고.”“내가 잔인하다고?”성진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잔인한 짓을 한 건 내가 아니라 형이지.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뭐가 잔인하다는 거지?”두 사람은 팽팽히 맞섰고 한 치도 양보가 없었다.성진은 성도윤의 위선을 혐오했고 성도윤은 성진의 비열함을 역겨워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차설아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더욱 날카롭게 맞섰다.“둘 다 조용히 해!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성주혁이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안경을 더듬어 찾아 쓰고는 성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말해 봐라. 네 형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냐? 왜 몸까지 다쳤다고 하는 거지?”“형수님은...”성진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성도윤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그를 향해 스치고 지나갔다.성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얼버무리듯 말했다.“형수님은 몇 년 동안 너무 도윤이 형을 그리워한 나머지 건강이 점점 안 좋아졌어요. 시동생인 저조차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니까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형한테 좀 뭐라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아내는 남편이 지켜줘야 하잖아요. 그가 지켜주지 않아도 형수를 쫓아다니는 남자들도 많다고요.”“그 말은 그나마 들을 만하구나. 도윤아, 너도 들었지?”
성씨 가문 대저택.성주혁의 건강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그는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고 영양 수액 없이는 버틸 수조차 없었다.그날 밤, 그는 성도윤과 성진을 자신의 병상 앞으로 불렀다.“도윤아.”성주혁이 쇠약한 목소리로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보며 손짓했다.“이리 와, 할아버지한테 가까이 오너라.”“할아버지!”병약한 모습의 할아버지를 보며 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네 어머니한테 들었다. 요즘 설아 곁에 붙어 있다고 하더구나. 이제야 내 손자가 사람 구실 좀 하는구나...”성주혁이 힘없이 손을 뻗어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이미 노쇠해진 눈빛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그동안 마음속에 가장 걸렸던 사람이 차설아였고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도 그녀였다.“예전에 말이다, 내 평생 전우이자 가장 친한 형님이 자신의 손녀를 내게 맡기면서 반드시 손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부탁했었지.”“난 굳게 약속했지만 넌 내 기대를 저버렸고 그 애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아느냐? 도대체 몇 번을 울렸는지,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이제 와서 그 형님을 볼 면목이 있을지...”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한평생 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차설아에게만큼은 크나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이제라도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속 깊이 안도감이 들었다.“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이전엔 제가 철이 없었고 설아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제 남은 인생은 설아와 아이들을 지키는 데 바칠 겁니다.”성도윤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진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지루한 듯 문가에 기대어서 있었다. 애초에 왜 노인이 자신을 부른 건지도 모르겠는데 성도윤의 고해성사를 들으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뭐가 그렇게 웃긴데?”성도윤이 뒤돌아보며 성진을 차갑게 노려봤다.평소라면 굳이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피했을 것이었다.그는 지금 더 중요한 것들
차설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의심이 가는 사람을 쓰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원칙이었다.현이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든, 최소한 지금 그녀를 계속 곁에 둘 수는 없었다.“설아 씨, 제발 절 내쫓지 말아 주세요! 제 월급을 안 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제발, 제발 저를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만약 제가 쫓겨나면... 저희 엄마의 목숨이 위험해져요!”현이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그 여자는 계획이 실패하면 평생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었다.그렇기에 현이는 절대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없었다.“그래서 누군가 현이 씨 어머님을 인질로 잡고 나를 해치라고 협박한 건가요?”차설아는 중요한 포인트를 짚으며 예리하게 물었다.“그게...”“다시 말하지만, 지금 말해 주면 제가 도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차설아의 차분한 말에 현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집 밖을 살폈다. 그 여자가 근처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를 악물며 말했다.“며칠 전, 한 여자가 저를 협박했어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얼굴도 몰라요. 항상 가면을 쓰고 있었고 굉장히 신비롭고 무서운 사람이었어요.”“매일 설아 씨가 마시는 음료에 약을 한 봉지씩 넣으라고 했어요. 총 열 봉지를 넣어야 하는데 오늘이 다섯 번째였어요. 만약 계획이 실패하면 그 여자가 저희 엄마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설아 씨, 정말 죄송해요!”“역시나 그랬군요.”차설아는 주먹을 살짝 쥐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구일까? 여자라면... 설마 서은아?’하지만 서은아는 오히려 정면으로 공격하는 스타일이었고 이렇게 몰래 음모를 꾸미는 수법은 그녀답지 않았다.‘그렇다면... 대체 나와 어떤 깊은 원한이 있는 여자가 이런 수고를 들여 날 해치려 하는 걸까?’“설아 씨, 저를 신고하세요. 제가 이런 짓을 한 건 범죄라는 걸 알아요. 저도 죄책감에 너무 괴로워요!”현이는 완전히 무너진 듯 흐느끼며 말했다.차설아에 대한 죄책감과
“아무것도 아니야.”차설아는 배경윤의 성격을 잘 알기에 당장은 이 이상한 점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현이는 최근 차설아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가정부였다.성실하고 부지런한 성격에 차설아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함께 지내며 그녀가 꽤 선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렇다면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걸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결국 배경윤을 적당한 이유로 돌려보낸 후, 현이를 방으로 불렀다.“부르셨나요?”현이는 부엌일을 마치고 손을 깨끗이 닦은 뒤 서둘러 방으로 올라왔다.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성실한 그녀였기에 차설아도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오늘 제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고 하던데요?”차설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아, 그거요? 제가 착각했어요. 그건 설탕이 아니라 프림 같은 거예요.”현이는 이미 배경윤이 그 일을 차설아에게 전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그래서 부엌에서 일하면서도 미리 변명할 내용을 준비해 두었고 심지어 실제로 ‘커피 첨가제’라고 할 만한 것까지 마련해 두었다.“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차설아는 현이의 태연한 반응을 보고 오늘은 더 캐물어 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했다.그래서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했다.“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할 일이 많아서요.”현이는 서둘러 방을 나가려 했다.예전에는 차설아와 대화할 때 항상 친근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달랐다.마치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 반응이 차설아에게는 더 의심스러웠다.차설아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예전과 달랐고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우리가 현이 씨한테 그래도 잘해줬다고 생각했어요.”차설아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아, 네! 설아 씨도 대표님도 그리고 민이 이모도 저한테 정말 잘해 주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