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차설아에 대한 요해대로라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그녀가 이렇게 허둥지둥거리는 걸 보니 틀림없이 S급 위험 주의보가 내려졌다는 뜻일 거다.“왜냐하면... 집에 더 안 가면 내 해바라기가 다 시들어버릴 거니까. 내가 안 급하게 생겼어?”“허허, 이유도 참... 내가 믿을 거 같아?”“방금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하고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잖아. 벌써 약속을 어기는 거야?”“당신 정말... 이 일은 내가 지금 말하기 어려워.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게.”차설아는 성진을 달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런, 그녀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던 성도윤이 엘리베이터 중앙에 떡하니 서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시간이 마치 이 순간에 멈춘 것 같았다.“당신이 어떻게...”차설아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던 성도윤의 시선이 휠체어를 탄 성진에게로 향했고 잘생긴 얼굴에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의 빛을 띠었다.“성진? 네가 왜 여기 있어?”일부 사소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재편성되기 시작했고 한 단락씩 모두 연결되었다.서은아의 말에 의하면 성진은 그의 여자 친구와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눈앞의 이 여자가 차설아란 말인가?계속 돌봐주고 격려해 주고 시력을 회복하면 그녀의 얼굴을 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던 그 사기꾼?이와 동시에 성진도 차설아의 모든 행위를 이해했다.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뒤의 차설아를 향했다. “당신이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했던 게 그 때문이었구나... 내가 진작에 짐작했었어야 했는데. 당신을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망했다.차설아는 이마를 두드리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했다.휠체어 방향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퇴원할 필요 없으니 돌아가서 푹 자자.”“어차피 난
“오늘은 늦었으니 쉬어야겠다, 정말 알고 싶으면 내일 아침 일찍 찾아와. 내가 다 얘기해줄게.”성진은 말을 마친 뒤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나 졸려, 가자.”“그래.”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성도윤은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그들이 그렇게 화목한 모습이 마치 노부부 같았는데 그가 마치 억지를 부리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알려주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그는 어쩌면 자신이 정말 미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차설아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휠체어를 밀어서 원래의 병실로 왔다.여인은 묵묵히 이불을 깔고 성진을 일으켜 침대에 눕혔고 또 묵묵히 이불을 덮어주었는데 한마디도 없었고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였다.그렇게 피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피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 하늘은 늘 간단한 국면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침대 머리맡에 기댄 성진의 잘생긴 얼굴에는 보기 드문 굳은 표정이었고 역시 침묵을 지켰다.고요함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고 분위기는 미묘했다.차설아는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화가 났다는 거 나도 알고 있으니 나를 욕하고 싶으면 마음껏 욕해. 이번에는 내 잘못이야.”그에게 더 이상 어떤 일도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렇게 큰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정상인이라면 분명 화가 나고 실망할 것이다. 하물며 사소한 것까지도 반드시 성도윤과 비교해야 하는 성진은 더더욱!“내가 당신을 욕을 해서 뭐 해, 아니, 어떻게 욕해. 당신한테 기대어 살아가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성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성진,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너에게 말했더라면 너는 아마 진작에 폭발했을 거야.”차설아는 성진의 이상한 말투에 못마땅하여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이것 봐.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이렇게 많이 변명하는데 내가 어떻게 욕해
뜻밖에도 방문을 열자 성도윤이 문밖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복도의 등이 그의 모습을 길게 끌고 있었다.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차갑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얘기 좀 합시다.”남자가 고개를 들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랑 내가 무슨 할 얘기가 있어요?”“정말 우리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이 시간에 문을 열지 않았을 거예요.”“....”남자의 말에 차설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그렇지, 마음에 담은 것이 많아서 뒤척이다 보니까 잠이 안 오는 거고 그걸 정리 안 하면 잠을 더 오랫동안 못 잘 수도 있었다.“좋아요, 얘기 좀 해요.”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옥상의 환경은 나쁘지 않았는데 야외 카페로 가장 밝은 별을 볼 수 있었다.차설아는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성도윤도 곁에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침묵을 깨지 않았다.이상하게도 별로 친하지 않은 두 사람인데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편안했다.성도윤은 이런 느낌이 너무 좋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즐기는 느낌이었다.“나랑 얘기 좀 하자며 왜 말을 안 해요?”한참 후 차설아는 반짝이는 별에서 시선을 거두어 남자의 애틋한 눈동자에 부딪혔다.성도윤은 쑥스러워하며 어설프게 목청을 가다듬었다.“그쪽이 차설아예요?”그는 수준이 매우 떨어지는 쓸데없는 말을 물었다.“그럼 내가 누구예요?”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그녀는 이 녀석이 예전과 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빙산이었는데 지금은 멍청한 것 같기도?“그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너무 불쾌했다는 걸. 언젠가 내가 당신을 만난다면 꼭 욕할 거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욕을 한다고요?”“놀라워요?”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꽉 쥐었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약속을 어기는 거예요. 우리는
