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은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양다인과 소 노인을 해결하기 전까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납치되는 일을 또다시 감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무리 아쉬워도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아이를 정유준 곁에 놔둘 수밖에 없다.안전한 게 제일 중요하니까.강하영은 강세준과 정희민을 동시에 품에 안고, 네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고 있다가, 강하영이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얘들아, 엄마는 항상 곁에 있으니까,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너희들을 보러 올게. 그러니까 며칠만 참을 수 있지?”강세준과 강세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독 정희민만이 아무 반응이 없자, 강하영은 정희민을 껴안고 있던 손을 풀고 고개를 숙여 희민을 바라보았다.“희민아?”그제야 정희민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앞으로 저도 엄마를 따라갈 수 있어요?”그 말을 들은 강하영은 가슴이 에이듯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대답했다.“물론이지! 희민이도 소중한 아들인데 어떻게 혼자만 내버려 두겠어?”하영의 말에 정희민의 새하얀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강세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엄마! 그 사람이 저를 떠보려 했어요!”“아빠가?”강하영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강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물었는데, 세희는 똑똑하니까 엄마를 배신하지 않았어요.”순간 강하영의 머릿속에 장미꽃이 떠올랐다.‘대체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아이한테서 내 취향을 알아보고 싶었을까? 내가 아직도 5년 전의 강하영인 줄 아나 봐?’강하영은 강세희의 작은 코를 쓱 훑어주었다.“우리 세희 점점 똑똑해지네. 이젠 떠보는 것도 다 알고!”“그럼요! 저는 엄마 딸이잖아요!”“자뻑이 심하네.”그때 강세준이 한 마디 끼어들자 강세희는 세준을 흘겨보았다.“오빠는 말하지 않아도 돼!”“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아이들과 함께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강하영은 회사로 향했다.저녁, 웨스턴
강하영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할 때 배현욱이 재빨리 하영의 말을 끊었다.“강하영 씨, 유준이는 사람 찾으러 온 거야.”배현욱도 따라 앉으며 설명하자 강하영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신분의 직원들이라 정유준이 직접 찾으러 올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강하영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배 대표님은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이런 곳에 정 대표님이 직접 만나러 올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강하영 씨는 아닌 것 같아?.”“저는 그럴만한 자격이 못 되죠.”웃으며 되묻는 배현욱의 말에 강하영이 바로 반박하자 옆에 있던 정유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너 찾으러 온 거 아니니 괜히 딴생각하지 마. 난 G를 만나러 온 거야.”정유준이 확실히 자신의 목적을 밝히자 강하영은 오히려 멍해지고 말았다.이때 그 말을 들은 캐리로 얼른 강하영을 바라보며 하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어떡해, 저 두 사람은 너 찾으러 왔나 봐!”강하영은 얼른 캐리를 흘겨보며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알았으니까, 귓속말 좀 하지 마.”만약 정유준이 이 사실을 알면 또 하영을 귀찮게 할 게 뻔했다. 곧 부진석과 함께하게 될 텐데 더 이상 정유준과 쓸데없는 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우인나도 인차 머리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정 대표님, G는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최고의 디자이너인데, 어떻게 하영이 회사에 나타날 수 있겠어요?”정유준이 그런 우인나를 힐끗 쳐다보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배현욱이 말을 가로챘다.“모든 건 가능성이 있답니다. 우인나 씨.”그 말에 우인나는 헛웃음을 치며 반문했다.“그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90퍼센트는 있다고 생각해요.”“증거 있어요?”“패션에 관한 온라인 상의 네티즌들의 댓글과 예약이 증거가 아닐까요?”배현욱의 반문에 우인나도 되물었다.“그럼 G와 강하영이 아는 사이라고 확신하는 건가요?”“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바로 이때, 파티장의 음악이 뚝 그쳤고, 메일의 수신 알림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정유준은 날카로운 시선이 강하영과 캐리 쪽으로 향했고, 캐리가 휴대폰을 꺼내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바로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정유준을 힐끗 쳐다보았다.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캐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쳤지만 이내 모른 척하며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유준은 캐리가 바로 G라고 확신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 조건을 내걸며 모셔 오려 해도 꿈쩍도 안 하더니 알고 보니 강하영 옆에 있었다.‘왜? 행동으로 자기 진심을 표현하려는 건가? 아무리 큰 유혹이라도 자기 눈엔 강하영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순간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정유준이 잔을 들어 술잔을 전부 비우자, 우인나는 정유준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대표님이 취하기만 하면 더는 하영이를 귀찮게 하지 않겠지!’우인나는 정유준 곁에서 꼬드기기 시작했다.“정 대표님, 혼자 무슨 재미로 술을 마셔요? 배 대표님도 함께 마셔야죠!”우인나는 배현욱에게도 술을 가득 따르려 하자, 배현욱은 눈치 빠르게 얼른 잔을 치웠다.