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경 쓰이긴 하지.”한성우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실망이 다시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한성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좋아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해.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과의 현재와 미래니까. 과거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전여친과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않다면 괜찮아. 사람이 별로라면, 연애 경험이 없어도 쓰레기일 뿐이야!”한성우가 호기심에 물었다. “모쏠한테 당했어?”“친구가 당했어!”강한서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는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얘가 입이 가볍게 내 흉을 본 건 아니겠지?’사실상 그건 강한서의 착각이었다. 차미주가 말한 친구는 유현진이 아니었다. “내 친구 남편이 모쏠이었거든. 걔랑은 첫사랑이었고. 학교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했지만 결국 결혼 2년 만에 회사 여상사랑 바람이 났어. 내 친구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이혼하려고 한 덕에 유산했어.”“그 자식, 내 친구랑 만나기 전엔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바람이든 쓰레기 같은 짓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다 했잖아. 걔 일을 겪고 나서 난 남자가 믿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는 연애 경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한성우가 그녀의 말에 무조건 찬성했다. “역시 우린 생각이 비슷해.”차미주는 한성우의 리액션이 마음에 들자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어떤 모쏠은 정말 별 볼 일 없다니까. 내 친구 남편만 봐도 그래. 잠자리 경험이 없으니까, 빨리 끝나는 건 물론이고, 아프게만 한대. 관건은 그럼에도 좋은 척 연기를 하면서 그 남자를 맞춰줘야 한다는 거야. 그 인간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이런 인간한테 뭘 바라겠어? 정말 쓸모라고는 없다니까.”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나서 수다를 떠는 누군가를 보며 그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남자가 경험이 있어야 둘 다 좋
차미주의 눈가가 떨려왔다. ‘이 여자는 대체 예의가 뭔지, 염치가 뭔지 모르는 거야?’“남자친구 있으시잖아요.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잡고 놓지 않는다고요?”유현진이 속삭였다. “그냥 부축한 것뿐이에요. 차미주 씨가 오해하신 거예요. 그렇죠, 강한서 씨?”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네”라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아내이니, 뭐 어쩌겠는가? 맞춰주는 수밖에. 그의 반응에 차미주는 분노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그녀는 절대 강한서를 면전에 두고 면박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강한서, 넌 눈이 삐었어? 저 여자가 너한테 꼬리치는 거 몰라? 너는 다른 남자랑 다르다고 생각했다니, 다르긴 개뿔! 다 쓰레기야! 예쁜 여자가 윙크라도 해주면 발도 못 떼지. 너 같은 인간이 현진이랑 잘 되고 싶어? 다음 생, 다다음 생도 너한테 기회— 읍—”차미주의 욕설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곧 뒤따라온 한성우에 의해 입을 틀어막힌 채 한쪽으로 끌려갔다. “술 많이 마셔서 헛소리를 다 하네. 편하게 해.”한성우는 자리를 피하기 전 강한서를 보며 또 말했다.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 난 쟤 입 못 막아.”말을 마친 그는 발버둥 치는 차미주를 안고 가버렸다. “이 자식아! 이거 놔!”차미주가 소란을 피운 덕에 한성우는 얼마 못 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왜 날 잡아! 나 아직 그 년놈들 손 보지 못했는데!”한성우가 말했다. “그냥 부축한 것뿐이야. 어딜 봐서 네가 말한 것처럼 심각하다는 거야? 한서가 그렇게 사리 분별 못하는 녀석도 아니고. 걘 그냥 예의상 그런 거야.”“저렇게 흘리고 다니는 여자한테 예의는 무슨 예의? 그냥 둘이 눈 맞은 거잖아! 안 되겠어, 내가 지금 바로 현진이한테 전화해서 강한서 이 쓰레기 같은 놈을 멀리하라고 해야겠어!”한성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번에 그녀를 원위치 시켰다. “너
“애초부터 네 탓이었어!”차미주는 ‘누가 너더러 말도 없이 입 맞추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잠시 생각하고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왜냐면 말을 하든 안 하든, 그는 그녀에게 입 맞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마음이 이상했다. 그녀는 어쩐지 자신이 화를 낸 포인트가 틀린 것 같다고 느껴졌다. 왜 그녀는 한성우가 자신에게 입 맞춘 것보다 그가 한 말에 더 화가 나 있는 걸까?차미주는 한성우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가 입 맞춘 것을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걸까?차미주는 머리가 복잡했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유쾌했다. 그녀는 아마도 한성우에게 여자친구가 없어서 더 이상 오해받을까 봐 피해 다니지 않고 편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 내 탓이야.”기분이 좋아진 한성우의 말투가 다정해졌다. 차미주는 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얼음이라도 가져와서 찜질하는 게 어때? 보기 흉한데.”한성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됐어, 네가 그랬잖아, 난 얼굴이 두껍다고.”차미주: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한성우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좀 할까, 도둑아?”차미주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이번 주말에 나 삼계탕 먹고 싶어.”차미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넌 내가 셰프인 줄 알아, 뭐든 다 할 줄 알게?”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너는 셰프보다된 능력 있는 사람이야. 네가 바로 실존해 있는 장금이자 요리의 신 그 자체지.”한성우의 아부에 차미주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잘난 척하며 말했다. “삼계탕은 조리 과정이 복잡해. 식재료도 많이 필요해서 만드는 데 며칠은 걸릴거야.”“그러니까 나도 당장 먹는다고 안 했잖아. 식재료는 내가 준비할게. 넌 하기만 해.”그는 자신의 볼을 내밀었다. “다친 것 좀 봐봐. 내가 너랑 친구 하면서 엎어치기도 당하고 따귀도 맞아야 해. 네가 제대로 몸보신 시
