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만둣국을 들고 중국집을 나섰는데 도중에 고개를 숙여 만둣국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향을 맡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고개를 들었을 때, 일찍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키 큰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당신...”차설아는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그 우렁각시가 당신이었어요?”1m 떨어진 곳에 서서 착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응시하는 성도윤의 표정은 놀라움과 당혹감 그 자체였다.“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차설아는 당황하여 말을 좀 더듬거렸지만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부정하지 마세요. 간호사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줬으니까...”성도윤은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서며 우뚝 선 자세로 여인에게 캐물었다.“말해요.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더 이상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차설아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무슨 목적이 더 있겠어요? 단지 당신이 굶어 죽을까 봐 그랬죠.”“내가 굶어 죽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리 아는 사이였나요?”성도윤의 그윽한 눈망울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아니면, 내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이런 식으로 내 주의를 끌려고 하는 겁니까?”“? ? ?”차설아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이 녀석, 성진의 뼈와 피, 그리고 눈을 사용하더니 성격도 성진처럼 나르시시즘이 되고 뻔뻔해진 것인가?“그래요. 제가 당신을 꼬시려고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저에게 넘어온 건가요?”차설아는 가늘고 고운 눈을 들어 여우처럼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그녀를 불순한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도 그에게 불순한 목적을 보여주면 된다. 그래야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녀와 너무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그래요, 그럼 다시 꼬셔 보세요.”성도윤이 무뚝뚝한 얼굴로 여자에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 차설아는 그의 감정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그날 이후,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그들은 마치 갑자기 방향을 잘못 잡은 두 개의 평행선처럼 잠시 교차했다가 다시 각자의 궤도로 돌아갔다.성도윤은 서은아의 곁을 지켜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룹의 일을 처리했다.지난 반년 동안, 성대 그룹은 성도윤의 강력한 지원 아래 마침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칩 협력사를 찾았다. 그렇게 출시된 전자 제품의 판매량도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그룹의 분기 보고서도 수치가 매우 이상적이었다.그와 동시에, 성대 그룹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며 차설아가 설립한 천신 그룹도 KCL 그룹의 도움을 받아 활발하게 발전했으며 그룹 이익도 빠르게 업계 3위 안에 들어섰고 심지어 성대 그룹의 추세를 크게 앞질렀다.두 집안은 비록 적수이긴 하지만 지난 반년 동안 서로에 대해 어떠한 정면충돌도 하지 않은 채, 선을 분명하게 지키며 그 누구도 서로의 사업에 발을 뻗지 않았다.사실 이것도 반년 전, 차설아와 성씨 가문, 그리고 서씨 가문이 미리 합의한 결과이다. 그녀는 성도윤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성씨 가문도 그녀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날 성도윤은 컴퓨터를 켜고 계약서 처리에 열중했는데 그때, 비서 진무열은 영상통화를 요청했다.“무슨 일이야?”남자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보스, 일이 생겼습니다.”진무열은 예전과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화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심각할 필요는 없지.”성도윤이 차분하게 농담을 던졌다.그는 많은 변고를 겪으면서 원래도 잘 놀라지 않던 성격이 더욱 차분해졌다.“허허, 보스, 몸이 좋아지고 나서 정말 유머가 많아졌네요.”진무열이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지만 그는 정말 웃을 수가 없었다.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목숨을 얻게 된 성도윤의 성격은 정말 크게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얼음처럼 차갑게만 굴었지만 지금은 입만 열면 건들건들한 느낌이 가득했다. 오히
그러자 성도윤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화를 냈다.“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부도덕한 짓을 한단 말이야?”“여러 증거로 볼 때 이런 비열한 수법은 우리의 오랜 원수, ‘성심 전당포'가 한 짓인 것 같습니다. 보스... 이번에는 반드시 강펀치를 날려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괘씸한 것. 또 그 자식들이야?”성도윤은 냉담한 얼굴로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화가 났다.“그들이 굳이 지옥을 찾아왔다면. 우리가 무례하다고 비난하면 안 되지.”성도윤 쪽은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차설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여자는 병원의 인공 호수 옆에서 휴대폰으로 오빠 차성철, 그리고 원이와 달이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오빠, 솔직히 말해. 오빠 주업은 전당포 장사이고 부업은 돼지 기르는 거지. 난 왜 원이와 달이가 살이 찐 것 같지?”사실 차설아의 말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 영상 속의 원이와 달이는 확실히 전보다 살이 많이 쪄있었다. 분명 예전에 잘생긴 도련님과 예쁜 공주님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동글동글한 공처럼 귀엽기 그지없었다.“네가 나한테 뭐라 할 자격이 있어?”그러자 차성철은 정색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넌 부업이 가정부야?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성진 그 녀석을 돌보고 있어? 네 아이도 버리고 그 녀석을 돌보는 이유가 뭐야? 그 녀석이 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봤어, 아니면 네 목숨을 구해줬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성진한테 매달리는 거야?”남자는 사업을 버리고 성씨 가문 남자를 돌보기 위해 달려간 차설아에게 항상 불만이 많았지만 차설아가 워낙 애교를 잘 부리는 탓에 몇 마디 좋은 말로 달래기만 해도 너무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화가 나 매우 불쾌할 뿐이다.“진짜 미안해. 오빠가 나 대신 아이를 돌보고 천신 그룹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거 다 알아.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곧 돌아갈게. 오빠와 원이 달이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현장에서 노래 세 곡