“우인나 씨는 왜 본인 상사와 같이 안 마셔요? 찔리는 거라도 있나?”그 말에 우인나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제 신분으로 어찌 사장님이랑 같이 술을 마시겠어요? 배 대표님은 사장님 친구분이면서 왜 마시지 않아요?”“유준이 우인나 씨랑 안 마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네요. 차라리 나랑 마시는 건 어때요?”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는 배현욱의 모습은 우인나의 눈에는 마치 도발하는 것처럼 보여, 우인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바로 언성을 높였다.“지금 그게 무슨 눈빛이죠?”“아무것도 아닌데, 왜 나랑도 못 마시겠어요?”누구랑 술을 마셔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던 우인나는 배현욱의 도발에 이를 악물었다. “마셔요! 오늘 밤 누가 이기나 한번 두고 보죠!”“……”두 사람의 모습에 강하영은 할 말을 잃었다.‘아니 왜 갑자기 싸우다가 술
하영의 말에 입술을 깨문 정유준의 어둡게 가라앉는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하나만 묻고 싶어. G와는 무슨 관계야?”“……”‘G와 무슨 관계라니? 내가 나랑 대체 무슨 관계겠어? 혹시 다른 사람을 G라고 생각하는 거야?’“내가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네요.”강하영의 대답에 정유준은 하영을 힐끗 쳐다보고 일깨워 주듯 입을 열었다.“G라는 자는 오만방자하고 멀리 내다보는 성격도 아닌 것 같으니, 아무리 한 방면에서 출중하다고 해도 미래가 보이지는 않는 것 같군.”“꼭 그렇게 장사꾼 시선으로 한 디자이너의 미래를 내다봐야겠어요?”강하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유준과 합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야가 좁은 사람이 돼버리다니.‘꼭 MK와 손을 잡아야만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지난 5년 동안 강하영은 누구에게도 의지한 적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꿈을 이루고 최고가 되었다.정유준은 손에 든 술잔을 천천히 흔들며 분석하기 시작했다.“돈을 벌 생각 없이 디자인만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질투심이 강한 인간들에게 눌려 어떻게 될지 모르지. 듣기 싫게 말해서 배후에 강한 세력이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조만간 그 장사꾼들한테 삼켜져 뼈도 추리지 못할 거야. 내 비서로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면서 이 바닥이 얼마나 복잡한지 아직도 내가 얘기해 줘야 알아?”강하영은 정유준의 말에서 그 어떠한 흠집도 찾아낼 수 없었다. 확실히 누군가 질투에 눈이 멀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큰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특히 이제 막 운영을 시작한 신생 회사라면.‘혼자서 강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강하영은 침착하게 술잔을 기울였다.“충고 고마워요. 앞으로 조심할게요.”“가끔은 네가 미처 막아낼 수 없는 일도 있어. 충고하나 하겠는데, G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통제하고 네 능력으로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그러니까 캐리가 바로 G라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영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묻자, 정유준
배현욱이 일어나 앉으니,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우인나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오자 대충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어젯밤 술에 취한 두 사람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것이다.“내가 묻잖아요!”우인나가 아무 반응도 없는 배현욱을 향해 또 소리 질렀지만, 배현욱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우인나는 배현욱의 나체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 당신 미쳤어요? 노출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창피하지도 않아요?”배현욱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옷을 주워 입으며 대답했다.“어차피 일어난 일인데 뭘 그리 순진한 척해요?”그 대답에 우인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었다.“누구나 다 당신들처럼 막 나가는 줄 알아요? 나는 처음이란 말이에요! 처음!”우인나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니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고 쏜살같이 방을 뛰쳐나갔다.문이 크게 닫기는 소리에 배현욱은 피식 웃었다.‘한 번도 처녀를 만난 적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만난다는 게 말이 돼?’셔츠를 입은 배현욱이 손을 뻗어 불을 켰고, 불빛이 방안을 비추던 순간 침대 시트 위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순간 배현욱의 몸이 굳어지며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았다.‘정말…… 처녀였단 말이야?’점심.정유준이 회사를 나서자마자 배현욱의 차가 회사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반쯤 열린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배현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정유준이 앞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배현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정유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배현욱.”정유준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배현욱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유준아, 네 직원 말이야, 정말 처녀였어…….”배현욱의 말에 정유준은 인상을 확 구겼다.“너 설마 우인나랑 잤다는 얘기는 아니지?”“맞아.”“…….”배현욱이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하자 정유준은 할 말을 잃었다. 정유준은 누구보다 배
