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가 유현진을 곁에 두고 싶어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가두어 두려던 적은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지내온 유현진이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치 사슬에 묶인 어린 코끼리처럼. 충분히 사슬을 끊을 능력이 있음에도, 그럴 용기가 없어 가만히 있기만 했던 코끼리처럼 말이다. 지금의 유현진은 이제 그 사슬에서 벗어났다. 유현진이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그의 손으로 다시 그녀를 묶어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민경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오디션이 한창 진행 중인 방을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강한서가 발걸음을 멈췄다. 발밑 카펫의 촉감이 이상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은 어쩐지 축축해져 있었고 카펫의 다른 곳은 밝은 빨간색이었지만 강한서의 발이 닿은 곳은 어둡고 짙은 빨간색이었다. 그 물에 젖은 자국은 그의 발밑에서부터 몇 미터 떨어진 아주 좁은 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민경하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물이 샌 것 같네요. 아닌데, 이거 술 냄새 아니에요?”힐끗 쳐다본 강한서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문틈에서 많은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웨이터 한 명이 달려 나오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과했다. “손님, 이쪽으로 걸으시죠. 창고에서 술이 새서 지금 바로 치우라고 하겠습니다.”술이 샜다기에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수준에 더 가까웠다. 술이 새어 나오는 문을 훑어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문 열어요.”흠칫 놀란 웨이터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여긴 직원들 탈의실입니다. 직원 개인 물품도 많고, 사생활 보호...”“열어!”강한서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강한서가 화를 내자 숨기고 있던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웨이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포식자가 가진 위압감은 대단했다. 9시가 되려면
문이 열리자 짙은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유현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술병을 들고 문틈으로 술을 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는 가슴이 저렸다. 그는 얼른 유현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민경하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좁고 꽉 막힌 방에 유일한 통풍구도 막혀있어 거의 밀폐된 공간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전기도 끊겨있었다. 공기마저 탁했다. 누구든 이런 곳에 30분 이상 갇혀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강한서?”유현진은 그의 품에 안겨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한서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응.”유현진은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창가나 베란다로 데려다줘. 바람 좀 쐬고 싶어...”강한서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병원에 데려다줄게.”“베란다로 먼저 가 줘.”유현진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좀 쉬면 괜찮아. 오디션 봐야 해. 그 사람들 뜻대로 되게 놔둘 수 없어.”긴장으로 굳은 강한서의 얼굴을 유현진이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데려다줘. 부탁해...”부탁...그렇게 해달라고 할 때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더니,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싶을 때면 꼭 이렇게 그 말을 내뱉었다. 강한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꼭 껴안고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확 트인 시야와 신선한 공기가 한 번에 밀려왔다.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가쁘던 숨이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강한서는 말 없이 옆에 앉아 유현진의 등을 토닥였다. 유현진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민경하가 따듯한 물 한 잔을 떠오더니 말했다. “사모님, 물 좀 마시세요.”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고 물 잔을 받은 유현진은 몇 모금 마시더니 다시 민경하에서 컵을 돌려주었다. “이제 오디션 보러 가야 해요.”몸을 일으킨 유현진은
“누구...”“저는 오늘 오디션을 보기로 했던 유현진이라고 합니다.”유현진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봄의 연인”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만약 그때 한 배우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차이현이 그녀를 써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운이 따라줄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안창수 감독에 대해 아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문예 영화든 상업 영화든 가리지 않고 찍는 감독이었고 상을 받은 영화도 적지 않았다. 이런 감독들은 보통 오디션에 늦는 배우를 싫어했다. 유현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영과 송민영이 나왔다. 서영이 유현진을 보자마자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찾을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인제 와서 무슨 소란이죠? 시간관념도 없이! 감독님께서는 이미 민영이를 윤여령 역으로 캐스팅하기로 하셨어요.”이때 안창수가 고개를 돌려 비서에게 물었다. “이 배우는 누구지?”이미 유현진의 자료를 찾은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에서 새로 계약한 연예인입니다. 신인이라 아직 작품은 없고, 얼마 전 사극 촬영을 마쳤고 아직 개봉하지는 않았습니다. 단편 극에 출연하여 이름을 조금 알린 것으로 보입니다.”비서가 말을 이었다. “송민영급의 배우도 감독님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해서 오디션 준비를 하는데, 시간관념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런 두 사람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다니 조금 웃기네요.”그가 보기에 유현진은 송민영에게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 듯 했다. 인기, 이미지, 출연한 작품.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송민영이 유현진보다 나았다. 서영이 계속 밀치자 화가 난 유현진이 오히려 서영의 손을 잡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늦었는지는, 서영 씨가 제일 잘 아실 텐데요!”서영이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시간관념이 없는걸, 왜 다른 사람 탓이죠?”서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유현진은 서영의 손을 뿌리치고 안창수와 그의 스텝들을
