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강한서가 방청석에 서서 얼음같이 차갑고 어두운 표정으로 쉴틈없이 쏙닥거리던 두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두 여자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강한서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뭐, 뭐하는 거예요?"강한서는 두 사람을 째려보더니 무표정으로 답했다. "칼슘 부족이라 갑자기 다리가 떨려서."두 여자는 어이가 없었다.누가 다리가 떨려서 타인의 의자를 차?그런데 강한서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하도 커서 상대방이 어이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더라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민경하는 두 사람이 여자이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남자였다면 강한서의 발은 의자가 아닌 그들의 몸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두 여자는 생각자체가 불건전했다. 어떻게 얼굴이 예쁘다고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을 저런식으로 비하할 수 있는가?이때 사법 결찰이 와서 경고했다. "법정에서 소란 피우시면 안됩니다."유현진은 강한서가 뒷좌석 의자를 발로 차는 모습을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얼굴만 봐도 지금 화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송민영을 위해 법정 현장까지 와 놓고선 화내기까지 해?잠깐의 소란으로 인해 재판장은 10분 휴정한다고 발표했다.강한서가 지금 막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현진을 찾으러 가고 있는데, 몇 발자국 남겨두고 박부자가 불러서 멈춰섰다. "한서야, 오랜만이야. 오늘 어떻게 소송을 들으러 왔어?"유현진은 강한서가 박부자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주강운을 향해 말했다."저 화장실 다녀올게요."강한서는 건성으로 몇 마디 응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찾았다. 그런데 유현진은 보이지 않았고, 주강운만 남아 있었다.강한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물었다. "현진이는?""화장실 갔어."강한서가 화장실로 쫓아가려고 몸을 돌리자 주강운이 말렸다. "오늘 현장에 기자들이 많아. 방금 전에 피고인
강한서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박부자는 단지 하현주가 병상에 누워있었다고만 말했는데, 주강운은 구체적인 사건과 시간까지 정확하게 말했다.주강운은 유현진을 안 지 2개월 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디테일한 정보까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주강운은 강한서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서에게 물음을 던졌다."너 현진 씨 어머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강한서는 무의식적으로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이 문제는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강한서가 구체적으로 조사하지 않은 내용이었다.강한서는 하현주에 대해 별로 깊은 감정이 없었다. 필경 식물인간이었으니, 오히려 깊은 정이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일 것이다.강한서와 신미정의 깊지 않은 모자 간의 정을 보더라도 강한서가 유현진의 슬픔을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바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현진이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과 이혼하자고 했던 행위가 그로서는 이해 불가였다.그런데 주강운이 지금 이 물음을 자신한테 던졌다. 강한서는 갑자기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워져다.주강운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에 현진 씨 어머님은 이미 생명 징후가 없으셨어. 현진 씨가 직접 어머님의 산소 마스크를 벗겨 드렸어.""네 사람이라면 평생을 보호하고 보살펴 줘야 되는 거 아냐? 그걸 할 수 없다면 넌 질책할 자격이 없어."말을 마치고는 강한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재판정을 나갔다.강한서는 굳어진 표정으로 제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다가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왔다.민경하는 강한서의 어두워진 안색을 보고 감히 주강운이 방금 전에 그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묻지 못했다.그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너무 걱정 마세요. 사모님의 안건은 증거가 충분한 데다가 주강운 변호사님이 유사한 소송을 변호했던 경험이 있으니 패소하지 않을 거예요."주강운의 선전포고로 이미 어두워진 강한서의 표정은 민경하가 주강운의 능력을 칭찬하는 것을 듣고 더 한층 어두워졌다.그는 이를