차설아는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데 또 마음 한쪽에는 조금의 기대가 있었다.“내가 뭐 때문에 당신한테 그렇게 잘해준 것 같은데요?”그녀는 그가 이미 기억을 회복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의심했다.만약 그렇다면 그의 연기는 정말 칸 영화제에 갔어야 했다. 너무나 완벽했다.“한 여자가 남자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베풀 수 있다는 건 그 여자가 이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죠.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잘해준 건 어쩌면 당신이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도 될까요?”성도윤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반년 가까이 그를 괴롭혔던 질문을 던졌다.신지 요양병원에서의 경험은 너무 특별했기 때문에 아무리 감정에 무딘 사람일지라도 차설아가 얼마나 그를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이런 의문을 품고 그는 나중에 요양병원으로 돌아갔고 그제야 여자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알게 되었고 뜻밖에도 자신의 피를 그의 약으로 사용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여자가 그를 이렇게 신경 쓰는데 왜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까?“너무 사랑한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 “내가 너무 착한가 보죠. 남을 기꺼이 도울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하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내 인품이 좋아서예요.”“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요. 남에게 잘해주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죠. 하지만 목숨을 걸고 남에게 잘해주는 건 사랑해서가 아니면 뭐 때문이란 말이죠?”“하하하, 성도윤 씨, 요즘 사랑이 많이 부족했나 봐요? 여자가 대가를 무릅쓰고 남자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건 사랑뿐만 아니라 속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차설아의 눈빛은 처음보다 날카로워졌다.만약 남자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그녀는 그의 흉터를 다시 들춰낼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표정이 살짝 바뀌며 되물었다.:속죄라니요?”“당신 눈이 어떻게 실명했는지 어
그가 이렇게 귀찮게 굴 줄 알았으면 그녀는 한사코 그와 대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장면은 한동안 어색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어요. 천천히 생각해봐요.”차설아는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일어나 떠나려 했다.“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못 가게 할 거예요.”성도윤은 여자의 손목을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의혹은 날 반 년 동안 괴롭혔어요. 얼마 후면 내 약혼녀와 결혼을 할 텐데 만약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난 은아한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요.”“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내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요, 우리 사이... 도대체 어떤 과거가 있는 거죠?”성도윤은 엄청나게 똑똑했고 감지 능력도 최고였다.뇌수술을 받고 깨어나 처음 그녀와 접촉했을 때 그는 그들 사이에 기묘한 이끌림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게다가 많은 사람이 우물쭈물하고 그녀에 대해서는 말을 회피하는 반응은 이 여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서은아와 결혼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공평한 일이니까!“그 말인즉슨 무조건 모든 것을 알고서야 마음 편히 서은아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차설아는 말다툼을 포기하고 물었다.“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인정했다.결혼이 임박할수록 이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다만 은아가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 그는 이런 감정들을 잘 숨겼을 뿐이다.“그럼 당신이 만약 내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서은아를 포기하는 거 아녜요?”차설아는 조심스레 떠보았다.“...”성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그는 몰랐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서은아는 현재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는 은아를 포기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만약 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고 단지 실수로 그녀를 잃어버렸다면 새로운 사랑과 옛사랑, 그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다.“그 봐요, 당신도 어떻게 해야
여자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연약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도윤아,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네.”서은아는 환자복을 입은 허약한 얼굴에 파이프까지 꽂은 채 옥상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여긴 어떻게 왔어?”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앞으로 나가 부축했고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제야 몸이 좀 나아졌는데 왜 이렇게 제멋대로 하는 거야?”“아니거든, 당신이 사라지면 내 몸이 어떻게 멀쩡해도 소용없어.”서은아는 두 번 기침하며 가냘프게 성도윤의 품에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 “아까 악몽을 꿨는데 너를 빼앗기는 꿈이었어. 갑자기 깨어나 사방을 둘러보는데 네가 없는 거야. 어쩐지 당신이 옥상에 있을 것 같아서 옥상으로 찾으러 달려왔어. 너무 힘들어. 상처가 덧나서 아픈 거 같아.”“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건 꿈일 뿐이야.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성도윤은 가슴이 아파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서은아는 줄곧 자신 곁에 있었고 그가 가장 힘들 때 그를 버린 적도 없었고 그로 인해 원수에게 복수를 당했기에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되었다.