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처럼 일에만 집중하는 거야. 남자는 무슨. 애초에 내 감정을 소모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잖아!’“어쨌든 오늘 고마웠어. 나중에 꼭 갚을게. 그럼 잘 있어.”배경윤은 말이 끝나자마자 길가로 걸어가 택시를 잡았다.그녀가 사도현을 떠나려는 건,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너무 못났고 쉽게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배경윤은 사도현을 잊어야만 했다.“고맙다면 그냥 간단하고 직설적으로만 해. 나중에 갚겠다는 건 성의 없어 보여.”사도현은 베경윤의 앞을 가로막고 마치 억지를 부리듯 그녀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배경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지금 나한텐 돈도 없어.”“돈이 없어도 시간이 있잖아. 나 배고파. 같이 야식 먹으러 가자.”사도현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너 같은 바람둥이는 전화 한 통이면 여자를 차에 가득 채울 수 있을 텐데 굳이 나랑 같이 가야겠어?”“응. 너랑 같이 가야 돼. 같이 갈 거야, 말 거야?”“갈게!”배경윤은 한순간에 마음이 약해져 바로 승낙했다.“어쩔 수 없지. 너한테 빚진 게 있으니까.”“그럼 차에 타.”사도현은 더 밝게 웃으며 배경윤을 위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 즐거움은 예쁜 여자들 수십 명이 있어도 바꾸지 않을 감정이었다.차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서 천천히 주행했다.도로에는 행인도 차량도 사라져 막힘없이 달릴 수 있었다.둘 다 아무 말 없이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묘한 감정이 서서히 퍼져가는 걸 느꼈다.마침내 차는 도심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배경윤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긴장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야식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 어디로 가는 거야?”“내 집.”사도현은 차를 전용 주차 공간에 집중해서 세우며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려 깔끔하게 주차를 마쳤다.“왜 또 네 집이야? 너... 너 뭐 하려는 거야?”
배경윤은 사도현의 노골적인 암시를 듣고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목덜미까지 달아올랐다.“헛... 헛소리하지 마!”곧 배경윤은 사도현의 뺨을 때리며 무거운 그의 몸을 멀리 밀어냈다.“내가 정말 눈이 멀었나 봐. 너를 괜찮다고 생각하다니... 진짜 역겨워, 우웩. 너무 구려!”사도현은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난 것을 보고 그제야 웃음을 거두며 해명했다.“알았어. 장난친 거야. 내가 말한 즐거움은 네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니야. 오해한 거라고.”“그럼 즐겁게 해준다는 게 대체 어떤 걸 말하는 건데?” “내가 사람을 통해 알아봤는데 너 새우 좋아한다면서? 그래서 일부러 새우 10kg을 사왔어. 널 위해 준비한 거야. 이걸로 너의 불운을 떨쳐버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의미지. 이 정도면 너를 즐겁게 해줄 수 있겠지?”“새우?”배경윤은 이 두 글자를 듣자마자 눈이 반짝였다.사실 새우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위였다. 매년 새우를 먹는 시즌이 되어 배경윤은 새우를 먹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였다.유치장에서 지내던 그동안, 배경윤이 가장 그리워하던 것도 바로 이 맛이었다.사도현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배경윤은 정말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 넌 새우를 좋아하고 난 또 새우 요리에 자신이 있거든. 정말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사도현은 턱을 괸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새우 요리도 할 줄 알아?”“매운맛, 갈릭맛, 특제 양념까지 다 가능해.”“완벽해!”배경윤은 참을 수 없이 침을 삼키며 서둘러 말했다.“그럼 뭐 하고 있어. 빨리 나 즐겁게 해주라고!”“그래. 즐거우러 가자!”사도현은 승리를 거머쥔 듯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먹보 같으니라고. 새우 한 그릇에 이렇게 넘어가다니. 절대 그냥 놓아줄 수 없겠어.’두 사람은 곧바로 지하 주차장에서 직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도현이 살고 있는 도심 속 고급 아파트로 올라갔다.그의 집은 매우 아름다웠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인테리어는 최신 유행인 원