주강운이 한꺼번에 대량의 문제를 제기하자 임효우는 당장에서 멍해졌다. 임효우는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계정은 1년 전에 만든 건데, 구체적으로 시간은 기억이 안 나요. 첫 번째로 올린 내용은 아마 제가 다른 계정에서 퍼온 걸 거예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요. 계정은 여태껏 저 혼자 사용했어요."주강운은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다들 그가 자신이 알고 싶은 답을 얻었는지 판단이 안 갔다. 임효우는 자신이 실수라도 했을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 자신의 변호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실례지만 임효우 씨의 생일이 어떻게 되죠?""7월 6일이요.""7월 6일......"주강운은 임효우의 생일을 되풀이하다가 돌연 물음을 던졌다. "2월 19일자에 임효우 씨 계정으로 인스타그램 하나가 올라왔는데, 내용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는 거였어요. 아무리 1년에 생일을 두 번 쇤다고 하더라도 음력과 양력 사이에 5개월 씩이나 차이가 날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임효우는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다. 2월 19일은 자신의 생일이 아니라 송민영의 생일이었다. 계정은 줄곧 송민영이 사용했기에 그는 송민영이 어떤 내용들을 올렸는지 몰랐다. 멍청한 녀석! 그 계정으로 사적인 내용을 올리면 어떡해! "임효우 씨, 제 물음에 답해주세요."주강운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재판장보다도 그 기운이 더 강했다. 임효우는 그런 압박감으로 인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박부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2월 19일은 저의 당사자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이에요.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에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로 생일을 쇠는 데 무슨 문제가 있어요?""당연히 문제가 없죠."주강운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하는데, 그걸 자신의 생일을 축하한다라고 적는 경우는 처음이라서요."말을 끝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재판장을 향해 말했다. "재판장님, 여기까지 묻겠습니다."그 한 마디가
현장에 폭소가 터졌다. 누군가가 그녀의 말에 응하여 농담을 건넸다. "진짜 변태가 따로 없네요."헛소리 문학은 언제나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언제 들어도 유머감이 넘쳐났으니 말이다."현진 씨, 지금도 만 촬영하고 있나요? 드라마나 영화 촬영은 계획이 없나요?""현진 씨, 녹음을 이제는 안 할 건가요?""현진 씨, 현재 싱글인가요?""현진 씨, 연예 기획사랑 계약했나요?"......다양한 물음들이 끊기지 않았다.감정 문제를 묻는 사람도 있었고, 송민영과의 원한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몇 년 간 신미정과의 수많은 크고 작은 배틀을 겪고나니 웬만한 물음들을 답하기는 식은죽 먹기였다. 그는 모든 물음에 빈틈없이 답했다.주강운은 시간을 계산하더니 십 분 후 다가와서 말했다. "현진 씨, 이제 가야 돼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얘기를 나눠요."기자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물러서서 길을 내주었다.주강운은 손으로 유현진을 보호하면서 거친 기자들이 그를 다치지 못하게 했다.차 앞에 도착하자 우선 유현진을 위해 차문을 열어주고, 자신은 나중에 차에 올라탔다.강한서는 뒷 차에 앉아서 방금 전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유현진이 탄 앞 차가 움직이자 강한서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가."유현진은 차에 올라타서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그러면서 주강운에게 인사를 했다. "강운 씨,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주강운은 웃으면서 말했다"저야 돈 받고 일하는 거 아니겠어요?"유현진은 미소를 지었다.주강운은 이번 소송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인 건 사실이었다.유현진이 주강운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변호사 선임 비용에 대해 알아봤다. 주강운과 같은 레벨의 변호사는 억대급 소송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받지 않았다. 대부분 큰 안건의 의뢰만 받았다.이번 소송과 유사한 안건은 시간이 길고 해야 할 일
백미러를 통해 본 결과 은회색 차였는데, 구체적으로 브랜드는 잘 보이지 않았다.유현진은 인상을 잔뜩 쓰면서 말했다. "초보 운전자 아니에요? 이것도 부딪힐 수 있나?"주강운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응했다. "아마 식사가 조금 늦어질 것 같네요."유현진이 말했다. "우선 사고를 처리해야죠.""잠깐만 차에서 기다려요."주강운은 낮은 소리로 말하고는 뒷쪽 플래시를 두 개 다 켠 후 안전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저도 같이 가요."유현진도 안전 벨트를 풀었다.만약 상대방이 막무가내인 사람이면 주강운의 온화한 성격으로는 대처 불가할 수 있으니 따라가 봐야 했다.주강운이 말로 안 되면 자신이 대신 싸우면 그만이었다. 낯에 철판 깔고 싸운 게 한 두 번도 아니고. 어차피 싸움에서 진 적 없으니까.주강운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요."강한서는 유현진이 주강운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진은 일부러 차를 한 바퀴 돌아 주강운의 옆으로 가서 섰다.유현진은 흰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머리는 자연스레 어깨에 드리워졌고, 담담한 표정으로 두 손을 코트에 넣고 있었다. 빨간색 입술은 꼭 다물고 있어서 보는 이에게 압박감을 주었다.유현진은 오히려 주강운보다도 앞서서 걸었다.이 모습을 본 주강운은 눈빛이 흐려졌다.주강운과 유현진이 결혼한 첫 해에 두 사람이 정인월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가는 도중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었다.당시 강한서는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뀐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런데 이때 스쿠터 한대가 갑자기 달려왔다. 강한서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그래도 상대방 스쿠터와 부딪혔다.스쿠터 주인은 50대 중년 여성이었고, 차에는 대여섯 살 되는 아이를 태우고 있었다.강한서의 차와 부딪히고 나서 두 사람 모두 스쿠터에서 떨어졌다.강한서는 유현진더라 사고 처리 센터와 보험 회사에 연락하라고 하고, 자신은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폈다.유현진이 전화를 치는 동안 그 중년 여성은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헬멧을 벗어 강
