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경 쓰이긴 하지.”한성우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실망이 다시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한성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좋아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해.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과의 현재와 미래니까. 과거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전여친과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않다면 괜찮아. 사람이 별로라면, 연애 경험이 없어도 쓰레기일 뿐이야!”한성우가 호기심에 물었다. “모쏠한테 당했어?”“친구가 당했어!”강한서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는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얘가 입이 가볍게 내 흉을 본 건 아니겠지?’사실상 그건 강한서의 착각이었다. 차미주가 말한 친구는 유현진이 아니었다. “내 친구 남편이 모쏠이었거든. 걔랑은 첫사랑이었고. 학교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했지만 결국 결혼 2년 만에 회사 여상사랑 바람이 났어. 내 친구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이혼하려고 한 덕에 유산했어.”“그 자식, 내 친구랑 만나기 전엔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바람이든 쓰레기 같은 짓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다 했잖아. 걔 일을 겪고 나서 난 남자가 믿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는 연애 경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한성우가 그녀의 말에 무조건 찬성했다. “역시 우린 생각이 비슷해.”차미주는 한성우의 리액션이 마음에 들자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어떤 모쏠은 정말 별 볼 일 없다니까. 내 친구 남편만 봐도 그래. 잠자리 경험이 없으니까, 빨리 끝나는 건 물론이고, 아프게만 한대. 관건은 그럼에도 좋은 척 연기를 하면서 그 남자를 맞춰줘야 한다는 거야. 그 인간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이런 인간한테 뭘 바라겠어? 정말 쓸모라고는 없다니까.”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나서 수다를 떠는 누군가를 보며 그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남자가 경험이 있어야 둘 다 좋
차미주의 눈가가 떨려왔다. ‘이 여자는 대체 예의가 뭔지, 염치가 뭔지 모르는 거야?’“남자친구 있으시잖아요.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잡고 놓지 않는다고요?”유현진이 속삭였다. “그냥 부축한 것뿐이에요. 차미주 씨가 오해하신 거예요. 그렇죠, 강한서 씨?”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네”라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아내이니, 뭐 어쩌겠는가? 맞춰주는 수밖에. 그의 반응에 차미주는 분노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그녀는 절대 강한서를 면전에 두고 면박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강한서, 넌 눈이 삐었어? 저 여자가 너한테 꼬리치는 거 몰라? 너는 다른 남자랑 다르다고 생각했다니, 다르긴 개뿔! 다 쓰레기야! 예쁜 여자가 윙크라도 해주면 발도 못 떼지. 너 같은 인간이 현진이랑 잘 되고 싶어? 다음 생, 다다음 생도 너한테 기회— 읍—”차미주의 욕설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곧 뒤따라온 한성우에 의해 입을 틀어막힌 채 한쪽으로 끌려갔다. “술 많이 마셔서 헛소리를 다 하네. 편하게 해.”한성우는 자리를 피하기 전 강한서를 보며 또 말했다.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 난 쟤 입 못 막아.”말을 마친 그는 발버둥 치는 차미주를 안고 가버렸다. “이 자식아! 이거 놔!”차미주가 소란을 피운 덕에 한성우는 얼마 못 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왜 날 잡아! 나 아직 그 년놈들 손 보지 못했는데!”한성우가 말했다. “그냥 부축한 것뿐이야. 어딜 봐서 네가 말한 것처럼 심각하다는 거야? 한서가 그렇게 사리 분별 못하는 녀석도 아니고. 걘 그냥 예의상 그런 거야.”“저렇게 흘리고 다니는 여자한테 예의는 무슨 예의? 그냥 둘이 눈 맞은 거잖아! 안 되겠어, 내가 지금 바로 현진이한테 전화해서 강한서 이 쓰레기 같은 놈을 멀리하라고 해야겠어!”한성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번에 그녀를 원위치 시켰다. “너
“애초부터 네 탓이었어!”차미주는 ‘누가 너더러 말도 없이 입 맞추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잠시 생각하고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왜냐면 말을 하든 안 하든, 그는 그녀에게 입 맞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마음이 이상했다. 그녀는 어쩐지 자신이 화를 낸 포인트가 틀린 것 같다고 느껴졌다. 왜 그녀는 한성우가 자신에게 입 맞춘 것보다 그가 한 말에 더 화가 나 있는 걸까?차미주는 한성우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가 입 맞춘 것을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걸까?차미주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유쾌했다. 그녀는 아마도 한성우에게 여자친구가 없어서 더 이상 오해받을까 봐 피해 다니지 않고 편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 내 탓이야.”기분이 좋아진 한성우의 말투가 다정해졌다. 차미주는 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얼음이라도 가져와서 찜질하는 게 어때? 보기 흉한데.”한성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됐어, 네가 그랬잖아, 난 얼굴이 두껍다고.”차미주: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한성우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좀 할까, 도둑아?”차미주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이번 주말에 나 삼계탕 먹고 싶어.”차미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넌 내가 셰프인 줄 알아, 뭐든 다 할 줄 알게?”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너는 셰프보다된 능력 있는 사람이야. 네가 바로 실존해 있는 장금이자 요리의 신 그 자체지.”한성우의 아부에 차미주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잘난 척하며 말했다. “삼계탕은 조리 과정이 복잡해. 식재료도 많이 필요해서 만드는 데 며칠은 걸릴거야.”“그러니까 나도 당장 먹는다고 안 했잖아. 식재료는 내가 준비할게. 넌 하기만 해.”그는 자신의 볼을 내밀었다. “다친 것 좀 봐봐. 내가 너랑 친구 하면서 엎어치기도 당하고 따귀도 맞아야 해. 네가 제대로 몸보신 시
