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못 들은 척 몸을 돌렸다. “갈게.”유현진이 그를 따라나서며 말했다.“다시 말해 봐.”강한서는 여전히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유현진이 그의 팔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한 번만 다시 불러줘, 한 번만.”강한서는 이렇게 닭살 돋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커플 사이에 하는 닭살스러운 호칭은 더더욱.예를 들어 그는 절대 유현진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제일 다정한 호칭이라고 해봐야 “현진이”거나 “현진아”정도였다. “자기”,“애기” 이런 호칭은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유현진이 생전 들은 적 없던 호칭을 들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예전에 유튜브에서 한 남자 인플루언서가 카메라를 향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자기”라고 했을 때 소름이 쫙 돋았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방용 세제를 보내 기름기 좀 제거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호칭을 강한서에게서 들으니 전혀 느끼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특히 무심코 그 호칭을 들으니 그녀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느끼한지 아닌지는, 역시나 사람에 따라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든, 강한서의 입은 봉인된 것처럼 다시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말 안 해?”유현진이 화난 척 연기했다. “너 안 하면 인턴 기간 지금 바로 끝이야, 해고할 거야!”강한서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나 그날 많이 말했어.”유현진이 의아해했다. “어느 날?”‘강한서가 말했었다고?’‘왜 아무 기억이 없지?’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속이는 거지?”강한서가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텔에서, 우리 여러 번 했던 그날. 내가 너한테 많이 불러줬어. 기억 안 나?”유현진: ...그는 강한서를 밀어내고 귀를 붉힌 채 그를 째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닥쳐!”그러더니 그녀는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강한서는 작게 웃더니 성큼
강한서도 그녀를 따라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한성우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사람을 누른 채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차미주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 유현진이 알고 있는 차미주라면, 그녀는 이 따귀에 전부의 힘을 쏟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차미주의 힘이라면 한성우가 피가 나지는 않더라도 아파서 소리라도 질렀어야 했다. 옆으로 고개가 돌아간 한성우는 혀로 방금 맞은 뺨 안쪽을 훑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를 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네 입술도 건드렸으니, 그것도 잘라 버릴 거야?”차미주가 팔뚝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녀는 눈을 붉히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개자식아! 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날 장난감 취급을 해? 그래서 네 멋대로 갖고 놀고 싶으면 갖고 놀고 그런 거야?”“친구?”한성우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역신 보듯 피해 다녔으면서, 그게 날 친구로 대한 거야? 내 도움은 받고 싶고, 날 미워도 하면서. 너야말로 앞뒤가 너무 다른 거 아니야?”차미주가 몸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언제 널 미워했어?”“네 팔만 잡아도 멀리 떨어져 나가려고 했잖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벽에만 붙어있고. 넌 내가 눈이라도 멀었는 줄 알아?”한성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특히 그녀가 조준과 함께 자기 앞에 나타났던 것만 떠올리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극에 달했다. “네가 필요할 때만 난 성우 오빠고, 너한테 필요 없어지면 화장실에 있는 돌보다도 못한 취급 하잖아. 왜, 조준을 꼬셨으니까 이젠 너한테 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야? 조준이 정말 너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알려줄게. 조준이 너한테 조금의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냥 너랑 자고 싶—”“짝—”차미주는 이번에야말로 온 힘을 손에 온 힘을 실었다. 한성우의 얼굴은 바로 저릿해졌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왔다. 성인이 된 후, 아무도 감히 그의 뺨을 때린
차미주가 코를 훌쩍이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사정?”한성우가 머뭇거렸다. 아마 얘기하기 어려운 일인 듯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전에 사귀던 모델 여자친구가 있었어. 걔가 날 따라다녔고, 예쁘장하게 생겨서 잠깐 만났었지.”차미주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잠깐 자기만 했겠지.”한성우: ...“안 잤어!”한성우가 그녀를 째려보았다. “난 연애할 때는 연애하는 과정을 즐긴다고. 누가 너한테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잔다고 그래? 그리고 걔가 먼저 따라다닌 거야. 예쁘게 생겼고, 성격도 잘 맞아서 사귄 거였어. 누가 알았겠어—”그의 말투가 확 변하더니 이를 갈았다. “그게 신하리 전여친인 줄 누가 알았겠어! 신하리 이게 내가 지 여친을 뺏은 줄 알고 먼저 와서 날 꼬셨어. 내가 자기 전여친을 차면 나한테 복수도 하고 피해도 입힐 수 있으니까.”차미주: ???!!!차미주는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하리 전 여친? 신하리 여자잖아? 신하리 여자친구... 신하리, 신하리가...”차미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한성우가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미주: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이미 충분히 막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보다 더 한 막장이었다.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 몇 없어. 난 널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니까, 넌 다른 데 가서 얘기하면 안 돼. 국내도 아직 그렇게 개방적이지 않으니까.”“알아.”차미주도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그러더니 그녀가 또 물었다. “그럼 네가 꽃을 들고 가서 고백한 건 어떻게 된 거야?”한성우가 말했다. “걔가 날 쫓아다녔잖아. 그때 난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리고 걔한테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어서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계속 포켓볼 클럽에 찾아오잖아. 꺼지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하고 굳이 게임을 해서 내가 이기면 다시는 내 앞에 나