유현진이 송민영의 말에 멈칫 걸음을 멈추고 송민영을 훑어보았다. “누구 연기력이 더 뛰어난지는 촬영장에서 밝혀지겠죠. 하지만 남자 문제는... 제가 가졌던 남자를 송민영 씨는 가져보지도 못했잖아요.”그러더니 유현진은 송민영의 배로 쓱 시선을 옮겼다. “아기는 아직인가 봐요?”송민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유현진은 그녀를 유유히 지나쳐 오디션을 보던 방으로 들어갔다. 안창수의 비서가 건넨 대사는 한 페이지가 전부였다. 학교 연습실 장면이었다. 이사라는 성수시 청년 무용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연습실에서는 한창 그 일에 관해 토론 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번 대회에 분명 문제가 있다며 윤여령을 대신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연습실 문밖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를 전부 다 듣고 있던 이사라가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윤여령과 말다툼 끝에 대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사라가 안무 실수를 했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유현진은 빠른 속도로 대사를 숙지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안창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시작해도 될까요?”고개를 끄덕이던 안창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송민영을 불렀다. “민영 씨, 와서 대사 좀 맞춰줘. 몇 마디 없어.”흔쾌히 대답한 송민영은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안창수가 건네는 대본을 받았다. 학생들은 전부 윤여령의 안무 표현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이사라는 대회 중 티가 나는 실수가 있었음에도 대상을 받았다. 이사라의 아버지는 성수시의 부시장이었고 할아버지도 유명 인사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번 대상 선정에 분명 누군가 손을 써 심사위원들이 이사라에게 투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대상은 공명정대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사람들은 윤여령을 위해 주절주절 불평을 늘어놓았다. 윤여령은 집안이 어려웠고 지방에서 올라온 특기생이었다. 등록금도 마을 사람들이 보태준 것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면 무려 60만 원의 상금을 줬다. 90년대의 60만 원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 금액은 윤여
“못할 거 없잖아. 여령아, 진짜 ‘열반’이 어떤 건지 보여줘!”윤여령은 등 떠밀려 이사라 곁에 섰다. “열반”은 말 그대로 봉황을 연상시키는 무용이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몸을 약간 구부리고 두 팔을 교차하여 가슴을 안았다. 이 안무는 잔뜩 움츠러든 채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는 갓 부화한 어린 새를 표현한 것이었다. 음악의 흐름에 따라 이사라는 점차 두 팔을 벌렸다. 그녀는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독수리 같았다. 슉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날개가 끊어진 새처럼 추락했고 곧 온몸이 활활 타오르더니 다시 태어났다. 그야말로 불과 함께 다시 태어난 봉황이었다. “펑—”허리를 올리는 동작을 할 때, 힘 조절 실패로 등 전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현장의 모든 사람이 유현진의 실수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유현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고는 빨개진 눈으로 옆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사라는 어떻게든 꼭 윤여령을 이기고 싶었다. 과도한 승부욕은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이어졌다. 주변에는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라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그녀의 눈빛은 분노와 시기로 가득했다. 오디션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잠시 멍해진 안창수는 몇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컷—”유현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풀린 유현진은 이미지를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바닥에 풀썩 앉았다.방금까지 오랜 시간을 방에 갇혀 있었던 터라 이런 춤을 추는 장면을 연기하는 것은 꽤 힘들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연기에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송민영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진의 연기는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몇 마디의 대사만으로 송민영도 유현진의 연기에 사로잡힐 뻔했다. 여주인공은 분명 송민영 자신이었다. 하지만 방금 유현진과 대사를 맞추었을 때, 송민영의 대사에서는 가난한 주인공 특유의 그런 끈기가 전혀 느껴지지