문이 열리는 순간, 사슴처럼 기대에 찬 표정이 배경윤의 얼굴에 굳어졌다.30평 남짓한 방안은 윤설의 대형 포스터로 가득했고 매끄러운 벽면에 걸린 것은 모두 윤설의 최신 포스터였다.포스터뿐만 아니라 윤설과 관련된 잡지, 그녀의 피규어, 그녀의 화보집 등 윤설과 연관된 각종 굿즈들이 진열대에 가득 놓여 있었다.이 넓은 방은 오직 윤설을 위한 공간으로, 마치 열렬한 팬의 가장 신성한 믿음처럼 느껴졌다.배경윤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고 방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급히 나와 문을 단단히 닫아버렸다.역시나, 그는 윤설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윤설은 사도현에게 있어서 수많은 여자들 중 유일하게 진심을 줬던 사람인 것이다.부엌에서 들려오는 ‘지지직’ 소리에 새우가 금방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와서 먹어.”사도현은 두 대야 가득한 새우를 내놓으며 말했다. 매운 맛 5kg, 갈릭 맛 5kg, 그리고 두 캔의 맥주까지 준비되었다.배경윤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실망감을 가다듬고 환한 미소로 다가갔다.“와, 이거 냄새 정말 좋다. 솔직히 말해서 너 본업은 요리사고, 부업이 엔터테인먼트계의 거물이지?” 배경윤은 식탁 위에 가득한 빨갛고 기름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우들을 보며 눈이 반짝였다.“과찬이야. 나도 이제 막 배운 거라서.”사도현은 겸손하게 웃으며 배경윤의 손에 장갑을 건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걱정스럽게 말했다.“잠깐, 너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잖아. 먹어도 돼?”“해산물 알레르기 있긴 한데 새우는 그나마 덜해서 괜찮아.”배경윤은 장갑을 끼고 새우 하나를 집어 뜨거운 기름에 찍어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음... 너무 맛있어. 딱 이 맛이야!”이 새우는 밖의 야시장에서도 뒤지지 않을 맛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배경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먹었다.“맛있으면 천천히 먹어. 충분히 준비했으니까.”사도현은 그런 배경윤을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묵묵히 새우를 까서 하나하나 대나무 꼬치에 꽂아 배경윤의
배경윤은 순간 몸이 얼어붙으며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떨림을 느꼈다.그녀는 뒤돌아 사도현을 바라보며 쿨한 척 농담을 던졌다.“인정해야겠어. 넌 정말 능숙해. 하지만 이젠 난 면역이 생겨서 소용없으니까 그만해줘.”사도현은 늘 이런 식으로 애매한 말로 사람을 홀리고 배경윤이 깊이 빠져들었을 때는 자신은 깨끗하게 빠져나가곤 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속상해할 곳조차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마음이 흔들리고 사도현을 좋아한다 해도 다시는 스스로 착각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으리라 배경윤은 결심했다.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사랑이라면 차라리 놓쳐버리는 게 나았다.“그래? 그럼 정말 아쉽네...”사도현은 노련한 사냥꾼처럼 배경윤이 단순히 ‘말뿐'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쉽게 떠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사도현은 배경윤의 앞에 다가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그녀 입가에 묻은 붉은 기름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드디어 결심하고 너한테 다가가려는 건데 떠나겠다고 하다니... 정말 매정하네.”배경윤의 심장은 ‘쿵쿵쿵' 뛰었고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채 물었다.“너...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나, 사도현이 진심으로 배경윤에게 부탁하는 거야. 내 엉망인 방을 치워주고 내 새로운 룸메이트가 되어줄 수 있겠어?”“무슨... 방 청소는 청소부를 불러야지.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너...”다음 순간, 사도현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진하고도 순수한 키스였다.‘뭐지?’배경윤은 그 자리에 서서 손과 발이 얼어붙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온몸이 마치 봉인된 것처럼 느껴졌다.사도현은 눈을 감고 부드럽게, 그녀와의 키스에 집중했다.그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배경윤의 볼을 스치며 마치 작은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듯했다.배경윤은 심장이 마치 나비 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졌고 자신도 곧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사도현의 키스에 응답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사도