진무열과의 대화를 마친 성도윤은 초조해하며 컴퓨터를 덮은 뒤, 기분 전환을 위해 근처 산책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요즘 그룹의 일에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현재 성씨 가문 전체를 둘러봐도 그룹 전체를 관리하는 중책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성진 두 사람뿐이다.그러나 성진은 지금 그 사기꾼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만약 그가 이대로 계속하여 게으름을 피운다면 성대 그룹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어쩔 수 없다. 현실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부단히 전진하지 않으면 결국은 잡아먹히기 마련이다.해안시의 8대 가문의 수장으로서 성씨 가문은 권력과 영광을 누린 만큼 수없이 많은 위험과 책임을 져야 했다.그렇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잠시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게다가 아직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는데 ‘성심 전당포'와 같은 원수들이 참지 못하고 도발하기 시작했다. 만약 어느 날 그가 정말 멈추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성심 전당포...”넓고 잔잔한 호숫가에 우뚝 선 남자의 얇은 입술이 차갑고 잔혹한 글귀를 내뱉었다.“이번에는 당신들이 스스로 총부리를 들이받았으니 어떤 결과가 따라도 싸.”멀리서 바라보면 성도윤의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은 고귀한 기질을 뿜어내고 있었고 마침 붉은 석양이 서쪽으로 질 무렵, 황금빛 햇볕이 호수에 스쳐 가며 호수면은 영롱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어 그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 장면은 정말 한 폭의 유화와도 같이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그런데 지금 남자는 머릿속으로 잔인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북유럽의 호수는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고 호수의 표면에는 때때로 새가 멈춰서며 신기한 광경을 그려냈다. 게다가 시원한 산들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대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자니 저절로 몸
그 청아한 모습을 한 여인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능숙하게 아기의 옷을 벗겨내고 가슴을 누른 다음 입을 맞대고 아기에게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한 번, 한 번, 또 한 번,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아이는 마침내 물을 토해냈고 하얗게 질린 얼굴에도 점차 혈색이 돌아왔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으니 빨리 병원으로 보내 정밀 검사를 받도록 하세요.”그제야 여자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젊은 엄마에게 영어로 말해주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들 덕분에 저와 아이가 살 수 있었어요!”젊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서둘러 의사를 찾아갔다.성도윤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고 여전히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완벽한 이목구비를 타고 흘러내렸다.이어 긴 손가락으로 무성한 머리카락을 넘겨버리자 몸은 피곤했지만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역시 좋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나 보다.“어, 잠깐만요!”그 청아한 모습을 한 여자도 막 자리를 뜨려는데 성도윤은 귀신이라도 쓰인 듯 무의식 간에 여자를 불러세웠다.“네? 저요?”여자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한 두 사람은 개똥을 밟기라도 한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졌다.“당신이라니.”성도윤은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시큰둥한 눈빛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돈 때문에 나를 꼬시려고 하는 된장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용감하게 뛰어들 줄 몰랐네요. 오늘 다시 보게 됐어요.”“허허, 정말 건방진 남자가 따로 없군요. 눈이 나쁘면 스스로 도려내어 더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게 어떨까요?”차설아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강산은 바꾸기 쉬워도 본성은 바꾸기 어렵다고 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녀를 폭발시킬 만큼 화나게 할 방법을 갖고 있었다.닥치는 대로 사람을 구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 거지?!“나를 꼬시려는 계획이 실패했다고 벌써 화가