옆 방에선 강한서가 모니터를 통해 현장 라이브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유현진이 이런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그녀는 가끔 집에서도 춤을 추었다. 유현진에게는 지금껏 유지해 온 좋은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일 시간이 날때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무용의 기본기를 연습한 것이었다. 가끔은 기분에 따라 춤을 추고는 했었는데 대체로는 웃기는 춤이었다. 예를 들어 외계인이 추는 춤, 개구리가 추는 춤, 자이언트 판다가 추는 춤 같은 것들이었다. 매번 이런 춤을 흉내 낼 때면 그녀는 꼭 강한서를 불러 원본 동영상을 틀어놓고 자신은 모니터를 보며 TV 를 보며 이상한 안무를 따라 했다. 강한서는 알고리즘에 뜨는 동영상을 보지 않았다. 때문에 처음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유현진은 TV속 인물의 동작을 거의 동시에 따라 하며 춤을 흉내 냈다. 그때 강한서는 처음으로 사람의 반응속도가 이토록 빠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유현진이 노란 옷을 입고 추는 외계인 춤은 아직도 그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다. 그가 참석했던 비지니스 파티 현장에서 누군가 이 춤을 춘 적이 있었다. 그때 무용가 출신의 사모님이 이런 춤은 보기엔 간단해 보이지만 기본기가 좋아야하기에 몇 번 만에 따라 출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이라고 했다. 때문에 유현진이 안창수에게 실력이 별로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겸손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겸손함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음, 아니면 그녀는 겸손이 아니라 반전을 위해 고의로 그렇게 말한 걸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유현진이 제일 좋아하는 일이 바로 그런 식의 자랑을 하는 것이니까. 동기들 그룹 채팅에서처럼 말이다.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 자랑하는 동기들이 유현진에게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물었었다. 유현진은 우리 남편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작은 사업을
오늘 오디션에 지각한 일은 확실히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듯 했다. 비록 그녀의 연기력으로 이미지를 조금 만회하긴 했지만 말이다. 유현진이 대답했다. “안 감독님, 두 번 다시 지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녀의 대답에 안창수가 흐뭇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계약서 확인해 봐요. 문제없으면 사인하시면 돼요.”유현진이 말했다. “매니저와 영상통화로 계약서를 확인해달라고 해도 될까요?”안창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그의 비서가 말했다. “이런 계약서는 거의 다 비슷해요. 그냥 사인하시면 돼요. 안 그래도 시간도 늦었는데, 굳이...”안창수가 손을 들어 비서에게 그만 말하라는 눈치를 줬다. 그러고는 유현진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요. 뭐든 조심하는 건 좋은 일이니까.”이준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유현진의 말에 서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유현진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제작진 몇 명과 함께 휴대폰 신호가 있는 곳에서 이준에게 전화를 걸어 계약서의 내용을 전했다. 아직 기차에 있던 이준이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이사라 역을 오디션 봤어요?”유현진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늘 제가 늦게 도착했거든요. 도착했을 땐 윤여령 역은 이미 결정이 끝났더라고요. 그래서 이사라 역을 오디션 보겠다고 했어요. 저도 그 역할이 더 좋았고요.”사실 이준도 이사라 역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화로 상을 받으려면 극 중 제일 복잡하고 어려운 역할을 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송민준이 꼭 여주인공 역을 고집했기에 이준은 어쩔 수 없이 유현진이 윤여령 역을 오디션 보도록 했다. 송민준은 사업가였다. 그는 투자만 할 줄 알았지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송민준이 보기엔 여주인공만이 제일 좋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이쪽 업계에서는 프로였다. 그는 어떤 캐릭터가 극에서 더 드라마틱한 역할을 하는지, 어떤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는 게 더 좋은지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유현진이 이사라 역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나은 선
“믿는지 아닌지는 시도해보면 되잖아요?”유현진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하찮은 수단으로 제가 오디션 볼 기회를 날리게 한 건, 대체 뭐가 두려워서죠?”잠시 멍 해있던 송민영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받아쳤다. “수단이라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송민영도 멍청이는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한 일이 아니니,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유현진 이 미친 게 녹임 중일 수도 있어. 약점을 잡힐 수는 없지.’“다들 실력으로 경쟁하는 자리였어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건 본인 잘못이니 대가를 치러야죠. 남 탓하지 말고.”유현진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눈치는 빠르네.’송민영은 웃는 듯 마는 듯하는 유현진의 표정을 보며 갑자기 유현진에 의해 바다에 빠졌던 일을 떠올렸다. ‘이 미친년은 항상 상식적으로 나오지 않았어. 오늘 일도 너무 성급하게 처리했는데 계속 이렇게 부딪혔다가는 꼬투리를 잡힐지도 몰라.’송민영은 유현진을 매섭게 째려보고는 콧방귀를 뀌며 한마디 했다. “두고 보자고요.”그러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서영은 멈칫거리며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진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서영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서영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눈빛에 어쩐지 서영은 불안해졌다. 그러나 서영은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조금 매력적인 외모와 연기력을 지닌 것이 전부였다. 라이징 스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관중에게 달렸다. 아무리 연기력이 좋아도 관중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자 강한서와 민경하가 룸에서 나왔다. 강한서를 마주한 유현진은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방에 갇혀 숨도 쉬어지지 않을 때, 그녀는 누구든 와주기를 바랐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그곳에서 그녀를 꺼내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이 한 몸 바치는 것일지라도.하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