사도현은 말이 끝나자마자 배경윤을 번쩍 들어 올려 평소와 다른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두 사람은 침실로 향했고 이제 길고 긴 밤만이 남아 있었다.다음 날 아침.배경윤은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하게 깨어나 옆에 누워 있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여전히 모든 것이 꿈같고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사실 어젯밤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사도현은 배경윤이 고생한 것이 안쓰러워 약을 발라주고 그녀를 품에 안고 밤새 곁에 있어 주었다.오히려 배경윤이 잠들지 못하고 작은 손으로 사도현의 몸을 더듬으며 그의 인내심을 시험했다.“서두르지 마. 어떤 일들은 서둘러서 좋을 게 없어. 우린 앞으로 많은 계절을 함께할 거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장난스러운 행동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눈을 감은 채로 그녀를 포근히 안아주었다.“뭐야, 평소엔 마치 바람둥이처럼 보이더니 알고 보니 순정파네?”배경윤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헐렁한 잠옷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자신에게 의문을 품었다.‘혹시 내가 너무 평범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가?’이런 생각이 들자 배경윤은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다.그래서 용기를 내어 사도현에게 다가가 키스를 하며 그를 깨웠다.“음...”사도현은 잠결에 귀여운 그녀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순간적으로 잠이 달아났다.이런 행동을 참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결국 그는 몸을 뒤집어 상황을 주도했다.“배경윤, 네 기술은 너무 서툴러. 오빠가 가르쳐줄게.”게으른 주말,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고 햇살마저도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점점 더 깊어졌지만 배경윤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잠깐!”“뭘 잠깐이야. 아침의 남자는 배고픈 늑대라는 걸 몰라?”“말도 안 돼. 어젯밤엔 서두르지 말라며!”“어젯밤은 어젯밤이고 아침은 아침이지.”사도현은 이미 기다릴 수 없었다.“아니야. 누가 문을 열었던 것 같아!”배경윤은 남자를 밀어내며 겨우 이성을 유
사도현은 무뚝뚝하게 그 자리에 서서 냉랭하게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잘하지 그랬어?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잘못했어, 오빠, 나 용서해줘. 이미 어르신께 분명히 말씀드렸어. 내가 연예계에서 더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아니 어르신이 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난 오빠랑 함께 할 거야.”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꼭 껴안고 울면서 말했다.이 사람은 다름 아닌 사도현이 떠받들고 있는 여우주연상 윤설이며 사도현의 마음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일 뿐만 아니라 많은 남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근원이기도 했다.두 사람은 그동안 연예계에서 소문이 자자했는데 마치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었다.소탈하고 돈 많은 연예계 거물이 가난하지만 아리따운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또한 그녀를 위해 방탕한 바람둥이에서 그녀밖에 모르는 사랑꾼으로 변했다.아무 검색창에 사도현 세 글자를 쳐도 첫 번째 관련 인물은 영원히 여우주연상 윤설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네티즌의 추앙을 받아 팬 픽션으로 창작되어 수많은 사람을 미치게 했다.그런데 이런 감동적인 커플이 갑자기 무너졌고 두 사람은 작년부터 전혀 서로와 아무런 교류를 하지 않고 있었다.사도현은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부잣집 도련님이 되었으나 윤설의 자원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인기는 점점 더 상승했다.그래서 새 금주를 찾은 윤설이 그녀를 추어올리던 사도현을 배신해서 사도현이 흑화했다는 소문도 돌았었다...“콜록콜록!”침대에 누운 배경윤은 문 앞에서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냈다.“방에... 또 누구 있어?”윤설은 당황하지 않고 사도현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는 남자의 어깨를 넘어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도 바보가 아니니 들어온 순간부터 사도현의 침대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오빠,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거라면 아주 축하해. 성공했어. 난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하