마치 그녀의 말처럼."저 여자가 먼저 건드렸잖아. 내 남편은 패도 내가 패."그녀는 소유욕이 강했으며 누군가가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극혐했다. 하지만 지금…...강한서는 침울한 눈빛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유현진은 주강운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유현진은 차에서 내릴 생각조차 안 하는 차주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본인이 운전 잘 못해 놓고 뭐가 그리 잘나서 꼼짝도 안 하는 거야?'주강운이 운전석 유리를 두드리자 유리는 천천히 내려왔다.유현진은 남자 운전사인지 여자 운전사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내려진 유리로 보이는 사람은 민경하였다. 민경하는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주 변호사님, 사모님. 여기서 만나네요."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주강운도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민 실장님이 왜 여기에?"민경하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대표님 옛 저택으로 모시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새 차라 손에 익지 않아서 실수했네요. 죄송해요."민경하는 주강운의 차를 살펴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심하게 부딪혔네요. 사고 처리 센터와 보험사에 연락해 놓았으니 곧 도착할 거예요. 시간 빼앗아서 죄송해요."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민경하의 운전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그는 차를 몰고 제자리에서도 360도 회전할 수 있다.강한서의 비서 실장이 이런 저급한 실수를 할 리가 있을까?'강한서 이 자식이 시킨 거 아니야?'유현진은 삐딱한 표정으로 뒷좌석의 유리를 노려보았다.물론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송민영을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이젠 사고까지 내려고 들어? 강한서 점점 밉상이야.'그녀는 뒷좌석 유리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러자 차 유리가 서서히 내려왔다.강한서는 정장 차림으로 뒷좌석에 앉아 유현진과 눈을 마주쳤다."민 실장님, 어떻게 됐어요?"민경하가 답했다."대표님, 하필 주 변호사님 차를 들이받았네요. 사모님… 아니, 현진 씨도 같이
유현진은 속이 철렁했다.'장례식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갑자기 왜?'그녀는 굳은 얼굴로 저도 몰래 손가락을 꽉 쥐었다.하현주를 보내고 그녀는 주위 사람들 건강에 아주 민감하다.이런 일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강한서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강한서는 안전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그는 유현진과 주강운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나머지는 민 실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난 택시 타고 갈게요."말을 끝낸 강한서는 조급한 발걸음으로 뒤돌아 걸었다. 그 모습에 유현진도 마음이 불안해져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강한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유현진은 떨리는 입술로 나지막하게 물었다."할머니한테 무슨 일 생겼어?"강한서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상세한 건 나도 잘 몰라. 궁금하면 같이 가던가."유현진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이미 이혼했는데 가는 게 맞을까?'그녀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강한서는 실망한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먼저 갈게."유현진은 목이 메어왔다.강씨 가문 다른 사람에게 일이 생겼다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만약 일이 생긴 사람이 정인월이라면 유현진은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이 바로 정인월이다. 그러니 그녀는 못 들은 척할 수 없다.하여 강한서가 뒤돌아서는 순간, 그녀는 바로 다시 불러세웠다."잠시만."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강운에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밥은 제가 다음에 살게요. 지금은 할머니한테 가야겠어요."주강운은 동공이 살짝 흔들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래요, 필요하면 연락해요."유현진은 긴 숨을 내쉬며 고맙다고 인사한 뒤 강한서의 뒤를 따라갔다.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멀어지자 주강운의 표정도 함께 굳어졌다. 그는 한참 뒤에야 두 사람이 떠난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