차미주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경 쓰이긴 하지.”한성우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실망이 다시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한성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좋아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해.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과의 현재와 미래니까. 과거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전여친과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않다면 괜찮아. 사람이 별로라면, 연애 경험이 없어도 쓰레기일 뿐이야!”한성우가 호기심에 물었다. “모쏠한테 당했어?”“친구가 당했어!”강한서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는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얘가 입이 가볍게 내 흉을 본 건 아니겠지?’사실상 그건 강한서의 착각이었다. 차미주가 말한 친구는 유현진이 아니었다. “내 친구 남편이 모쏠이었거든. 걔랑은 첫사랑이었고. 학교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했지만 결국 결혼 2년 만에 회사 여상사랑 바람이 났어. 내 친구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이혼하려고 한 덕에 유산했어.”“그 자식, 내 친구랑 만나기 전엔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바람이든 쓰레기 같은 짓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다 했잖아. 걔 일을 겪고 나서 난 남자가 믿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는 연애 경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한성우가 그녀의 말에 무조건 찬성했다. “역시 우린 생각이 비슷해.”차미주는 한성우의 리액션이 마음에 들자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어떤 모쏠은 정말 별 볼 일 없다니까. 내 친구 남편만 봐도 그래. 잠자리 경험이 없으니까, 빨리 끝나는 건 물론이고, 아프게만 한대. 관건은 그럼에도 좋은 척 연기를 하면서 그 남자를 맞춰줘야 한다는 거야. 그 인간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이런 인간한테 뭘 바라겠어? 정말 쓸모라고는 없다니까.”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나서 수다를 떠는 누군가를 보며 그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남자가 경험이 있어야 둘 다 좋
차미주의 눈가가 떨려왔다. ‘이 여자는 대체 예의가 뭔지, 염치가 뭔지 모르는 거야?’“남자친구 있으시잖아요.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잡고 놓지 않는다고요?”유현진이 속삭였다. “그냥 부축한 것뿐이에요. 차미주 씨가 오해하신 거예요. 그렇죠, 강한서 씨?”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네”라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아내이니, 뭐 어쩌겠는가? 맞춰주는 수밖에. 그의 반응에 차미주는 분노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그녀는 절대 강한서를 면전에 두고 면박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강한서, 넌 눈이 삐었어? 저 여자가 너한테 꼬리치는 거 몰라? 너는 다른 남자랑 다르다고 생각했다니, 다르긴 개뿔! 다 쓰레기야! 예쁜 여자가 윙크라도 해주면 발도 못 떼지. 너 같은 인간이 현진이랑 잘 되고 싶어? 다음 생, 다다음 생도 너한테 기회— 읍—”차미주의 욕설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곧 뒤따라온 한성우에 의해 입을 틀어막힌 채 한쪽으로 끌려갔다. “술 많이 마셔서 헛소리를 다 하네. 편하게 해.”한성우는 자리를 피하기 전 강한서를 보며 또 말했다.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 난 쟤 입 못 막아.”말을 마친 그는 발버둥 치는 차미주를 안고 가버렸다. “이 자식아! 이거 놔!”차미주가 소란을 피운 덕에 한성우는 얼마 못 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왜 날 잡아! 나 아직 그 년놈들 손 보지 못했는데!”한성우가 말했다. “그냥 부축한 것뿐이야. 어딜 봐서 네가 말한 것처럼 심각하다는 거야? 한서가 그렇게 사리 분별 못하는 녀석도 아니고. 걘 그냥 예의상 그런 거야.”“저렇게 흘리고 다니는 여자한테 예의는 무슨 예의? 그냥 둘이 눈 맞은 거잖아! 안 되겠어, 내가 지금 바로 현진이한테 전화해서 강한서 이 쓰레기 같은 놈을 멀리하라고 해야겠어!”한성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번에 그녀를 원위치 시켰다. “너
“애초부터 네 탓이었어!”차미주는 ‘누가 너더러 말도 없이 입 맞추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잠시 생각하고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왜냐면 말을 하든 안 하든, 그는 그녀에게 입 맞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마음이 이상했다. 그녀는 어쩐지 자신이 화를 낸 포인트가 틀린 것 같다고 느껴졌다. 왜 그녀는 한성우가 자신에게 입 맞춘 것보다 그가 한 말에 더 화가 나 있는 걸까?차미주는 한성우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가 입 맞춘 것을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걸까?차미주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유쾌했다. 그녀는 아마도 한성우에게 여자친구가 없어서 더 이상 오해받을까 봐 피해 다니지 않고 편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 내 탓이야.”기분이 좋아진 한성우의 말투가 다정해졌다. 차미주는 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얼음이라도 가져와서 찜질하는 게 어때? 보기 흉한데.”한성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됐어, 네가 그랬잖아, 난 얼굴이 두껍다고.”차미주: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한성우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좀 할까, 도둑아?”차미주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이번 주말에 나 삼계탕 먹고 싶어.”차미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넌 내가 셰프인 줄 알아, 뭐든 다 할 줄 알게?”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너는 셰프보다된 능력 있는 사람이야. 네가 바로 실존해 있는 장금이자 요리의 신 그 자체지.”한성우의 아부에 차미주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잘난 척하며 말했다. “삼계탕은 조리 과정이 복잡해. 식재료도 많이 필요해서 만드는 데 며칠은 걸릴거야.”“그러니까 나도 당장 먹는다고 안 했잖아. 식재료는 내가 준비할게. 넌 하기만 해.”그는 자신의 볼을 내밀었다. “다친 것 좀 봐봐. 내가 너랑 친구 하면서 엎어치기도 당하고 따귀도 맞아야 해. 네가 제대로 몸보신 시
