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 사람 찾아갔었어?”“네, 외삼촌이 바쁜 틈을 타서 아빠 회사에 들렀는데 나를 모르는 것 같았어요.”원이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가장 슬플 때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원이는 더는 슬프지 않았고 단지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원이, 우리 원이, 많이 속상했지?”차설아는 얼굴을 붉혔고 원이를 품에 안으며 울먹였다.“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너와 달이가 너무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너희의 느낌을 무시했어.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너와 달이를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절대!”그녀는 원이가 성도윤을 찾아갔다가 외면당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원이의 처지에서 보면 엄마는 보이지 않고 아빠는 그를 무시하는 모습이 마치 전 세계에서 버림받는 것 같지 않았을까?“하지만 아빠의 동생은 어떡해요? 민이 이모가 엄마가 그 사람을 돌보고 있으니 언젠가는 떠날 거라고 했어요, 맞죠?”원이는 차설아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탐색하듯 말했다.“그건 엄마가 방법을 찾아낼 거야. 앞으로 어딜 가든 엄마는 항상 너와 달이를 곁에 둘 거야. 엄마는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약속했다.“엄마, 난 엄마 믿어요. 엄마는 나랑 달이를 가장 사랑하잖아요. 엄마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는... 이미 나와 달이를 잊은 것 같아요.”“만약 엄마랑 아빠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우리도 다시 해바라기 섬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그 사람은 잊어버려,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차설아는 눈을 감았고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마치 자신을 위로하듯 원이를 위로했다.“그래요.”원이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원이의 마음속 응어리가 마침내 풀렸고 차설아의 말은 그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었다.이 안정감은 아빠가 없는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전당포에 돌아왔고 차설아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는 다시 바빠졌다.차성철은 연락이 끊겼고 배경윤은
차설아는 배경윤이 갇힌 구치소를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얼마면 되죠? 배경윤을 석방하려면요.”책임자는 50대 후반의 소장으로 사건 처리 경험이 풍부하고 온갖 종류의 사람을 다 경험해 보았는데 차설아처럼 돈 많고 거만한 사람은 더욱 흔하게 볼 수 있었다.그는 서류 정리에 골몰하면서 차설아를 외면했다.“이 용의자는 특수한 상황이라 아직은 석방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세요.”“사람을 죽였어요, 아니면 불을 질렀어요? 왜 석방할 수 없죠? 자기 보호 차원에서 난동을 부린 사람에게 반격했을 뿐이잖아요? 정당방위인데 왜 형사범죄를 저질렀다는 판단이 선거죠?”차설아는 격앙된 소장과 논쟁을 벌였다.“정당방위?”소장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흘리며 불쑥 말했다. “피해자는 오늘 아침 9시에 치료도 받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현장 감시카메라를 보니 용의자는 과실 살인으로 판정되었습니다. 형법을 어긴 거죠.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그녀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과... 과실 살인이라고요?”차설아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고 그녀는 일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만약 살인과 관련된 형사범죄라면 확실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네, 과실치사는 가족들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는 적어도 3년은 빵에 있어야 하죠.”늙은 소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개탄했다. “내가 보기에 헛수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가 와서 소란이고...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는데 누가 용서하겠어요?”“네?”“누가 또 왔다 갔어요?”“네. 그쪽도 부자던데요? 당신보다 더 날 못살게 굴면서 윽박질러서 내가 그냥 쫓았죠.”“사랑꾼이더라고요?”차설아는 더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소장한테 물었다.“그럼 제 친구를 만나 봐도 될까요?”소장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원칙적으로는 안 되죠... 하지만 이렇게 급한 걸 보니 내가 선심 쓸게요. 30분 만이에요.”“감사합니다.”차설아는 소장에게
교도관이 배경윤을 향해 물었다.“네, 괜찮아요.”배경윤은 옷소매로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는 차갑게 돌아섰다.“누가 면회 왔어요.”“면회요?”배경윤의 무감각한 눈동자가 약간 움직이며 밝아졌으나 곧 다시 어두워졌다.그녀는 이번에 함정에 빠져 아무도 그녀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배경윤은 조금 정리를 하고 교도관을 따라 면회실로 향했다.“설아야, 돌아왔어?”그녀는 차설아를 보고 감격에 겨워 철문 쪽으로 달려갔다.“경윤아, 내가 너무 늦었지? 고생 많았어.”차설아도 철문을 향해 달려들었고 울먹이며 배경윤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철문을 사이에 두고 좁은 창문을 통해서만 서로를 볼 수 있었다.“눈이 왜 그래, 입가는 왜 찢어졌어?”차설아는 예리하게 배경윤의 눈가와 입가가 모두 다쳤다는 것을 발견했다.“내 친구가 다쳤어요. 의사는, 의사 어디 있어요?”“쉿, 설아야,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여기서 이런 건 다반사야. 우리 모처럼 만났으니까 얘기나 많이 하자!”