윤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반박했다.그 자신감이 오히려 배경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그녀도 알고 있다, 사도현은 소문난 바람둥이라는 것을. 그와 스캔들이 난 여인은 수없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원해서 들이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설은 달랐다, 사도현이 기꺼이 마음을 내보여준 여자였다.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여지없이 졌다.“내 추측이 맞다면 당신이 뻔뻔하게 우리 오빠를 오랫동안 쫓아다녀서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거죠?”윤설은 배경윤을 위아래로 둘러보면서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만약 우리 오빠를 충분히 안다면 전혀 그의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죠. 다만 오빠는 지금 마침 그를 도와 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듣기 거북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배고플 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아요. 배를 채울 수 있으면 되죠... 당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도 똑같을 거에요.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당신은 볼품없게 버려질 거에요.”“그만해!”사도현은 참다못해 윤설의 말을 잘랐다.“도대체 언제까지 억지를 부리려는 거야? 포기하겠다고 한 사람도 너도 이제 와서 날 못살게 구는 것도 너야. 내가 잘하는 꼴은 못 본다 이거야?”남자는 정말 고통스러워서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윤설은 그가 마음을 다잡고 진지하게 대할 첫 번째 여자였고 그는 그때 그녀에게 200%의 진심을 쏟아부으며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추켜세우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진심은 적절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사랑하면 어떻고 유일한 사람이면 어때?이제 그는 피곤해서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단지 서로 편하게 지낼 사람을 찾아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었다...“오빠,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봐. 고칠 기회를 줘, 응?”윤설은 사도현을 바라보며 남자의 심리적 방어선을 차근차근 공략했다. “오빠도 알잖아, 날 사랑한다는 거. 다른 여자를 이용해 마음속 상처를 치료하려는 거라면 오빠의 상처도 낫지 않을 거고 저 여자한테도
배경윤은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기 위해 매정하게 말을 내뱉었다.과연 그녀가 방을 나가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사도현은 쫓아오지 않았다.“역시 남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믿을 구석 하나 없어.”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사양치 않은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자신의 자존심이 마치 발밑에 짓밟힌 것처럼 느껴졌다.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가 무슨 억울한 목숨인지 예전의 강우혁이나 지금의 사도현 모두 마음속에 한 여자를 품고 있었다.그녀는 그저 늘 대체품일 뿐이었고 여자가 다시 나타나면 그녀는 당연히 물러나야만 했다.너무 비참해, 이게 바로 운명이라는 건가?배경윤은 넋을 잃고 전당포로 돌아왔다.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머리 위로 쾅 하는 불꽃이 쏟아졌다.“차설아 아가씨의 컴백을 환영합니다.”장재혁은 유자잎을 물에 적셔 배경윤을 한 바퀴 돌며 악운을 제거했다.“자자, 화로를 건너요, 얼른. 건너면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민이 이모는 뜨거운 연탄불을 배경윤을 부축해 건넜다.그들은 배경윤을 맞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렸고 온갖 불운을 쫓는 의식들을 진행했다.“경윤아, 너 고생했어!”차설아는 두 팔을 벌리고 얼굴을 붉히며 배경윤에게 포옹하며 입을 열었다.“어때, 어젯밤 사도현이랑 좋은 시간 보냈어?”어젯밤 분위기가 이미 그 정도로 도달했으니 그 이후의 모든 것은 틀림없이 물 흐르듯 흘러가리라 생각했다.요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은데 배경윤과 사도현이 만약 결혼한다면 큰 위로가 될 것 같았다.“설아야, 네가 정말 내 친구라면 앞으로 내 앞에서 그 사람을 언급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나 정말 너랑 화낼지도 몰라.”배경윤은 턱을 괴고 전에 없던 진지한 태도로 차설아한테 말했다.이번에 그녀는 크게 마음을 상했기에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차단하려고만 했다.그녀는 연락하지 않으면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어...”차설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지만 배경윤의 암울한 모습을 보고는 차마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이들은 어제저녁 약속한 대로 섬 근처에 있는 청정지역에서 스토클링하기로 했다.