유현진이 강한서의 뺨을 살짝 때렸다. “나 강운 씨랑 같이 왔어. 최소한 들어가서 인사는 해야지.”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들어갔다. 계획은 좋았으나, 들어왔다가 다시 간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날 밤 결혼식 피로연이 준비되어 있었고 친구들이 신랑 신부와 함께 게임을 하도록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다. 강한서는 자리를 비울 수 없고, 그렇다고 혼자 가면 재미도 없으니 그녀는 아예 함께 피로연에 참석했다. 방금 주강운이 불려 나간 것도 신랑의 친구들과 피로연 게임에 사용할 도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이는 유현진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을 재밌게 만들어서 그렇게 지루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가고 싶지 않으면, 제가 진성 씨한테 얘기하고 데려다 드릴게요.”“괜찮아요.”유현진이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도와드린다고 약속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같이 가요.”주강운은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멈칫거린 주강운이 손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그 장면을 응시하고 있던 강한서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차미주만이 호시탐탐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마치 그들이 무슨 선을 넘는 행동이라도 하면 바로 친구를 대신해 그 현장을 잡을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피로연은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사람들도 모두 술을 마셨고, 호텔에서 피로연을 하는 편이 나았다. 게임은 전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실게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능에서 자주 나오는 마피아 게임이었다. 유현진은 이 신혼부부가 너무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혼 첫날 밤에 진실게임이라니, 어떤 사생활을 물을 줄 알고. 부부관계가 틀어질까 두렵지도 않은 걸까?하지만 현실은, 그런 생각은 그녀의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진실게임은 신혼부부가 아닌,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흥분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대답하지 그랬어.”강한서는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종이를 찢었다. 기대하는 눈빛을 잔뜩 받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벌칙주 마실게.”주위에는 실망하는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프라이버시라도 듣게 되는 줄 알았는데, 겨우 이거야?’유현진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두 사람의 사생활을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그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강한서 이 재수 없는 자식 세 번째에도 걸리고 말았다. 그러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침묵했다. 운이 나쁜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나쁜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신우도 옆에서 강한서를 부추겼다. “아니면 벌칙을 선택해. 질문을 뽑으면 너 또 술 마셔야 해.”강한서는 고집스럽게 질문을 뽑았다. 그가 세 번째 질문을 뽑아 펼치자 한성우가 질문 내용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렇게까지 똥손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차미주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얼른 한성우에게 물었다. “뭘 뽑았어?”한성우가 강한서가 펼치고 있는 종이를 가져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넌 18 이상이야, 아니면 18 이하야?”차미주가 질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이상, 이하라는 거야? 나이? 아니면 키?”한성우가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차미주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자리에는 전부 성인이라, 당연히 질문의 뜻을 파악하고 속으로 웃으며 강한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현진은 옆에서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강한서는 유현진의 뜻을 알아듣고 말했다. “술 마실게.”한성우가 말했다. “네 선택은 무효야. 두 번 연속 질문을 패스할 수 없다는 게 게임 규칙이야. 그러니까 똑바로 대답해.”강한서: …그는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진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펜과 종이를 건넸다. 고여정이 정답을 쓴 종이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말해.”신우가 말했다. “대학교 4학년 파티하던 날 밤, 너희 숙소 아래서.”고여정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신진성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펼쳐보았다. 위에는 “극장”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르잖아. 너희 둘, 대체 누가 잘못 기억한 거야?”신우가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여정을 바라보았다. “네 생일날 극장을 말하는 거야?”고여정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알면서 잘못 말한 거야?”신우가 말했다. “내가 잘못 말한 게 아니야.