오후.허시원이 정유준의 사무실에 들어가 일정을 보고했다.“대표님, 플라워 시티 호텔의 어르신이 오늘 저녁에 김제에 도착한다고 하시는데, 만나러 가시겠습니까?”허시원의 말에 정유준이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그가 김제에는 무슨 일인데?”“김제에 있는 병원에 의술이 뛰어난 외과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들이 종양에 걸려 의사한테 병을 보이러 온다고 하네요.”“어느 외과 의사인지 알아봐.”“네.”허시원이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정유준의 싸늘한 목소리가 허시원을 붙잡았다.“친자확인 검사 결과는 어떻게 됐어?”“사람을 보내 검사를 맡겼는데 빨라서 3일 뒤에 나온다고 합니다.”“그래, 나가 봐.”정유준은 계속해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을 때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는데 어젯밤 G에게 보낸 메일이 이제야 답장이 왔다.정유준은 서류 봉투를 내려놓고 메일을 열었다.G: “저는 실력이 부족하니 다른 능력 있는 자를 뽑아주시길 바랍니다.”메일을 확인한 정유준은 피식 웃으며 다시 답장을 보냈다.“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돕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어서 MK로 오지 않으려는 거죠?”컴퓨터 앞에 앉아 강하영 대신 메일에 답장을 보내던 캐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유준의 답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얼마 전, 강하영은 여러 차례 MK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 일을 캐리에게 맡겼던 것이다.‘내가 어제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데. 정유준이 바로 맞은 편에서 메일을 보낸 줄도 모르고, 휴대폰을 꺼냈다가 얼마나 뚫어져라 쳐다보던지. 어젯밤에 답장을 보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G가 바로 강하영이라는 사실을 들켰을지도 몰라.’생각에 잠겨 있던 캐리는 갑자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정유준의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그 눈빛은 나를 G라고 여기고 있는 거야!’장난기가 발동한 캐리는 씨익 웃으며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정 대표님, 이미 제가 누군지 아셨다면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메일 답장을 확인한 정유
캐리의 이사를 돕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아크로빌로 돌아간 강하영이 문을 열자 캐리가 뛰쳐나왔다.“G, 애들은 어디 있어?”“애들은 지금 정유준 집에 있어. 설명하기엔 좀 복잡한 사정이 있으니까 일단 물건부터 옮기고 나중에 얘기해.”강하영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캐리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물건들을 거의 다 정리하고 나서 강하영은 휴대폰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했고, 10분 정도가 지나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갈게.”그때 캐리가 문을 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하영을 막은 뒤, 아무렇게나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는데, 역시 자신의 계획대로 그 남자가 나타났다!정유준은 그런 캐리를 보는 순간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쪽이 왜…….”“캐리 아저씨!”정유준이 미처 묻기도 전에 뒤에 있던 강세희가 감격에 겨운 듯 작은 머리를 내밀며 캐리를 불렀고, 캐리는 눈을 반짝이며 손을 뻗어 강세희를 안아 들었다.“세희야, 보고 싶었어! 세준이랑 둘이 어디로 갔었던 거야? 아저씨가 좋은 소식 알려줄게. 이제부터 함께 지내게 됐으니 매일 만날 수 있단다!”캐리의 말은 정유준에게 매우 거슬렸다.‘함께 지낸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강하영이랑 동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가 G라서 강하영에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인다고?’거실에 있던 강하영은 애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 도착하자, 세 아이와 검은색 코트를 입은 정유준을 발견하고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뭐야? 왜 갑자기 애들을 데리고 왔지?’잠시 후, 정신을 차린 강하영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강세준은 뽀얀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엄마,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설명이라니? 무슨 설명?”강세준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캐리를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캐리 아저씨가 방금 저희와 함께 지낸다고 하던데요?”“아, 그건 캐리 아저씨가…….”“하
“캐리, 애들을 데리고 거실에 가서 놀고 있어.”강하영의 말에 캐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유준 뒤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를 힐끗 쳐다봤다.“저 아이는 누구야?”캐리의 물음에 강하영도 캐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작은 머리를 살짝 내밀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유준 뒤에 서 있는 정희민을 발견했다.“희민이야?”“네.”강하영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작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정희민을 부르자, 아이는 순순히 앞으로 나왔다.하영은 순간 마음이 약해지며 얼른 손을 뻗어 정희민을 안았다.“이리와, 나랑 같이 들어가자.”말을 마친 강하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정유준을 바라봤다.“집이 작아도 상관없다면 당신도 들어와요.”정유준은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두말없이 별장에 발을 들여놓더니, 캐리를 앞질러 갔다.적대심을 한가득 품고 있는 싸늘한 눈빛에 캐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한 손으로 강세희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세준의 손을 잡고 정유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임 씨 아주머니는 안 계셔?”