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승소 축하해."유현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말했다."내가 승소해서 강 대표 실망했지? 변호사 비용 만만치 않았겠는데 배상금까지 내게 생겼으니."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뭘 실망해?"유현진은 눈꺼풀을 치켜들고 반쯤 감은 눈으로 강한서를 바라보았다."박 변호사한테 사건 의뢰했으니 돈 많이 터졌을 거 아니야."주강운 말로는 박부자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려면 비용도 아주 많이 들고 게다가 돈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라 의뢰인을 봐가면서 사건을 맡는다고 한다.송민영은 그럴 능력이 안 된다. 하지만 강한서는 가능하다.법정에서 송민영과 강한서가 대화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유현진은 저도 몰래 표정이 어두워졌다.'모르는 척하기는?'"박 변호사 내가 고용했다고 생각하는 거야?"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보며 말했다."그게 아니라면 당신 오늘 왜 왔어? 강 대표, 연기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아니라고 발뺌할 거였으면 그렇게 가까이에서 대화라도 하지 말던가. 패소했다고 끝까지 아니라고 우길 셈이야?"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유현진의 조롱 섞인 말에 강한서는 오히려 머리가 밝아졌다.그는 며칠 전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선셋 스타가 유현진이었다면 사진 사건은 유현진 짓이 아니야. 그럼 대채 누가 날 법정으로 부른 거지?'머리가 밝아진 강한서는 계속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강한서의 말대로 선셋 스타는 유현진이니 사진 사건은 유현진과 상관없다.그러면 대체 누가 강한서를 법정으로 끌어들였을까?목적은 또 무엇일까…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유현진은 비웃음 섞인 쌀쌀한 표정으로 강한서를 바라보았다.강한서는 이제야 상대의 목적을 알아차렸다.상대는 유현진이 이 소송을 강한서가 부추겨서 진행한 것이라고 오해하게 만들려는 목적이다.유현진이 강한서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그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이미 이혼한 두 사람에게는 건넬 수 없을 것 같은 강이 하나
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송가람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제 사무실에 있던 금전수 기억해요?”움찔하는 송가람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가 하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승인하실래요, 아니면 다들 들을 수 있게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송가람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현진이 그 도청 장치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현진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송가람의 사무실에도 도청 장치를 달았다. 송가람과 주현은 사무실에서는 거리낌 없이 모든 얘기를 했었다. 게다가 한현진이 대체 어디서 어떤 얘기를 들은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송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꼭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송가람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질 때쯤 멀리서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가람아.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하마터면 자신이 한 일을 승인할 뻔한 송가람은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입가까지 흘러나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해금을 불렀다. “엄마!”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좋게 찾아왔네.’한현진은 몸을 돌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서해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한현진 앞으로 다가온 서해금이 몸을 곧게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소 지으며 물었다. “밥도 안 먹고 두 사람 여기서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만 가람 언니가 별다른 이유 없이 직원의 보너스를 삭감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있었어요.”한현진의 말에 반박하려던 송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려는 한현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만약 송가람이 자신의 구역에서 한현진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서해금이 알게 된다면 또 그녀를 한바탕 꾸짖을지도 몰랐다. “그래?”서해금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현진이 말이 사실이야?”송
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비웃음 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다. 안규리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한현진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송 팀장님, 여긴 회사예요. 호칭 주의하시죠.”말문이 막힌 송가람은 이를 악물고 화를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다들 그저 장난 좀 한 건데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네요.”“제 말이 좀 지나쳤나요?”한현진이 차가운 눈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규리 씨가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놀릴 때는 왜 규리 씨 말이 심하다고 하지 않은 거죠? 이해 능력이 형편없어서 규리 씨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송가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서하 씨 형편이 어려우면 회사에 복지 신청해도 된다고 제가 얘기했잖아요.”