유현진이 강한서의 뺨을 살짝 때렸다. “나 강운 씨랑 같이 왔어. 최소한 들어가서 인사는 해야지.”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들어갔다. 계획은 좋았으나, 들어왔다가 다시 간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날 밤 결혼식 피로연이 준비되어 있었고 친구들이 신랑 신부와 함께 게임을 하도록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다. 강한서는 자리를 비울 수 없고, 그렇다고 혼자 가면 재미도 없으니 그녀는 아예 함께 피로연에 참석했다. 방금 주강운이 불려 나간 것도 신랑의 친구들과 피로연 게임에 사용할 도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이는 유현진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을 재밌게 만들어서 그렇게 지루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가고 싶지 않으면, 제가 진성 씨한테 얘기하고 데려다 드릴게요.”“괜찮아요.”유현진이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도와드린다고 약속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같이 가요.”주강운은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멈칫거린 주강운이 손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그 장면을 응시하고 있던 강한서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차미주만이 호시탐탐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마치 그들이 무슨 선을 넘는 행동이라도 하면 바로 친구를 대신해 그 현장을 잡을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피로연은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사람들도 모두 술을 마셨고, 호텔에서 피로연을 하는 편이 나았다. 게임은 전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실게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능에서 자주 나오는 마피아 게임이었다. 유현진은 이 신혼부부가 너무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혼 첫날 밤에 진실게임이라니, 어떤 사생활을 물을 줄 알고. 부부관계가 틀어질까 두렵지도 않은 걸까?하지만 현실은, 그런 생각은 그녀의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진실게임은 신혼부부가 아닌,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흥분했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대답하지 그랬어.”강한서는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종이를 찢었다. 기대하는 눈빛을 잔뜩 받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벌칙주 마실게.”주위에는 실망하는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프라이버시라도 듣게 되는 줄 알았는데, 겨우 이거야?’유현진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두 사람의 사생활을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그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강한서 이 재수 없는 자식 세 번째에도 걸리고 말았다. 그러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침묵했다. 운이 나쁜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나쁜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신우도 옆에서 강한서를 부추겼다. “아니면 벌칙을 선택해. 질문을 뽑으면 너 또 술 마셔야 해.”강한서는 고집스럽게 질문을 뽑았다. 그가 세 번째 질문을 뽑아 펼치자 한성우가 질문 내용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렇게까지 똥손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차미주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얼른 한성우에게 물었다. “뭘 뽑았어?”한성우가 강한서가 펼치고 있는 종이를 가져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넌 18 이상이야, 아니면 18 이하야?”차미주가 질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이상, 이하라는 거야? 나이? 아니면 키?”한성우가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차미주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자리에는 전부 성인이라, 당연히 질문의 뜻을 파악하고 속으로 웃으며 강한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현진은 옆에서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강한서는 유현진의 뜻을 알아듣고 말했다. “술 마실게.”한성우가 말했다. “네 선택은 무효야. 두 번 연속 질문을 패스할 수 없다는 게 게임 규칙이야. 그러니까 똑바로 대답해.”강한서: …그는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진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펜과 종이를 건넸다. 고여정이 정답을 쓴 종이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말해.”신우가 말했다. “대학교 4학년 파티하던 날 밤, 너희 숙소 아래서.”고여정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신진성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펼쳐보았다. 위에는 “극장”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르잖아. 너희 둘, 대체 누가 잘못 기억한 거야?”신우가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여정을 바라보았다. “네 생일날 극장을 말하는 거야?”고여정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알면서 잘못 말한 거야?”신우가 말했다. “내가 잘못 말한 게 아니야.