유현진이 강한서의 뺨을 살짝 때렸다. “나 강운 씨랑 같이 왔어. 최소한 들어가서 인사는 해야지.”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들어갔다. 계획은 좋았으나, 들어왔다가 다시 간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날 밤 결혼식 피로연이 준비되어 있었고 친구들이 신랑 신부와 함께 게임을 하도록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다. 강한서는 자리를 비울 수 없고, 그렇다고 혼자 가면 재미도 없으니 그녀는 아예 함께 피로연에 참석했다. 방금 주강운이 불려 나간 것도 신랑의 친구들과 피로연 게임에 사용할 도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이는 유현진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을 재밌게 만들어서 그렇게 지루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가고 싶지 않으면, 제가 진성 씨한테 얘기하고 데려다 드릴게요.”“괜찮아요.”유현진이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도와드린다고 약속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같이 가요.”주강운은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멈칫거린 주강운이 손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그 장면을 응시하고 있던 강한서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차미주만이 호시탐탐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마치 그들이 무슨 선을 넘는 행동이라도 하면 바로 친구를 대신해 그 현장을 잡을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피로연은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사람들도 모두 술을 마셨고, 호텔에서 피로연을 하는 편이 나았다. 게임은 전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실게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능에서 자주 나오는 마피아 게임이었다. 유현진은 이 신혼부부가 너무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혼 첫날 밤에 진실게임이라니, 어떤 사생활을 물을 줄 알고. 부부관계가 틀어질까 두렵지도 않은 걸까?하지만 현실은, 그런 생각은 그녀의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진실게임은 신혼부부가 아닌,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흥분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대답하지 그랬어.”강한서는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종이를 찢었다. 기대하는 눈빛을 잔뜩 받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벌칙주 마실게.”주위에는 실망하는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프라이버시라도 듣게 되는 줄 알았는데, 겨우 이거야?’유현진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두 사람의 사생활을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그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강한서 이 재수 없는 자식 세 번째에도 걸리고 말았다. 그러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침묵했다. 운이 나쁜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나쁜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신우도 옆에서 강한서를 부추겼다. “아니면 벌칙을 선택해. 질문을 뽑으면 너 또 술 마셔야 해.”강한서는 고집스럽게 질문을 뽑았다. 그가 세 번째 질문을 뽑아 펼치자 한성우가 질문 내용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렇게까지 똥손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차미주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얼른 한성우에게 물었다. “뭘 뽑았어?”한성우가 강한서가 펼치고 있는 종이를 가져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넌 18 이상이야, 아니면 18 이하야?”차미주가 질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이상, 이하라는 거야? 나이? 아니면 키?”한성우가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차미주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자리에는 전부 성인이라, 당연히 질문의 뜻을 파악하고 속으로 웃으며 강한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현진은 옆에서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강한서는 유현진의 뜻을 알아듣고 말했다. “술 마실게.”한성우가 말했다. “네 선택은 무효야. 두 번 연속 질문을 패스할 수 없다는 게 게임 규칙이야. 그러니까 똑바로 대답해.”강한서: …그는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진은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
주강운에 관해선 강한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를 도와 치료를 받게 한 일이든, 간민혜의 일을 숨겨준 것이든. 심지어 그 뒤로 있었던 간민혜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까지. 강한서는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유를 알 수도 없게 주강운의 원망만 샀다. 주강운은 지금까지도 간민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이상 전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강운 스스로 조사를 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밝혀야만 그의 마음속에 얽힌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이 물었다. “네가 대체 누구의 죄를 뒤집어써서 강운 씨의 원망을 받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시선을 내렸다. “강운이 날 원망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땐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엔 그 마음이 사라졌어. 어떤 이유가 있었든, 우린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20여 년의 우정이 결국은 지금 이 지경에 이렀다.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지금의 강한서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두 사람 사이는 뒤로 미뤄둔 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 “민 실장님, 서류를 주 변호사님께 보내시고 간민혜 씨가 당시 왜 나이정 씨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조사도 계속 해주세요. 