배경윤은 가냘픈 손가락으로 철제 난간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그녀는 면회 시간이 한 번에 30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만약 의사가 진찰하러 오면 차설아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경윤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말해봐.”차설아는 배경윤에게 물었다.그녀는 반드시 일의 경과를 알아야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배경윤을 구할 수 있었다.“이 일은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어. 탓하려면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나를 탓해야지.상대방이 몇 마디 위협해서 내가 손을 댔고 그곳은 또 공사장이었으니... 그 사람의 머리에 못이 박혔어...”배경윤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뒤통수에 못이 박혔으니 살지는 못 했을 거야... 난 살인자가 된 거고...”“걱정하지 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상황이 심각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최고의 변호사들이 있잖아? 분명 널 구할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구할 수 있을 거야.”차설
차설아도 이상했는데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렇게 빨리 일이 해결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갈 수 있다고 하면 잔말 갈고 가지? 토 달지 말고.”교도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뒷배로 법정 제재를 모면하는 이런 부잣집 아가씨에 대해 그는 원래 별로 좋은 인상이 없었다.“네, 네. 갈게요, 가.”배경윤은 너무 감격해서 말했다.행복의 순간은 그녀가 미처 생각을 마칠 겨를도 없이 무척 빨리 왔다.간단히 정리하고 배경윤은 잡혀가던 날 입었던 사복으로 갈아입고 감방을 나왔다.“설아야, 드디어 내가 자유로워졌어!”그녀는 구치소 문을 나서자마자 맑은 공기 냄새를 맡고 하늘의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차설아와 부둥켜안았다.“그래, 그래. 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너도 피해자니까 자유는 당연한 거야!”차설아는 배경윤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달랬다.“설아야, 이곳은 지옥보다 더 무서워.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우리는 반드시 규율과 법을 준수해야 해. 평생 이런 곳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그, 그럼.”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났다.그녀는 자신의 손에 사람의 피가 묻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 성격은 배경윤보다 더 악랄해 충분히 살인죄로 고소될 수 있었다. 이는 몇 년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잘못하면 무기징역, 심지어 사형까지 받을 수 있었다.“하지만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누가 손을 썼지?”배경윤은 눈물을 훔치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말고 정말 누가 나를 도와줄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어. 설마 우리 아빠? 혹은 오빠?”하지만 이 일은 철저히 비밀인 상태였는데 오빠는 현재 남극대륙을 탐험 중이어서 이렇게 빨리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한창 화가 나 있었는데 지난번에 기분 나쁘게 헤어지고 나서 다시는 그녀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으니 그대로라면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혹시 널 몰래 짝사랑하는 사
사도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그냥 돈 좀 썼지?”“구체적으로는? 돈만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구체적으로는 피해자 가족 계좌로 300억 원을 송금한 뒤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든 사람을 보내 과일을 사서 인사를 시켰지... 그들도 자기 아들이 먼저 일을 벌였다는 것을 아니까 순순히 합의했어.”사도현은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하게 말했지만 큰 힘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설아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너 이 자식, 300억이나 줬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배경윤은 얼굴을 붉히며 차설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설아야, 그만해.”“사도현, 고마워. 300억은 어떻게든 갚을게.”“300억만 갚는다고? ”사도현은 껄렁대며 말을 이었다.“300억을 은행에 두면 하루에 이자가 얼마인지는 알아?배경윤의 얼굴이 갑자기 반쯤 어두워졌다.쯧쯧, 역시 사도현은 여전했다. 그 말에 감동한 자신이 바보지.“그래, 은행 이자도 계산해서 1년 안에 갚아줄게!”배경윤이 이를 갈며 말했다.“그래도 안 되지.”사도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우리 집도 사체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이자를 은행 이자로 계산할 수는 없고 그래도 40%의 이자는 있어야 하는 거 알지.”“40%? 30%도 아니고? 그냥 뺏지 그래?”속았다는 생각이 든 배경윤은 돌아서서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돌아가자, 감옥에 있는 게 돈 뜯기는 것보단 낫지.”“하하하, 걱정하지 마, 이자 갚을 수 있을 거야. 네가 내 곁에만 있으면 돼.”사도현은 배경윤의 팔을 잡고 말했다.차설아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미소를 금치 못했다.“저기,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말을 하고 차설아는 빛의 속도로 자리를 떠났다.“어, 설아야, 같이 가. 내가...”배경윤이 차설아를 쫓아가려 하자 사도현은 그녀를 잡고 차설아가 택시를 타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둘이 무슨 꿍꿍이야? 설마 짜고 한 건 아니지?”여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고는 사도현의 손