“콜록콜록!”차설아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색하게 왜 이래요?”“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요. 있어요, 없어요.”성도윤은 경험이 풍부한 사냥꾼처럼 차설아에게 말을 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살피려 했다.“네, 있어요.”차설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진지하게 허튼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에 대한 감정은 흐르는 강물처럼 걷잡을 수 없어요. 정말 매력적이시네요. 제 유일한 신이에요.”“...”“어때요, 만족하세요? 카리스마 넘치는 척 안 하면 안 돼요? 정말 어색해요.”“?”“아직도 마음에 안 들면 계속할 수 있어요, 나 이런 헛소리 엄청나게 잘해요. 더 듣고 싶다면 더 할 수도 있어요.”성도윤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됐네요.”이 여자... 정말 평범한 여자가 아니군.그는 그녀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려고 할수록 더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다른 일 더 있어요? 없으면 난 가봐야 해요”그녀는 자제력이 매우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오래 있을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는데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지금 온몸이 흠뻑 젖었고 날도 어두워져 정말 추웠다.“없어요, 가봐요.”성도윤도 차설아와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그가 보기에 여자는 좀 지나치게 미친 것 같았는데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차설아가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요.”“또 왜 그래요?”“추우니까 이거 입고 가요.”성도윤은 자신이 아까 물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놓은 마른 외투를 여자에게 살짝 걸쳐주며 말했다.“몸조심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유혹할 힘이 어디 있겠어요.”“정말 고맙네요.”차설아는 말없이 주먹을 조이며 일부러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왜 병원에 있는 거죠? 여기서 일해요? 아니면 가족이 아파서?”“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가요.”차설아는 차갑게 가버렸지만
성진이 볼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일을 그녀는 비교적 편하게 할 수 있었다.“갑자기 옷은 왜 갈아입어?”성진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옷이 더러워져서.”차설아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남자에게 성도윤을 만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분명 또 끝도 없이 헛된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거짓말.”성진은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영원히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지금 나를 바보처럼 속이고 있잖아.”남자가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차설아가 깨달았다. 병원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그는 이곳에 자주 오기 때문에 누가 그에게 정보를 알려줬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내가 당신을 속였다니, 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 말해봐.”여자가 조심스럽게 탐색하듯 말했다.“닥터 데이비드가 입원 구역의 작은 호수에서 익사 사건이 발생했고 당신이 뛰어내려 사람을 구했다고 하던데. 당신이 옷을 갈아입은 것은 당신의 옷이 젖어서지 옷이 더러워져서가 아니란 말이지.”성진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맞아, 거짓말이야. 난 당신이 걱정할까 봐 그랬지. 데이비드는 정말 입이 빠르네, 병원을 옮겨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사생활이 하나도 없겠어.”그녀는 확실히 병원을 옮기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병원에서 서은아와 성진은 같은 층에 있으니 조만간 양측이 마주칠 것이 분명했다.성진은 원래 매우 비관적이고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병원을 바꾼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본질을 알지 못했어.”성진은 침대에 앉아 보기 드문 진지한 모습으로 차설아를 낯설게 했다.“본질이 뭔데?”“본질은 당신이 나를 당신의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사람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야”“그 결론은 도대체 어떻게 낸 거야? 우리가 지금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그래도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야?”“내가 지금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성진은 이번에 정
차설아가 자료를 들고 성진의 전원 절차를 밟을 때 주치의 데이비드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제인, 왜 갑자기 병원을 옮기려고 하는 거죠? 그는 지금 회복이 중요한 시기예요. 장기간의 이동은 적합하지 않다고요.”데이비드의 스펙은 인근 도시로 보면 모두 최고로 손꼽히고 상냥하고 겸손하며 책임감도 강했다.처음에 그들이 이 마을에 온 것도 데이비드의 의술 때문이었는데 이 반년 동안 데이비드의 치료를 받으면서 서로 깊은 우정을 쌓았다.“특별한 사정이 있어서요.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거에요.”차설아는 데이비드에게 대충 설명하고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반드시 병원을 옮겨야 한다면 주치의도 바꿔야 하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의사마다 의료 이념이 다릅니다. 내가 보기에 진의 상황은 좋아지고 있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요양하고 기분을 좋게 유지하면 천천히 좋아질 것입니다, 적어도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데이비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일깨워주었다. “만약 병원을 바꾸고 주치의를 바꾼다면 의사가 데이터만 보고 급진적인 치료방식을 취할 수 있어요.”“급진적인 치료방식이라뇨?”“근육재생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든지, 새로운 팔다리를 직접 이식한다든지...”“그건 안 되죠.”차설아는 듣기만 해도 미덥지 않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다.호르몬 주사를 맞든 팔다리를 바꾸든 그건 정상적인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전 병원을 옮기지 않는 것을 추천해요. 어쨌든 이미 잘 적응했고 나의 의료 이념을 진도 잘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이 결정적인 시기에 포기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데이비드는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차근차근 논리정연하게 차설아를 설득했다.“데이비드, 당신 말이 일리가 있어요, 그럼 전원은 안 할게요, 퇴원 절차를 밟고 좀 지나면 다시 입원할게요, 그건 괜찮아요?”차설아는 심사숙고 끝에 절충점을 찾았다.이제 성진의 허리 부상은 거의 회복되었고 병원에 있어도 매일 일상적인 재활 훈련을 하고 손상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