한현진이 흥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송 팀장님은 이해력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서하 씨가 2개월간 감봉 당한 건 송 팀장님 작품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겠다는 건가요?”표정이 굳어진 송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서하 씨 보너스가 삭감된 건 인사팀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헛소리하지 말아요.”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전 서하 씨가 보너스를 삭감당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요. 조향팀의 일개 팀장에 불과한 송 팀장님이 어떻게 재무팀 직원의 월급 삭감 정황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인사팀 부장이 꿈에서 알려주기라도 했어요?”송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한현진에게 말꼬투리를 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화가 치민 송가람이 말했다. “대충 제 추측으로 얘기한 것 뿐이에요. 감봉은 보너스를 삭감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하지만 보너스를 전부 삭감당했다는 건 저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회사에도 징계에 관한 규정이 명확하게 있어요. 설사 서하 씨가 진행한 업무가 전부 규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은서하는 송가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현진과 가깝게 지내다 또다시 송가람에게 당할까 두렵지는 않은 걸까?한현진은 도무지 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그런 은서하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은서하와 인사를 나누었다. “서하 씨, 외할머니도 아직 퇴원하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은 어떻게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 거예요?”은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비꼬며 말했다. “진작 회사에서 먹어야 했어요. 도시락도 매일 구정물 같은 것만 싸 오던데 식욕이 있겠어요? 서하 씨. 구내식당은 직원 할인도 있잖아요. 매달 6만 원만 내면 돼요. 그 정도 돈도 없는 건 아니겠죠. 그 도시락, 서하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전 이제 못 봐주겠어요.”그 말에 은서하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젓가락을 꽉 움켜쥐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규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구내식당을 이용하든 도시락을 싸든 그건 다른 사람 마음이에요. 6만 원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뭐 그리 고상한 일 같아요?”안규리라고 불린 사람은 송가람 옆에 앉아 있었다. 한현진도 전에 본 적 있는 재무팀 직원이었다. 안규리가 눈썹을 씰룩였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고상하다는 얘기는 전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매일 죽 같은 도시락을 싸 와 식당에서 데워 먹는 모습은 사실 저희 식욕을 떨어뜨리거든요. 다들 안 그래도 일하느라 힘든데 밥 먹을 때도 이렇게 입맛이 떨어져서야 저희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죠?”주현도 안규리의 말을 거들었다. “서하 씨도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요. 전에 한 대표님이 옷 선물을 하셨을 때도 제일 비싼 옷을 가져갔잖아요. 딱 봐도 그런 걸 처음 본 사람은 아니잖아요. 보자마자 제일 좋은 거로 가져갔는데.”“2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는 사람이 식비 6만 원을 아낀다고요?”“그게 어떻게 같아요? 몇백만 원짜리 옷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잖아요
한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을 나선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황씨 아주머니의 월급 인상에 관해 상의했다. 강한서와 강민서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혁이 한현진을 데리러 도착했다. 별장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현진은 순간 길가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인영이었다. 한현진이 탄 차가 그 사람과 가까워져서야 한현진은 그 사람이 은서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현진은 다급히 주혁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하고는 차창을 내려 은서하를 불렀다. “서하 씨!”고개를 돌린 은서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저 이 근처에 살아요.”한현진이 물었다. “그러는 서하 씨는 여긴 어쩐 일이에요?”이 근처엔 별장을 제외하면 길가에 오가는 차가 전부였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흔하지 않은 길이었다. 은서하가 말했다. “집이 이 근처라서요.”한현진이 놀라며 말했다. “이 근처에 사신다고요?”은서하가 꿋꿋이 거짓말을 이어갔다. “네. 오늘 늦잠을 잤더니 택시가 안 잡혀서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은서하를 살펴보더니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일단 타요. 타서 얘기해요.”은서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종종 달려와 한현진 반대편의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은서하는 그제야 차에는 한현진과 운전기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외모의 젊은 청년도 함께인 것을 발견했다. 한현진이 소개하며 말했다. “여긴 원율 씨. 제 개인 비서예요.”은서하가 원율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안전벨트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고 공손한 자세로 한현진 옆에 앉아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한현진이 질문을 이어갔다. “여긴 회사와 거리도 있는데 평소 출퇴근 시간이 꽤 걸리지 않아요?”은서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외할머니 치료 때문에 집을 팔았어요. 하지만 회사 근처엔 월세가 높아서 어쩔 수 없이 먼 곳으로 옮겼어요. 평소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어젯밤엔... 일이 조