그녀가 아프니 그도 같이 아팠다. 그녀가 미간을 조금 찌푸려도 그는 그녀를 위해 온 세상을 등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정말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한 거야?”서은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남자를 바라보며 차설아를 가리켰다. “그럼 왜 늦은 밤중에 이 여자랑 옥상 커피숍에 단둘이 있는 거야? 이렇게 야릇한 분위기에 두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엉뚱한 생각을 않게 생겼어?”성도윤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궁금한 게 많아서 찾아가서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야.”“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지. 한밤중에 나 몰래 이 여자와 밀담할 필요는 없잖아? ”원래 안정감이 없던 서은아는 차설아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차설아 씨는 세계여행을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요? 갈 곳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여기서 우리랑 우연히 만나길 바란
그는 오늘 밤 자신이 약간 통제 불능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불장난을 하는 사람처럼 조심하지 않으면 분명 불에 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말이지? 이건 당신이 나에게 약속한 거야, 만약 당신이 나중에 이 여자를 따로 만난다면 나는... 여기서 뛰어내려 죽을 거야, 당신 평생 후회하게 할 거야.”서은아는 캄캄한 아래층을 가리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자, 화내지 말고 일단 내려가자. 여긴 너무 추우니까 감기 조심해야지.”성도윤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서은아를 안고 자리를 떴다.도중 두 사람은 차설아와는 말 한마디 없었는데 기본적 예의인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차설아는 두 사람이 떠난 방향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고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하하, 하하하! ”그러고 나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웃겨, 성도윤도 웃기고 서은아도 웃겼다. 하지만 가장 웃긴 건 역시 그녀 자신이었다.성도윤의 원래 짝이면서도 얼굴을 못 드는 내연녀 형편이 되어 치욕을 당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꽁냥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차설아, 정말 대단해. 그의 완벽한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이 정도까지 비굴하게 만들고 묵묵히 혼자 모든 걸 감수하다니... 이보다 더 미련한 사랑꾼이 어디 있겠는가!일주일 후차설아는 주치의의 원래 계획에 따라 성진의 퇴원 절차를 밟았다.이번 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또 짧았는데 성도윤과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만날 수 있는 어떤 장소도 피했다.모든 것이 평소와 같이 진행되었다. 만약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꿈만 같았다. 진실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꿈 말이다.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성진도 있었다.차설아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그도 절대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항상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차설아는 차를 불러 입원실 아래층에서 기다리게 했고 가방을 메고 성진을 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성도윤은 창문 뒤에 숨어서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그 차를 지켜보았다.“자기야,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는 거야?”심심해서 잡지를 뒤적거리던 서은아는 성도윤이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자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새 한 마리.”성도윤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새 한 마리?”서은아는 그 대답에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날아가는 새 한 마리였어, 하지만 아직 날개가 뻣뻣하지 않아 멀리 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성도윤은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은아의 좋지 않은 예감은 더욱 강렬해졌다.아마 남자가 말하는 '새는 단순한 새가 아닐 것이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홀가분한 척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자기야, 요 며칠 설아 씨를 다시 보러 간 적이 있어?”“내가 다시는 안 만날 거라고 약속했잖아.”성도윤의 표정은 약간 엄숙했다. “며칠 동안 나는 당신이랑 거의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당신이 이런 말을 묻는다면 나를 너무 믿지 않는 거 아니야?”“미안해,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칫 잘못하면 당신을 잃을까 봐 그러는 거야.”“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우리 사이에 자신이 없어? 아니면... 우리 사이의 사랑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은 건가?”성도윤의 눈빛은 탐구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럴 리가!”서은아는 찔린 듯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차설아한테서 성도윤을 훔친 도둑과 같다.성도윤이 지금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바로 그가 차설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어느 날, 그가 갑자기 기억을 되찾으면 서은아는 단 1초 만에 지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당신한테 물어봐도 된다고 말했잖아...”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많은 일이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성씨 가문 대저택.성주혁의 건강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그는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고 영양 수액 없이는 버틸 수조차 없었다.그날 밤, 그는 성도윤과 성진을 자신의 병상 앞으로 불렀다.“도윤아.”성주혁이 쇠약한 목소리로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보며 손짓했다.“이리 와, 할아버지한테 가까이 오너라.”“할아버지!”