소파에 앉아 주위를 훑어보던 정유준의 물음에, 정희민을 내려놓던 강하영은 손을 움찔하더니 대답했다.“아주머니는 병원에 계셔.”“병원?”강하영의 말에 정유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네.”강하영은 심장이 옥죄어 오는 아픔을 참으며 대답했다.“애들이 납치된 날, 아주머니께서 심한 폭행을 당하셔서 지금 식물인간이 됐거든요.”그 말에 정유준은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왜 그 사실을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얘기하면 뭐가 달라져요? 당신이 아주머니를 구해줄 수 있어요? 부진석 씨마저 속수무책인데 당신한테 얘기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정유준은 눈을 내리깔고 휴대폰을 꺼내 허시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임씨 아주머니의 병력을 알아보고, 최대한 빠르게 연세 병원으로 옮겨.”정유준은 휴대폰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애들을 너한테 맡기고 내일 다시 데리러 올게.”정유준은 강하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집을 나섰고, 문이 닫히
시현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알았어, 알았어.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세희는 그제야 흐뭇하게 손을 거두었다.“참, 지난번에 말한 그 사건 말이에요, 언제 해결하러 갈 거예요?”“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현이 말했다.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 안 돼. 만약에 저쪽에도 이런 악독한 귀신이 있다면, 너 또 상처를 입을지 몰라. 난 이미 죄책감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해서 평생 챙겨주고 싶으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정말 방법이 없어.”세희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시현 오빠와 결혼한다고 했어요?”“쳇.” 시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가 어때서? 나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있는 미남이라고!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세희는 말문이 막혔다.‘정말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칭찬하다니.’세희는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시현 오빠.”“응?”“내가 지금 귀신을 잡는 일을 종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난 사실 아주 좋은 신붓감은 아니에요. 눈치 없는 귀신들이 가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난 인우와 반대로, 팔자에 음기가 가득 찼거든요.”“그러면 어떻게 되는데?”“7월 중순이 되면 많은 귀신들이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럼 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지어 다칠 수도 있거든요.”“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귀신들은 심지어 시현 오빠를 귀찮게 할 거예요.”“그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란 거야?” 시현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로 내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아? 세희야, 너도 날 너무 얕본 것 같아.”“그때 가면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 풀릴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아요?” 세희는 시현에게 물었다.시현은 입술을 구부리고 웃었다.“넌 우빈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빈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세희야, 넌 날 뭘로 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두렵지
시현과 인우는 비록 귀신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검은 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인우는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이에요?”세희는 몸을 돌려 말했다.“그 귀신은 환생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죽었어.”“귀신이 죽었다고?” 시현이 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야?”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바라보았다.“캐리 아저씨, 이제 그 여섯 명의 귀신을 좀 잡아주세요.”캐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불과 몇 분 만에 겁에 질린 그 귀신들을 세희의 앞으로 데려왔다.세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들은 그 처녀귀신과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아니면 나와 같이 서낭당에 갈 건가요?”“서낭당에 갈래요!”“우리는 그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여기에 갇힌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죽어도 우리를 괴롭히려 하다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이 귀신들은 그 처녀귀신이 사라진 후, 불평하기 시작했다.세희는 그들의 원망을 듣고,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지금 그 처녀귀신을 비난할 면목이 있는 거예요?!”세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당신들을 죽인 것은 그 여자의 잘못일지라도. 당신들은 자신에게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당신들이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귀신으로 되어 이곳에 갇히지 않았겠죠!”“풉.” 한 여자 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그 여자는 늘 자신의 성적을 가지고 남을 비웃었어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세희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남의 성적이 우수해서, 당신들은 또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불쌍하네요! 이 세상에 당신들 같은 질투심이 강한 쓰레기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심해요, 당신들은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귀신들은 세희가 한 말에 화가 났지만, 캐리와 인우 때문에 화가