간민혜 씨가 교양도 있고 애증이 분명한 분이라면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독하진 않았을 거예요. 조사는... 나이정 씨가 사망하기 1년 전 진찰했던 환자부터 시작하세요. 간민혜나 간민혜 씨와 관련된 사람이 환자 리스트에 있는지 알아봐요. 조사를 마치면 직접 저에게 알려주시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 그리고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강한서가 시선을 올렸다. “뭔데요?”민경하가 서류뭉치를 뒤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장례식장을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옆쪽에 놓인 화환에는 나이정과 관련된 애도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영상 사진 속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간민혜?”멈칫한 한현진이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간민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 얼굴은 주강운이 그의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해달라며 부탁했던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줬던 메이크업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강한서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불 같이 화를 낸 건 단순히 그녀가 주강운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주강운이 한현진을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심지어 본인은 모른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강운, 이 사람은 다정한 겉모습을 하고 뒤에선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일그러진 얼굴의 한현진을 본 강한서는 그녀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강한서가 줄곧 한현진에게 간민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강운이 어떤 목적이었든, 산 사람 얼굴에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 건 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현진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누르며 시선을 올려 민경하에게 물었다. “간민혜 씨와 나이정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간민혜 씨가 왜 장례식장에 있었던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추측과는 오히려 반대예요.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이 사진은 나이정 씨 동료 분께서 주신 거예요. 장례식 당시 현장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난리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이정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심지어 세상을 뜬지 이미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민경하가 말했다. “나이정이라는 분은 당시 조예단 씨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동기였고 직장도 같이 다녔어요.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 말에 따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서로 도우며 지냈대요. 나중에 조예단 씨는 병원을 그만 뒀고 나이정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그 병원에 다니셨어요.”“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집에서 발병하셨고 따님이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잠시 멈칫하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정이라는 분, 구암동 고아원의 후원자세요.”한현진과 강한서가 눈을 마주치더니 강한서가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정 씨는 한주 사람이 아녜요. 여기엔 친척도 없고요. 따님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따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나이정 씨와 이혼하셨어요. 나이정 씨는 혼자 딸을 키우셨고 돌아가실 땐 따님은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나이정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친구 분께서 따님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망하신 걸 알게 됐어요.”“고향도 한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도 없어서 장례식은 친구 분들과 동료들이 나서주셨어요. 후원했다는 사실도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거고요. 1999년부터 후원을 시작하셨고 총 3번의 기부를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후원하신 시간이 18년 전, 총 금액은 6000만 원이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딸이 아파서 돈에 쪼들렸을 텐데, 무슨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한 거야?”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원금은 나이정의 돈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 대신 기부한 것이고 나이정에게 그걸 부탁
진희연은 하늘을 안고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도일준이 몸을 뒤척이자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진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 드릴까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들어가요.”진희연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게요. 저녁엔 링거를 맞으셔서 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링거 다 맞은 줄도 모르면 어떡해요.”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도일준이 말했다. “그럼 아이라도 침대에 눕혀요. 희연 씨는 안 자도 아이는 자야죠.”도일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라 침대 넓이가 1.2 m이었다. 어린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같이 자기엔 충분했다. 