한현진이 거울을 보며 옷을 정리했다. “이름이 뭐야?”“문채영.”“꽃부리 영?”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영리할 영.”“특이한 이름이네.”한현진이 멈칫했다. “너 전에 오빠가 맞선을 싫어한다고 하더니 그 여자를 못 잊어서 그런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그럼 두 사람은 왜 안 만났던 건데?”강한서가 말했다. “자세한 건 네 오빠만 알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고등학교 시절 누나 이모가 누나 아버지를 횡령, 뇌물수수 그리고 사생활이 문란한 문제를 신고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누나 아버지는 형량을 꽤 많이 받았어. 누나 어머니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시고 실성하신 분처럼 구셨어. 그렇게 문씨 가문은 나락으로 떨어진 거야. 그때 누나는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었어.”“우리 수능이 끝나자 누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외로 갔어.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결혼했지. 남편은 부자인 교포였어. 귀국해서 결혼식을 올린 거라 민준이도 일부러 M국에서 돌아왔어.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는 남편과 함께 해외로 갔어. 그 후로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고. 그리고 2년 전, 누나가 이혼하고 나서야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한현진이 물었다. “넌 그 여자와 오빠를 이어주고 싶은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나는 민준이를 만나고 싶어 해. 난 그저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것뿐이야.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발전할지는 두 사람 일이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그 감정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 누나가 이혼 후 2년이 흘렀어. 만약 나라면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바로 전남편에게 꽃이라도 사 들고 찾아가 이혼을 축하해줄 거야. 그리고 바로 누나를 찾아갔겠지. 하지만 네 오빠는 그저 가만히 있었어. 이혼한 걸 몰랐을 리가 없어.”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약 너였다면 넌 출국하기도 전에 잡혔을 거야. 그리고 오빠는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 그렇게 창피한 일은
문자를 확인한 강한서는 몸을 일으키며 답장을 했다.[고마워요, 누나도 잘 지내죠?][응, 잘 지내지. 나 내일 귀국하는데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그래요.][네 와이프 송씨 집안에서 잃어버린 딸이라던데, 너랑 민준이는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거야? 어떻게 지낼만해?]송민준의 상황을 묻기 위해 연락했다는 걸 알아챈 강한서가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괜찮긴 한데 너무 동생 바보라서 나 별로 안 좋아해요. 누나도 송민준 못 본 지 오래됐죠? 내일 같이 나갈게요.][그래, 안 바쁘면 민준이 여자친구도 같이 불러.]강한서는 문채영이 떠보기 위해 하는 말인 걸 알았지만 모른 척 대꾸했다.[송민준 여자친구 없어요, 솔로에요.]그 말에 적잖이 놀란 건지 글자뿐인 문자에서도 문채영의 놀라움이 전해져왔다.[진짜?][누나도 송민준 성격 알잖아요. 얼마나 사람 짜증 나게 하는데, 그렇게 쓸데없는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여자친구를 사귈 리가 없잖아요.]그 말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은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온 문채영은 곧바로 한마디 더 보탰다.[너도 와이프 데려와, 선물 준비했으니까.][네.]이튿날 아침, 강한서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한현진 곁으로 다가가 어젯밤 문채영과 했던 말을 전했다.“내가 아는 사람이야?”그 말에 강한서가 고개를 젓자 한현진은 또 물었다.“남자야 여자야?”“여자.”그 말에 한현진이 잠시 멈칫하자 강한서가 한마디 더 보탰다.“네 새언니가 될뻔한 여자야.”“우리 오빠 첫사랑?”깜짝 놀라며 묻는 한현진에 강한서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만난 건 아니고 그냥 송민준이 혼자 좋아했어. 그때 같이 다니던 애들은 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갑자기 말을 멈추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다급히 그를 재촉했다.“왜 갑자기 여기서 말을 끊어, 그런데 뭐?”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볼을 귀엽다는 듯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나처럼 원하는 여자를 쟁취하진 못한 거지. 그런 쪽으론 영 능력이 없어.”“우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