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입 맞춘 건, 졸업식 파티가 끝난 뒤였어. 그날 네가 취해서 잊어버린 거야. 극장에서 그때는, 사실 두 번째였어. 하지만 너한텐 첫 번째지. 그러니까 우리 둘 대답이 다 맞아.”고여정이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생일날 극장에서는 두 사람은 사실 키스를 하지 않았다. 다만 신우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을 뿐이었다. 진정한 첫 키스는 사귀기로 한 그 해 밸런타인데이 극장에서였다. 고여정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렴풋이 파티장에서 자신을 안고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누군가 친구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해장국을 보냈던 것은 기억했다. 그녀는 한참을 알아보고 나서야 그 사람이 신우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녀가 신우에게 물었을 때, 그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여정은 눈을 뜨고 옆에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처음 신우가 그녀를 따라다녔을 때, 로맨틱했고 또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사귀고 나서 그는 어쩐지 이 관계에 조금 무관심한 듯 보였다. 데이트를 할 때든, 일상에서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때만큼의 열정을 느낄
“왜 그래?”신우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번뜩 정신이 든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번도 나한테 졸업식 파티 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준 적이 없었어.”신우가 웃었다. “몰래 입맞춘걸, 내가 어떻게 감히 떠들겠어?”한성우가 손을 흔들었다. “그만해. 부부의 애정행각은 사절이야.”그는 아직 다른 사람의 사생활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 라운드에서 바로 자신이 걸려버렸다. 한성우의 운은 강한서와 비겨도 도긴개긴이었다. 그가 질문지를 펼친 그 순간, 사람들은 폭소했다. 한성우의 질문은 “20 이상, 아니면 20 이하?”였다. 그 질문에 한성우의 얼굴은 바로 어두워졌다. “누가 쓴 질문이야, 일어나봐요! 왜 강한서는 18이고 나는 20인데?”강한서는 한성우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20 이하만 아니면 비슷하잖아. 왜 그렇게 흥분해? 설마, 이하인 거야?”한성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강한서를 향해 중지를 치켜세우더니 남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술을 마셨다. 그는 20 이상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강한서와 한성우가 이상한 질문 대부분을 걸러냈다. 마지막 라운드에 주강운이 걸렸고 그는 벌칙을 선택했다. 그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벌칙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가 뽑은 미션은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1분간 딥키스하는 것이었다. 그 미션을 본 사람들은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현진: …강한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고 얼른 손을 들어 그 벌칙을 반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전 의견이 없지만, 아이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그녀가 말하며 공간을 확보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와 주강운 사이에서 두리안 크러스트를 먹고 있는 네, 다섯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는 고개를 쳐들고 요리조리 이상한 어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법으로도 허락하지
유현진은 밖에서 한참 있고 난 뒤에야 들어갔다. 주강운이 어떻게 그 라운드를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한서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또 게임에 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유현진이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아마 또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술을 거절할 줄 모르는 바보. 그는 자신의 주량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유현진은 민경하에게 문자를 보내 강한서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는 강한서가 갑자기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일까 두려웠다. “뽑아요.”주강운은 뽑기용 종이박스를 그녀 앞으로 건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라운드만 끝나면 집에 데려다줄게요.”유현진은 종이를 뽑으며 말했다. “강운 씨는 계속 놀아요. 전 아직 볼 일이 좀 있어서, 택시 타고 가면 돼요.”주강운이 웃었다. “만약 제가 현진 씨를 혼자 보내면, 오늘 밤 연기는 다 물거품이 돼요.”유현진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됨을 알렸다. 유현진은 어쩔 수 없이 이번 라운드가 끝나고 다시 얘기할 생각으로 말을 삼켰다. 새로운 마피아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사람마다 종이를 한 장 뽑고, 각자 자신의 종이에 적힌 물건을 묘사하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물건이 적혀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묘사를 통해 누가 다른 사물인지 추측하고 그 사람을 잡아내면 마피아의 실패였다. 게임에서 진 사람은 신혼부부를 대신해 결혼식 비용을 제외한 기타 하객들이 호텔에서 소비한 모든 비용을 계산해야 했다. 7성급 호텔, 판이 꽤 커졌다. 게임 벌칙을 들은 차미주는 바로 게임에서 빠지고 싶었다. 한성우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 “무서워하긴. 지면 이 오빠가 다신 계산해 줄게.”차미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말 지면, 넌 바로 날 버리고 가버릴 거지?”한성우가 웃으며 주머니에서 스포츠카 차키를 건네주었다. “차를 너한테 맡기면 돼?”차미주는 얼른 차키를 가져왔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