진희연은 주저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몸을 일으켜 도일준에게 물 한 잔을 떠줬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도일준에게 약을 건네며 잊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듣고 있던 도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간호사가 멈칫했다. “네?”도일준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약 잘못 가져왔어요.”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약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두 병실의 약이 바뀌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약을 바꿔 가져온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도일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일준이 담담히 말했다. “의료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늘 경외심을 갖고 모든 생명에 책임을 다해야 해요. 매번 이렇게 행운이 따르진 않을 테니까요.”간호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을 내려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진희연이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도일준 씨, 약이 바뀐 건 어떻게 아셨어요?”도일준은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도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의사였어요. 그래서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난번 하늘이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손길이 능숙하셨던 거네요.”진희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훌륭하신 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아니야 난—”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어.”“느끼긴 뭘 느껴!”한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강한서를 찰싹 때렸다. “나라고 너한테 부탁 안하고 싶은 줄 알아? 둘째 삼촌과 경영권 다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너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신제품 발표회 파티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면, 네가 6시간 이상 잔 적이 있기는 해? 지금 네 다크써클 좀 봐봐. 지난번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오빠도 나한테 몰래 물어 봤었어. 혹시 네가 어디 아픈건 아니냐고. 네가 꼭 정기를 다 뺏긴 사람 같대. 너 지금 임산부인 나보다도 더 피곤해보여. 강한서, 넌 안 느껴져?”강한서: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파?”기가 찬 한 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아파! 난 그저 네가 하루 24 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려서 우리 셋 먹여 살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강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돈 좋아하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널 주면 네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한현진이 찰싹, 강한서를 밀어냈다. “네가 과로로 몸에 무리라도 오면 내가 그렇게 많은 돈 해서 뭐하라고. 아이의 양육을 전부 나에게 맡길 생각은 하지마! 일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남편, 아이 다 버리고 네 재산만 들고 재가할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고생 끝에 드디어 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듯 한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한현진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몸 챙기면서 하고 있어. 임신 때문에 겪는 네 고통을 내가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다른 건 나에게 다 맡겨도 돼.”한현진이 강한서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부탁할게.”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놓아주며
“아파?”강한서가 또 다시 물었다. 고개를 가로졌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허리가 조금 아파. 조금 전에 눌렸거든.”강한서가 한현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애들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한현진: ...“나도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생각 안 해봤는데.”강한서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름 짓자. 만약...”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그런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이때 검사를 마친 의사가 진단서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변연전치태반이예요.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될수록 누워서 하루 쉬셔야 해요.”강한서가 눈을 깜빡이며 한현진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물었다. “선생님,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괜찮은 건가요?”의사가 말했다. “괜찮아요.”강한서가 말했다. “하지만 하혈을 했잖아요.”“하혈은 변연전치태반의 증상 중 하나예요. 출혈량이 많지만 않다면 활동을 줄이고 누워서 휴식만 잘 취하시면 돼요.”“하지만 조금 전 밀쳐져서 허리를 부딪쳤어요.”“네.”의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은 돌아가셔서 먼저 얼음찜질을 하다가 온찜질하세요. 이틀 정도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강한서: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괜찮다고요?”의사가 반문했다.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왜요?”그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한서를 보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허리를 부딪친 것 때문에 하혈한 건 분명 아녜요. 변연전치태반이 있은지는 조금 됐을 텐데 아마 모르시고 계시다가 마침 허리를 부딪치고 하혈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아이는 무사해요. 아내 분도 괜찮으시고요. 이름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진정 시키고 천천히 지으시죠. 울면서 이름을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요.”강한서: ...창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