“아무것도 아니야!”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배경윤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머리로 상처를 가렸다.“부었는데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사도현은 여자의 턱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눈 밑을 살폈다.불과 며칠 사이에 두려운 게 없던 여자아이가 이렇게 가련한 모습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남자는 자신이 아끼던 장난감이 망가진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말했다.“아무도 내 사람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어.”배경윤은 남자의 손을 떼고 등을 돌렸다.그는 차설아와 마찬가지로 뼛속까지 강한 여자였는데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당연히 사도현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배경윤의 손을 잡고 말했다.“돌아가자.”“어, 어디로?”“구치소로 돌아가야지.”“구치소 가서 뭘 해? 겨우 나왔는데 안 돌아갈 거야. 거기는 지옥이지 사람이 있는 게 아니야!”배경윤은 발버둥 치다가 마침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교도소에 있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짧은 며칠 동안 거의 매일 같이 감방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머리를 쥐어뜯기거나 뺨을 맞았다.그녀가 반항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반항하면 할수록 더 비참하게 맞으니 어쩔 수 없었다. 참을 수밖에.그러니까 그 악몽 같은 곳을 그녀는 죽어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돌아가야지!“사도현은 단호한 태도로 배경윤의 어깨를 잡고 정중히 말했다. “예전의 기세 어디 갔어? 누가 널 때렸는데? 당연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갚아줘야지. 내가 있는데 뭐가 두려워?““너...”배경윤은 얼굴을 붉힌 채 남자를 주시하며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왜? 내가 한 말이 잘못되기라도 했어? 배가 큰 아가씨가 사람한테 맞아서 이 지경이 됐는데 그냥 넘어가는 게 말이 돼?”사도현이 격노하여 되물었다.그의 눈에는 배경윤이 마치 그의 딸과 같았는데 그가 괴롭힐 수 있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감히 그녀의 머리카락 한
“29번, 그 곱게 자란 아가씨?”사나운 여죄수는 갑자기 신이 나서 허벅지를 툭툭 치며 웃었다. “나갔다고 하던데 왜 다시 왔어? 마침 어깨가 시큰거리던 참인데 이리 와서 주물러 봐봐.”“매일 허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아프다고 했잖아? 내가 잘 치료해 줄게.”배경윤은 말을 마치고는 두말없이 여죄수의 뺨을 때렸다.“너... 너... 감히 날 때려?”여죄수는 그대로 얼떨떨해져서 통통한 볼을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배경윤을 쳐다보았다.“때리면 어때? 난 널 때릴 뿐만 아니라 네가 날 걷어찬 것처럼 널 걷어찰 거야.”배경윤은 말을 마치고는 여죄수를 향해 발길질해댔다.여죄수는 비틀거리며 나머지 여죄수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여죄수 몇 명은 벌벌 떨며 배경윤의 뒤에 있는 키 큰 남자를 쳐다보았다.“누가 감히 이 여자를 건드려?”사도현은 느릿느릿 담배 한 대를 태웠고 희미한 불빛이 그의 아름답고 사악한 얼굴을 비추었고 그의 은은한 카리스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여자들을 겁주기에 충분했다.“넌 또 누구야?”여죄수도 사도현을 발견하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그녀도 밖에서는 손에 몇 명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 두렵지 않았다.“나?”사도현은 담배를 피우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똑똑하면 그냥 가만히 맞지?”“뭐?”여죄수는 흉악한 얼굴로 주먹을 쥐고 복수를 준비했다.하지만 그녀가 불빛을 빌려 사도현의 얼굴을 똑똑히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신, 당신, 당신이 사 도련님인가요?”사씨 가문에도 회색 장사가 좀 있는데 여죄수는 길에서 빈둥거리다가 운 좋게 사도현을 한 번 만났고 사도현의 잘생긴 외모가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사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29번이 도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제가 만약 도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조심해서 모셨을 것입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제발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여
“오늘 목숨만은 살려줄게. 기억해 둬, 앞으로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마침내 화가 풀린 배경윤은 복수를 멈추고 벌벌 떠는 여죄수 몇 명을 가리키며 경고했다.“감사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여죄수 몇 명이 잇달아 배경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적어도 이번의 교훈을 통해 그녀들도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 밖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더 이상 쉽게 누구를 괴롭힐 수 없었다.배경윤과 사도현은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깔끔하게 구치소를 빠져나왔다.“손 이리 줘.”사도현이 갑자기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손?”배경윤은 남자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좋아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사도현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배경윤의 가느다란 작은 손을 감싼 뒤 부드럽게 문지르며 정색을 했다. “때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가 주물러 주려고.”반짝이는 하얀 달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너무나 잘생기고 그의 편애는 너무나 뚜렷했다.