병약한 모습의 할아버지를 보며 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네 어머니한테 들었다. 요즘 설아 곁에 붙어 있다고 하더구나. 이제야 내 손자가 사람 구실 좀 하는구나...”성주혁이 힘없이 손을 뻗어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이미 노쇠해진 눈빛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그동안 마음속에 가장 걸렸던 사람이 차설아였고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도 그녀였다.“예전에 말이다, 내 평생 전우이자 가장 친한 형님이 자신의 손녀를 내게 맡기면서 반드시 손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부탁했었지.”“난 굳게 약속했지만 넌 내 기대를 저버렸고 그 애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아느냐? 도대체 몇 번을 울렸는지,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이제 와서 그 형님을 볼 면목이 있을지...”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한평생 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차설아에게만큼은 크나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이제라도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속 깊이 안도감이 들었다.“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이전엔 제가 철이 없었고 설아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제 남은 인생은 설아와 아이들을 지키는 데 바칠 겁니다.”성도윤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진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지루한 듯 문가에 기대어서 있었다. 애초에 왜 노인이 자신을 부른 건지도 모르겠는데 성도윤의 고해성사를 들으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뭐가 그렇게 웃긴데?”성도윤이 뒤돌아보며 성진을 차갑게 노려봤다.평소라면 굳이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피했을 것이었다.그는 지금 더 중요한 것들
차설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의심이 가는 사람을 쓰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원칙이었다.현이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든, 최소한 지금 그녀를 계속 곁에 둘 수는 없었다.“설아 씨, 제발 절 내쫓지 말아 주세요! 제 월급을 안 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제발, 제발 저를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만약 제가 쫓겨나면... 저희 엄마의 목숨이 위험해져요!”현이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그 여자는 계획이 실패하면 평생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었다.그렇기에 현이는 절대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없었다.“그래서 누군가 현이 씨 어머님을 인질로 잡고 나를 해치라고 협박한 건가요?”차설아는 중요한 포인트를 짚으며 예리하게 물었다.“그게...”“다시 말하지만, 지금 말해 주면 제가 도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차설아의 차분한 말에 현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집 밖을 살폈다. 그 여자가 근처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를 악물며 말했다.“며칠 전, 한 여자가 저를 협박했어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얼굴도 몰라요. 항상 가면을 쓰고 있었고 굉장히 신비롭고 무서운 사람이었어요.”“매일 설아 씨가 마시는 음료에 약을 한 봉지씩 넣으라고 했어요. 총 열 봉지를 넣어야 하는데 오늘이 다섯 번째였어요. 만약 계획이 실패하면 그 여자가 저희 엄마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설아 씨, 정말 죄송해요!”“역시나 그랬군요.”차설아는 주먹을 살짝 쥐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구일까? 여자라면... 설마 서은아?’하지만 서은아는 오히려 정면으로 공격하는 스타일이었고 이렇게 몰래 음모를 꾸미는 수법은 그녀답지 않았다.‘그렇다면... 대체 나와 어떤 깊은 원한이 있는 여자가 이런 수고를 들여 날 해치려 하는 걸까?’“설아 씨, 저를 신고하세요. 제가 이런 짓을 한 건 범죄라는 걸 알아요. 저도 죄책감에 너무 괴로워요!”현이는 완전히 무너진 듯 흐느끼며 말했다.차설아에 대한 죄책감과
“아무것도 아니야.”차설아는 배경윤의 성격을 잘 알기에 당장은 이 이상한 점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현이는 최근 차설아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가정부였다.성실하고 부지런한 성격에 차설아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함께 지내며 그녀가 꽤 선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렇다면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걸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결국 배경윤을 적당한 이유로 돌려보낸 후, 현이를 방으로 불렀다.“부르셨나요?”현이는 부엌일을 마치고 손을 깨끗이 닦은 뒤 서둘러 방으로 올라왔다.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성실한 그녀였기에 차설아도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오늘 제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고 하던데요?”차설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아, 그거요? 제가 착각했어요. 그건 설탕이 아니라 프림 같은 거예요.”현이는 이미 배경윤이 그 일을 차설아에게 전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그래서 부엌에서 일하면서도 미리 변명할 내용을 준비해 두었고 심지어 실제로 ‘커피 첨가제’라고 할 만한 것까지 마련해 두었다.“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차설아는 현이의 태연한 반응을 보고 오늘은 더 캐물어 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했다.그래서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했다.“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할 일이 많아서요.”현이는 서둘러 방을 나가려 했다.예전에는 차설아와 대화할 때 항상 친근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달랐다.마치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 반응이 차설아에게는 더 의심스러웠다.차설아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예전과 달랐고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우리가 현이 씨한테 그래도 잘해줬다고 생각했어요.”차설아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아, 네! 설아 씨도 대표님도 그리고 민이 이모도 저한테 정말 잘해 주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