이때 감독 최빈이 말했다.“이 섬은 모양이 하트로 되어있어 하트섬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맑아 산호초와 열대 물고기를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들 오늘 운이 좋으면 하트섬 특유의 야맹주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밤이면 빛이 나는 그런 야맹주요.”“정말 야맹주가 있는 거예요?”배경윤이 이번 스노클링이 점점 더 기대되었다.사실 그녀는 일찍 하트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섬 중앙에는 고가의 진주가 들어있는 천연 조개가 많다고 했다. 최빈이 언급한 야맹주는 그저 전설일 뿐이었다.전설 속에서는 야맹주를 찾은 사람이 평생 행복할 거라고 했다.신난 배경윤은 야맹주를 찾아서 차설아한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호객행위인지 몰랐다.“당연히 있죠. 수년 전에 섬에서 살던 분들이 발견했대요. 찾을 확률은 낮지만, 없는건 아니에요.”최빈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그럼 뭘 기다려요. 저희 얼른 가요...”조급해 난 배경윤이 이때 대담하게 제의했다.“저희 스노클링하지 말고 아예 다이빙하는 거 어때요? 6미터 가까이 되는 그런 다이빙을 하면 야맹주를 찾을 수 있는 확율이 더욱 높지 않을까요?”“좋아요.”사도현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스노클링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다이빙해야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죠.”“저도 좋아요. 저는 폐활량이 좋아서 물속에서 산소통이 없어도 몇 분씩이나 있을 수 있다고요.”하늘도 찬성의 의미도 손을 들었다.올림픽 금메달 수영선수로서 물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오직 진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찬영 씨는 스노클링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이빙하실 거예요?”최빈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진찬영에게 물었다.“저는 경윤 씨랑 같은 걸 할게요.”진찬영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은 전에 중이염 수술을 받은 적 있어 수압을 견디지 못해 너무 깊게는 내려가지 못했다. 5미터
배경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거렸다.“급할 필요 없어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어제저녁 하늘 씨를 선택한 것은 저랑 사도현 씨의 모순을 와해시키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경윤 씨 마음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진찬영은 배경윤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계속 지금처럼 애매모호하지 말았으면 했다.이런 명분 없는 사이가 싫기도 했고, 사도현의 맹렬한 공격하에 배경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그래서 하루빨리 결정짓고 싶었다.“알았어요.”배경윤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저녁은 제 마음에 따라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오늘 아침 진찬영과 함께 잠깐 아침햇살을 만끽하면서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생활이 아니라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함께 하산할 때, 사도현도 마침 기상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스코어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경윤과 방을 바꾸기로 하고 짐을 배경윤의 바다뷰 별장으로 옮기기로 했다.복식 별장에는 방이 네 개나 있었고,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배경윤이 상냥하게 대해준다면 기꺼이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모습만 상상해도 기분이 좋았다.입이 귀에 걸려있을 때, 배경윤과 진찬영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웃으면서 걸어오는 것이다.“어디 갔었어요?”사도현의 안색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어딜 갔든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다 저를 놓칠 수도 있어요. 지금 경윤 씨한테 방을 하나 내어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죠...”사도현이 턱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할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었다.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유치하긴.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어요. 도현 씨한테는 천장에 별이 가득 붙어있는 저 방이 어울릴 것 같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