“말이 쉽지!” 처녀귀신은 화가 나서 말했다.“날 죽인 그 사람들은 비록 귀신이 되었지만, 나도 그들이 환생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이었어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들을 죽였을 것 같아요??”“그 사람들 찾아 복수를 한 이상,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줘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가며 그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더 있을까요?”“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쉽게 환생을 하라고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처녀귀신이 노발대발했다.세희는 웃었다.“당신은 집념이 너무 커서 줄곧 이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만약 내려가서 벌을 받고 환생하여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어요?”“이렇게까지 날 가르칠 필요 없어요!”처녀귀신이 말했다.“오늘 당신들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하자고요!”말을 마치자, 처녀귀신은 세희를 향해 공격하려 했다.세희는 바로 인우를 부르려고 했고, 이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빠른 속도로 달려온 캐리는 즉시 그 처녀귀신을 먼 곳으로 밀어냈다.“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고, 심지어 세희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오늘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캐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붉은 옷을 입은 처녀귀신에게 말했다.“그게 뭐가 무섭다고.” 처녀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 더없이 더러운 세상! 내 부모님은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의 돈을 받고 바로 이 일이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내 오빠는 심지어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친구로 여겼고요! 환생할 게 뭐가 더 있겠어요? 환생해도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날 죽여요. 더 이상 이 징그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처녀귀신의 말을 듣고, 캐리는 바로 손을 써서
세희가 이렇게 말하자, 세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인우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세희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척 흥분해하며 달려갔다.“누나, 돌아왔어요?” 인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때요, 다 나은 거예요?”세희는 의미심장하게 인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인우야, 오늘 저녁에 나 좀 도와줘.”“그래요.” 인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에 가는 거 맞죠?”세희는 의아하게 인우를 바라보았다.“뭐야? 너 이제 무섭지도 않는 거야?”인우는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누나, 귀신은 무섭지만, 난 누나가 더 이상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누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날 정말 학교로 달려가서 그 귀신들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현 형이 누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가지 않았던 거예요.”세희는 뿌듯해하며 인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우리 인우 다 컸네. 누나를 걱정할 줄 다 알고.”인우는 세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누나, 난 줄곧 누나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면, 꼭 나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요.”“그래! 저녁에 우리 가족들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출발하자!”“좋아요!”저녁에 하영과 유준 그리고 희민이 돌아왔다. 세희가 이미 퇴원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은 기뻐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수다를 떨었다.저녁을 먹은 다음, 하영은 세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주고서야 세희를 보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희는 시현이 그의 포르쉐와 함께 집 앞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세희와 인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시현을 쳐다보았다.세희가 먼저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시현은 별장을 바라보았다.“세준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한테 연락했지 뭐. 네 기사 되어 달라고.”“우리 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시현 오빠가 너