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입 맞춘 건, 졸업식 파티가 끝난 뒤였어. 그날 네가 취해서 잊어버린 거야. 극장에서 그때는, 사실 두 번째였어. 하지만 너한텐 첫 번째지. 그러니까 우리 둘 대답이 다 맞아.”고여정이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생일날 극장에서는 두 사람은 사실 키스를 하지 않았다. 다만 신우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을 뿐이었다. 진정한 첫 키스는 사귀기로 한 그 해 밸런타인데이 극장에서였다. 고여정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렴풋이 파티장에서 자신을 안고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누군가 친구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해장국을 보냈던 것은 기억했다. 그녀는 한참을 알아보고 나서야 그 사람이 신우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녀가 신우에게 물었을 때, 그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여정은 눈을 뜨고 옆에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처음 신우가 그녀를 따라다녔을 때, 로맨틱했고 또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사귀고 나서 그는 어쩐지 이 관계에 조금 무관심한 듯 보였다. 데이트를 할 때든, 일상에서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때만큼의 열정을 느낄
“왜 그래?”신우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번뜩 정신이 든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번도 나한테 졸업식 파티 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준 적이 없었어.”신우가 웃었다. “몰래 입맞춘걸, 내가 어떻게 감히 떠들겠어?”한성우가 손을 흔들었다. “그만해. 부부의 애정행각은 사절이야.”그는 아직 다른 사람의 사생활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 라운드에서 바로 자신이 걸려버렸다. 한성우의 운은 강한서와 비겨도 도긴개긴이었다. 그가 질문지를 펼친 그 순간, 사람들은 폭소했다. 한성우의 질문은 “20 이상, 아니면 20 이하?”였다. 그 질문에 한성우의 얼굴은 바로 어두워졌다. “누가 쓴 질문이야, 일어나봐요! 왜 강한서는 18이고 나는 20인데?”강한서는 한성우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20 이하만 아니면 비슷하잖아. 왜 그렇게 흥분해? 설마, 이하인 거야?”한성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강한서를 향해 중지를 치켜세우더니 남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술을 마셨다. 그는 20 이상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강한서와 한성우가 이상한 질문 대부분을 걸러냈다. 마지막 라운드에 주강운이 걸렸고 그는 벌칙을 선택했다. 그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벌칙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가 뽑은 미션은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1분간 딥키스하는 것이었다. 그 미션을 본 사람들은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현진: …강한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고 얼른 손을 들어 그 벌칙을 반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전 의견이 없지만, 아이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그녀가 말하며 공간을 확보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와 주강운 사이에서 두리안 크러스트를 먹고 있는 네, 다섯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는 고개를 쳐들고 요리조리 이상한 어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법으로도 허락하지
유현진은 밖에서 한참 있고 난 뒤에야 들어갔다. 주강운이 어떻게 그 라운드를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한서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또 게임에 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유현진이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아마 또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술을 거절할 줄 모르는 바보. 그는 자신의 주량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유현진은 민경하에게 문자를 보내 강한서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는 강한서가 갑자기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일까 두려웠다. “뽑아요.”주강운은 뽑기용 종이박스를 그녀 앞으로 건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라운드만 끝나면 집에 데려다줄게요.”유현진은 종이를 뽑으며 말했다. “강운 씨는 계속 놀아요. 전 아직 볼 일이 좀 있어서, 택시 타고 가면 돼요.”주강운이 웃었다. “만약 제가 현진 씨를 혼자 보내면, 오늘 밤 연기는 다 물거품이 돼요.”유현진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됨을 알렸다. 유현진은 어쩔 수 없이 이번 라운드가 끝나고 다시 얘기할 생각으로 말을 삼켰다. 새로운 마피아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사람마다 종이를 한 장 뽑고, 각자 자신의 종이에 적힌 물건을 묘사하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물건이 적혀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묘사를 통해 누가 다른 사물인지 추측하고 그 사람을 잡아내면 마피아의 실패였다. 게임에서 진 사람은 신혼부부를 대신해 결혼식 비용을 제외한 기타 하객들이 호텔에서 소비한 모든 비용을 계산해야 했다. 7성급 호텔, 판이 꽤 커졌다. 게임 벌칙을 들은 차미주는 바로 게임에서 빠지고 싶었다. 한성우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 “무서워하긴. 지면 이 오빠가 다신 계산해 줄게.”차미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말 지면, 넌 바로 날 버리고 가버릴 거지?”한성우가 웃으며 주머니에서 스포츠카 차키를 건네주었다. “차를 너한테 맡기면 돼?”차미주는 얼른 차키를 가져왔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