배경윤은 곧 그의 마음에 잔물결이 일 것 같아 얼른 손을 거두었다.“너 그러지 마... 오늘 밤 이미 충분해. 더 하면 내가 오해할 거야. ”그녀는 손을 등 뒤로 젖히고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그에게 말했다.생김새부터 기품까지 완벽한 남자가 안정감과 체면을 세워주다니 아무리 철벽을 치는 사람이라도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다만 과거의 경험이 그녀에게 사도현에 대한 설렘은 열심히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무엇을 오해한다는 말이야?”사도현은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갑자기 냉랭해진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몰라서 물어?” 배경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몰라서 그래? 걸핏하면 유혹해서 사람을 설레게 하고는 그냥 친구라고 하고... 이렇게 놀리는 게 재미있어?”“나 때문에 또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구나?”사도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이들은 어제저녁 약속한 대로 섬 근처에 있는 청정지역에서 스토클링하기로 했다.이때 감독 최빈이 말했다.“이 섬은 모양이 하트로 되어있어 하트섬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맑아 산호초와 열대 물고기를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들 오늘 운이 좋으면 하트섬 특유의 야맹주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밤이면 빛이 나는 그런 야맹주요.”“정말 야맹주가 있는 거예요?”배경윤이 이번 스노클링이 점점 더 기대되었다.사실 그녀는 일찍 하트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섬 중앙에는 고가의 진주가 들어있는 천연 조개가 많다고 했다. 최빈이 언급한 야맹주는 그저 전설일 뿐이었다.전설 속에서는 야맹주를 찾은 사람이 평생 행복할 거라고 했다.신난 배경윤은 야맹주를 찾아서 차설아한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호객행위인지 몰랐다.“당연히 있죠. 수년 전에 섬에서 살던 분들이 발견했대요. 찾을 확률은 낮지만, 없는건 아니에요.”최빈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그럼 뭘 기다려요. 저희 얼른 가요...”조급해 난 배경윤이 이때 대담하게 제의했다.“저희 스노클링하지 말고 아예 다이빙하는 거 어때요? 6미터 가까이 되는 그런 다이빙을 하면 야맹주를 찾을 수 있는 확율이 더욱 높지 않을까요?”“좋아요.”사도현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스노클링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다이빙해야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죠.”“저도 좋아요. 저는 폐활량이 좋아서 물속에서 산소통이 없어도 몇 분씩이나 있을 수 있다고요.”하늘도 찬성의 의미도 손을 들었다.올림픽 금메달 수영선수로서 물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오직 진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찬영 씨는 스노클링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이빙하실 거예요?”최빈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진찬영에게 물었다.“저는 경윤 씨랑 같은 걸 할게요.”진찬영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은 전에 중이염 수술을 받은 적 있어 수압을 견디지 못해 너무 깊게는 내려가지 못했다. 5미터
배경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거렸다.“급할 필요 없어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어제저녁 하늘 씨를 선택한 것은 저랑 사도현 씨의 모순을 와해시키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경윤 씨 마음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진찬영은 배경윤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계속 지금처럼 애매모호하지 말았으면 했다.이런 명분 없는 사이가 싫기도 했고, 사도현의 맹렬한 공격하에 배경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그래서 하루빨리 결정짓고 싶었다.“알았어요.”배경윤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저녁은 제 마음에 따라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오늘 아침 진찬영과 함께 잠깐 아침햇살을 만끽하면서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생활이 아니라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함께 하산할 때, 사도현도 마침 기상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스코어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경윤과 방을 바꾸기로 하고 짐을 배경윤의 바다뷰 별장으로 옮기기로 했다.복식 별장에는 방이 네 개나 있었고,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배경윤이 상냥하게 대해준다면 기꺼이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모습만 상상해도 기분이 좋았다.입이 귀에 걸려있을 때, 배경윤과 진찬영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웃으면서 걸어오는 것이다.“어디 갔었어요?”사도현의 안색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어딜 갔든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다 저를 놓칠 수도 있어요. 지금 경윤 씨한테 방을 하나 내어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죠...”사도현이 턱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할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었다.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유치하긴.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어요. 도현 씨한테는 천장에 별이 가득 붙어있는 저 방이 어울릴 것 같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