“그래, 우빈아, 넌 15년 동안 세희를 좋아했고, 또 세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지. 하지만 그거 알아? 세희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세희가 만약 무슨 일을 알고 싶다면, 바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호흡이 흐트러진 우빈은 시현을 바라보며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알아요.” 우빈이 대답했다.“세희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죠.”“그럼 만약 세희가 정말 날 선택한다면, 넌 어쩔 계획이야?”“그런 건 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난 세희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세희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복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시현은 계속 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세희와 함께 하더라도 넌 세희와 계속 친구를 하겠다는 말이야?”우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나와 세희는 줄곧 친구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귀지 않아도, 앞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은 친구예요. 고 과장님, 세희를 좋아해도 되지만, 내가 세희와 계속 친구로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어요.”시현은 갑자기 웃었다.“그럼 됐어!”우빈은 시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난 내가 세희와 사귀면, 넌 불편해서 세희와 연락 끊을 줄 알았거든.”우빈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제 세희를 포기하자고. 넌 정말 세희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말을 하다 시현은 우빈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어. 아무튼 후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널 향한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세희를 포기한다면, 그건 널 무시하는 것과 같잖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우빈도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자, 우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난 확실히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
시현은 말을 이어받으며 오른손을 들었다.“그때 내 오른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거 있지? 심지어 의사가 네 등의 썩은 살을 모두 베어낸 것을 직접 봤는데, 며칠째 잠을 못 잤어.”“에이, 그건 간단하죠!” 세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수면제 처방받으면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겠어요?”시현은 웃으며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세희야, 날 원망하고 싶지 않아?”“원망이요?” 세희는 시현의 뜻을 잘 몰랐다.“내가 왜요?”시현은 콧등을 긁적였다.“내가 널 데리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너도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시현을 바라보았다.“그건 시현 오빠 탓이 아니에요. 그 귀신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것뿐이니까요. 다 회복되면 그 귀신들 전부 잡아버릴 거예요!”“또 그곳에 가려고?” 시현은 경악하며 물었다.“그럼요!” 세희는 손을 내밀었다.“일곱 명의 귀신을 전부 다 데려갈 수 있다면, 염라대왕님은 좋다고 박수를 치실지도 몰라요.”시현은 세희의 얼굴에 나타난 즐거운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난 오히려 네가 날 욕하면서 분풀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말투로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그럼 너무 재미없죠! 난 시현 오빠 돈 뜯어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날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오케이!” 시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세준 오빠가 그러던데, 미정 할머니를 찾아갔다면서요?”시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응, 가서 어떻게 해야 널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어.”“하하하.” 세희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날 보호한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시현 오빠는 귀신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귀신과 싸우려는 거예요? 정의감과 용기로 귀신을 제압하려고요?”“내가 만약 내 정의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귀신이 없을 거야?”세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시현은 세준 그들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한 다음, 혼자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세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이때 간호사가 걸어왔다. 시현은 그녀를 보며 얼른 일어나 물었다.“선생님.”간호사는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시죠?”“세희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 며칠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제가 본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엄중한 상처를 입으신 환자라서요. 잘못하면 흉터가 남을 텐데... 어휴...”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번 생은 철저히 세희에게 빚진 셈이네.’사흘 후, 세희는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이 일을 알게 된 하영과 유준도 얼른 병원에 찾아왔다.세희가 침대에 엎드려 멍을 때리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슴이 아팠다.하영은 허리를 굽혀 세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세희야, 미안해. 네 오빠들이 아침에 금방 이 일을 알려줘서, 엄마와 아빠도 이제야 달려온 거야.”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엄마. 이거 봐요, 나 아직 멀쩡하잖아요?”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 마. 무슨 방법을 써서더라도 네 등의 흉터를 치료할 테니까.”“사실 난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등일 뿐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자신도 볼 수 없으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요.”“네가 꾸미길 좋아한다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세준은 벽에 기대며 말했다.세희는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보려 했지만, 상처가 땅기는 바람에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세준은 마음이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좀 움직이지 마. 나도 안 비웃을게.”유준은 세준을 바라보았다.“세준아, 너희들은 외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좋은 성형과 의사를 찾아. 세희의 등에 절대로 흉터 남지 않게.”세준은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오자, 시현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세희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그럼 세희를 보호하려면 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생각하다 시현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톡을 보냈다.[그 할머니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시현에게 나미정이 지내고 있는 호텔 주소와 방번호를 보냈다.[고마워, 세준아.]세준은 이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세희의 일,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날 때리고 싶든, 죽이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 다 내 잘못이니 나도 변명할 말이 없어.]이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시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호텔로 갔다.30분 후, 시현은 나미정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는데, 잠시 심사숙고한 다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곧 안에서 나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문을 열자, 시현이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의아해했다.“네가 바로 병원에 있었던 그 총각인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저와 잠깐 얘기를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그래.” 나미정은 몸을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말하자꾸나.”시현은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고, 나미정은 그의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로 날 찾는 거지?”시현은 긴장이 돼서 두 손을 비볐다.“할머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세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평범한 사람이라...”나미정은 웃기 시작했다.“왜, 네가 보기에 우리와 같은 무당은 평범하지 않은 건가?”시현은 멈칫하더니 얼른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희보다 강하고 특수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그것도 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 뿐이지.”나미정이 말했다.“그러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니
세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적은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렬한 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세희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 순간, 옆에서 놀던 그 귀신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모두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세희도 눈을 돌려 귀신들을 보았다.‘또 이런 느낌이야!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그런 느낌!’세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으며 용기를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과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음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심지어 세희는 자신의 영혼이 억압된 느낌을 받았다.“누나, 무서워하지 마요!!”“세희야! 용기를 내서 그곳에서 나와! 그 귀신들은 널 건드리지도, 널 다치게 하지도 못할 거야!”“누나! 나랑 형들이랑 그리고 고 과장님이 여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어요!”인우와 나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문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부적이 그려진 손을 들어 다시 시도했다.이번에 그 귀신들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세희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려 하자,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매몰찬 음기가 덮쳐왔고, 세희는 부적이 있는 그 손을 들고 돌아섰다.그 귀신들은 하마터면 세희의 영혼과 닿을 뻔했다. 그러나 세희의 손에서 나는 강렬한 양기가 서려 있는 부적을 감지한 그들은 표정이 돌변했다.세희는 뒤로 물러섰고,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연 후, 그녀는 즉시 뛰쳐나갔다.이때,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세희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마셨다.세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인우는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누나! 왜 이제야 깨어난 거예요!!”그러나 세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인우는 완전히 멍해지더니 당황해진 표정으로 나미정을 바라보았다.나미정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